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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평점 :
<군주론>이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책인 줄 알았다면 진작 읽었을 텐데. 솔직히 부정적인 논란도 많고 오래된 고전이라는 선입견으로 꽤나 따분할 줄 알았다. 마키아벨리는 진부한 정치이론가가 아니다. 그는 당대에 외교관으로서 종사하고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현실 정치의 실상을 꿰뚫어 보았다. 참고로 이 책은 이탈리아어 원전 완역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정 옹호론자가 아니다. 사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화정이다. 그가 피렌체 공화정부에서 내내 활동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도 ‘자유롭게 사는 데 익숙한 곳’(P.19)이라고 공화정 체제를 풀이한다. 인민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정치체제라면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 마키아벨리는 하필 <군주론>이라는, 자신의 정치이념과 배치되는 책을 썼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당대 이탈리아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여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외세도 반복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혼란을 가중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정치적 이상은 통일된 이탈리아 나라였는데, 공화정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장점이 있지만 이탈리아 통일의 이상 실현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서 국력을 발전시키고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여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통해 이탈리아를 통일시키는 게 현실 가능한 방안이라고 마키아벨리는 판단한다. 그래서 이 책을 쓰고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였으리라.
이 책의 내용은 실용적이다. 군주국의 유형을 세습군주국, 새 군주국, 혼합군주국 등등 나열하고 국체의 차이에 따른 특성을 밝힌 후 해당 영토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 방책을 제시한다.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여 프랑스 루이 왕의 전략이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원인까지도 제시한다. 자신의 정치 기술에 가장 부합하는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예시한다.
공작[체사레 보르자]의 행위를 종합해보면 저는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무력과 행운으로 통치권을 얻은 사람에게 모방할 만한 표본으로 제시할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커다란 뜻과 야망을 품은 그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획을 가로막은 것은 단지 알렉산데르의 짧은 삶과 자신의 병이었습니다. (P.64, 7장)
마지막 장에서도 메디치 가문에 앞서 이탈리아를 구원할 기회가 있었으나 행운이 마지막에 그를 거부했다고 애석해할 정도다.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에게 매우 우호적인 이유는 그가 현실적으로 최고의 군주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다. 뛰어난 군주는 정치를 할 때 도덕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지만 도덕에 얽매이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악덕을 피하는 게 당연히 좋겠지만, 악덕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크다면 과감하게 악덕을 행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유명한 여우와 사자 전략이 등장한다.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여우와 사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 신중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신의를 약속한 이유가 사라졌을 때, 신의를 지킬 수 없을뿐더러 지켜서도 안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착하다면 이런 권고는 바람직하지 않을 테지만, 사람들을 사악할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도 그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P.125, 18장)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은 성악설에 가깝고, X 이론에 해당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면 군주도 도덕과 윤리에 기초한 정치를 해야겠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않다면 군주 홀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을 베푼다면 망국의 지름길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오늘날 정치학뿐만 아니라 경영학이나 처세술에서도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잘 활용할 줄 알아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국가 차원은 물론 사회와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대체로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위험을 피하려 하고, 탐욕스럽게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P.119, 17장)
군주가 권력과 영토를 획득하고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데 가장 큰 자질은 역량과 행운이다. 책 속에서 역량은 미덕, 능력과 같은 내부요인의 개념이며, 행운은 운명 또는 환경 요인의 개념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내내 강조하는 것은 결국 역량의 중요성과 필요성이다. 행운은 일시적이며 변하기 쉽기에 한때의 성공은 가능하나 지속 가능하지 못하기에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중의 지지, 용병과 지원군의 원조 모두 행운에 가깝다.
훌륭하고 확실하며 지속적인 유일한 방어책은 바로 자신과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P.166, 24장)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 행동에 모범적이고 인재를 귀중하게 여기며 유능한 신하를 거느릴 수 있다면 어떤 민중도 군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상기한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천년 넘게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은 이익과 갈등에 집착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고스란히 민중의 피해로 전가되는 불행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를 “어떤 둑도 없고 제방도 없는 벌판”(P.168)으로 비유한다. 마지막 장의 그는 절실하다. ‘전하의 탁월한 가문’이라는 표현을 되풀이하면서 이탈리아의 혼란과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존재가 메디치 가문임을 강조하며, 통일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기를 열렬히 요청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지극한 아부가 아닐 정도로 과한 인상이 있지만, 단순히 개인의 영달 차원을 넘어서 당대의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겠는가.
마키아벨리즘은 부정적 명칭의 대명사 격이다. 정치적 기회주의,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기. 민중의 본성은 변하기 쉽다는 설파. 공화국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공화정을 파멸시켜라. 이런 주장 등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비난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피식 웃고 말리라. 세상과 정치의 속성을 알지 못하는 순진한 책상물림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