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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평점 :
소위 후장사실주의자로 알려진 8명 중에 소설가는 4명이다. 오한기, 이상우, 박솔뫼, 정지돈. 나는 오한기와 이상우는 포기했고, 박솔뫼와 정지돈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지돈의 경우 「건축이냐 혁명이냐」, 「미래의 책」,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를 읽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단행본으로 쭉 읽다보니 흐릿하게나마 그림이 잡히는 듯했다. 물론 아홉 편의 단편 중에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없었지만, 정지돈의 작품론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홉 편의 단편들은 '장'과 '우리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기준은 작품에 '장'이라는 인물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다. '장'으로 분류된 네 편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어떤 인물이 책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그 책은 가상의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기도 한데, 이 과정 중간중간에 특정 작가(사데크 헤다야트, 보리스 사빈코프 등등)와 관련된 사실들이 '인용'된다. 이것 때문에 그의 소설을 두고 지식조합형 소설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인용은 기억상실에 걸린 '화자-나'(「뉴욕에서 온 사나이」)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에 가깝다. 에리크가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판본을 모으고(「눈먼 부엉이」), 장이 일기에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을 받아적는 것(「창백한 말」) 역시 이와 연결되며,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관련이 있다. 「일기/기록/스크립트」에서 인용되는 유리 로트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하는 행위시학의 방식, 예술과 삶이 뒤섞이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 「눈먼 부엉이」 (34쪽)
장의 이야기는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노트를 가득 채웠으며, 회사 일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쏟아지는 문장에 파묻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정신을 잃거나 몽유병자처럼 떠돌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생소한 공원이나 카페, 건물의 계단 위였다. 장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미래의 책」 (104-105쪽)
'우리들'로 넘어가면 작품의 서사는 더 줄고 인용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데, 이 역시 '장'에서 살짝 드러났던 메타소설적 요소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주말」은 어느 날 서해안의 항구들을 여행한 뒤 고다르의 「주말」(1967)을 보며 떠올랐던 이야기의 인용이며, 「건축이냐 혁명이냐」 역시 고다르의 「김중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황손 이구와 그가 살았던 건축사(史)의 인용이고,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도 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프레데릭 키슬러와 레이몽 루셀에 대한 인용의 연속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작가가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살짝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보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이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그의 책 『반딧불의 잔존』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말을 하자 동기는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지금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사진작가 아르노 지쟁거와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환영의 새로운 역사Nouvelles Histoires de Fantômes」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며 전시의 부제는 ‘새로운 유령의 이야기’라고 했다. 전시장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과 아르노 지쟁거가 수집한, 언뜻 봐서는 연관을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수집물로 가득하며 그러한 이미지는 통상 말하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아닌 단순한 기록 사진과 사소한 물품이 뒤섞인 것들로, 이를 통해 기획자들의 이미지의 도서관, 그러나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찾을 수 없고 고정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확장성과 통일성이 있는 이미지의 궁전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며 이는 아비 바르부르크로부터 이어져온 프로젝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박찬경이 한 이야기, 자신은 이상하게도 1960년대에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 전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매력을 느끼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기 때문에, 빈티지한 취향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그런 기록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기록물을 수집하는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왔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 「건축이냐 혁명이냐」 (165쪽) (강조는 인용자)
물론 나의 이 독법으로는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작품은 화자인 '정지돈'이 엔카베데(소련의 정치경찰)에게 붙잡혀 콜호스로 가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내가 알아본 인물은 조지 스마일리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더 공부해야 되나라는 고민을 안겨주진 않는다. 이 소설집은 아는 만큼 보이는 소설들의 집합이고, 이 소설집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인물과 책과 영화 들의 쓰나미 같아서 도저히 찾아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쓰는가.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장 뤼크 고다르다. 매체에 대한 고민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를 영화에 녹여내는 방식, 그리고 매체를 뛰어넘어 영화에 대한 정의를 바꾸겠다는 의지 등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다르에 대한 이야기는 2분 10초쯤부터 나온다).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많이 녹아있는 글이 「일기/기록/스크립트」인데, 그는 서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술도 문학도 어느 순간 연주자의 시대가 되었다"고. 이후 그가 니콜라 부리오의 "기호 탐험가semionaut"를 인용하며 지목하는 소설가는 제발트, 데이비드 실즈, 엠마뉘엘 카레르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2014)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방에서 홀로 걸작을 쓴다는 생각을 이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병리학 실험실, 쓰레기 매립지, 재활용 센터, 사형선고, 미수로 끝난 자살 유언장, 구원을 향한 돌진으로서의 예술이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이 끌어 모은 온갖 잡다한 메모와 기억을 콜라주한다. 그의 글은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 이건 그냥 책이다. 빌렘 플루서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1987)에서 새로운 창작자는 “자기 스스로를 더 이상 독창적인 창작자로서가 아니라 언어 배열자로서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조작하는 언어도 역시 그에게서는 더 이상 그 자신의 내면 속에서 집적되어 있는 원자재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매개로 배열되기를 그에게 강요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 흐름들을 짜깁기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행을 따라가면서 읽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망을 짜고 있다.” 잘나가던 소설가였던 카레르 역시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카레르의 『리모노프』(2011)는 논픽션인가 팩션인가 에세이인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나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는 어떤가.
- 「일기/기록/스크립트」 (289-290쪽) (강조는 인용자)
그는 사람들이 흔히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현재에 적확한 형식이 있다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거부감이 그의 작품에서 움틀댄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어떤 사조가 개가를 올리는 그 시점에 이미 거기서 이탈"하려는 작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우리는 외친다. 볼라뇨라고."를 패러디해서 "우리는 외친다. 후장이라고."라고 외치며 열광하게 될까. 나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그들이 배수아나 정영문의 흐름을 새롭게 이으려고 노력하는 작가들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잡학사전 같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있는 작품은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지막에 모든 일에 실패하고 다시 필경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을 인용한 것은 필경-인용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삶의 모습, 김수환이 『책에 따라 살기』에서 말하는 "책 읽기 모델"이라는 암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소설이 앞으로 소설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내 좁은 눈이기에 판단을 유보해둔다..
‘책에 따라 살기’는 유리 로트만이 쓴 표현으로 행위시학이라는 로트만의 연구영역의 "집중적인 고찰 대상"이다. 행위시학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했으며 직접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김수환에 따르면 삶과 예술을 섞어놓으려는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 예술-삶의 뒤섞임은 모든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이 결과적으로 닿았던 최종적인 형태이며 작가들이 탐구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주제이다. 그러니까 김수환/유리 로트만의 ‘책 읽기 모델’은 예술-삶이 맞이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 아닐까. - 「일기/기록/스크립트」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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