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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내 생애 첫 번째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은 정희진의 추천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첫 번째 페미니즘 도서는 아니었지만,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라 얇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량이 무색하게 술술 읽히는 문체와 사실적인 경험이 주는 흡입력이 이 책을 읽는 원동력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에세이이자, 페미니즘 고전에 대한 한 권의 서평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한때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리던 여성이었으나, 결혼과 육아를 겪으면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 사이에서 고뇌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문하게 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모교로 돌아가 페미니즘 고전 강의를 듣기로 결심한다. 이후 대학 강의에서 페미니즘 고전을 읽으며 토론 수업에 참여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고전의 내용과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며 서술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저자의 삶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토론 수업이라는 형식이 한 권의 고전에 대한 다양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적절한 형식을 취했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페미니즘 고전은 워낙 다양해서 이를 일일이 거론하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될 듯하다. 그녀가 다루고 있는 책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까지 매우 다양하며, 1세대 페미니즘부터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까지 고루 분배되어 있다(원래 네 번이었던 강의를 세 번으로 나눈 것도 페미니즘의 시기 구분 때문이었을까?). 페미니즘의 역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개관을 조망해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이 훌륭한 서평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한 고전을 쉽게 정리해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토론의 방식으로 고전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저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의를 들으면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추적하기도 하고,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던 보부아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성장 과정이 페미니즘 고전 읽기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저자가 읽는 다양한 페미니즘 고전을 함께 읽는 기분으로 이 책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저자의 훌륭한 정리가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보이는 몇 가지 한계점들이 있는데, 하나는 정희진이 해제에서 지적한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는 저자의 위치다. 처음에 정희진의 해제를 읽을 때는 이런 한계가 그렇게 크게 드러날까.. 하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읽다보니 정희진의 지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가사 노동자의 등장.
경제적 능력이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단의 조언에 따라 전통적으로 여자들에게 떠넘겨졌던 가사와 육아를 수행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불운한 계층의 여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소수만을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 20년 동안 가사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제3세계 여성들의 유입도 점진적으로 증가해 왔으며 이는 세계화 추세와도 꼭 들어맞았다. (...) 「메리 포핀스」(1964)나 「내니 다이어리」(2007) 같은 인기 영화들은 유모 산업에 얽혀 있는 인종과 계급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 관계에 내재된 권력 구조는 미국에 온 많은 여성을 열악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환경에 밀어 넣는다. 그들은 법적인 배우자의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며 많은 경우 정당한 피고용자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고용주의 사적인 생활에 상당 부분 관여하는 일을 한다. (298-299쪽)
이후 책에서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앨리 혹실드의 『글로벌 우먼』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지만 "L교수는 토론 주제를 국소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 토론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발언 역시 국소적인 차원에 머문다(L교수가 스웨덴의 예를 들자 어떤 학생은 "스웨덴과 비교하다니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 게다가 저자는 이례적으로 토론 장면만 제시할 뿐 자신의 생각을 적지 않았다. 「3기니」에서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라는 계층이었기에 노동 계급에 속하는 체하는 것을 경계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입장과 비슷한 것일까? 육아와 가사 노동의 전가에 대한 문제는 이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이 속한 계층이 한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깊은 접근을 생략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수강생의 대부분이 백인 중산층이어서 그랬는지도.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글이 품고 있던 저자의 열정이 점점 힘을 잃는데, 이는 3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문장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성 역할, 또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런 주장이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저자의 눈으로 그들을 읽었기 때문이겠지만. 저자-나의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부분은 서아프리카 유학생인 프리실라의 발언이다.
학기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면서 수업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심리 분석이나 급진적 여성 동성애 등을 다루기 시작했다. 프리실라에게는 곤혹스러운 주제였을 것이다.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누며 서양의 페미니즘을 사치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게는 이 이론이 낯설게 느껴져요." '여성성의 신화'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여자가 '이진법'에서 탈출해 성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레즈비언이 되는 것이라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nique Wittig)의 주장에 대한 프리실라의 의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주제에 대해 논의할 일이 없을 거예요." (392쪽)
현실은 여전히 "어머니 세대가 해결하려 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남아있는데, 이론만 홀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성도 성별도 없으며 정체성의 허구만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나는 여성이기 전에 나 자신이다'라는 말이 담겨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나 식수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들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 멀리까지 간 것이 아닐까. 저자도 그런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긴 하지만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이론만 제시할 뿐이라는 관점을 바꾼 것 같지는 않다.
그 외에도 한계는 아니지만, 종종 저자가 학생들과 세대 차이를 느끼는 부분이 등장한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르노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미국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포르노의 긍정적 측면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공개하는 시대, 아무런 체에도 걸러지지 않는 발언들이 넘치는 시대에 무엇을 바라겠냐마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무리 좋아진들, 심지어 페미니즘 포르노가 만들어진들, '창녀에 대해 쓴 글'이라는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의 성 해방, 또는 욕망의 해방은 전혀 쿨하지도 힙하지도 않다. 로빈 모건을 인용하자면, "포르노물이 이론이라면 강간은 실제다." 저자는 캐서린 매키넌을 인용한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에 나오는 행위가 여자를 신체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포르노그래피가 자신의 행위를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처럼 멀찍이 떨어져 경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정식이 뒤집혀 사람들은 자신의 섹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으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30쪽)
이런저런 한계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첫 번째 페미니즘' 책이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공감하기도 하고,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풀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페미니즘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 또는 페미니즘을 알기 위해 어떤 책을 찾아보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읽으면서 정말 많은 부분에 밑줄을 쳤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콕 집어서 인상깊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누군가 내게 책장을 다 접을 거면 왜 접냐...고 물었다), 특히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어서 이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70년대와 9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씁쓸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좌파에 속하던 메릴린 살즈먼 웹은 다음 선언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여자들은 억압받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대우받아야 마땅한 우리 여자들은 팔과 다리가 잘린 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단상 아래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웹은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들을 물건 취급하는 체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남자들은 주먹으로 위협하는 동작을 하며 오싹한 말들을 내뱉었다. "미친년!", "저년 끌어내!", "뒷골목으로 끌려가 강간당하고 싶냐!", "벗겨 버려!" 이미 좌파 운동가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남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여자들은 여러분들이 무슨 뜻으로 혁명을 외치는지, 그저 권력을 더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남자가 대부분이었던 청중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 (269-270쪽)
후일담에 따르면 1970년대의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주도했던 행동가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미쳐 버린다. (...) 몇몇 페미니스트는 영혼과 정치를 맞바꾸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화적 페미니즘으로 전향한다. 작가이자 행동가였던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미즈(MS.)》의 전 수석 편집자였던 로빈 모건 같은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 잘 싸웠다. 그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기를 포기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역풍(Backlash)』이라는 제목의 책에 기록했듯, 1980년대에 불어닥친 역풍은 가공할 수준이었으며(여자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기본으로 하는) 페미니즘은 다시 한 번 욕설 비슷한 단어가 되었다. (271-272쪽)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낯설었다. 분노에 차서 클래런스 토머스의 인준 청문회를 지켜보던 내가 어느새 모순으로 가득한 「앨리 맥빌」을 시청하고 있는 짝이었다. 대학 졸업 무렵 페미니즘은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권위자들은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며 우리가 이제 후기 페미니즘(혹은 후후기 페미니즘)에 해당하는 립스틱 페미니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만......"으로 시작하는 학생들의 발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이런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하고, 데이트하고, 결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다. 어깨 위에 책임이 하나둘 쌓여 가면서 페미니즘은 나보다 어린 여자들, 《비치 오어 컨트(Bitch of Cunt)》 같은 파격적인 잡지를 구독하며 몸 여기저기에 문신을 한 젊은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여전히 페미니스트라 부르기는 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확신하지 못했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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