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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달려라 아비』를 읽은 게 벌써 6년 전이다.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도 단편집을 읽으며 느꼈던 건 이야기가 아프면서 명랑하다는 것이었다. 웃프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6년 만에 다시 단행본으로 『비행운』을 읽으며 난 생각했다. '아, 김애란이 돌아왔다.' 『달려라 아비』에서 느꼈던 김애란 소설의 특징들─뒤집기, 결말 처리 방식, 명랑한 슬픔 등등─은 더욱 강해졌고, 길이는 더 길어졌고, 내용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웃픈 이야기'에서 '웃'보다 '픈'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노가 아닌 체념과 견딤의 모습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장면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처연해진다.
여전히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혼자다. 생존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하지만 그 노력을 격렬한 감정으로 표출하지 않는 도도한 인물들. 하지만 이전 작품집보다 삶의 모습은 더 독하다. 그만큼 세상은 더 잔인해지고 냉혹해졌기 때문에,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쪽 편만 드는 십자가" 같은 세상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비행(飛行)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비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추락을 마냥 슬프게만 다루지 않는다. 인물들은 김애란 특유의 뒤집기 방식을 통해 추락한다. 교도소에 있는 아들이 처음 보낸 편지에 '엄마, 사식 좀.'이라는 다섯 글자만 담겨 있을 때(「하루의 축」), 그들의 소비를 따라잡고자 손톱케어를 받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녀의 축축한 겨드랑이만을 기억할 때(「큐티클」) 등등. 이런 방식이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 웃음이 씁쓸한 웃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 분노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친근한 표현인지, 애써 상대의 성(性)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선배는 곧잘 나를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런 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어쨌든 1분도 안 되는 시시한 순간이었지만, 준이 선배는 그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내 머리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
- 「너의 여름은 어떠니」(15쪽)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핫도그만 먹었다. 되도록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배는 스케치북을 가져와 뭐라 급히 갈겨썼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와 종이를 들고 흔들었다. 나는 선배에게 과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해 머리를 더욱 수그렸다. 선배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얼마 뒤 물을 마시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선배가 들고 있는 도화지 속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핫도그를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양손 아래로 끈적끈적한 케첩과 겨자 소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작진에서는 난리가 났다. 피디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했고, 선배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도화지에 뭐라 열심히 썼다. 그러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듯 종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
- 「너의 여름은 어떠니」(36-37쪽)
한때 흠모했던 선배가 순식간에 추락하는 모습은 선배가 움켜잡은 팔에 생긴 상처와 어린 시절 물에 빠진 화자가 움켜잡은 병만의 팔의 상처가 겹쳐지면서 더욱 비극적인 색채를 띤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작품 속 누구도 손가락질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준이 선배도 그렇고, 「벌레들」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아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남편도 그렇다. 『비행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땅에선 도저히 살 수 없어 비행(飛行)을 시도하다 추락하거나, 비행 마저 포기하고 어떻게든 지상에서 견뎌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벌레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까) 어디에나 있으며, 사실 우리도 이 세상에선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있어야 한다.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서윤의 양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생전에 폐지를 모아 자신을 키운 할머니 생각이 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자기를 못 알아보는 게 서운해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서윤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건 할머니가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호텔 니약 따」(280-281쪽)
대부분의 작품들이 모두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내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된 작품은 「서른」이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문장을 만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게 만드는 작품. 서간문의 형식으로 아는 언니에게 심경을 토로하는 이 작품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화상이자 풍속도다. "하부 판매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든 판매원들에게 득이"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다단계의 구조야말로 개미지옥 같은 현대 사회의 본질이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새 물건이 아닌 사람을 팔며 윤리성마저 상실한다. 한때 신뢰했던 전 남자 친구에게 이끌려 들어간 지옥에 자신을 신뢰했던 제자를 밀어넣으며 빠져나가는 소설의 구조가 내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한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김애란은 명랑하지 않다. 애잔하고 처연한 슬픔을 천천히 끝으로 밀고갈 뿐.
문체에 대해 한 마디만 보태면, 명사구나 부사구로 문장을 끝맺는 방식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첫 작품집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이런 방식으로 문장을 썼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첫째, 한국어의 특성상 대부분의 문장이 '-다'로 끝나기 때문에 이로 인한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 둘째, 도치를 통해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 특히 어떤 이미지를 두드리지게 하려고 사용했을 가능성. 쉼표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표가 나와 흠칫 놀라면서 읽었다. 이런 문장의 활용이 문장의 단조로움을 깨고 신선함을 주기도 하며, 특정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특히 결말을 하나의 풍경이나 이미지로 제시해 끝내는 방식은 볼 때마다 놀랍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이런 것도 너무 자주 나오면 그 신선함을 잃기도 하고 흐름이 끊어진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자주 돌출되는 문장은 그 신선함을 잃기 쉬워진다.
한때 내 기억속의 김애란은 세대를 다루는 작가였지만, '비행운'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단편집에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 중 하나는 계급이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계급적 풍경을 김애란식으로 보여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보여줄 그녀의 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