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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이 책을 가장 간명하게 정리한 문장은 2005년 대산문학상 심사평에서 찾을 수 있다. “김연수의 소설은 알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은 그 진실에 대해 알고자 하고 나아가 말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걸로 부족하다면 김병익 평론가의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불립문자의 문자적 설법’처럼 모순된 진실에 대한 증언이며, 인간은 결코 서로 이해될 수 없는 소통 불가능의 관계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의 존재라는 절망적 세계 해명의 인식”. 이걸 수록작의 한 제목으로도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뿌넝숴不能說’. 즉 여기 실린 아홉 가지 이야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 또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해보려 하는 작가의 치열한 시도들이다.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단편들의 대부분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어떤 역사나 책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교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단편들은 이런 전개방식에서 형식적인 공통점을 갖기도 하고, 작가의 세계관/역사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도 한다. 그 세계관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인간관계의 소통 불가능성’, ‘역사 또는 진실의 이면과 모순’일 텐데, 이 둘은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음’에 수렴한다.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다’라는 명제에서 그는 ‘현실’과 ‘재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주제 중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후자인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편은 「뿌넝숴不能說」다. 지평리 전투를 겪은 중공군 출신 노인의 진술로만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며(69쪽),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게 진짜 역사라는 것(80쪽). 그렇기에 “운명이 드러나는 순간에 언어 같은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70쪽). 그렇기에 작가는 기록된 역사에 회의적이며, 역사의 우연성과 그 이면에 끊임없이 천착한다. 이런 주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소재(한국 전쟁)를 선택했기 때문에 「뿌넝숴不能說」가 가장 돋보였던 게 아닌가 싶다. 특히 노인이 손가락을 잃게 된 이유를 감추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게 하는 형식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대부분 실패한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나’는 우연히 만난 전처와 걸었던 산책로를 지도에 그리면서까지 산책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중심에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서 들여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는 ‘농담’뿐이다. ‘나’는 혼잣말을 하지 않고, 꿈도 잘 꾸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는 이성적 인간이지만, 그런 이성으로도 “삶의 행로”라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30쪽)은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과 달리, 나는 여전히 혼잣말을 잘”(18쪽)하기 때문이다. ‘농담’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음’, 즉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없음’이다. 결국 ‘농담’은 이 단편집 전반을 지배하는 ‘우연’의 모습 중 하나다. 투신한 그녀와 자신의 사랑을 소설로 쓰려 했지만 인과관계에 맞는 문장만 남겼더니 서로 사랑했던 순간이 모두 사라졌다는 아이러니 역시(「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142쪽), 삶이, 사람 사이의 소통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농담'으로 채워져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정리해버리는 역사는 얼마나 가혹한가.
상당히 일관된 테마로 구성된 작품이지만 이를 다루는 형식이 다양한 편이고, 이야기 역시 온도 차가 커서 골라 읽는 재미를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노고와 형식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역사적 허무주의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작가의 감상적인 문체에 기인한 것이다. 역사의 이면을 들추고 우연을 추적하는 작가의 투쟁이 감상적인 문장 때문에 아련해지고 모호해진다. 대다수의 단편에서 시구(詩句)가 자주 인용되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뿌넝숴不能說」역시 그랬는데, 노인과 조선인 여성 구호원 사이에서 항상 등장하는 것이 한시다. 거대서사(전쟁)와 그 파도에 뛰어든 개개인의 소서사 사이의 긴장감은 한시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희석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발에 걷어차일 만큼 흔한 전장에서 피어난 개개인의 낭만적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이 단편에서 강조되어야 했던 것은 전쟁이 얼마나 그들을 파괴했는지, 왜 그녀가 모든 남자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했는지가 아닐까. ‘이야기’를 어떤 문장으로 감싸는지에 따라 ‘내러티브’의 분위기와 응집력도 달라지는데, 이런 식의 감성적인(혹은 감상적인) 문장은 그들의 투쟁을 아련한 것으로, 마치 추억처럼 만든다. 밑줄 긋기에는 좋겠지만.
아마 이런 식의 감성이 극대화된 단편이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일 것이다. 예전부터 나는 이 단편이 정말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것은 주인공 ‘그’의 행적이 갖는 낭만성이 김연수의 문장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나 아닌 (대)타자를 이해해보겠다는 그의 몸부림은 결말에 이르면 따뜻함으로 덮이면서 연민을 부르고, 이제까지 쫓아왔던 ‘그’의 행적이 허무하게 느껴지게 한다. 결국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온다는 “수정의 니르바나”(177쪽)는 죽음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냐는 허무함. 작품을 지배하는 세계관/역사관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의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에는 일련의 허무주의가 흐른다.
내가 김연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6년 전이고, 이번에 읽은 것이 세 번째이다. 예전에 읽었을 때도 내가 느꼈던 건 실망감이었다(근데 왜 집에는 그의 책이 네 권이나 있을까). 그때 읽었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나 『7번국도 Revisited』보다는 이 책이 훨씬 나았지만, 엄청 좋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물론 나름 읽어볼 만한 작품이고, 다양한 형식을 보는 즐거움도 있으며,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와 엮어 텍스트(text)로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노고가 돋보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작품도 있고(일곱 번째 단편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다), 형식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해도 보이는 한계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풀리긴 했다. 왜 그가 이토록 역사에 천착하고 있는지도(그는 이후에 역사소설을 세 권 썼고, 악스트 인터뷰에 따르면 지금 쓰고 있는 작품 역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다룬 소설이다).
+) 딴지 하나.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는 화자인 네즈미와 그의 연인 세희, 그리고 세희의 동생 세영이 나온다. 중간 즈음에 세영이 네즈미에게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네즈미’가 일본어로 ‘쥐’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이름일 리가 없다고. “(…) 그렇지 않아, 미스터 네즈미 요시히로? 당신은 누구지?”(46쪽) 네즈미는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며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내가 알기로 일본 이름은 성+이름이다. 우리나라처럼. ‘요시히로’라는 이름에 다른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내가 보기에 오류다. 그러므로 내가 대신 세영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의 이름은 요시히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