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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ㅣ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평점 :
칼레 난민촌에 장벽을 추가로 세우겠다는 뉴스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랑드 대통령이 난민촌을 연내에 철거하겠다고 밝힌 뉴스가 나왔다. 헝가리는 EU의 난민할당제를 거부하겠다며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을 채우지 못해 부결됐고, 요르단은 더 이상 시리아 난민을 받기 어렵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다. 메르켈은 난민 수용 정책을 여전히 강하게 밀고 있지만 유럽은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고, 이를 의식한 듯 차기 유엔 사무총장은 소위 난민 문제 전문가라는 사람이 이어받게 됐다. 일련의 뉴스들을 보면서 나는 메르켈이 숱한 반대에도 난민 수용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단순히 인도주의 때문은 아닐 텐데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은 난민 문제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도 쉽게 볼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김재영, 「코끼리」), 농어촌의 국제 결혼 문제 등 비슷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다만 외면하고 있을 뿐. 일각에서는 난민들의 범죄율과 자국에 동화되지 못하고 일탈하는 이민자들의 모습이 더욱 부각된다. 사실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까지 올라간 것도 사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호소한 결과가 아니었나. 정말 장벽을 차단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유입을 막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2004년에 출간된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쓰레기”라는 개념을 통해 오늘날 세계가 처한 현안들을 진단한다. 이 책에서 “쓰레기”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주로 사용되는 의미는 “인간 쓰레기”다. 그는 인간 쓰레기의 생산 문제를 현대화, 지구화의 결과이자 현대성의 산물로 본다. 현대적인 생활 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과거 선진국들이 쓰레기를 처리하던 배출구가 막힌 결과라는 것이다. 과거의 쓰레기는 다시 재활용될 수도 있는 노동 예비군의 성격을 띠었지만, 오늘날 쓰레기로 규정되면 그 속성이 영구화된다.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 쓰레기는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현대에 들어와 질서정연한(법을 준수하는/규칙이 지배하는) 주권 영역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배출된”(68쪽) 호모 사케르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진보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희생자들”인 잉여 인구다.(80쪽) 이들은 정치 권력에 의해 사회 부적응자, 안전을 위협하는 자로 낙인찍히고 도태된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그들을 격리하면서 국가가 불안과 불확실성을 잘 통제하고 있음을 과시하기도 한다.
잉여 인간들은 어떻게 해도 승산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현재 칭찬받고 있는 삶의 방식에 맞추려고 하면 즉각 사악한 오만함, 거짓 허세, 노력도 하지 않고 보너스를 달라고 요구하는 뻔뻔한 자들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범죄적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까지는 듣지 않겠지만 말이다. 반면 공공연히 분개를 표명하면서 가진 자들에게는 유익하지만 이들과 같은 무산자에게는 독이 될 가능성이 큰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으면 이것은 즉시 ‘여론’(좀더 정확히 말해, 선출되거나 자임한 대변인들)이 ‘당신에게 이제까지 쭉 이야기 해온’ 것—즉 잉여 인간들은 단순히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며 사회의 건강한 조직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이자 ‘우리의 생활 방식’과 ‘우리의 가치’를 위협하는 불구대천의 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간주될 것이다. (83쪽, 강조는 인용자)
정치 권력은 국민들에게 규율과 법규의 준수를 요구하면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완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 정당성을 획득했다. 때때로 그들은 국가의 보호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해 위협을 창조해내기도 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국가 정체성을 “복지 국가”로 규정하면서 개인의 불행과 재난을 국가가 책임질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자유 시장의 논리”가 몰아친 현재, 국가는 더 이상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개인이 사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로 전환시켰다. 또한 이로 인해 촉발된 집단적 두려움을 경제적 이주자와 망명자 들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이렇게 국가의 정체성은 '복지 국가'에서 '형사 국가', '형벌 국가'로 전환된다.
국가 권력은 불확실성을 박살내기는 고사하고 진정시키기도 힘들다. 국가 권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불안의 초점을 손에 닿는 대상으로 다시 맞추는 것뿐이다. 손을 쓸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적어도 그들이 다루고 통제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 피난민, 망명자, 이주자—지구화가 생산한 쓰레기—는 이러한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124쪽, 강조는 인용자)
“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넘었고, 쓰레기 배출구는 막혀버렸다. 그리고 인간 쓰레기들이 서구 사회의 “우리”와 같은 공간에 머문다. 이런 뒤섞임 속에 쓰레기화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사람의 잠재적 전망”이 되어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서구 사회는 “그들”의 나라에 피임법을 전파하며 인구 조절을 강하게 요구하기도 하고(1994년 카이로 국제회의. 하지만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의 대부분은 유럽이다), 이미 자국에 들어와 있는 쓰레기들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를 건설한다. 이때의 게토는 고전적인 게토처럼 “잔인한 인종적 배제에 대항하는 보호막 역할을 수행”(150쪽)하지 않는, 오로지 격리와 사회적 추방만을 담당하는 “하이퍼게토”다.
어제는 자본과 자본의 노동력 이용 방식을 자유화하기 위해 ‘작은 국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투쟁해 가시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오늘은 고용 조건의 규제 철폐가 낳은 유해한 사회적 결과와 사회의 취약 지역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악화를 현 상태대로 봉쇄하고 감추기 위한 ‘큰 국가’를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
물론 와캉이 지적한 사실은 결코 역설이라고 할 수 없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이러한 심경 변화는 인간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에서 폐기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너무나 철저한 것이어서 국가 권력의 강력하고 정력적인 도움이 필요했으며, 국가는 이에 응했다. (154-155쪽, 강조는 인용자)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종교는 이를 이용해 자신들이 고안한 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고, 정치 권력이 그 뒤를 이었다. 다만 과거엔 종교나 국가가 복종을 대가로 안정을 약속했다면(물론 그 약속이 항상 지켜지진 않았다), 현대에는 인간 쓰레기들로 규정된 이들을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공허한 은유 아래 미국 정부는 국민들의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그들”의 배제만이 답이라고 외쳐왔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새로운 빅브라더, ‘배제’의 빅브라더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과거의 빅브라더가 ‘포함’에 열중했다면, 새로운 빅브라더는 인간 쓰레기를 ‘배제’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접촉 횟수가 잦아지는 “그들”에 대한 불안 때문에 빅브라더를 열렬히 지지하고, 더 강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난민촌을 폐쇄해 달라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달라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라.
오웰이 기술한 과거의 빅브라더는 포드주의 공장들과 군대 막사들과 수많은 크고 작은 (벤덤/푸코가 묘사한 종류의) 파놉티콘들을 지배했다—그리고 그의 유일한 바람은 우리 조상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길 잃은 양을 무리로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 오늘날의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빅브라더는 이민국 관리들에게 입국 불허자 명단을 제공하고, 은행가들에게 신용 있는 회사에 취직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제공한다. 그는 경비원들에게 관문 앞에서 정지시켜서 관문으로 보호되는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지시한다. (241쪽, 강조는 원문)
실제로 무슬림이나 난민, 이주자에 의한 범죄가 급증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느냐고 통계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통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단순히 “그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단순한 설명이다. “그들”이 “사방에 만연해 있는 사회적 잉여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촉발된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편리한 표적이 되고”(119쪽) 있는 것은 아닌지, 여기에 휘둘리면서 “전쟁에 대한 규제의 완화”가 이루어지고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변경 지역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복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바우만은 자신이 고안한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라는 틀에 ‘쓰레기’라는 개념을 보태 사회 현상을 진단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것뿐인지, “포함/배제의 게임이 공통의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유일한 방식인지”(244쪽)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보유(補遺) ┃ 돌직구와 사이다
오늘날 한국 예능과 드라마에서 주목할 만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돌직구와 사이다일 것이다. 드라마의 전개가 조금만 더뎌지면 우리는 ‘고구마’라며 불평하고, 시원시원하게 쭉쭉 전개가 나가면 ‘사이다’라며 시원해한다. 예능에서도 우리가 선호하는 건 그들의 ‘돌직구’ 또는 ‘사이다’ 발언이다. 현대 사회가 되면서 자극이 점점 다양해지고 빈번해져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에 더 센 것을 원하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뉴스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더 센 말이 흥하고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브렉시트, 두테르테, 트럼프 모두 강경한 발언과 자극이 성공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현재의 원인을 단순명료하게 “그들” 때문이라고 지적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듯하다고 다 맞는 이야기는 아니며,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은 카프카의 「굴」을 생각나게 한다. 안전 강박증에 걸린 짐승이 평생 지하 은신처를 파지만 공포만 가중되고 만다는 이야기처럼, 사회 안정을 위해 실시하겠다는 그들의 행위가 더 큰 위험을 부를 것이다. 바우만이 인용한 크라카우어의 말처럼 ‘존재적 두려움이 유발한 조치들은 그 자체가 존재에 대한 위협이다.’ 듣는 사람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아 시원하겠지만, 가려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채기가 날 때까지 긁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가려운 이유가 모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인해 말라리아에 감염될 수 있다고 경고해주는 진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