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나에겐 10월과 11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현재 내 생활은 일정한 패턴으로 쳇바퀴 돌 듯 굴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10월 즈음이 되면 권태가 정점을 찍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때가 책을 가장 안 읽는 때이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가장 가라앉아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위안이 될 만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래도 책은 최대한 읽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점점 읽을 수 있는 시간도 줄어 최근에는 서재에도 거의 들어오지 못했다(그래봤자 2-3일 정도 비운 것이지만). 쓰는 시간은 읽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준다.
최근까지 나는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있었다. 결론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서 다른 책들을 제쳐놓고 읽는 중이었는데, 자꾸 예정에 없던 책이 불쑥 들어와 한 권을 진득하게 읽는 걸 방해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서관 희망도서인데, 신청을 해도 오는 데 최소 2~3달은 걸리기 때문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올 무렵이면 이미 잊어버리고 있던 책이 대다수다. ‘신청은 니가 원하는 때에 했지만, 오는 건 니가 원할 때가 아니란다’라는 식이다. 여하튼 이번 달은 오래 전에 신청했던 책들이 돌연 폭탄처럼 쏟아졌고, 그 중 한 권이 바네사 R. 슈와르츠의 『구경꾼의 탄생』이었다. 이 책은 독서 모임을 같이 하는 분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고 추천하기에 신청해 두었던 책이다(무려 넉 달 전에!). 이번 주에 문자가 왔고, 도서관에서 빌려와 맨 앞에 실린 역자 해제를 읽다가(역자 대표로 노명우 씨가 썼다)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하는 문장을 보았다. 안 그래도 가라앉았던 기분은 짜증으로 바뀌었다.
한국어 번역서는 본제목 ‘spectacular realities’를 직역하지 않고, 세기말 파리 군중이 사로잡혀 있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선택하였다. 또한 책에 종종 등장하는 ‘spectacle’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스펙터클과 구경거리로 번역했다. 장엄한 광경임을 표현해야 하는 문맥에서는 스펙터클로 옮겼고, 구경에 해당하는 문맥이 강조될 때는 구경거리로 번역했다. 『구경꾼의 탄생』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구경거리의 사회』라고 번역해야 하나, 이미 출판된 드보르의 한국어판 제목이 『스펙터클의 사회』이기에 독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드보르의 책은 예외적으로 책 제목을 그대로 옮겼다. (41쪽, 강조는 인용자)
마침 읽고 있었던 책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였는데, 이 부분을 읽고 ‘이 사람은 『스펙타클의 사회』도 안 읽어봤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책을 덮을 뻔했다. 1장만 읽어봐도 ‘스펙타클’이라는 개념이 ‘구경거리’로 치환될 수 없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구경거리의 사회』라니. 그리고 ‘스펙터클’과 ‘구경거리’를 구분하는 기준도 웃기지만, 책 제목을 ‘구경거리의 사회’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는 상상력 자체가 어이없었다. 이 글을 보고 그 분이 번역한 『사회학의 쓸모』를 읽기 싫어졌다. 이미 샀는데. 저자의 서문을 읽어보면 19세기 말 파리 문화의 변화에 따라 발생한 ‘구경’과 ‘구경꾼’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두고 있어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바꾼 것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나에겐 과한 개입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제목을 맘대로 바꾸는 것이 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죽음의 스펙터클』의 원제는 ‘HEROS: Mass Murder and Suicide’인데, 저자가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스펙타클과 현실의 경계가 붕괴된 모습을 보이는 다중살인사건인 건 맞다. 하지만 실제 책에서 저자의 논의가 기대고 있는 이론은 기 드보르가 아니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도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 Living in the Aftermath of Tragedy’인데, 처음에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한국어판 제목을 너무 자극적으로 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과 반감을 동시에 부르는 제목이라고 해야 할까. 마케팅 측면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심판’과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사이의 간극은 너무 멀어보인다. 마지막으로 『빨래하는 페미니즘』. 이 책의 원제는 ‘Reading Women: How the Great Books of Feminism Changed My Life’, 그러니까 ‘여성 읽기’ 정도다. 제목이 너무 밋밋해서 바꿨겠지만, 다 읽고 나면 ‘빨래하는’이라는 수식어가 이 책과 너무 안 어울린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차라리 부제를 적절히 축약해서 제목을 짓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구경꾼의 탄생』을 읽다가 성질이 나는 바람에 주절주절 썼지만, 개인적인 느낌이기에 비판의 여지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래도 ‘구경거리의 사회’는 용납할 수 없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책 제목도 잘 다루어 주었으면 싶다. 괜히 열폭해서 썼다는 생각도 들지만(이게 다 희망도서 때문이다).
+) 『스펙타클의 사회』는 4장까지 읽었는데, 얇은 책이지만 내용이 정말 깊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물론 풀어서 설명하고 논증하는 책이 아니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꽤 있지만. 종종 ‘기 드보르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새로운 자본론을 쓰려고 했던 걸까’라는 생각도 들고.. 다만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한다고 비판한 것을 기 드보르가 들었다면 어떻게 반박했을까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손택은 “사라예보를 당일치기로 갔다왔던 몇몇 주목할 만한 프랑스인들”이라는 말까지 썼는데, 남은 부분을 읽고 나면 기 드보르의 반박을 정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