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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타인의 고통』 리뷰를 쓰면서 떠올렸던 것이 진은영 시인의 글이었는데, 내가 이 책을 절반만 읽고 말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책장에서 꺼내보니 열두 개의 글 중 여섯 편만 읽은 상태였고(황정은 작가의 글까지였다), 이후 틈이 나는 대로 조금씩 나머지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에도 이곳은 제대로 돌아갈 뜻이 없다는 듯 요동쳤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여전히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런 정지 상태에서 열두 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글들은 어디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부끄러운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당시 나는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고, SNS도 하지 않았으며,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거의’가 아니라 ‘아예’라고 고쳐 써도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날, 그러니까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친구와 함께 서울광장에 분향하러 갔을 때도 나는 제대로 이 “사건”의 윤곽을 알지는 못했다. 아마 난 그때 “사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이 거대한 괴물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 것은 10월 즈음, 그러니까 이 책이 나올 때 즈음이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사 놓고도 읽지 않았고, 책장을 펴 본 것이 작년 4월 16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노란 리본을 볼 때마다, 이 책이 꽂혀있는 것을 볼 때마다 과거의 무지했던 내가 떠올라 몸서리친다.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부를 만큼 수시로 온갖 뉴스를 확인하는 것도 이 죄책감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황하게 썼지만, 남은 부분을 마저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맺혀 있는 죄책감과, 울분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中
남은 절반을 읽으면서 내가 끊임없이 떠올린 것은 “온몸”이라는 단어였다. 읽으면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머리” 유형과 “심장” 유형으로 구분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온몸” 유형이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학부생 시절, 김수영에게 시란 “머리”로만 쓰는 것(언어파)도 아니요, “심장”으로만 쓰는 것(서정파)도 아니다, 그런 구분 없이 온전한 자유로 시를 쓰는 것이다, 라고 배웠으나, 여전히 잘 가늠되지 않는다. 조금 더 그의 말을 따라가보면,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은폐”와 “대지”는 하이데거에게서 가져온 말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는 존재의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자기 폐쇄성을 가진 대지와 투쟁한다고 말한다. 아마 김수영이 말하고 싶었던 “온몸”의 시는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내용으로서의 현실성”이 서로 끊임없이 시의 전부가 되려는 긴장일 것이고, 그것이 이 세계에 충격을, 혼란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머리로 썼는가, 가슴으로 썼는가. 아니면 진정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가. 열두 편의 글을 이런 식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들의 분노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깊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글도, 불의를 떠받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들춰내는 글도 우린 여전히 필요하다. 어쩌면 이 글들이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건 꿈쩍도 않는 저 세계 때문일까. 그렇다면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반드시 “답신”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97-98쪽). 그것이 이 글들을 “혼란”의 씨앗이 되도록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루가 가고 또 간다. 또다른 죽음에 애도할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 세계의 하루가. 나와 당신이 이 글을 매개로 만나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날이, “자정의 그림자처럼” 긴 우리의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더 많은 말과 글들이 그날이 오게 할 혼돈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며, 시론의 마지막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대신하려 한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 예전에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도 가장 아팠던 글은 황정은 작가의 글이었다. 그것은 나 역시도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96쪽)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다시 읽으면서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 글은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97쪽) 위해 쓰는 “응답”이다. 9월의 막바지에 또다른 죽음을 뉴스로 보며 나는 다시 절망했지만, 9월이 지난 뒤에 내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