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라딘에서 알려주는 독서 통계를 보았는데, 올해 산 책이 작년보다 2배가 넘는 양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처음으로 세 자리 수가 되었다). 통계를 쭉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세 가지였는데, '이래서 올해 내 삶이 피폐했나..'하는 생각과 '이래서 내 방이 요지경인가..'하는 생각, 그리고 '이 많은 책 중에 내가 읽은 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었다. 북플 독서통계는 지금까지 내가 산 책 중 읽은 것이 1/4이라고 말해준다.. 아무튼 이런 수치들을 보면서 알라딘에서 매겨주는 올해의 책 말고, 왜 올해 내가 산 책 이렇게 많았나를 생각하면서 결산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매기는 올해의 책들은 당연히 올해 나온 책이 아닌 올해 내가 읽은 책이다. 원래는 내일이나 모레쯤 정리하려고 했으나, 내일과 모레 모두 나는 아침 일찍 상경해야 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 중 올해 안에 끝까지 다 읽을 가능성이 있는 책이 없어서 시간이 잠시 남은 지금 정리를 해 놓는다..

 

1. 올해의 문학

 















올해 읽은 소설 중에는 작년에 읽은 스토너처럼 깊이 몰입하는 감동을 준 작품도, 제발트처럼 이건 뭘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충격적으로 신선한 작품도 없었다. 그렇다고 올해 읽은 소설이 다 평작이었던 것은 아니고, 역시 걸작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소설도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굉장하다고 느꼈던 장미의 이름을 올해의 문학에 올린다. 아는 만큼 더 많이 보이는 소설이어서, 더 많이 보고자 중세의 미학을 샀지만 책장에 꽂혀 읽힐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 권을 더 뽑자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고를 수 있겠다. 읽으면서 정밀하게 짜여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나보코프가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쓰는지 제대로 알고 썼구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득 끊임없이 회자되는 단어의 힘이 항상 긍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평소에도 시집을 많이 읽지는 않는 편이고, 시를 읽는 속도도 다른 책보다 워낙 느려서 올해 완독한 시집은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뿐이다. 최근에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 「그날」이 언급되었을 때 반가우면서도 쓸쓸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날」도 좋아하는 시지만, 요즘 들어 「그날」만큼 자주 떠올리는 시는 「1959년」이다. 일부분만 인용하면 이렇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올해 산 시집 중 두 권을 더 올려본다. 아직 펼치지도 못했으나 올해 나와줘서 고마운 시집들이다. 특히 나는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에 마음이 간다. 외로움의 폭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내 감정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올해의 비-문학

 














비문학이라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아서 분야별로 올해의 책을 고르고 싶었지만, 소설의 비중을 줄이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올해의 목표는 또다시 좌절되었다. 안타깝게도 전체를 통칭해서 한 권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내년에는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인상깊게 남았던 책으로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고른다. 프리모 레비의 책들이 항상 그렇지만, 특히 이 책은 읽는 내내 그 안으로 침잠하는 느낌을 받았다. 올해 영화 <사울의 아들>에 대한 글을 적을 때도 언급했지만, 여전히 홀로코스트는 내가 사로잡혀 있는 주제 중 하나다.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다른지, 여전히 파시즘의 논리가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심지어 대놓고 드러내는 자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독일인들의 편지를 보면 우리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작년 문학동네 계간지를 훑어보다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다루어지는 죄책감(guilt)와 수치심(shame)에 대한 논의를 조르조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다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감벤의 책은 호모 사케르를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상태라 다른 책을 사는 것도 미뤄두고 있었는데, 내년부터 바로 아감벤 읽기를 시작하라는 신호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쉽게 선정에선 밀렸지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역시 많은 자극을 주었던 책이었다. 밑줄을 하도 많이 그어서 따로 타이핑도 해두었는데,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하기도 하고(다 적으니 27쪽이 나왔다. 돋움체 9포인트), 책 역시 얇은 분량에 담긴 사상의 깊이가 나를 압도해서 정리하는 것은 미루어 둔 상태다. 아직 이해가 덜 되었다는 판단도 미룸에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의 진단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책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 아수라와 같은 세계에서 놀아나지 않기 위한 방법은 두 눈을 똑바로 뜨는 것뿐이다.

 

3. 올해의 표지

 















원래 올리려던 책은 김엄지 작가의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였으나, 최근에 읽은 서브텍스트 읽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책 크기도 들고 다니기 편하고, 심플한 디자인에 각 철자들이 실처럼 엮여 있는 모습이 텍스트의 어원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도 아주 어려운 편은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는 겉으로 보기엔 최근의 산뜻한 표지 디자인 트렌드를 따라가는 평범한 표지처럼 보이지만, 표지의 촉감이 특이해서 올해의 표지에 같이 올렸다. 궁금하신 분은 도서관에 가서 한 번 만져보시길..

 

4. 올해의 입문서

 















언제나 궁금한 것은 많은데 혼자 찾아가며 배우는 처지라, 이런저런 입문서들을 읽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올해의 입문서로 골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전에 한국 사회에 강하게 몰아쳤던 화두가 페미니즘일 텐데, 올해 출간된 책들을 보면 실천적인 페미니즘 저서는 많이 나왔지만 이론적 페미니즘을 다룬 저서가 많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웠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실천력도 거의 밑바닥인 사회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붕괴를 불러온 수많은 원인 중 하나는 꼰대로 대변되는 경험 중심주의와 이론의 홀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천적 페미니즘의 열풍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했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일화로 편입되고 진정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페미니즘이 부딪쳐야 할(혹은 지금도 부딪치고 있는) 싸움에 필요한 것은 세밀한 이론의 칼이다. 이론 쪽에서도 정희진과 같은 국내 여성학자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의 소개가 주디스 버틀러 하나로만 집약되는 것에도 나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비판한 마사 누스바움 등의 견해도 언급되는 과정이 있어야 이론이 더 정교화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론의 소개서뿐만 아니라 이론의 원전들, 이를테면 빨래하는 페미니즘에 나오는 여성학 저서들이 활발하게 출간되고, 그에 대한 논의도 생산적으로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급진적인 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힘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으나 올리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도 올려놓는다. 굉장히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보이지만 블랑쇼의 사상에 다가가는 것이 녹록치 않아서, 짧은 분량인데도 매우 천천히 읽고 있다(한 달 동안 읽고 있는 듯). 내년의 기대작 정도로 정리해야 할까? 어찌됐든 내년에 나는 블랑쇼와 어떻게든 마주하고 파고들어야 한다. 이 책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매력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5. 올해의 발견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몰랐던 올해의 발견은 이승우 작가의 소설들이다. 원래는 이름도 모르는 작가였지만, 몇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문장이 주는 단단한 힘이나 사유의 치열한 싸움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에게서 찾기 어려운 자질이 되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의 이면을 최고로 꼽지만, 나는 지금까지 읽은 세 권의 장편 중 에리직톤의 초상이 제일 좋았다. 처음에 발표된 1부에서 끝났다면 나의 평가는 더 박했을 것이다그의 소설에 담긴 정신적 가치나 사상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떤 식으로든 깔려있다과 지상의 노래까지 읽어보고 싶었으나 역시 다른 책에 치였다내년엔 더 읽을 수 있겠지..


읽으면서 종종 이 사람은 기독교적인 이청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이 사람의 소설에 반한 데에 다 이유가 있었구나라고 느꼈다. 이청준 작가는 내가 지금껏 읽었던 한국문학 중 가장 존경하는 작가이므로. 그나마 많이 읽은 분야가 한국문학인데, 그 가운데 내가 항상 최고로 꼽는 장편은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이다.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과거의 내 독해를 수정하면서 읽었다. 네 번째 독서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에도 나는 세 번째 독해를 수정하게 될까.

 


북플 독서통계를 보고 대충 계산을 해보니 내가 올해 읽은 책은 5-60권 정도다(악스트를 포함한 수치여서 별로 신뢰할 수는 없다). 정리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알아야 할 것은 많고, 탐구해야 할 주제도 많고, 시간은 모자란다. 내년에 이해타산적인 공부를 마치고 내가 원하는 무용성의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지는 1월이 되어봐야 알 수 있으므로, 내년에도 공부에 치여서 틈틈이 도둑질하듯 책을 읽을지, 아니면 좀더 여유를 가지고 책을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칠흑의 시대에 필요한 건 더 넓고 깊은 이해이고, 이를 위해 내가 정한 첫 번째 목표는 최근에 구입한 서양철학사를 정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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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과 북플이 알아서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저는 연말 결산을 주제로 하는 글은 안 쓰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읽은 책들에 관해 한 번으로 몰아 쓰는 게 귀찮아서 연말 결산을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

아무 2016-12-28 20:29   좋아요 0 | URL
저도 평소에는 이런 결산을 잘 안하는데, 책을 구입한 수치가 작년하고 너무 차이가 나서 이번에 읽은 책 목록을 보면서 정리해봤어요. 아마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ㅎㅎ

cyrus 2016-12-28 20:34   좋아요 0 | URL
제가 감히 예상해봅니다만 내년 연말에 이런 글을 읽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아무 2016-12-28 20:41   좋아요 0 | URL
내년 제 책 구매량을 예언하신 것 같은데... ㅎㅎ 개인적으로는 올해만큼만 샀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책 구매량이 늘면 항상 식비를 줄이더라구요...^^;;

AgalmA 2016-12-28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보코프에 대한 소감 저도 그랬는데ㅎㅎ 롤리타 읽고 그 느낌을 확인차 <절망>을 읽었는데 역시나 그 느낌이 여전하더라는^^;
다시 또 확인차 <재능> 을 읽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내가 왜 이런 확인작업을 해야 해 약간 성질도 나면서ㅎㅎ;(읽을 책이 얼마나 밀려 있는데!)

서양철학사.... 자주 느끼는 거지만 책 읽는 노선이 아무님이랑 저랑 자주 겹쳐요^^ 그래서 이웃친구인가ㅎ;;

아무 2016-12-29 00:06   좋아요 1 | URL
요사이 나보코프 책에 대한 리뷰를 연이어 쓰신 걸 저도 주목하고 있었죠ㅎㅎ 정말 치밀한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롤리타를 다 읽고 나니까 들더라구요. <절망>이나 <재능>도 Agalma님 리뷰 보고 읽어보고 싶었는데 제가 지난 주부터 책 구입 금지령을 제게 내렸습니다..^^;;

꼬리를 무는 호기심따라 책을 찾다보니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학사를 봐야겠다 싶더라구요. 제가 월초에 책 정리를 하면서 스무권 정도를 팔았는데, 판 돈으로 저 책들을 샀어요 ㅎㅎ 새해 독서의 시작은 철학사로..;;

AgalmA 2016-12-29 00:18   좋아요 1 | URL
저도 책 읽다보면 철학사 줄기나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갈증이 늘 느껴지더라고요. 띄엄띄엄 이 책 저 책으로 읽을 게 아니라.
우리 새해 시작을 책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ㅎㅎ; 무사히 귀환합시다/

아무 2016-12-29 00:26   좋아요 0 | URL
구입하신 책으로 보았을 때 제가 오를 산이 조-금 낮은 것 같은데요 ㅎㅎ.. 그럼 포스의 기운이 함께 하시길.. (레아 공주의 명복을 빌며..ㅠㅠ)

AgalmA 2016-12-29 00:30   좋아요 1 | URL
일정 함량을 갖춘 철학사라면 무슨 책이든 쉬운 건 없는 거 같은데요;;

크리스마스에 사망한 조지 마이클 명복도ㅜㅜ... 정신 없이 바빠서 명복 페이퍼도 깜빡했네요ㅠㅠ

아무 2016-12-29 00:33   좋아요 1 | URL
방금 검색해봤는데 분량은 제가 더 두껍네요;; 방심했다가 큰일날뻔..

조지 마이클도 그렇고 캐리 피셔도 그렇고.. 유난히 올해 부고 소식을 많이 듣게 되네요ㅠㅠ 한해의 마지막이 이렇게..ㅜ

북프리쿠키 2016-12-2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리타 저도 최고의 문학중에 손꼽아요^^;

아무 2016-12-29 09:2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원래는 롤리타 한 권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 읽고 나니 만만치 않은 작가라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ㅎㅎ 새해엔 꼭 시간내서 찾아보려구요^^;;
 

다난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성동구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이해타산적인 공부를 하고, 6시가 지나서야 상암동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도 앱은 이름도 생경한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주었으나, 실제로 걸린 시간은 30분이었다(그리고 30분 동안 길을 잃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다 서점에 도착했고,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30분이 조금 넘는 당신의 이야기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사람들의 질문들. 질문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작가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었고, 나는 질문하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나서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고 당신의 싸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나는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로 들었다, 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 중 한 사람은 백의 그림자를 읽었을 때는 인물들이 찢어지게 가난했어도 요즘 한국소설답지 않게 징징대지 않아서 신선했는데, 이번 작품에는 징징거리는 작품들이 많아서 좀 그랬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징징, 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이 생각했던 징징, 이라는 말이 내가 생각했던 징징,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난 3년 동안 당신의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징징, 과 같은 단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징징, 이라는 말이 이 작은 연서를 쓰도록 마음먹게 했다.

 

길 위에서’, 라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소설 속의 화자들에게 징징, 거릴 수 있는 삶은 없었다. 냉혹한 조건들은 이미 삶의 전제가 되어 있다. 그리고 화자들이 마주하는 생의 갈림길 위에 나는 자꾸 나를 위치시킨다. 내가 제희의 어머니라면, 내가 서점 앞에서 그 소녀를 보았더라면, 내가 도도라면, 내가 앨리시어라면... 그리고 내가 '나'라면. 거기에서 묻게 되는 질문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바스러져 가는 존재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질문. 하지만 그 길 위로 나를 안내했던 당신은 더 이상 없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답을 찾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 싸인을 받았다. 처음 만난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쑥스럽고 긴장이 돼서, 눈도 못 마주치고 싸인하는 손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 그대라는 말이 작은 울림을 주었던 까닭은, 그 말이 아무도 아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서다. ‘단 한 사람 그대라는 단독성이 아무도 아닌아무것도 아닌을 구별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아닌을 종종 그 누구도 아닌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어진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보면서 여전히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나보다 훨씬 많이 아팠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 봄에 만났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마웠다. 옹기전을 용산과 겹쳐서 읽고, 웃는 남자를 세월호와 겹쳐서 읽는 것은 편협한 독서이지만, 지난 시간 동안 세계가 우리에게 가했던 모든 일들이 당신의 문장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그 자리에 언제나 있어 주었으면 싶다.

 

아무런 친분이 없음에도 당신, 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와 같은 말이 주는 분리(또는 격리)의 느낌이 싫어서 그렇고, 당신의 글을 볼 때마다 내가 내 앞에서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아 그렇다. 나를 비추는 라는 거울 말고 또다른 거울. 그 거울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지 처럼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두 번째 책에 싸인을 할 때 나는 내 쑥스러움을 넘어 폭력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당신은 지금 현실에 너무나 폭력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계속 밀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라고 짐작했던 말이었다. 내년에도 나는 마냥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냥기다리는 것이 기다려지는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당신이 호명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싸인을 다 받고 인사를 할 때 나의 눈과 당신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눈은 여전히 깊었고 맑았다. 소설과 작가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말했던 그 사람과 달리, 나는 당신의 글과 당신 자신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제대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감상의 언어, 파토스의 언어를 최대한 아끼겠다고 다짐했었다. 설령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이 감정의 몰아침이어도, 그것을 어떻게든 이성의 언어로 붙잡는 것이 결함 많은 언어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나의 다짐이었다. 언어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부딪치는 것이야말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그런 엄정함이 나의 존재론적 깊이를 파고들게 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사로잡았던 상념들은 감정의 언어로밖에 쓸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다짐을 허물고 이렇게 연서를 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당신과의 만남이 준 감정에 젖어서.

 

서점을 나와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또 길을 잃고 헤맸다. 집으로 가는 막-지하철은 이미 지나고 없었고, 신논현까지 빙빙 돌아가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 당신의 필체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올해의 마지막은 아무도 아닌의 리뷰로 갈무리해야겠다고. 읽고 있던 두세 권의 책을 한쪽에 밀어두고 읽는다. 대부분 재독(再讀)이지만,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는 당신의 문장과 세계관을 생각하면서, 나는 밑줄을 긋는 것으로 당신의 아픔에 최대한의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만의 황정은론을 쓰겠다는 목표의 실현이 조금은 앞당겨져야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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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2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은 황정은론 정말 잘 쓰실 분이시라는! 이 연서 보고 있는데 제가 다 감격스럽네요. 짝짝짝)))

아무 2016-12-24 19: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네요^^;; ... 항상 생각만 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데, 쓰려면 좀더 더듬어 보아야 할 길들이 있어서.. 몇몇 단편들은 아직 저에게 안개 자욱한 길이라서요;; 그 외에도 쓸 때 참고해야겠다 싶은 책들도 찾아봐야 하고... 내년부턴 조금씩 시작할 수 있을지도ㅎㅎ

2016-12-24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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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싫어지는 게 하나씩 늘어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나이도 별로 먹지 않았으면서). 예전에는 그냥 넘길 수 있었던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버스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낯선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라는 경험 제일주의, 자신의 말이 어떤 영향과 책임을 갖는지 생각도 안하고 말하는 사람, 기타 등등. 작년까지는 왜 저럴까 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견디기 힘든 짜증이 일고, 마음이 누군가 돌을 던진 연못처럼 출렁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삶에서 이런 것까지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관념론자가 아니고,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58)이라고 믿고, 그렇기에 살아감/죽어감(결국 둘은 하나다)의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만족스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쉽게 오진 않겠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윤동주는 왜 살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이라 했을까. “죽는 날까지와 맞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죽어가는 것이라고 쓰는 것이 생명에 대한 경외의 표시였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에브리맨역시 한 남자의 삶의 기록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의 삶이 경이롭고 존경받을 만한 삶은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빛나는 것은 여성 편력으로 점철된 의 청장년 시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투쟁하며 버텨나가는 의 노년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이 소설을 의 삶의 기록이 아닌 죽어감의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135)이었다고 믿었지만, 대학살 속에서 완전함 따위는 없었음을 깨달아가는, 그래서 결국 뼈에서만 위로를 찾을 수 있는 죽어감의 과정.

 

최근 읽고 있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한 책에는 그의 소설 죽음의 선고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소설 속 J가 죽어가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을 보며 나는 가 매년 병원에 입원하며 겪었던 투쟁,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사그러드는 과정들이 생각났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경험은 세계의 부재를 겪는 공포스러운 체험이다. 나의 모든 능력이 사라져 의미 부재에 직면하는 두려운 체험이다.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공포를 겪어야 한다. 죽어가면서 사람은 행동의 세계에서 내쫓긴 실존을 드러낸다. 이 실존 속에서는 내 앎의 근원이었던 진정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죽어가고 있다는 무한한 수동성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죽는 자는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마주한다. , 세계를 의미 있는 무엇인가로 바꾸는 일의 불가능성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01)

-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기 힘으로 존재하고, 이성적이며, 자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생각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칭했다. “우리의 모든 가능성이 끝장나는 가능성이라는 뜻으로,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만이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어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맞닥뜨릴 때 나는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가 되어 내 삶이 무의미 속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죽어감 앞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모든 수동성보다 더욱 수동적인 수동성을 경험한다. 블랑쇼에겐 이런 죽어감의 경험을 겪도록 해주는 것이 문학이고, 서로가 서로를 암시하는 사유에서 블랑쇼는 죽음과 문학의 경험을 공동체와 연결시킨다.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사유를 섣불리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가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형 하위와의 관계마저 끊어졌음을 깨닫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는 부모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서. 그것이 만 남은 부모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본 것은 잠들어 있는 나이 든 여자의 높은 돋을새김 윤곽이었다. 그가 본 것은 돌이었다.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돌 같은 무게는 말하고 있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124)


평범한 삶이었다. 죽기 전까지 모든 가정을 해체시켰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삶이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13, 83)하다는 진실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에브리맨이 된다. 그래서인지 보석상의 이름이 에브리맨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의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63)이라는 의 아버지의 말처럼, 보석-돌의 무게(영원성)에브리맨이라는 이름의 유한성은 서로 대립하는 이름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주는 쓸쓸함이란.

 

결국 죽어가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이다. 에브리맨가 노년이라는 대학살을 겪는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동성 앞에서의 인간을 보여준다. 책을 마지막까지 읽은 뒤 보이는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의 고독한 모습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유한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죽어갈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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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18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이 표현하신 ˝살아있는˝은 윤동주가 저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노래하는, 걸어가는, 스치우는 것처럼 삶도 향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멈춤 상태의 ‘살아있는‘이 아니라 ‘살아가는‘의 뜻으로 쓰려 했을테고, 잡힐 것 같지 않은 저 먼 별도 바람에조차 스치우는 존재이니 우리는 살아감에서 살아감(영원성)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살아감에서 죽어감(소멸)로 가는 게 이치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죠.

보석의 영원성과 에브리맨의 유한성을 대비시키는 분석 좋네요^^

아무 2016-12-18 23:12   좋아요 1 | URL
댓글을 보고 제가 쓴 글을 다시 보니 제가 앞에서는 ‘살아감‘이라고 쓰고 뒤에서는 ‘살아있는‘이라고 썼네요. 손가락에 가해지는 관성의 힘이란..^^;;

말씀하신 부분에는 100% 동감합니다. 특히 멈춤이 아닌 움직임의 상태라는 것... 말미에 고은 시인의 ‘문의마을에 가서‘를 적으려 하다 내키지 않아서 말았는데, 생각해보니 시에서 죽어감의 이미지가 제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네요.

말씀하신 보석은 글을 쓰려고 밑줄 친 부분들을 다시 훑다가 떠올라서 쓴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때가 아니라 정리하려고 글을 쓸 때 이해의 순간이 종종 오기도 해요. 그런 이해의 순간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ㅎㅎ..

AgalmA 2016-12-18 23:16   좋아요 1 | URL
아하...말이 엉켜버린 거군요. 수차례 훑어봐도 오픈하면 막상 그럴 때 있죠^^; 제가 너무 빨리 댓글을 달았나봄;; 아무님 이런 리뷰 정말 기다려와서 기쁜 마음에ㅎㅎ

리뷰가 고역이긴 한데 말씀처럼 그런 줄기들이 이어지는 걸 발견하는 기쁨이 숨은 보답이라^^

아무 2016-12-18 23:38   좋아요 1 | URL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책들이 있어요. 어떤 책은 100자평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고..ㅎㅎ 글자 수가 애정도를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각잡고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다음엔 말씀처럼 고역의 시작이죠^^;

전 아마 다음날은 되어야 발견했을 거예요 ㅎㅎ 이틀 지나면 더이상 교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서시에 대한 Agalma님의 평도 읽게 되고 좋네요^^

2016-12-23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3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브텍스트 읽기 -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찰스 백스터 지음, 김영지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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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소설 쓰기에 대한 몇 가지 팁을, 일반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 때 문자 사이에 문자화되지 않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작가는 말해진 부분과 말해지지 않은 부분 모두에 있어서 치열해야 한다는 것. 언어화되지 않는 것을 언어로 지어야 하는 고독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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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12-18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소설이나 시는 영미 쪽이 대다수인데, 대부분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었다. 국내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았던 건 아쉬운 점(내 독서 경험의 부족 탓이지만). 초판이라 그런지 오자나 비문도 이따금 보인다.
 

올해 내가 했던 수많은 미련한 짓 중 하나는, 계간지가 나올 때가 되면 주요 계간지 및 문학 잡지의 목차를 알라딘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계간지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황정은 작가의 신작이 실렸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는데, 가을호까지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아서 아마 올해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긴 힘들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창비 겨울호에 중편 웃는 남자가 실려서 깜짝 놀랐고, 곧바로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 너무나 반가웠다. 신작은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읽어야 할 책이 계속 밀려서(반납 기한이 있는 도서관 책이 상전이다. 이러니 산 책은 끊임없이 뒷전으로 밀려난다) 아직 읽지는 못했다. 목차를 보니 한 편을 뺀 나머지 단편들은 다른 경로로 읽고 리뷰까지 각각 썼었다..
















사실 내가 황정은 작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나온 이후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황정은 작가는 현재 생존해 있는 한국 작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는 도대체 황정은 소설의 어떤 점이 좋았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나는 황정은 소설에서 보이는 세계관과 윤리(윤리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에 깊게 공감했던 것 같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문장은, 신작 아무도 아닌에 작가의 말처럼 붙어있는 제사(題詞).



글귀를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마음이 울렸고, ‘역시 나는 이 작가를 애정할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아닌아무것도 아닌’. ‘이 들어갔느냐 아니냐의 차이뿐이지만 이로 인해 생기는 의미의 차이는 크다. ‘아무것도 아닌은 말 그대로 nothing, 즉 그 존재 가치가 부정되어 ()’로 규정된 대상이다. 내 식대로 규정하면 비-존재다. 하지만 아무도 아닌이라는 말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려고 해도 규정할 수 없는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렇기에 아무도 아닌, 명실」(*)이라고 불렀을 때 명실이라는 개별적인 존재가 오롯이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명실이 가진 개별자로서의 존재성은, 세계에서 비-존재가 되어버린 실리를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것이 황정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작가로서의 사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에 의해 비-존재가 되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는 것, 기억하기 위해 쓰는 것. 그리고 그 쓺을 통해 존재성을 찾도록 돕는 것.

 

태블릿 PC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저 안에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증거가 들어있지 않을까... 였다. 결국 그 안에서는 찾을 수 없었지만. 일련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들은 정말 많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들, 청와대에 계신 당신들이 세월호를 비-존재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7시간 동안 무슨 공작을 벌였는지에 대한 진실이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지만, 드러난 것은 7시간 중 겨우 20(이라고 당신들은 말한다)에 지나지 않는.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지만, 촛불은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헌재의 탄핵 인용도 끝이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게 한 변화의 물결이 박근혜라는 한 인간의 물러남으로 끝난다면, 병들고 곪아버린 나라의 시스템은 다시 본 궤도에 진입할 것이다. 첫 걸음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 사이, 당신들은 또다시 반격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의 광장이 지난 주보다 훨씬 더 뜨겁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권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광장이야말로, 당신들의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린 세월호를 기억하고 몸으로 쓰는 행위, 더 나아가 세월호를 다시 존재로 호명하는 행위의 공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 『아무도 아닌에 실린 명실은 한겨레에 아무도 아닌명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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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도 아닌 자 Niemand˝, ˝아무 것도 아닌 것 Nichts˝을 부정에서 건져내는 파울 첼란
    from 공음미문 2016-12-11 05:29 
    찬미가 아무도 우리를 또 다시 흙과 점토로 빚지 않으리라.아무도 우리의 먼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아무도. 찬미 받으소서, 아무도 아닌 자여.당신을 위해우리는 피어나오니.당신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아무것도 아닌 것의,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꽃술과함께 영혼 환하게 황량한 하늘에 꽃실을 가지고우리가 노래했던 심홍색 말의꽃관으로 붉게가시
 
 
오거서 2016-12-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이름을 기억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무 2016-12-10 13:23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합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작가지만, 그래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ㅎㅎ

AgalmA 2016-12-11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 첼란 시를 읽던 차 아무님 글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먼댓글 페이퍼를 썼습니다^^ 짧게 시만 옮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아무님이 그간 관심 가지던 주제와 읽어오시던 책 프리모 레비, 수잔 손택, 한나 아렌트, 바우만 등등과도 연결되겠죠.
인간을 비존재로 만드는 폭력성에 대한 저항, 인간 본질에 대한 의문, 윤리의식 그런 것들에 늘 공감했었고 저 또한 그랬고...

아무 2016-12-12 09:50   좋아요 0 | URL
‘아무도 아닌‘과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가 연결되는 부분이 있네요. Niemand라는 명사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파울 첼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그가 말한 ˝대화의 문학˝을 보니 바흐친과 블랑쇼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뷔히너 문학상은 아마 게오르크 뷔히너인 듯한데(맞겠죠? ㅎㅎ), 뷔히너의 <보이체크>는 제가 좋아하고 여전히 시의적인 희곡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전 그 희곡을 <당통의 죽음>보다 좋아하고.. 재작년 즈음에 뮤지컬로도 봤었는데, 희곡으로 받았던 느낌이 잘 와닿지는 않더라구요..

폭력이라는 주제가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여전히 고민중인 문제이죠. Agalma님도 마찬가지이시겠지만.. 하기야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문제로 잠시나마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폭력‘, ‘자유‘, ‘공동체‘의 문제는 여전히 제가 고민해야 할 과제들이고, 그래서 계속 찾아보고 있기도 해요. 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답을 만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