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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올해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싫어지는 게 하나씩 늘어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나이도 별로 먹지 않았으면서). 예전에는 그냥 넘길 수 있었던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버스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낯선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라는 경험 제일주의, 자신의 말이 어떤 영향과 책임을 갖는지 생각도 안하고 말하는 사람, 기타 등등. 작년까지는 왜 저럴까 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견디기 힘든 짜증이 일고, 마음이 누군가 돌을 던진 연못처럼 출렁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삶에서 이런 것까지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관념론자가 아니고,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58쪽)이라고 믿고, 그렇기에 살아감/죽어감(결국 둘은 하나다)의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만족스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쉽게 오진 않겠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中
윤동주는 왜 ‘살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이라 했을까. “죽는 날까지”와 맞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죽어가는 것”이라고 쓰는 것이 생명에 대한 경외의 표시였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에브리맨』 역시 한 남자의 삶의 기록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이 경이롭고 존경받을 만한 삶은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빛나는 것은 여성 편력으로 점철된 ‘그’의 청장년 시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투쟁하며 버텨나가는 ‘그’의 노년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이 소설을 ‘그’의 삶의 기록이 아닌 ‘그’의 ‘죽어감’의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135쪽)이었다고 믿었지만, 대학살 속에서 완전함 따위는 없었음을 깨달아가는, 그래서 결국 뼈에서만 위로를 찾을 수 있는 죽어감의 과정.
최근 읽고 있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한 책에는 그의 소설 『죽음의 선고』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소설 속 J가 죽어가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을 보며 나는 ‘그’가 매년 병원에 입원하며 겪었던 투쟁,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이 사그러드는 과정들이 생각났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경험은 세계의 부재를 겪는 공포스러운 체험이다. 나의 모든 능력이 사라져 의미 부재에 직면하는 두려운 체험이다.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면서 ‘나’ 자신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공포를 겪어야 한다. 죽어가면서 사람은 행동의 세계에서 내쫓긴 실존을 드러낸다. 이 실존 속에서는 내 앎의 근원이었던 진정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죽어가고 있다는 무한한 수동성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죽는 자는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마주한다. 즉, 세계를 의미 있는 무엇인가로 바꾸는 일의 불가능성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01쪽)
-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기 힘으로 존재하고, 이성적이며, 자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생각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칭했다. “우리의 모든 가능성이 끝장나는 가능성”이라는 뜻으로,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만이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어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맞닥뜨릴 때 나는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가 되어 내 삶이 무의미 속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죽어감 앞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모든 수동성보다 더욱 수동적인 수동성”을 경험한다. 블랑쇼에겐 이런 죽어감의 경험을 겪도록 해주는 것이 문학이고, 서로가 서로를 암시하는 사유에서 블랑쇼는 죽음과 문학의 경험을 공동체와 연결시킨다.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사유를 섣불리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그’가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형 하위와의 관계마저 끊어졌음을 깨닫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는 부모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서. 그것이 “뼈”만 남은 부모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본 것은 잠들어 있는 나이 든 여자의 높은 돋을새김 윤곽이었다. 그가 본 것은 돌이었다.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돌 같은 무게는 말하고 있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124쪽)
평범한 삶이었다. 죽기 전까지 모든 가정을 해체시켰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삶이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13쪽, 83쪽)하다는 진실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에브리맨”이 된다. 그래서인지 보석상의 이름이 “에브리맨”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의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63쪽)이라는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보석-돌의 무게(영원성)와 “에브리맨”이라는 이름의 유한성은 서로 대립하는 이름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주는 쓸쓸함이란.
결국 죽어가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이다. 『에브리맨』은 ‘그’가 노년이라는 대학살을 겪는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동성 앞에서의 인간을 보여준다. 책을 마지막까지 읽은 뒤 보이는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그’의 고독한 모습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유한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죽어갈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