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題詞)에 대한 단상

 

 

 

 

 

 

 

 

 

 

 

 

 

 

 

찬미가

 

 

 

아무도 우리를 또 다시 흙과 점토로 빚지 않으리라.

아무도 우리의 먼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

아무도.

 

 

찬미 받으소서, 아무도 아닌 자여.

당신을 위해

우리는 피어나오니.

당신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

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꽃술과

함께 영혼 환하게

황량한 하늘에 꽃실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했던 심홍색 말의

꽃관으로 붉게

가시

위로, 오 그 위로.

 

 

*제여매 역자의 말 발췌 인용: 이 시에서 아무도 아닌 자 Niemand'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독일어에서 niemand가 부정대명사임에 비하여, Niemand는 부정의 뜻을 지닌 명사이다. 첼란은 이 단어를 제1연에서 부정대명사로 사용함으로써 성경이 전하는 신의 인간 창조 신화를 부인하고, 2연에의 아무도 아닌 자는 미지의 누군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문학은 그가 자신의 문학을 대화의 문학이라고 밝혔듯이 이러한 미지의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한다.

 

 

 

 

 

 

 

튀빙겐, 정월

 

 

 

눈멀도록

설득당한 두 눈.

그 눈은 순수하게

솟아올랐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물 위에 떠 있는 휠덜린 탑을

그 눈은 회상하는 것이다, 갈매기

소리.

 

  

말이 물에 잠길 때

익사한 목수들이 찾아온다.

 

 

한 인간이 온다면,

온다면,

한 인간이 세상에 온다면, 오늘,

족장들의

빛의 수염을 달고 그가 온다면,

이 시대에 대하여

말하리라, 그는

아마도

단지 랄라랄라 웅얼대리라,

자꾸자꾸

또또.

 

 

(“팔락쉬, 팔락쉬”)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제여매 옮김, 시와 진실, 2010)

 

 

* 제여매 역자의 말 발췌 인용: 1960년에 첼란은 골 사건'이라는 표절 시비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19601월에 독문학자 발터 옌스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하여 튀빙겐을 방문하는데, 이 시는 이 방문 바로 다음 날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첼란은 튀빙겐에서의 개인적 체험과 튀빙겐에서 말년을 보냈던 휠덜린의 전기적 요소를 도입하여 시적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다. “순수하게-/ 솟아올랐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는 휠덜린의 라인 송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익사한 목수들은 휠덜린 예술관과 관련되어 있는 표현으로 파악되는데, 휠덜린은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짐머라는 훌륭한 목수를 그리스의 조각가와 비유하였다고 한다. 휠덜린은 말년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으며, 라인 강에서 익사하는데, “팔락쉬, 팔락쉬 Pallaksch, Pallaksch”는 휠덜린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을 때, 때때로 긍정하는 말(ja)로 때로는 부정하는 말(nein)로 사용한 말이다. 첼란은 여기에서 휠덜린의 문학과 전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문학이 죽음이라는 심연을 관통해야 비로소 진실을 표현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정월 스무 날”은 그가 뷔히너 문학상 수상 시 언급하기도 했는데, ‘1942120유대인 말살 정책이 결정되었던 날이며, 1942년에 수용소에서 파울 첼란이 부모를 잃는 등 유대 민족의 비극과 고통을 상징하는 날짜이다.

 

 

 

§

파울 첼란도 휠덜린처럼 1970년에 파리 센 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건 언어 밖에 없었을 텐데, 원망스럽게도 그의 모국어는 독일어였다. 유대교에도 회의적이었으나 그가 유대인인 건 전후에도 그에게 내내 주홍글씨로 작용했다 반유대주의와 보수적 분위기가 전후에도 여전해 파울 첼란은 당시 독일 문단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의 푸가는 아우슈비츠 비극을 미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참상과 무도곡을 연결한 것을 꺼림칙하게 여긴 탓이 아닐까 나는 짐작하는데, 산문이 아니라 왜 시였어야 했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좀 더 깊게 봐야 한다.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죽음의 푸가」가 1947년 한 잡지에 최초로 발표될 때 제목은 '죽음의 탱고'였다. 같은 시기에 다른 잡지에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표되었다. 제목 때문에 '푸가'라는 음악 형식에 따른 작품이라 오해될 수 있으나 아무 관계가 없다고 제여매 역자는 전한다.  내가 보기에 "새벽의 검은 우유~또 마신다"를 독립한 복수의 성부로 보고 각 연에서 그 주제가 반복된다고 보면 푸가 형식과 아주 관계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파울 첼란이 시를 쓸 때 푸가를 토대로 하진 않았을 거다.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바꿀 때 푸가와 연결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이런 접점들 때문에 내가 시와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아무튼 '죽음의 탱고'에서 '죽음의 푸가'로 고친 건 잘한 일이다.  

 

 

죽음의 푸가」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반성적 성찰을 되돌려 준 시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통 속에서도 파울 첼란이 인간 속에서 끝끝내 보려고 한 공존, 부정을 통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긍정의 모색을 본다.

한국의 많은 시인들조차 파울 첼란 시가 난해하다고 여겨 그를 비의적 hermetisch' 시인이라 말하고 있는데, 파울 첼란 자신도 그것을 부정했고, 그런 규정은 폄하의 의도가 있으며, 최근 파울 첼란 문학 연구 방향도 비의성을 배제하는 추세라고 제여매 역자는 전한다. 파울 첼란 문학관을 봐도 그렇고 그의 수상 연설들을 봐도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시를 쓰려는 시인이 아니었다.

 

 

 

 

시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며, 움직임이며, 또한 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 질문은 시계의 시침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시는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시는 무한성에 대한 요청이 있지만 시대를 관통합니다. 시대를 관통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

 

 

창조된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닌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만이 예술의 유일한 척도이다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파울 첼란이 인용한 뷔히너의 말

    

 

 

 

죽음의 푸가찬미가가 연결된 듯한 파울 첼란의 다음 詩도 보자.

 

 

 

 

흙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팠다.

 

 

그들은 파고 또 팠다. 그렇게 그들의 밤이 지나고,

그들의 낮이 지났다. 그들은 신을 찬미하지 않았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원했다고 그들은 들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았다고 그들은 들었다.

 

 

그들은 흙을 팠고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현명해지지 않았고, 아무 노래도 짓지 않았다,

아무 말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팠다.

 

 

고요함이 찾아왔고, 폭풍우가 몰려왔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는 판다, 당신이 판다, 그리고 벌레도 판다,

그들은 판다고 저기서 노래한다.

 

 

오 한 사람, 오 아무도, 오 아무도 아닌 자, 오 당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을까?

오 당신이 파고, 나도 파네, 나 자신을 당신에게로 파묻네,

우리 손가락에 반지가 깨어나네.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제여매 옮김, 시와 진실, 2010)

 

 

 

 

찬미가」와 마찬가지로 이 시도 성경의 창조 신화를 신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의 중기 시집인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서시이기도 하다. 인간을 초월적 존재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창조된 모든 것의 생명력을 강조한 파울 첼란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무도 아닌 존재들이지만 서로 속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빛날 수 있다고 이 시는 강조하고 있다

 

 

 

여울 물, 그 위에서

신들의 안짱다리가

절뚝거리며 건너온다 -

어떤

별의 시간에 너무 늦었단 말인가?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시집 마지막 시 허공에》마지막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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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11 05: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 시들 잘 보고 가요!^^
아무도 아닌자의 장미 , 죽음의 푸가 , 극(?)적인 시들...

AgalmA 2016-12-11 05:51   좋아요 2 | URL
또 안 주무시고 무슨 책 보고 계세요 ㅎㅎ

[그장소] 2016-12-11 06:02   좋아요 2 | URL
자면서도 꿈에 리뷰를 쓰더라고요. 푸핫~^^
지금은 ㅡ제대로 책도 못 보겠다는, 그래서 그냥 시간보내고있어요. 잡스런 일들 하면서.. 누웠더니 머리 아프고 ㅎㅎ 일어나니 숨 막히고..코 막혀서 ..이런..ㅎㅎㅎ

AgalmA 2016-12-11 06:11   좋아요 2 | URL
책 악몽 꾸는 그장소 님 그림 그리고픈 에피소드네요ㅋㅋ
그장소 님도 참 한 슬랩스틱 하신다는ㅋㅋ

[그장소] 2016-12-11 07:05   좋아요 2 | URL
대충 쓴 리뷰가 맘에 걸린 모양 ㅡ 책은 두권인데 그내용이 짬뽕되서 이렇게 썻어야지 ㅡ하는 느낌으로 꿈에나오더라고...그런데 깨서 옮겨보려고하니 , 재채기 한번에 ...응? 뭐였지...감각만 남고 내용은 사라짐..ㅎㅎ;;;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