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한 순간의 판단 착오라고 하기엔 엄청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그녀의 죽음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믿을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난 비극이다. 수많은 전조증상이 있었겠지만 일상에 묻혔으리라. 세상에 가벼운 죽음은 없다. 저마다의 죽음은 그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는 것이다.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죽음은 가슴을 치고 땅을 칠 고통이다. 오래 살았던, 짧게 살았던, 건강했던, 많이 아팠던 죽음은 단 한 가지 색이다. 블랙.




이유원인 따지고 분석한들 이미 한발 늦어버렸다. 그 순간 그렇게 갈 줄은 당사자도 몰랐을 테니. 그건 착란처럼, 도무지 제어가 안 되는 망가진 기계처럼 손을 쓸 틈도 없이 파국으로 치달았으리라. 억척스럽고 독한 듯 했던 한 인간의 내면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유리였음을 연민한다. 가엾고 가엾다. 죽음 이후의 세계 따윈 믿지 않는 나로선 좋은 세상 어쩌니 하는 빈말은 못하겠다. 그냥, 남겨진 것들을 향한 그녀의 통곡 소리만 계속 들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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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사랑초 아가들. 벌레먹고 잎이 누렇게 변하길레 줄기까지 싹둑 잘랐줬음에도 다시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고 있다. 닮고 싶은 생명력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청사랑초 구팅이에 보라사랑초도 두 포기 있다. 길에서 주워다가 심은 거다. 애완견을 유기하는 인간이나 말라비틀어진 화초를 버리는 인간이나 같은 종자다. 과거, 유기까지는 아니라도 말라죽인 전력이 있으니 본인도 유구무언이다. 애정은 눈꼽만치도 없이 마지못해 거두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랑 줄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말아야 한다. 그건 사람에게도 해당한다.

올해 꽃밭은 온통 메리 골드 천지다. 작년엔 민달팽이의 먹이로 스러져야 했던 녀석들이 한 포기도 죽지않고 모두 살아남았다. 너무 많아 처지곤란할 지경이다. 얘네들도 은근 번식력이 강하다.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는 속도가 놀랍다.  

 

 





부레옥잠은 추위에 약하단다. 몇 뿌리는 크고 길쭉한 유리병에 담아 실내로 들였고 몇 뿌리는 작은 화분의 흙에 심었다. 모두 따뜻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어야 한단다. 내년 봄이 오는 그날까지.

작은 석류나무도 한 그루 얻어 심었다. 가능한 화분이 아닌 노지에 심으려다 보니 햇빛은 많이 부족하다. 내년엔 두 뼘의 키가 배가 되어 있기를 소망한다. 

교훈 하나. 꽃이 사랑스럽다면 벌레와 친해야 한다는 거. 아침마다 초록이나 갈색의 벌레들이 꽃과 잎에 달라붙어 맛있게 냠냠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놀랄 것이 없다. 당연하다는 듯 집게를 찾아 벌레를 들어 꾹 눌러 죽일 용기가 없으면 멀리 대문 밖 하수구에 낙하를 시켜야 한다. 벌레의 엄마는 대개 나비다. 크고 작은 화려하거나 소박한 나비들이 날아들어 우아하게 꽃에 앉아있는 모양이 예쁘다고 해서 마냥 즐거울 수가 없는 이유다. 최근엔 나비를 보면 넌 어떤 아가들을 낳을래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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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 전2권 세트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불행히도 드라마 ‘연애시대’를 보질 못했다. 주인공이 감우성과 손예진이고 보석처럼 빛나는 연기를 했다는 평을 읽긴 했다. 하지만 과연 드라마를 봤다면 이 소설을 기꺼이 읽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거다. 무척 멋진 드라마라는 환상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기에 주저 없이 손을 뻗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서 소설을 미리 읽었고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걸 알았다면 눈을 크게 뜨고 드라마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미묘한 심리지만 그런 거다.




남자와 여자는 이혼을 했다. 것도 일 년 삼 개월 전에. 그럼에도 주구장창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만남을 지속한다. 이혼의 원인이 폭행도 바람도 아니고 죽도로 싸우다 환멸을 느낀 것도 아니므로 친구로 지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변명을 하면서 입버릇처럼 서로에게 새로운 사랑을 결혼을 종용한다. 네가 먼저 해라. 그럼 나도 하겠다. 아니다. 네가 먼저 하는 게 좋겠다. 그렇다. 척 들어도 마음과는 다른 말임을 알겠다. 미련이 철철 넘치는 게 보인다. 쿨한 관계?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이혼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이혼 후에라도 부딪치며 싸우며 정을 떼야 한다는 진단도 얼핏 수긍이 간다. 문제는 그들의 이혼은 아기를 잃은 게 원인이었고, 서로에게 품은 연민과 자책 때문이었고 시간이 흐르고 만남이 거듭 되도 이혼을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오기와 자존심을 내세워 상대가 행복하면 내 마음쯤은 포기하겠노라 큰소리친다. 이타심도 정도가 있다. 이 정도면 부처님도 돌아앉겠다.




제목이 ‘연애시대’인 게 이유도 있었다. 결혼보다 연애. 이혼 후의 연애가 최고라는. 뭐 그런 건가? 이러니 적당히 잘난 남자와 혼자 살아도 능력 있는 여자의 이혼은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이혼을 해라. 그리고 연애를 하라고 부추기는 듯도 하다. 이렇게 멋진 이혼 후의 연애가 여기 있노라고. 사랑해서 떠나보낸다는 신판조의 능수능란한 작가의 글 솜씨는 매력이 있다. 그 작가가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자살을 했다니 더 끌린다. 이런 근사한 연애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왜 죽어야 했을까. 죽음의 어떤 면이 그를 매혹시켰을까. 작가의 요절은 분명 그가 남긴 글들을 빛나게 한다. 사소한 흔적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의 이혼처럼 그의 죽음도 어쩌면 우발적인 사고일지도 모르는데. 말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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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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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가볍고 무거움을 떠나 의사의 선고가 내려지고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은 고독하다. 외딴 섬에 갇힌 듯, 노 잃은 배처럼 표류하듯, 길 잃은 아이처럼 두렵다. 내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의사와 마주앉기까지의 과정도 쉽지 않고,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마음을 다잡아 피할 수 없다면 맞서라는 교훈을 되새길 때, 혼자여야 하는 사정은 더 아득하다. 가족이 없음은 다행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다. 나눠서 반이 될지 배가 될지는 겪어봐야 안다.




-가족들 이외에는 암을 알리지 마십시오. 암환자라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면 신변을 정리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워낙 많은 환자들을 봐서 하는 말입니다.
의사가 메모지를 꺼내서 주의사항을 적어주었다. 술 담배 섹스를 끊고 잠을 많이 잘 것,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산책을 할 것, 청국장을 많이 먹을 것, 고등어 꽁치 방어 같은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을 것······· (318쪽)




어느 날 갑자기 간암을 선고 받으며 시한부 인생이 된 그 남자의 여정에 공감하는 건, 그 메마른 삶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질병이라는 벽 앞에 섰었던 기억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맞추어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먹어선 안 될 음식과 먹으면 좋은 음식을 따져 매끼마다 의무처럼 우걱우걱 먹어대는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진 자신을 들여다본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뭐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니까.




장편소설을 선호해서 단편은 어지간해선 읽을 기회가 없다. 짧지만 강렬한 뭔가를 곱씹으며 그 여운을 붙들어 맬 능력도 없고. 그럼에도 가끔 경험이나 기억에 맞물린 이야기를 만나면 푹 빠져들어 단편이 이런 거구나 한다. 아마도 ‘화장’이 처음 읽은 김훈의 소설이었을 게다. 강렬하면서도 그 건조함에 질려했던 기억이 있는데, 두 번째 읽어보니 처음과는 또 달랐다. 평소 읽는 방식으로 후다닥 단편을 읽어선 안 된다는 걸 다시 새겼다.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습성은 무섭다. 정말 좋아한다면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한 글자 한 글자 베껴 쓰며 읽기도 좋다. ‘강산무진’도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건조하고 출구가 없어 때때로 숨이 꽉 막히는 나날을 굳이 소설에서 찾아 읽고 감동했느니 하는 건 거짓일 런지도 모르지만. 그건 있다. 어려서는 단지 글자 이상도 아니었을 것들이 보인다는 거. 그 이면의 이면까지도 그려진다는 거. 부끄럽지만 연륜이다. 그럴 때가 되었음을 알겠다. 그래서 작가는 집요할 정도로 독자에게 들이대는지도 모른다. 읽힐 거라는 걸 알고, 어쩌면 반복해서 읽을 거라는 걸 알고. 대단한 힘이다. 소설을 읽는 저마다의 방식은 다르겠지만 결국 길은 하나로 통한다. 김훈이라는 이름. 그의 에세이 네 권을 읽은 다음에 만난 소설집이라는 것도 의미라면 의미다.




나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감당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우울과 어둠이 안개처럼 배어 나와서 온몸의 모세혈관을 가득 채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물을 떨구듯이, 게눈에 거품이 끓듯이 조금씩 조금씩, 겨우겨우 몸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런 날 나는 대낮에도 커튼을 닫고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 종일 혼자 누워 있었다. (234쪽)




‘언니의 폐경’속 자매들은 무력하다. 그녀들의 나약과 순응과 고요는 불편하다. 남자는 인간으로서 납득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여자여야 하는 한계와 현실은 피해망상일까. 미루다가 맨 마지막에 읽은 이유다. 그리고 숙제다. 인간으로서 공감할만한 응원하고 지양할 여자를 만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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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꽃이 드디어 피었다. 새끼손가락 한마디만한 봉오리가 진흙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순간부터, 날마다 들여다보고 또 보는데, 그 감질 맛이란.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랄까. 하긴 꽃뿐이 아니라 잎도 마찬가지다. 뾰족한 잎 끝이 보이는 순간부터 돌돌 말린 잎을 물 위에 꼿꼿이 세우고 있다가 서서히 잎을 펼치는 과정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바라보는 것은 감동 그 자체다. 또, 편하게 누울 자리를 찾아서 줄기를 뻗치다가 물 위에 납작 눕거나 허공에 서 있을 때, 그 반들반들 윤이 나는 짙은 초록의 잎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타인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팔불출의 짓이다. 꽃은 이른 아침 노란 속살을 내보이다가 점심이 지나면서 꽃잎을 하나둘씩 오므리기 시작하고, 급기야 저녁이 오면 봉오리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고, 그 봉오리가 연잎 밑으로 숨었을 때 또 감탄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연꽃이 피었노라 자랑하고 구경 오는 사람마다 작은 즐거움을 나눠준 것도 착한 일이라면 착한 일일지. 이 동네에서 기르는 연꽃은 실상 두어 달 전에 이미  피고 졌다. 그러니 이 아인 귀염을 독차지하는 늦둥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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