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던 마지나타 삽목을 하다. 온갖 방법을 다 써도 화분에 박힌 뿌리가 빠지질 않아서 힘을 콱 줬더니 뿌지직, 뿌리가 끊어지는 듯한...... 뭉텅 잘려진 뿌리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이다. 이왕 끊어진 거 잊는 게 상책이다. 새로운 화분에 옮겨 심고 흙을 채우고 물을 준 다음 그늘에 고이 모셨다. 부디, 건강히 살아다오.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키 큰 가지 중 하나를 중간쯤에서 뚝 잘라 삽목용으로 준비해 둔 모래에 심다. 자른 가지에서 중간을 또 잘라 도합 두개를 삽목한 셈이다. 무성한 이파리도 싹둑 잘라주다., 물꽂이도 고민했지만 일단은 삽목부터다. 실패하면 또 하나의 가지를 잘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뿌리쪽에서 올라온 가지가 보험용으로 남는다.^^;; 앞으로 일주일이 고비라는데 어떻게 기다리지?  아직까지 분갈이에서 크게 실패한 적은 없다가 아니라 있구나. 작년 겨울 포인세티아가 결국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죽었다. 시기가 문제였고 잦은 자리 이동도 나빴고 지나친 관심도 죽음에 일조했다. 사람에게나 식물에게나 적당한 무관심과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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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워놓은 적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예정에도 의도에도 없던 그냥 그렇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보니 잠시 잊었다랄까.  까맣게 잊을 정도는 아니지만 잊은 척에 가까운 방임이다. 유쾌하게 살지는 못했다. 행복했다라고도 말하기가 껄끄럽다. 불행과 행복의 중간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별일도 없이 이렇게 오랜시간을 무얼하고 살았던 건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서 어쩔수가 없었다고 한다면 믿을라나. 헛헛한 웃음이 나는 걸 보면 아닐거다. 오늘, 갑작스런 변덕은 맥주 한캔의 마법이다. J가 사온 라이트맥주가 어찌나 부드럽게 목안으로 빨려들어가는지 간만에 마신 술맛에 뿅 갔다. 술, 거의 안마신다. 거의, 아주가 아닌 거의. 때때로 기분에 따라서는 맛나게 들이키거나  홀짝거리지만 어지간해서는 즐기지 않는 것이 술인데, 이 술이란 것에 약간의 의도된 심리적 거부반응이 있어서다. 할아버지가 술을 즐기시다 술 장사도 하셨고 술 주정도 상식 이하였고, 젤 큰 아버지도 술만 들어가면 주사가 장난이 아니셨고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의 전부는 술에 의해서였고(술만 아니면 천하의 둘도없는 호인), 그래서인지 거나하게 취해서 말실수하는 사람과는 상종을 하기가 싫었고 취해서 붉어진 사람 얼굴도 무진장 싫어하고(그러면서 술만 들어가면 빨개지는 얼굴의 소유자면서), 암튼 술과 나는 악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셈이다. 집안이 주당이다보니 작정하면 제법 마신다는 것도 사실 슬프다. 술만큼 멋진 벗도 없다는 데 동의하기에 빌어먹을 나의 선입견이 애달프다. 그러나 어쩌랴. 늘 싫다가도 때때로는 근사해 보이는 걸로 위안삼아야지.  

어떻게 사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지요가 정답이다. 그저 그뿐.  


괭이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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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141쪽) 

 

청춘, 이라고 읽고 쓰는 순간마저 살이 떨리는 듯, 그것은 온몸과 마음을 감전시킨다. 그 시절, 푸르른 한철에는 감당하기에도 벅차 헉헉 거리고, 도망치거나 숨거나 외면하거나 하나였다. 그런데 오묘하게도 이제 나이 마흔에 이르러 심장이 뛴다. 가슴을 망치로 치는 것처럼 아프거나 멍이 들지 않고 순수하게 설레고 즐겁다. 원래가 청춘은 지나온 후의 그리움으로 쓰여 지는 건가. 그래선 가.


'청춘의 문장들'을 새해 첫 날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다. 김연수는 젊고 잘생긴  작가다. 책 표지 안쪽의 남정네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실, 책에 박히는 작가들의 사진을 그닥 좋아하진 않았다. 이런저런 매체에서 만나는 사진이라면 모를까, 혹은 이미 죽은 이의 흑백사진이라면 모를까. 그랬는데, 날카로운 콧대가 두드러진 작가의 사진을 읽기 전과 읽는 중과 읽은 후에 아주 자세히 바라봤다. 이전에 김연수란 작가는 두 권의 소설로 기억한다. 옛날 옛적에 읽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와  근자에 읽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다. 앞에 건 10여년도 더 전에 읽어 기억은 안 나지만 재미와는 무관한 지루하고 골치  아픈 소설로 기억된다. 뒤에 건 한번으로 읽은 척하기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야지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소설을 다시 읽을 요량으로 고이 보관하기는 그리 흔치 않다. 한사람의 작가를 소설 두 개로 얼마나 알 수 있나. 좀 더 어렸다면 적극적으로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다녔겠지만 이제는 그것도 시들하다. 단지, 이렇게 우연으로 만나지기 전엔 깊게 관심 갖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폭삭 늙었다는 증거다. 


사실 ‘청춘의 문장들’은 별 생각 없이 골랐다. 반드시나 기필코  와는 관계없이, 요즘은 소설 읽기가 겁이 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산문집이 진도도 나가고 딱딱하고 번잡한 정신을 유연케 하는지라. 소설이 읽히지 않는 건 부끄럽게도 게으름 탓인데, 나 게으르다고 인정하기는 싫은 거다. 두어 권짜리 장편소설을 완독하는 데는 열정과 몰입의 시간이 필수다. 안 만드는 건지 없는 건지 하여튼 모르겠지만 당분간 소설은 금할 테다.


작가의 성장기와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유려한 문체로 그려지는 이 책은 아주 멋지다. 사적으로 마음산책이란 출판사의 책들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디자인과 표지의 색도 흡족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구김이나 접혀지지 않게 다룰 정도다. 빳빳한 그린 톤의 속지도 맘에 든다. 염소처럼 종이를 먹을 수 있다면 야금야금 아껴서 먹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렇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자세, 직업이 된 작가로서의 피나는 노력들에 두 손이 모아진다. 한때는 모든 작가들은 천재라고 믿었었다. 펜만 들면 술술 빈종이가 채워지는. 작가들의 소설만을 보면 착각할 수도 있다. 허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같은 창작론류 류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마법의 펜 따위는 없음을 알았다. 글쓰기는 피를 토하는 처절한 노동임을 안다. '청춘의 문장들'이란 책의 가치는 김연수의 사적인 일상과 추억과 기억의 보물창고이기도 하지만 그의 소설이 어떤 기초에서 쓰여졌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쉽게 무심히 휘리릭 읽어치우고 집어던지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한다. 물론 소설 중에는 함량미달의 일회용도 부지기수다. 내용과는 무관하게 모든 책을 그러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나의 청춘에 대한 기억은 고통과 환멸과 비루하고도 비루한 이 삶의 끝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매사 비관주의자에 가까웠기에 하루하루가 지겹고 지루해서 그 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나이 30세를 지나 40세가 되리라곤 꿈도 안 꿨다. 그런데 모든 건 지나가더라.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도 그런 시절이 있노라고 회고하더라. 작가 김연수의 청춘은 날줄과 씨줄로 엮여 그의 소설 속에서 빛나는 문장들로 재탄생될 것임을 안다. 그것이 이 책의 존재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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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젖은 길은 이내 말라버리곤 했지만, 나는 그 길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길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 나 역시 그 밭의 채소들처럼 할아버지의 발소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반 통의 물을 잃어버린 그 발소리를.  (28쪽)   

 

몸이 불편한 할어버지가 물을 길어 채소밭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시인의 시선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읽는 동안 마음이 울렁거린다. 자박자박 느리게 걷듯이 읽기에 좋다. 가는 한해를 무심히 바라보며 내가 뱉은 일그러진 비틀린 말들이 잊혀지기를.   

 

산사의 고요한 종소리 같은. 내 손에 들린 것은 투명한 비닐로 깔끔히 커버를 씌운 헌책이다. 이전 주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을, 그럼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중고시장에 팔려나오게 됐는지. 허긴 영원한 사랑의 맹세는 책에 관해서도 의미가 퇴색하더라. 목숨이라도 줄 듯 품던 것들도 세월과 함께 정리될 품목으로 분류한 게 엊그제니까. 이사 다니면서 악착같이 챙겼던 많은 책들이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이유로,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묵은 먼지와 함께 재활용 되거나 팔려갔으니. 요즘은 사실 새 책을 사서 꽂는 일보다 묵은 책을 골라내는 횟수가 더 많다.  혼잣말로 나이 탓을 해가며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아 났음을 자축하며.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금의 비워가기 이후는 무엇이 올까.

눈 내리는 회색 하늘과 마주선 창가에 작은 화분 두 개가 있다. 로즈마리의 푸르른 잎에게 인사를 건네며 하루가 시작되고 끝난다. 다양한 화초들과 인연을 맺은 한해였다. 난생 처음이었다. 진지하고 바른 자세로 마주한 식물과의 교감은. 벌써부터 봄 여름 가을 화단에 심을 씨앗을 생각하며 설렌다. 이것도 지나가는 한때라고들 하지만 이런 한때가 있는 삶이 싫지 않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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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모닥불 피워놓고 앉아서 노는 중이다. 쫀디기(?)도 구워먹었다. 불장난은 어려서도 커서도 재미나다. 하루 한번 바깥 외출이 필요한 할머니를 위한 모닥불 피우기는 아른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아궁이에 불을 때던 기억이랄지, 집안 대소사에 마당에 피운 불이랄지. 고구마 및 감자는 귀찮아서 굽지 않았다. 구워 달라는 걸 안된다고 함. 결과물에 비해 과정이 보통 번거롭지 않다. 대신 쫀디기로 만족한 듯.     

 아이들의 성장은 눈부시나 대가없는 성장은 없는 법. 그 성장통은 고스란히 이 아이들의 몫. 한뼘씩 자라있는 아이가 애달파 혼자 삭힌다. 그래서 간절히 고통없이 시련없이 곱디 곱게 어른이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최소한 너희들의 아주 작은 상처라도 호호 불어주는 그런 사람, 가족이 되어 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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