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그 열 살짜리 말라깽이 소녀가 이토록 오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방과후에 다가와 내손을 잡았다. 그 사이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뿐이다.

하지만 아오마메는 그때 그의 일부를 가져가버린 모양이다. 마음이나 몸의 일부를. 그리고 그 대신 그녀의 마음 혹은 몸의 일부를 덴고 안에 남기고 갔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런 중요한 주고받음이 이루어졌다. (BOOK2,110페이지)

 

디킨즈의 소설에 나오는 고아들처럼. 상처받은 영혼이 상처받은 또 다른 영혼에게 끌리듯이 그렇게 무심코 다가갔던 소년과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스침과도 같은 마주침의 기억이 영혼에 각인되었다. 삶의 목적이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될 만큼의 무게감이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도록 재미있다. 아주 빠르게 읽힌다. 무섭고도 두려워서 타본 적 없는 롤러코스터가 이럴까. 흥미와 스릴, 연민과 안타까움, 조바심과 기대치의 카타르시스가 마치 내면에서 폭발하는 듯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들이 언제쯤 어떻게 만나질까 하는 당연한 기대는 나뿐일까. 이 소설에 빠져든 사람 전부가 아마도 똑같은 예상과 추측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이 비극의 전조라는 것도 짐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 평범해져 버리니까. 
 

후카에리는 부서질 듯 연약한, 매혹적인 이미지에 반하여 실제는 팜므파탈적이다.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녀의 ‘자각’으로 인해 시작되었으므로. 아버지, 후카다가 리시버가 된 것도 그로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던져진 것도, 의지와는 무관하게 십대의 어린 소녀들과 성관계(다의적인 교접)를 가지게 된 것도 그리하여 아오마메로 하여금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모두 시작은 후카에리였다. 그녀는 아오마메가 간절히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지 못했던 사람(혹은 사랑)도 아주 쉽게 갖는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선한 눈망울로 응시하면서. 한 세계를 깨웠고 그 세계에 반하여 도피하여 ‘공기번데기’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아 대항마를 세운 장본인이다.

 

내 의문은 새로운 리시버가 된 덴고의 역할이다. 그는 첫 번째 리시버였던 후카다와 다른 역할인가. 죽음에 이르러 공기 번데기가 된 아오마메를 과연 구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까. 후카에리는 선일까 악일까.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게야. (book2,289p) 
 

아오마메, 나는 반드시 너를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건, 그곳이 어떤 세계이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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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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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석 손이 가서 읽어지는 책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제목만을 읽고는 지나쳤다.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딱히 읽을 게 없기도 했지만) 읽고 말았다. 역시나 눈물 콧물 징징 흘리고 아침에 눈이 퉁퉁 부은 눈을 얼음으로 찜질하는 사태 발생했지만, 오랜만의 만족스런 책읽기였다. 냉동실 구석, 무척 오래된 청국장 한 덩이를 발견해 끓여놓고는 그 여전한 맛에 새삼 놀라는 기분이랄지. 암튼, 제목 타령에 대한 변을 하자면 ‘엄마’라는 단어가 세상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원천은 아니라는 거다. 모정의 축복이 비처럼 내리기도 하지만, 에누리도 없이 가혹하게 버림받는 경우도 있고, 극단적인 좋은 엄마가 절반이면 나머지 절반의 나쁜 엄마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그리운 사람들이 읽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서 뒤늦게 그런 ‘엄마’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읽을 수도 있다는 뭐 그렇고 그런 넋두리인 셈이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의 자리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소풍 때도, 장에 가는 날도, 논일 밭일을 하던 아스라한 기억 속에도 온통 할머니 뿐, 어디에도 엄마는 없었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당사자인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없으니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고로 내게 ‘엄마’라는 호칭은 낯설음이다. 부르기 위해 있는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무런 감동도 여운도 느껴지질 않는 글자다. 자라면서 내 엄마가 보통의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깨달음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다르다는 건 그게 무엇이든 행복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련하고 노련한 언어의 연금술사가 빚어놓은 ‘엄마’가 참 부러웠다. ‘엄마’의 고통스런 세월에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탐났다. 내 눈물은 그녀가 가여워서이기도 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소설가라는 예술가가 빚어놓은 ‘엄마’는 전설 속의 영웅이나 다를 바 없다. 동경하고 원하고 탐이 나지만, 소망일뿐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타인이 것을 향한 시기심, 질투, 분노로 인한 외면이 이 책에 대한 솔직한 평가다. 물론 ‘엄마’에 버금가는 할머니가 계셨고, 그걸 자랑스러워했고, 아직도 최고라고 믿지만 마음 구석에는 빈자리가 있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소설은 시작한다. 길을 잃으신 할머니가 파출소에 계시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어느 날의 저녁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할머니를 잡고 엉엉 울었던 기막힌 기억. 그렇게 몇 번이나 할머니는 길을 잃고 해매셨다. 그게 치매의 시작인줄 그때는 몰랐다. 소설 속 ‘엄마’에 버금가는 할머니의 굴곡진 삶은 내게도 우산처럼 드리워져 영향을 미쳤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두 아들을 잃는 고통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눈으로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소설 같은 얘기들을 인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다. 이제는 귀도 눈도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할머니께 이 소설을 읽어드려야겠다. 여기 할머니처럼 산 ‘엄마’ 이야기가 있노라고. 할머니처럼 그녀도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고, 후회하고, 원망하고,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고통에 사무쳤노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엄마를 부르며 엄마와 살았던 집으로 돌아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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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 에도시대 약재상연속살인사건 샤바케 1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기대하고 상상했던 딱 그만큼의 이야기다. 귀엽고 병약하고 착한 도련님과 무척 힘센 두 요괴가 일단은 주인공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이지만 뭐 어떤가. 재미를 우선으로 추구하는 인간인지라 비슷하거나 닮은 건 오히려 실보다는 득이다. ‘백귀야행’이라는 만화의 열혈 팬으로 감질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쉬워 한숨(?)이 절로난다면 두말이 필요 없다. 

 

사랑스러운 도련님을 보필하는 요괴에게는 반드시 여느 요괴와는 다른 숨은 능력이 있게 마련. 사스케와 니키치도 그런 존재들이다. 인자하고 다정한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엄한 아버지가 되어 거짓말을 하는 도련님을 나무라지만, 첫째도 둘째도 도련님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고 보필하는 대요괴들의 충직함은 살짝 놀랍다. 이치타로의 탄생에 얽힌 비화가 드러나는 본문을 읽은 후 납득하게 되었지만 ‘사람도 요괴도 아닌, 기묘하게 생긴 생물’같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한 할아버지의 안배가 두 요괴의 존재이유였다. 또한, 거기에는 손자를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야했던 비극적이고 놀라운 가족사가 숨어있기도 하다. 꼭 그래야했을 지는 무의미한 의문이다. 그것은 엄마라는 존재의 슬픈 염원이니까. 지독히도 아이를 원하는 저주에 가까운.

 

공포영화나 귀신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요괴가 난무하는 세계를 동경하고 상상하는 이유는 친근함 때문이다. 주변의 오래된 사물에 깃든 이런 저런 요괴의 일상을 받아들이는 건 복수와 원한의 산물인 토속적인 귀신들과 조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반쪽요괴가 된 먹줄통의 원한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우리의 도련님이 병약한 몸을 이끌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무시무시한 공포와는 거리가 먼 연민과 동정이 앞선다. 백 년을 채워 겨우 요괴로서의 영생을 얻으려는 찰나 안타깝게도 먹줄통이 깨졌다. 완전한 요괴가 되고자하는 먹줄통의 집념이 잔혹한 살인을 불렀지만, 그것도 반혼향을 얻어 죽은 혼조차 살려낸 누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도련님의 의연함에 깃들인 사유의 조각에는 그런 깨달음이 깃들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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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다가 이제 겨우 일어났다. 그 뉴스를 보고 듣던 날은 이미 몸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앓아 눕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몸이 그리고 마음이 사정없이 떨렸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가 감상적인 인간이고 소소한 일에도 우는 일이 다반사라서 내 눈물에 내가 취한 것 뿐이라고 둘러대도 멈추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원없이 울고 또 울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여.  

신기하게도 마지막까지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것은 정치가, 대통령으로서의 그가 아닌 아닌 소탈한 시골 할아버지로 돌아가서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의 말들이 진실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안다고 이제와 말한들 무엇하랴. 살아서 들었다면 좋았을 응원이고 지지일텐데. 정치에 대한 습관적 무관심과 나태가 새삼 부끄럽다. 삶도 죽음의 자연의 일부라는 말에 공감한다. 죽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니 애통하지 말라는 의미리라. 사실 죽음만큼 숭고하고 순결한 의사결정방식도 없지 않던가. 고뇌의 사슬을 단호히 끊을 수 있는 결단도 어쩌면 그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믿을까 말까 의구심을 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결백이라는 신뢰라는 도장이 박혔다. 마음 아픔과는 별개로 가슴이 후련한 건 나뿐일까.  

그럼에도 살아서 보여줄 수 있었던 그의 다른 삶을 상상하면 아쉽고도 안타깝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았다. 그의 스케치북에 미완으로 남았을 그림들이 정녕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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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은 마당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막 움트는 싹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는 거다. 일일초는 도무지 떡잎이 나온 이후로 변화가 없어 애를 태우더니 본잎이 아주 조그맣게 움트고 나오려 해서 마음이 놓인다. 얘가 느리다는 건 작년 여름에 진작 알았지만 그땐 어느정도 자란 아이를 옮겨심기 한 거였고 올핸 직접 씨앗을 뿌린 거라 기다림이 더 지루하다. 기껏 두 해째지만 느려도 이렇게 느린 애는 처음이다. 대신 기다림만큼 튼실하고 매끈하게 자라주므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이미 흐드러진 꽃을 보여주는 건 사랑초와 로사캠피온. 로사는 햇수로 삼 년 만에 꽃대를 올린 것이다. 5월 초에 얻어 심었던 홍화는 모양이 영 시원찮다. 예쁜 꽃을 보려면 화분에 옮겨심어 집중 관리를 해야할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제대로된 성장이 어렵다. 키만 삐죽 커서 비가 오면 드러눕기 일쑤다. 역시 땅이 부족하구나. 아무리 늘려도 부족한 화분은 또 어쩌구. 이미 마당을 가득 채울인데도 어째 해가 갈수록 더 부족하다. 오며가며 동네 어른들이 주시는 새로운 종류의 화초들을 욕심껏 다 길러보겠다는 의욕이 앞서서다.  

뒷집에서 줘서 뭔지도 모르고 심었던 게 맥문동이란다. 보라색 꽃을 피우고 추위와 건조에 강한 풀이다. 키가 제법 크게 자라는 거란다. 올해는 두고 보다가 내년 봄엔 담벼락 쪽으로 옮겨심을까. 문제는 세를 확장한 초롱꽃들이다. 초봄에 파릇하게 자라는게 기특해서 방치했더니 군락을 이루어 무섭게 성장중이다. 작년에 키도 작고 포기도 작고 가지도 갸날펐는데, 이파리 하나가 딱 작년의 세 배다. 베어버리라고 하는데 자그만 새싹부터 오매불망 봐와서 그런지 그렇게 쉽게 베거나 뽑을 수가 없다.  화초기르기의 가장 어려운 점은 죽이고 살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한다는 거다. 장소는 한정되고 개체수는 많고, 튼실하게 적게 키울 것인가. 약하게 많이 키울 것인가. 마음이 약한 건지 욕심이 과한 건지 도무지 햇갈릴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사실 이것도 요령이고 경험이다. 농사의 달인인 엄마를 보면 그냥 휙 휙 가차없이 뽑아 던지잖는가. 난 어쩔수 없는 초보다.  

희소식들. 올봄 옮겨심은 연산홍도 드디어 꽃을 맺었고. 부레옥잠이 새끼를 치기 시작했다(겨우내 봄내 눈 빠지는 줄 알았다). 고맙다.      

  길모퉁이 집에 사시는 아주머니댁 초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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