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거나 잊힐까봐 전에 핸폰으로 찍은 올 여름의 낙들.



연과 개구리밥 일명 부평초. 얘네들은 어느날 갑자기 하나씩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그릇 가득이다.



 

 

 

 

 

 

부레옥잠과 개구리밥. 분양을 해도해도 쑥쑥 자라 금새 그릇을 채운다. 그런데 다른 집으로 분가한 녀석들은 영 시원찮다. 그릇의 크기와 흙과 물의 양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작년. 화분에 키울 땐 딱 두송이 피었다. 올핸, 땅 기운을 받아 한꺼번에 두 개, 세 개씩 마구 꽃대가 올라온다. 공간에 따라 무지막지하게 자랄 수 있는 꽃이다. 엔젤 트럼펫 일명 다투라.



 

 

 

 

 

 

이름을 모른다. 씨를 준 분도 모른다고 하고. 



무슨 꽃이 필까. 기대기대 하였더니. 저게 끝이란다. 위에서 보면 잎에 흰색의 테두리가 있어 보기에는 좋다. 자잘한 흰꽃은 너무 작아 한참을 찾아야 한다. 역시 이름은 모르겠다.  

 



 

 

 

 

 

 

 

이웃에서 조금씩 나눠 준 것들. 공작, 게발선인장을 비롯 다육식물인 화월 등. 선인장이 관리가 쉽다고는 하나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젤 어렵다. 목이 마른지, 고픈지, 아픈지 뿌리를 보기 전엔 알 수가 없으니. 도통 말이 없는 무심한 녀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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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7-24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젤 트럼펫 옆에 있는 붉은꽃은 사진이 작아서 확인이 잘 안되네요.
유홍초 종류인것 같은데 그 옆에 있는 잎을 봐선 '새깃 유홍초' 같기도 하고
아님 '둥근잎 유홍초'일 것도 같고. 잎이 어떤 모양이에요?

아래 흰 태두리가 있고 작은 꽃은 '설악초'입니다. 꽃이 피면서 점점 잎에 흰 테두리가 커집니다.
나중에는 가운데만 초록선이 남고 잎 전체가 하얗게 되죠. 원산지는 미국이고 독성이 있으므로 만지심 안되요.

겨울 2008-08-0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악초였군요. 볼수록 신기한 화초입니다. 하긴 지금 제겐 모든 꽃과 풀이 다 신기하기만 합니다. 오랜 세월 보아왔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에게 비로서 이름을 불러주는 감격이랄까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니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싯구절처럼요.

잎이 둥근 나팔꽃을 닮은 꽃은 거리에 조경용으로 심는 거라는데요. 꽃색이 보라, 자주, 분홍, 흰색 등등 다양하고 때로는 흰색과 자주, 흰색과 보라, 등등 마구 섞인 꽃도 있어요. 늦은 인사지만 고맙습니다.^^
 

 

장맛비가 지나간 정원은 초토화가 된다. 쓰러지고 엎어지고 널브러진 꽃나무를 서둘러 일으켜 세우고 지지대를 만들어주고 쓸려간 흙을 돋아주느라 비가 쉬어가는 잠깐의 막간이 금쪽같다. 그놈의 개구리밥이 뭐라고. 행여 떠내려 갈 새라 연과 부레옥잠을 키우는 고무다라의 물도 연신 퍼내야 한다. 꽃대 하나가 뚝 부러져나간 백일홍이 내내 눈에 밟힌다. 소국과 분꽃은 노끈을 찾아 묶어준다. 화분에 심은 국화는 비가 들이치지 않은 곳으로 들인다.  비에 약한 선인장들과 제라늄, 마지나타와 행운목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대피 중이다. 목련나무는 으름덩굴이 무거운지 비바람에 기울어졌다. 무화과나무도 왼쪽으로 심하게 쏠렸다. 또, 비가 내린다. 순식간에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 쏟아진다. 해가 그립다.




식물을 키우는 건 아이 돌보는 일에 버금간다. 깊은 밤 빗소리에 깨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녀석들이 궁금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이 진짜 인줄 알았다. 식물과의 교감은 낯설고도 신기한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듯, 첫 만남, 설렘, 지속적인 관심, 쌓이는 정으로 맺는 결실, 꽃이나 열매의 수확. 그리고 씨를 받는 내년의 기약. 여러해살이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일년생들이 더 예쁜 이유는 시작과 끝이 분명해서다. 잠시라도 눈을 떼지 못하게 긴장시키는 은근한 매력 같은 게 있다. 강낭콩을 까다가 싹이 튼 녀석이 있어 화초고추 화분 구석에 묻었는데 하루 만에 잎이 나더니 잭의 콩나무처럼 쑥쑥 자란다. 옷걸이를 반듯하게 펴서 기둥을 만들어줬더니 곧장 몸을 말아 타기 시작한다. 신기해서 보고 또 보며 웃는다. 얘좀 보라고 자랑까지 한다. 팔불출.




이제부턴 비가 좋다는 입버릇은 쏙 들어갈 듯. 더불어 비오는 날 떨던 궁상도 사라질까. 사람의 취향이나 습성, 관계가 얼마나 쉽게 바뀔 수 있는지 체험하는 중이다. 이웃으로부터 사랑초와 스파디필룸을 나눠 받아, 오늘도 새 화분을 샀다. 시작은, 작은 땅에 몇 가지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당에는 올망졸망한 화분들이 일렬로 서기 시작했다. 타인의 정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바라보는 것도 새로 들인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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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의 번식력은 상상 이상이다. 며칠 사이 저 고무다라가 가득 찼다.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처음 올 때 모습이 뜬잎 2장이었던 연은 지금 다섯 장으로 늘었다. 선잎이 몇 개 나와줘야 꽃을 피운다는데...... 어떤 꽃을 피울까. 가정집에서 키우는 연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다른 종류라고 해서 사왔다는 앞집 거도 꽃 색깔만 다른 듯하다. 조만간 황토랑 마사토를 깔아줄 생각이다. 황토는 이끼 방지에 효과적이고 마사토는 물을 맑게 해 준단다.  



저녁밥 하러 갈 시간에 맞춰 핀다는 분꽃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가면 저 분꽃이 대문 앞에 만발했었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은 쌍처럼 붙어다닌다. 한량이었던 할아버진 꽃이며 나무는 정성스레 가꾸셨는데 정작 식구들의 밥벌이는 관심 밖이었다. 그 바쁜 농사철에도 바지 둥둥 걷어부치고 논에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술 드시고 주정하는 거랑 할머니께 호령하는 낙으로 사셨다. 하얀 바지저고리 입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그 모습이 난 부끄러웠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도 성장해서도 다감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할머니께 다행인건 그런 할아버지보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돌아가시기 전의 병수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할머니께서 더 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바랄나위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은 아직도 아쉽고 쓸쓸하고 죄송하다. 그래서 병중의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관심없었다. 고통스러웠는지 외로웠는지 정말 눈곱만큼의 연민도 일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여덟이나 되었던 자식들 누구나가 그랬으리라. 그럼에도 살아오신 날들의 업에 비하면 약과였던 말년이었다. 주변에선 다들 더 고생하시길 은근 바랬다는........... 청년시절 빨치산이었다는데, 그게 무슨 감투인가. 자의식만 강해서 마누라 자식들 고생만 죽어라 시켰지. 더불어 최악의 유전자를 물려주었고.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그것이다.  

이 동네에도 6.25때 인민군으로 내려와 정착한 할아버지가 한분 있다. 여든 가까운 나이에도 술만 들어가면 마누라에게 욕하고 때리고 동네방네 소리지르고, 피해의식인지 자격지심인지 자기 실수, 잘못을 죽어도 인정 못하는 인종이다. 술주정을 빌어 가족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거. 못나고 못난 인간의 전형이다. 아주머니와 무려 열살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것도 그가 성질 부리는 이유중의 하나인데, 병들고 늙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자기보다 젊은 마누라를 윽박지르는데서 해소하는 거, 오만정이 떨어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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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이랑 채송화다. 마당에 깔린 대리석을 빼낸 자리다. 백일홍은 옮겨 심은 거고 , 채송화는 작년에 떨어진 씨앗에서 살아남았다. 여러모로 쓸모있는 근사한 화분 대용이다. 얘네는 비교적 빨리 핀 경우고, 이제 막 올라오는 싹이 대부분이다. 봄에 흙갈이를 해주느라 대부분의 씨앗들이 묻혔는데 생각만큼 많이 올라오지 않아 속상했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녀석들이 기특하다. 그래서 오며가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 채송화야.


 

 돌이끼? 보면 볼수록 신기.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다른 화초에 묻어왔길레 심었더니 작고 앙징맞은 노란색과 자주색이 섞인 꽃이 핀다. 그 옆에는 코스모스. 꽃이 피기 전의 모양이 닮았다.  



무화과. 첫 결실이다.

부드럽고 단 과육이 할머니 입맛에 맞아 익을 날을 고대하고 있다. 산자락에 심었다는 시골의 무화과나무는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었다. 혹시나 해서 비니루를 둘둘 말아 씌운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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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떠올리면 애잔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할머니를 엄마인 듯 치마꼬리에 매달려 쫓아다닌 기억은 하찮다. 할머니에게 나는 그렇고 그런 손녀 중의 하나일 테니. 내 기억과 애증은 일방통행일 가능성이 크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힘들게 살던 때였고 아이들은 넷이나 되었다. 젊다 못해 어린 부모는 자격미달에 직무유기였고, 싸우거나 일하거나 딱히 나쁜 부모는 아니지만 바람직한 부모와도 거리가 멀었다. 모든 기억이 할머니로 통한다는 건 무관심과 방임에 가까운 부모를 대신한 할머니가 늘 가깝게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 할머니가 아프다. 아직은 할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고, 할머니를 필요로 하면 할수록 부재가 두렵다. 소풍도 목욕탕도 할머니를 따라서 갔구나. 처음 따라나선 새벽 감장도 우시장도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의 회초리에 맞고 울기도 했고, 그 등에 업혀 잠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의 존재를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그건 어쩌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무른 마음 탓일 수도 있고, 미처 성장하지 못한 나의 일부 때문일 수도 있다.




지인의 시아버지가 최근 요양원으로 모셔졌다. 집 문제, 며느리와의 소통, 기타 등등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나 라는 의문이 내내 들었다. 시어머니였으면 또 모르겠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중환자도 아닌, 단지 거동이 약간 불편한 정도의 노인을 굳이 이런저런 불편을 이유를 들어 다수의 아들 며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설로 보내야 하는가. 요양원에 방치된 수많은 늘고 병든 사람들을 보며 느낀 외로움과 서글픔은 유능한 의사가 있는 깨끗하고 좋은 시설이 환자가 아닌 보호자를 위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기심과 허울인 경우가 많다.




할머니와 나의 동거가 언제까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 젊음과 시간의 가치가 결코 할머니보다 우위는 아니라는 거. 내 바람은 하나. 할머니의 여생이 부디 고통 없이 평안하기를.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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