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의 한 여교수가 여교수 비율이 10%까지 올라갈 때까지 남녀 동등한 조건이라면 여교수를 채용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서울대 여학생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는데 비해 여교수의 비율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나마 여교수가 있는 곳은 간호대, 음대, 생활과학대 뿐이고, 공대, 법대, 경영대 등에는 아예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출판인은 " '여교수를 쓰면 불편하다' '여교수는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다' 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대학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차별'을 시정하라는 여교수들의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항변이라 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였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이를 군대식 문화와 연결지어 생각해보았다. '군대식 문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을 여러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모아 한가지로 요약한다면 '상하 명령과 복종의 문화' 라고 할 수 있겠다. 군대내에서는 계급이 낮은 사람에게는 계급이 높은 사람의 명령 앞에서 어떠한 개인적 의견이나 소신을 피력하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 국가는 군대의 창설시기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징병제! 대한민국의 모든 신체건강한 남성은 최소 2년 2개월동안 군에 복무해야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물론 편법을 동원해 알게 모르게 빠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우리 국가가 정하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일년에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죽어나가고 있다. 그것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간에 상관없이-만일 그것이 자살이라 해도 사회에서 멀쩡하던 한 젊은이가 '군대'에 들어갔다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군대'내부의 책임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필자는 여기서 의문사 문제를 들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군대의 개인의 인권이나 사상적 자유, 견해나 의견을 무시하는 작태, 오로지 명령과 복종의 관계만이 성립되는 그곳에서 최소 2년 2개월을 경험하고 사회에 나온 '교육된' 남성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는 과연 어떨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여권이 신장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지극히 남성중심의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고, 대부분의 사회 여러 분야를 남성이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발붙이기가 힘들다. 그것은 이미 '군대'를 통해 '교육된' 조직에 순응하고 명령과 복종에 익숙한 남성들이 사회 여러분야의 우두머리로 자리잡고, 그의 휘하에는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잘 부릴 수 있는 사람만을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군대'에서 '교육받은' 자기들끼리의 세상을 만들으려는 것이다.

대학사회 또한 남성들이 우두머리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사회와 총장이 휘하 교수들을 마음대로 부리며 조직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여성'교수 보다는 '남성'교수를 채용하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80년대 서울대의 여학생 비율은 20%가 될까말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30%까지 급증했고 올해는 37%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학생이 이렇게 많이 늘어나는 동안 서울대 여교수의 비율은 전체 교수 1,487명 중 겨우 104명으로 7%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그만큼 능력있는 여성박사가 없다는 말 아니겠느냐 라고 항변하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전국 162개 대학의 여학생이 36.25%이고, 석박사 과정의 학생은 37.68%라고 하니 그러한 주장은 37.68%의 여학생들이 모두 바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여교수의 비율이 이토록 낮은 것은 왜인가? (물론 이것은 서울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앞서 필자가 언급했듯 서울대의 수장들이 부리기 편한 '남성'들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인은 그것 뿐이다. 따라서 이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남성들에게 '교육된' 군대식 사고방식과 문화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제거하는가? 그것은 후에 필자가 다른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너무 논의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서는 문제점만을 파악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필자의 주장에 근거해 필자는 서울대 한 여교수의 그러한 주장을 적극 지지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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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가 자라서 사리를 분별하게 되면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말은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절기가 여름인지 가을인지를 제대로 알아서 더 이상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어린이는 철이 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때를 알아야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수한의 <역사에세이>에서 참고)

우리는 아직 군대갔다오지 않은 자유분방하고 혈기왕성한 진보적 성향을 띠며 사회비판을 하는 남성에 대해 군대갔다오면 철이 들거라는 말을 한다. 이는 군대갔다온 사람이라면 나이 많은 어른이든 갓 제대한 예비역이든 그 연령대를 초월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철이 든다'는 의미는 위에서 말한 철이 든다는 의미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떻게 다를까?

자유분방하고 혈기왕성하여 사회에 비판을 가하는 군미필자의 남성에게 군대갔다오면 '철이 든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네가 지금 그렇게 자유롭게 사회를 비판하고 그러는 것도 다 한때다, 군대갔다오면 다 달라진다 라는 식의 의미가 담겨있다. 즉 다시 풀어 이야기하면 군대가서 군대의 상하 조직문화와 명령과 복종체계를 몸으로 익히고 나오면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비로소 '철이 들었다'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이 든다'의 본래 의미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 같지 않은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 나아가 사리판단을 하는 것을 '철이 든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보다 그냥 조직에 따르고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이 말을 사용하니 이 말이 그 본래의 의미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어떤 사람에게 군대갔다오면 철이 들거라고 말하는 그 화자 본인이 '철이 들어야'하는 것이고, 그가 지칭했던 청자는 반대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화자에게 "넌 철이 들어야해"라고 말하는 것이 '철이 든다'의 본래 의미를 생각할 때 더 바람직할 것이다.

앞으로 누군가 당신에게 "군대갔다오면 철 들겠지" "군대갔다오고 철 들어야지"라고 말한다면 '철이 든다'는 것의 본래 의미를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당신도 그들에게 한 마디 하라. "너나 철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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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다.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고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사고영역을 넓게, 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준비를 위해서는 철학, 국문학,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 3총사가 필수적이다. 사고의 넓이, 깊이를 기르는데는 철학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그것을 말과 글로써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논리학(철학의 한 요소)과 국문학 만한 것이 없다. 말과 글에 있어 철학은 논리를 제공하고, 국문학은 올바른 단어사용이나 문장구조 등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또한 이러한 형식적인 준비가 끝났다면 세상을 바라보기에 앞서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역사학이다. 역사학은 세계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서술하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를 예상케해주는 학문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토대가 세워졌다면 그 다음은 정치학과 사회학이다. 정치학과 사회학은 이러한 기초 위에 살을 붙여준다. 사회와 정치는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세상을 바르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이고 정치인 것이다. 우리는 이 엇나가는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기초적인 토대로서 세운 철학, 국문학, 역사학과 같은 학문들로 현실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면 되는 것이다.

한가지 또 덧붙이고 싶은 것은 법학인데, 사실 우리사회에 있어 법은 기득권자, 권력을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법의 근본적인 취지는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지만 사소한 영역으로 들어서면 그것은 권력을 지키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법은 현실을 다스리는 기준으로서 작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철학, 사학, 국문학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될 것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법으로 하자, 법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하지만 법 이전에 법을 형성하게 한 더 근본적인 철학과 역사가 있는 것이다. 법의 가장 기초적인 자유, 평등, 인권과 같은 개념은 본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다. 법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규준임에는 틀림없으나 법의 이념을 지킬 때에만 그러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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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이 나 모르게 나의 습관이나 행동양식 등을 따라하는 것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싫어한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하려고 하지 않고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예외로 하고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아는 어떤 사람이 나의 행동이나 습관, 흔적들을 보고서 그것을 익히고 따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내 나름대로 필기를 하고 체크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남이 내 방식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따라하면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공부를 해오며 습득해온 나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자기 습관을 익히면 될터인데 나를 따라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지금과 같은 나의 글쓰기 방식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매우 불쾌할 것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방식이 있을텐데 남의 것을 왜 따라하느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그럼 넌 남의 방식 따라한 적 없느냐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어떤 분야에 미숙해 양해를 구하고 그들의 것을 배우거나 따라한 일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정말 그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 '모름'을 인정하고 행한 일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내가 나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모르기 때문에 배우겠다는 것, 따라하겠다는 것과 자신이 그것을 처음부터 사용한 것인양 행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후자의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속였고 남을 속였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라. 미숙하면 미숙하다 인정하라. 그렇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배우고, 모방하고, 가져오겠다면 그 누구든 그를 따뜻이 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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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우리사회의 논객들 각각은 그 나름대로의 글쓰기의 스타일이 있다. 강준만 교수 같은 경우는 글을 거침없이 쓰면서도 모든 사람이 알아듣도록 쉽게 쓰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어떤가? 나는 글을 쓸 때 어떻게 쓰는가? 어렵게 쓰는가? 쉽게 쓰는가? 내가 글을 어려우면서도 쉽게 쓰려고 한다. 무슨 이상한 논리냐 할지 모르지만 할 말을 다 하면서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려 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지식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다음에 내가 쓸 글에서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생경한 용어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이 쉽게 쓴다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논리적인 글은 사람들이 읽기에 한눈에 들어오는 글을 말한다. 거기에는 함정이 없다. 그냥 읽으면 바로 들어올 뿐이다. 그런면에서 논리적인 글은 쉬운 글이다.  

전에 나는 내 글쓰기 방식을 자유연상식 글쓰기라고 한 적이 있다. 즉 붓가는대로, 키보드위에 손가는대로 쓰는 글이란 말이다. 어떤 것을 쓰다가 다른 것이 생각나면 거기에 연관시켜 또 쓰고, 또 쓰다 다른 것이 생각나면 또 연관시켜 또 쓰고...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선에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글쓰기의 단점은 쓰면서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고 지나갈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끊어줄 필요가 있다. 자유연상식 글쓰기는 독자가 읽기에 가장 편안한 글쓰기다. 그냥 따라오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실을 가지고 미궁속으로 들어갔다가 실을 따라 미궁을 빠져나오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다. 그럼 내 글은 쉬운글? 어려운글?
결론은 쉬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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