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글쓰시는 것 좋아하나봐요?"

이에 대해 난 이렇게 답했다.

"네. 글쓰는 거 좋아해요. 가급적 경험한 모든 것을 글로 남기려고 하죠."

이 짧은 대화는 내가 글쓰는 이유를 잘 말해준다.

최근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일본의 한 지식인의 책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한글번역제목)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는 지은이를 일컬어 "지적욕구가 강한"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평생을 글을 읽고 글을 쓰는데에 열중했다. 다른 어떤이들이 성욕이 강하고, 식욕이 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지욕이 강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어쩌면 그런 욕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어릴적부터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도 않았고 학창시절에도 교과서 이외에 읽은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나만큼 학창시절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책'이 아닌 '글'이다. 아직도 내게는 책 한권을 읽는 것이 힘들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읽음'의 대상이 '책'이 아닌 '글'이 되면 나도 많은 글을 읽었노라 말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 시절, 인터넷을 알고 채팅을 즐기며, 게시판에 글 남기기를 좋아하던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후 미친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기장'이라는 이름으로든, '사색노트'라는 이름으로든 뭘로 불려도 상관없다. 사르트르는 일기랍시고 썼지만 그의 '구토'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구토'를 고등학교 2학년때, 그리고 대학1학년때 읽기를 시도했다가 몇장 읽고는 포기했다. 그것은 일기 아닌 일기였다.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구체적 경험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글'이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내가 순간 생각한 것들, 내가 몸으로 체험한 것들, 나는 이 모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내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다. 내 고민이 묻어있고, 내 생각이 묻어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난 이 무형의 가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괜찮은 답변들이다. 이 하나하나가 모여서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를 찾아가는 하나의 작업인 것이다. 나는 이를 '경험의 문자화'라고 표현한다. 주변에 날아다니는 잡히지 않는 경험-그것을 '순간'이라 표현해도 좋다-을 '문자'라는 매개를 통해 언제나 내가 원하면 잡을 수 있는 경험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고찰(考察) : 상고하여 살피어 봄.
상고(相考) : 서로 비교하여 고찰함.

성찰(省察) : 반성하여 살핌.
반성(反省) : 1.자기의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그 선악,가부를 고찰함.
               2. 주체가 자기 자신을 관찰함.
               3.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함.

위의 기초적인 단어들을 국어사전을 통해 다시 살펴본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당신의 글은 "고찰은 있되, 성찰이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통해 그 낱말들이 뜻하는 바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전적 정의로서 '고찰'이라 함은 '비교하여 살펴봄' 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고, '성찰'이라 함은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펴봄'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무엇이 다른가?

비교하여 살핀다는 것과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핀다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핀다는 것은 비교하여 살핀다는 것보다 좀더 깊이있는 '살핌'이다. '비교하여 살핌'은 단순히 드러난 사태나 사건들을 토대로 하여 이들을 '비교'한다는 것이고,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살핌'은 드러난 사태나 사건이 아닌 그 본질에서부터 '살핌'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의 글은 과연 고찰만 있고, 성찰은 없는가? 내 글에는 다양한 형식의 글들이 있으니 그 글들의 범위를 좀더 좁힐 필요가 있다. 그 자체 일기형식의 글이나 단순 사건나열식의 글들은 빼기로 하자. 여기서 주를 삼고자 하는 것은 '나의 공격적 글쓰기'이다. 나의 공격적 글쓰기에는 고찰만 있고, 성찰은 없나? 지금까지 쓴 글을 떠올려보건대, 나의 글에 성찰이 깃들지 않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고자 한 것이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 것이므로 이러한 비판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지적에 대해 대꾸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해보려고 이 글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이나 '신독', '생각하다와 생각되다' 등의 글을 보면 성찰이 빠져있다고 할 수는 없다. '신독'이나 '생각하다와 생각되다' 등과 같이 미묘한 단어의 국어사전의 사전적 정의를 토대로 풀어내려 한 경우에도, 단순히 국어사전의 의미만을 전부로 삼지도 않았으며, 단어가 지닌 사전에 나와있지 않은 미묘한 차이점을 나름대로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의 글에서 '고찰'만 있고 '성찰'은 없다 는 비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혹여 내가 찾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그 점을 다시 구체적으로 지적해 무지한 나를 깨우쳐줬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전에 나는 어떤 글에선가 나의 글쓰기 방식을 '자유연상법'이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다. 자유연상법 이라 하면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문시간에 배운 바로 그 '자유연상법'이다. 나는 그것을 글쓰기에 도입한 것이다. 한 가지 단어나 주제를 모태로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막지 않고 그대로 적는다. 계속  글을 쓰다보면 한 단어나 주제를 통해 새로운 다른 단어나 주제가 머리속에 떠오르고 이것을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일괄된 맥락을 갖추며 계속해서 글을 쓴다. 한가지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나의 사유공간이 이동하면서 글이 완성된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글쓰기 방식의 내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이다. '자유연상법'을 글이 서술되는 내용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공격적 글쓰기'는 외형적인 측면이다.

나는 '공격적 글쓰기'를 즐긴다. 때로는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아 실제 내가 그 글에서 극단을 지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단인 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얼마전 썼던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남성조직의 여성차별이 군대문화임을 주장하며 그것만이 여성차별의 원인임을 주장했다. 사실 모든 우리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태에 대해서 거기에 한 가지 원인만이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은 무리다.그것은 누구나 안다. 나도 알고 있지만 나는 그 글에서 그렇게 단정지었다. 왜인가? 나의 글쓰기 방식이 극단적이고 공격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그 표현방식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외형상 극단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내용'또한 극단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 내가 쓴 글에 그렇게 나와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은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었지, 그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경험하고 난 후 나는 나의 공격적 글쓰기, 극단적 글쓰기 방식을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는 꼬투리를 잡으려 할 것이고, 나의 극단적 글쓰기에서는 그들이 내 꼬투리를 잡기가 쉬워진다. 따라서 그들이 내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고, 내 생각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형식논리학'적인 측면에서 완벽성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나의 글이 쓸데없는 비난 내지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그들의 머리속에 침투시키기 위해 외형을 좀더 다듬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주변에는 기독인들이 참 많다. 친한 사람들은 거의가 기독인들이다. 그것도 아주 독실한... 철학과여서 유난히 기독인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신학과 철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주변인들로부터 많은 설득을 받아왔다. 종교가 없는 나를 기독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부터 교회나 성당을 몇번 간적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금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20살이 되어서도 친구를 따라 한번 순복음교회를 갔지만 그날로 끝이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려기 보다는 종교에 기대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 눈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기독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리고 내가 기독교에 그다지 내키지 않는 까닭은 그들은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나 기타 등등의 사회적 참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 그것을 고치려하는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인들은 나름대로 선하고 건강하며 바람직한 삶을 살려고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다.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런 점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보신주의, 안정을 추구하고 변화에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이들에게는 이들은 오히려 반대의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친한 기독인 선배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잠깐 동안의 대화였지만 선배는 그런 기독인들도 있지만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기독인들도 있다는 말을 했다. 기독교가 그 내부에서도 워낙 다양한 시각들을 내포하고 있어 외견상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좌파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학생신학운동을 하는 에스에프씨라고 하면서... 이 잠깐 동안의 선배와의 대화는 기독교에 대한 일방적인 나의 관점을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독교를 갖겠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그런 관점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갖지 않겠다는 나의 신념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선배와의 대화는 나의 일방적 편견을 깨는데는 기여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기독인들이 보수 안정희구 세력이라는 인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은 기독인들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 많은 기독인들이 실제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어떤 교리에 기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땅에는 많은 기독인들이 있고 이들을 끌어안고 진보된 사회를 꿈꾸기 위해서는 이들의 사고방식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터넷이 우리생활에 깊숙히 파고들고 이제 인터넷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예쁜 편지지에 편지를 쓰기 보다는 이메일로 간단하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편리하고, 레포트를 쓰더라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더 편리하다. 심지어는 컴퓨터를 켜놓고 앞에 앉아있지 않으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인터넷은 또한 자유게시판을 통해 쌍방의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게시판을 통해 드러내고 이를 보고 그와 견해를 달리하는 다른 네티즌들은 또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터넷 게시판 사용은 자유로운 토론장으로 변모하기도 하며 새로운 토론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내 의견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해 누구보다도 이런 인터넷 자유게시판이나 토론장을 즐겨 찾게된다. 따라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내 의견을 인터넷에 올려놓기도 하며 내 의견에 반하는 다른 사람들의 '리플' 내지 '메일'을 받기도 한다. 그중 내가 어느 특정 집단의 민감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라도 하면 이들로부터 집단 공격을 받기도 한다. 물론 그 중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내 의견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절대적으로 높기라도 하면 내 의견에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공격을 모면하기 위해 본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개인 메일로 지지글을 보내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유게시판 상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이게 된다. 가운데 금을 긋고 한편에는 나 혼자, 한편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된다.

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 분노하며 이를 고쳐나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다. 일종의 '사회비평가' 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것인데, 이는 타인들로부터 '배척됨'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배척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들과 연대를 갖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들 '아웃사이더' 또한 사회의 소수임을 감안할 때 지극히 '혼자'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어찌보면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서 보면 그들이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간다는 점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외견상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면에서 철저하게 '혼자'이고 '아웃사이더'이며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