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육교 위나 지하철 계단에 앉아 도움을 청하는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IMF 이후로 이런 이들이 급증하다가 요새 다시 줄어드는 추세이다. 내가 집밖을 잘 나서지 않는 탓인지 모르지만 난 이들을 본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종로에 가면 어디에서든 이런 이들을 한 두 사람씩 꼭 만나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도와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그들 중에는 때론 정상인이면서 장애인인 척 하는 이들도 있기도 하다. 물론 사이비 들은 극히 드물다.

난 약자의 편에 서고 싶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싶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건네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항상 '마음만'으로 였다. 실제적으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준 적은 없다.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한편 나 또한 그리 부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부유함'을 누리고 있겠지만 내 입장에선 또 나보다 부유한 자들과 비교를 하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하고픈 많은 일들이 어느정도의 '부유함'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들이고, 이것들을 하나하나 이루기 위해서는 나는 나의 조그마한 '부유함'이라도 남에게 쉽게 내줄수가 없다. 사고픈 책, 사고픈 씨디, 보고픈 영화 기타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의 '부유함'을 요구하고 있다. 항상 나는 모자란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작은 '부유함'을 그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나에게 치명적이다. 차비 500원을 아끼기 위해 걸어다니고, 점심을 굶으며 모은 돈으로 겨우 씨디 한장을 산다. 그들을 위한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네가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에 동의하고 나의 변명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와 같은 이들이 항상 하는 말이 나중에... 나중에... 내가 좀더 여유가 있으면 그때 가서 돕자. 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되면 또 난 너무 여유가 없어 라고 다시 변명할지 모른다.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기는 정말 힘들다. 그것이 나의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더욱 힘들다. 나는 언제쯤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말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어렵다... 난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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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행정구역상 그곳이 광화문인지, 종각인지, 종로인지는 모른다. 편의상 종로라고 하자. 종로에 있는 교보문고 건물의 벽에는 위와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교보문고를 지날 때 마다 저 글귀를 보면서도 무심코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새삼 저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책은 사람을 만드나? '만들다'라는 단어의 전자와 후자의 의미는 다르다. 그것은 기본적인 국어 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 간파해 낼 수 있는 부분이다. 전자의 '만들다'는 의미는 '제작하다'라는 뜻을 지닌 것이고, 후자의 '만들다'라는 의미는 '수양시킨다', '성숙시킨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사람을 수양시키고, 성숙시킨다. 사람을 잘 발효시킨다. 사람의 됨됨이를 높여주고, 인격완성의 길로 인도한다. 예로부터 "책이 스승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이다. 나는 학교제도교육 속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보다 책 한 권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 책은 사람을 한 순간에 변화시키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다수는 젊은 시절에 책 한 권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 책은 인간에게 생각의 시간을 주고,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그의 삶의 방향을 일러준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아 그 시절에 내게 영향을 준 책이라곤 애써 떠올리려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학시절에 읽은 책 중 내게 사색과 깨달음, 삶의 방향을 일러준 책들은 먼저 탁석산 선생님의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을 들 수 있고, 삼인 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안의 파시즘',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 평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외에도 플라톤이나 헤겔 등의 철학자들의 생각 또한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책을 읽는 순간이 기쁘다. 즐겁다.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나는 쾌감을 느낀다. 나에게 생각할 꺼리 들을 주는 모든 것은 반가움의 대상이다. 책은 생각할 꺼리를 주는 것중 으뜸이다. 나는 책을 통해 논다. 놀이를 한다. 내가 어떤 이의 책을 읽을 때 그는 내 머리 속에 들어와 장난을 친다. "이거 라니깐". 그러면 나는 "아니야 그건 아니야. 왜냐면..." 하고 그의 장난에 반응을 보여준다. 내 머리 속에는 그와 내가 들어있다. 둘이서 서로 시비걸고 장난치고 뒹구르고 한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세상을 좀더 멀리, 좀더 깊이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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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사람이 재산이다"라는 말을 한다. 사람이 재산이다. 그것은 아마도 주위에 사람을 많이 알아두라는 말일 게다. 내가 어려울 때 선뜻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놓으라는 말일 게다. 한편으로는 인맥관리를 잘 하라는 말일 수도 있겠다. 내가 어떤 분야에 있어서 성공하고자 할 때 그 분야의 사람들을 알아두면 나에게도 적잖이 도움이 될테니...

그렇다. 사람이 재산은 재산이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전에 어떤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어떤 사람을 사귈 때 그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가 되려면 일년 이란 세월을 필요로 한다. 나에게 있어 사람을 사귀는 일은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이며, 나에게 있어 "사람이 재산이다"라는 평범한 인생의 진리는 과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원체 내성적이고 독자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내게 있어-어찌보면 독단론자 로 보일 수도 있는-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접근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와 그들 사이의 접점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나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소위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 좌파주의자 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 진보냐 보수냐를 따질 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으며, 그들 중에서 진보진영에 속하는 자들을 골라내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또 이들 중에서도 나와 행동습관을 달리 하는 자들이 많고, 나의 행동습관을 그들의 그것으로 강요하는 자들도 많다. 물론 그들은 그것이 강요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들과 동화되기가 힘들다.

나에게 있어 사람이 재산이게 하기는 힘들 듯하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가 남들보다 뛰어난 자이기를 꿈꾼다. 여러 방면에서 남들보다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그것이 나만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나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나와 그들 사이의 일치점을 찾기란 쉬워진다. 물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납득이 가능한 당연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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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케케묵은 가산점 논란을 이렇게 다시 꺼내는 이유는, 필자의 글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  에 대한 독자들의 여러 글들에서 필자의 주장에 대해 적잖은 오해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 과는 외견상 전혀 달라보이는 한 가지 입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징병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필자의 기본적인 입장과 '군 가산점 논란'에 대한 여성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에 보인 많은 이들의 반응이 자신의 군대생활은 뭘로든 보상받아야함을 말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필자 또한 그들과 견해를 달리 하지 않는다. '군가산점 논쟁'은 이화여대의 몇몇 여학생들이 공무원 시험과 교사임용고시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으로 헌법소원을 낸 것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후 시험에서 군가산점은 더이상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들을 비롯한 남성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였고 인터넷상에서 치열한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마초들의 집단 테러(욕설, 비방)가 있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이 점을 지적하진 않겠다. 논점이 흐려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필자의 의견을 말하자면, 필자는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군가산점을 부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소원을 제기한 몇몇 여성들을 비롯한 군가산점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진보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본 옳은 판단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문제의 근본을 제대로 보지 못한, 자기들만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남성들을 희생량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주장이었다.

교사임용고시에서 남성들은 자기들과 같은 조건(완전히 100% 평등한?)에서
임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2년 2개월, 2년 6개월의 지적활동을 강제적으로 금지당한 남성들은 그들과 평등한 조건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네들이 외치는 정말 평등한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네들도 똑같이 2년 2개월, 2년 6개월의 군복무를 행하고 돌아와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야한다. 남성들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에 군대에서 최소 2년 2개월의 기간을 소비하기 때문에 제대 후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기도 힘들다. 여기에 시험까지 보려면 그만큼 떨어진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엄청난 노력이 든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군의 징병제를 타파하고 모병제로 바꾸는 것이며, 이는 남성들만이 아닌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여성들을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모병제를 시행해서도 여성들은 지금과 같이 선택적으로 군에 갈수도 안갈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의 타파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그것을 별도로 하고,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평등이란 무엇인가? 를 따져봐야 한다.

당시 군가산점 논란은 냄비 끓듯 논란이 커지다가 금새 사그라들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이미 군에서 권력과 억압의 문화, 규율과 복종의 문화를 익힌 남성들이 헌법에 의거한 판결에 자발적 복종한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가 남성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해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는 '군대' 라는 조직을 통해 남성들을 사회조직 일원으로서 훈육시켰으며, 과거에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지배받는 문화가 팽배했던 만큼, 남성을 지배하면 해당 남성에 귀속된 가정의 일원(여성을 포함하여)을 모두 복종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군대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유교식 교육의 문제다 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도록 하자. 현재의 사태에 영향을 끼친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 중 '군대'에 그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말을 무조건 듣는 그런 시대는 지났으며, 여성의 권익이 어느 정도는 남성과 대등하게 보장받고 있다. 그런 여성권익의 수호차원에서 군가산점 폐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결국 희생량은 군대에서 권력과 억압, 명령과 복종의 문화를 습득하고 재사회화된 남성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타당하고 합당한 주장을 외치는 방법을 잃었으며(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사회에서 벗어난 주장을 일삼는 자는 반드시 국가의 보복조치를 당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과거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부터 우리네 사회는 그러한 국가적 차원의 보복조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일종의 후유증이라고 보면 되겠다. 근원적인 문제해결은 징병제의 타파이며, 그 이전에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진정 남성과 여성의 평등의 실현차원에서 타당하고 합당한 것인지를 판단해야한다. 모병제의 실시는 앞서 지적한 그러한 '가능성'으로부터 많은 남성들이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오히려 여성들이 진정한 남여평등을 외치고자 한다면 남성들의 가산점을 빼앗을 것이 아니라 징병제 타파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자는 얼마되지않으며, 깨닫는다 할지라도 징병제 타파를 외치기보다 군가산점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있어 쉽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을 희생량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필자의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을 통해 마치 필자가 남성들의 군대기간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반응을 보인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됐으리라 본다. 필자는 그들의 군대에 빼앗긴 기간을 사회적 제도를 통해 충분히 보상해야한다고 보며 그 점에서 '군가산점'을 되살릴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군가산점 논쟁'이 일어난 배경에는 '징병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과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정면으로 충돌하는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글 같지만 결국에는 조직사회에 뿌리박은 군대문화에 대한 지적이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어떤 이는 '군대식 사고' '군사문화' 만이 그 원인은 아니며 다른 원인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다른 원인들이 아닌 '군대'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또한 한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을 통해 필자는 그 어떤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서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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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조직내에 있는 이들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술자리를 갖기 마련이다. 꼭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달리하기도 한다. 또한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자리를 할 때도 그곳은 술자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술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 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있어 술자리는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술이 한 두잔 들어가고 이야기 꽃이 피면서 서로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건배를 하기도 한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예의상(?)이라도 잔에 술을 따라놓고 건배를 하고 술잔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런데 왜 이것이 '예의'라는 이름으로 술을 못하는 이들을 구속해야하는가? 술 대신 음료를 시켜 음료수 잔으로 건배를 하면 안되는 것인가? 심지어는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어떤 사람은 술을 못하는 사람에게 자꾸 술을 마시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는 취했는데 남이 안취하니까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술 예찬론자들은 술이란 취하라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반드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취할 필요는 없다. 취하고 싶은 사람은 취하고, 취하기 싫은 사람은 안마시거나 자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술 취한 자들은 '자기'를 넘어 '타인'까지도 간섭하려든다.

얼마 전 한 일간지 오피니언 란에 게재된 글을 통해 소설가 공지영씨는 이런 말을 했다.

"모임이 끝난 후 2차를 가야 하고, 돌리는 폭탄주를 빠짐 없이 마셔야 하고 그런 대열에서 이탈해 혼자 집에 가야한다거나 혼자만 음료수를 마시겠다거나를 고집할 때 쏟아지는 눈총에, 정말 내가 너무 까탈스러운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싫다"

"그것이 공익을 해치지 않는 한, 그것이 비윤리적이거나 범죄적이지 않는 한 사람의 특성이 그 자체의 다양성으로 존중되는 것이 무어 그리 나쁜가. -중략- 갈비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혼자 피자를 한쪽 싸들고 가서 먹을 수도 있고, 생맥주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가 즐거운 모임..."

그렇다. 술을 안마시는 사람은 술을 마시고 술을 강요하는 그들에게 일말의 죄책감 내지는 미안함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죄책감 내지 미안함을 느껴야하는가? 오히려 술을 강요하는 그들이 술을 안마시는 이들에게 미안해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뭔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취향마저도 '예의'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고 강요하려고 한다. 술자리에서의 '예의'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 대해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사람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 대해서 지켜야 할 것이다. 더이상 술자리에서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사람에 대해서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말자. 술을 안마시는 것은 당신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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