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예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을 위해 영화를 사용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렵다."

이 두 가지는 어찌보면 "둘다 똑같은 말 아니야?" 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목적'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로 예술을 표현한다는 것은, 영화를 하다보니 그 안에 예술이 자연스럽게 담기게 됐다는 것이고, 예술을 위해 영화를 한다는 것은, '예술'을 목적으로 하고, 그 수단으로써 '영화'를 삼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인위성'이 가해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 아닌 고의적 인위성을 가하게 되면 영화를 보는데 있어 관객들은 다소 어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근데 예술을 먼저 목적으로 하고 무엇을 한다는 행위는 소위 우리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본다. 그들은 그것을 예술로서 만들려고 일부러 의도한 것이 아닌, 하다보니 예술이 된 것이라고 본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그렇고, 기타 등등 그외의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것이 예술영화라고 불려지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남들이 경험하지 않는 밑바닥인생을 조명하고 거기서 '삶'이라는 요소를 부각시키려 한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예술영화로 승화된 것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이는 영화에서 재미를 찾고, 어떤이는 철학을 찾고, 어떤 이는 감동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한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재밌으니까" 라는 대답으로 충분하다. 조폭이 활개치는 이유도, 엽기가 활개치는 이유도 "재밌으니까". 내가 봐도 그 영화들은 참 재밌다. 유쾌하고 즐겁다. '주유소 습격사건', '엽기적인 그녀', '쉬리' 참 재밌게 봤다. 대중들에게 예술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즐기려고 영화를 본 것인데...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너무 재미만 추구하다가 '단순화'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내용없는 우리나라 댄스음악들 듣고, 미국 허리우드 액션물이나 조폭영화만 보고, 그저 '즐기는 것'만을 추구하다가 사람들이 정작 나의 이웃에 대해, 사회의 다른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인명에 대해, 자연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까 그것이 우려된다. 보는 순간에는 그저 즐기는 것일 뿐이었는데, 이러한 단순한 '봄'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다 내용이 없는 껍데기만 남을까 우려된다. 요즘들어 평론가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폭'과 '엽기' 세태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하고, '예술성' 있는 영화들이 많은 대중들로부터 등돌려지는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아마도 여기저기서 조폭과 엽기 세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도 나와 같은 우려를 하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는 재미 속에서 깨달을, 감동할 무엇인가가 담겨있는 그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보면서도 유쾌하고 즐거우면서 또 그 안에 많은 가르침과 감동이 있는 영화 말이다. '매트릭스'나 '공동경비구역JSA', '봄날은 간다', '메멘토' 등이 그런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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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나는 종로3가 지하철 계단에서 사람들에게 구걸(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만 딱히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하고 있는 할머니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음반을 사기 위해 다시 종로를 찾았다. 어둑해진 저녁무렵이었다. 방배동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로 향했다. 지난번과 같은 경로로 종로3가에 다다랐고 역시나 같은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지난 번 바로 그 출구 계단에 똑같은 할머니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계셨다. 옷을 잔뜩 껴 입으시고 두꺼운 목도리를 하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머리는 하얗게 새었고 할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계셨다. 할머니 앞의 조그마한 통에는 동전에 몇 개 보였고 그 앞을 사람들은 열심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할머니를 발견한 순간, 지난 번과 같이 나는 또 마음속에 어떤 망설임같은 것이 느껴졌다. 할머니에게 가지고 있는 동전을 드릴까. 지난번에는 마음 속에서 이런 망설임이 교차하는 순간에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동전을 가지고 있던가? 하는 생각에까지 다다랗다. 그러나 내겐 동전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건 지폐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또 지상으로 나와 사람들 속으로 파묻혔고 이내 내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조금전의 망설임은 마음 속 어딘가로 묻어둔 채...

지난 번 나의 '지하철 노인'에 대한 글을 읽은 어떤 한 사람이 내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동전 하나가 아닌 그들의 손을 맞잡아주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때 나는 순간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꼈고 그의 일침이 고마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봤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씀씀이, 혹은 동료의식이기도 하지만, 물질적 도움이 없이 그것만으로 그들이 만족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마음은 가있더라도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들에겐 타인의 마음씀씀이와 더불어 물질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결론을 내리고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가. 아니 돕지 못하는가. 그것은 순전히 아직까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봐야한다. 나는 말은 열심히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선 아직 서툴다. 의지의 문제일까.

'지하철 노인'의 예에 이것을 적용시켜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만 있을 뿐, 그 마음을 전달할 줄도 모르고, 물질적 지원을 하지도 못했다. 할머니에 대한 가련한 마음이 있돼 나는 왜 그 자리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고 가지고 있던 돈의 일부를 건네지도 못했는가. 전자의 문제는 아마도 내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는 행위, 잠시라도 할머니와 함께 그곳에 머무는 행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파묻혀 걸어가던 나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평소 '평범'이라는 굴레를 나에게 씌우기를 거부하던 내가 '평범'에서 벗어날 절호의 찬스를 왜 두려워했는가?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평범'을 끊임없이 거부하면서 결국은 '평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의 진전을 보았으나 더이상은 무리일 듯 싶다. 좀더 깊은 고민이 요구된다.

그리고 후자의 문제, 가지고 있던 돈의 일부를 할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문제는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돈'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한다. 밥을 굶어가며, 웬만한 거리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씨디를 사려고 했는데 중간에 할머니에게 이것을 쉽게 내주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것은 '지하철 노인' 1편에서도 제기했던 문제이다. 나는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고 작은 돈에서 누군가에게 또 떼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까지가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분석해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습관의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이런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돈이 많아진 후에도 남에게 자신의 것을 내주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이다. 이러한 지적은 옳다. 나는 내가 돈이 적다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떼어주길 거부했지만 이는 핑계일 뿐인 것이다. 다음 번에는 적은 돈이라도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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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그것이 본래 어디에서 파생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마초는 대체적으로 남성성을 상징하며, 그것이 '여성주의와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보여질 때에는 이성이 결여된 지극히 감성적인, 심지어는 짐승적인 남성성만이 존재하게 된다. 여성들의 남성의 행동거지에 대한 비판에 대해 흔히 '마초'라 불리는 남성들은 상대 여성을 헐뜯고 비방하며 욕설과 함께 집단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지난 부산대 페미니즘 웹진 '월장' 사태에서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갑자기 마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회사에 위에 언급한 '마초'성향을 지닌 남성들이 몇몇 있다는 것이고, 그중 한명은 아주 전형적인 마초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르는 상대를 향해 처음부터 반말로 시작해 그를 자신의 하수인인양 취급하고 자신이 설정한 상하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스스로가 아래 위치를 점한 사람을 향해 절도있고 단정적인 명령조의 언어를 구사하고 스스로가 왕인줄 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남성들을 향해서는 자신의 하수인으로 부리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면서도 동급의 여성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잘해주고 다정다감하게 굴며 심하게 표현하자면 치근덕거리고 끈적끈적 거린다는 것이다. 남성들을 자신의 밑에 묶어두려고 함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는 그가 여성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남성들의 관계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자신만만함으로 여성들로부터 자신이 매력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남성들을 자신의 밑에 묶어두려고 한다고 볼 수 있다.

남성들을 억압하여 자신의 밑에 묶어둠과 동시에 여성들에게 잘보이려 애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어떤 상황에서의 마초의 활동과 상반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남성들의 지나친 남성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마초들은 상대 여성에 욕설, 비방과 함께 집단적인 공격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평소 여성들에게 동물적 본능에 의거해(성적으로) 자신을 매력적인 남성임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는 마초들의 행동과는 외견상 충돌한다. 평소 여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씀과 동시에 여성들이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띤 마초들을 비판하면 그 여성을 향해 테러적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마초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다른 행동양태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여성'개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들이 다른 행동양태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들이 바라는 여성다운 여성들에게는 구애를 하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집단적 테러를 가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개인'에 따라 차이를 두는 것이다.

결국 이들 마초들은 남성을 상대로건, 여성을 상대로건 자신을 최고의 위치에 안치시키려하고 남성과 여성을 자신의 하위관계에 위치시킨다. 다만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그들의 '위치시킴'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절대권력화 해야만 비로소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그들은 끊임없는 테러를 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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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눈물이 많은 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감상주의자와 이성주의자로 구분을 짓는다면, 나는 나 자신을 감상주의자로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극히 이성주의자이고 싶다. 또한 실제로 감상과 이성이 양분된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나를 세웠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이성의 방향에 많이 치우쳐있다고 생각한다. 이성이 80이라면 감상이 20이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과 달리 나는 눈물이 참 많은 편이다. 눈물이 많은 것은 감상적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나는 이성의 영역이 강하게 작용하는 한편, 때로는 감상적인 것이다. 나는 나를 '눈물이 많은 남자'라고 말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괜히 아무일도 아닌 것에 질질짜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타인의 시각과 상관없이 나는 실제 눈물이 많은 남자 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20여해를 살아오면서 이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나는 눈물이 많았다. 중학교때는 중간, 기말고사를 앞두고 시험공부를 하면서 '완벽'하게 시험범위를 공부하지 못하면 나는 시험 전날 울곤 했다. 나 자신에게 짜증을 내며... 내 스스로 만족스러운 공부를 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했고, 내게 있어 '만족'이라는 것을 성립시키려면 '완벽'한 공부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또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물론 남들앞에서는 애써 아닌 척 하며 눈물을 자제하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눈물을 잘 흘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내가 눈물이 많은 남자라는 것을 모른다. 조금전에도 난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내 가슴을 울리게 했다.

얼마전 티비를 보니 어떤 의사가 하는 말이, 감정표현을 애써 억제시키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밖에서 울어주지 않는다면 속에서 운다는 것이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것이다. 나는 표정이 없다. 사진을 찍을 때건 무엇을 할 때건 나에게서 한가지 이상의 표정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 나는 웬만한 웃긴 대화나 웃긴 이야기에도 잘 웃지 않는다. 웃기지 않기 때문에 웃지 않기도 하지만 애써 참으려 할 때도 있다. 이렇게 표정을 감추는 것이 내게 그리 어렵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는 그동안 표현을 감추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가끔 내가 눈물을 많이 흘릴때가 어쩌면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여 한꺼번에 발산하는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눈물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써 그런 '사실'들을 감추고 싶지는 않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눈물이 많은 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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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읽는 재미를 늦게 알게된 덕에 읽고픈 책이 너무 많아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무리 빨리 읽어도 새 책은 수없이 쏟아져나오고(우리나라는 책의 수로 치자면 일년에 발행되는 책의 숫자가 세계에서 몇번째 안에 들더군요), 나는 그것들(과거에 발행된 것들과 현재 발행되는 것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미래에도 발행되는 것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출판되어 나오는 책들 중에서도 '양서'라 뽑히는 책들을 고른다 할지라도, 그 수 또한 만만치 않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한 책들만 해도 그것은 어마어마한 숫자다.

과거의 책들, 흔히 말하는 동서양의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먼저 읽어야겠지만 내게 먼저 눈에 띄고,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현재의 것'이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라는 책을 지은 일본의 어느 저널리스트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기 위해서는 내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책은 그때그때 모조리 사들여라.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책을 많이 읽으려면 미리미리 읽고픈 책들을 사들여야한다. 그래야 나를 읽어주세요 하고 외치는 집안에 가득히 쌓인 수많은 책들에 미안해서라도, 또 그 수많은 책을 산 돈이 아까워서라도 읽는다. 내 책상에는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있다. 많다고 할 수 없는 이 책들 중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얼마되지 않는다. 열 손가락 안에 뽑을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그만큼 책을 읽지 않아왔다. 그러나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은 크다. 책을 읽고 싶은데 이 많은 책들을 읽자니 하나하나 정성스레 음미하며 읽기가 힘들다. 왜냐. 다른 책들이 나를 읽어주세요 하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빨리 읽어야 그 다음 책을 또 읽을텐데 책 읽는 속도가 더디다 보니 한권 끝내기가 힘들다. 그렇다. 나는 책을 매우 늦게 읽는 편이다. 그렇다고 꼼꼼히 읽지도 않는다. 그냥 평범하게 읽는데 그렇게 된다. 어릴적부터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지 않은 탓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느리게 책을 읽는 나 자신이 짜증나기도 하고 그래도 느리게라도 읽지 않으면 여기서 더 속도를 냈다간 시간버리고 내용도 모르는 격이 될 것 같아 겁나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책읽는 재미'란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는 시기여서 나는 이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다. 책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아니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작가와 나, 세계와 내가 소통하면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깨닫는다. 작가는 내게 그 동기를 혹은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 뿐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가지고 어떻게 사건을 풀어가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각기 느낌이 다르고 얻는 것이 다른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다. 작가가 쓴 동일한, 똑같이 인쇄된 책을 들고 있지만 사람마다 그 안에서 얻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흡사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희열을 느끼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이와 처음 만날때 들었던 곡을 나중에 그와 헤어진 후에 다시 듣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머리 속에는 사랑하는 이와의 기억, 장면들이 스쳐지나갈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해지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곡을 듣고 흥겨움을 느낀다. 같은 음악이지만 개인의 경험차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책읽는 재미는 바로 그것이다. 음악을 감상하는 재미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아 가을이도다.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책을 읽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는 나를 보며 안타까움 뿐이다. 어서 돈을 벌고 시간을 내 남는 시간에 책을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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