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나는 어떤 글에선가 나의 글쓰기 방식을 '자유연상법'이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다. 자유연상법 이라 하면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문시간에 배운 바로 그 '자유연상법'이다. 나는 그것을 글쓰기에 도입한 것이다. 한 가지 단어나 주제를 모태로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막지 않고 그대로 적는다. 계속  글을 쓰다보면 한 단어나 주제를 통해 새로운 다른 단어나 주제가 머리속에 떠오르고 이것을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일괄된 맥락을 갖추며 계속해서 글을 쓴다. 한가지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나의 사유공간이 이동하면서 글이 완성된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글쓰기 방식의 내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이다. '자유연상법'을 글이 서술되는 내용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공격적 글쓰기'는 외형적인 측면이다.

나는 '공격적 글쓰기'를 즐긴다. 때로는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아 실제 내가 그 글에서 극단을 지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단인 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얼마전 썼던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남성조직의 여성차별이 군대문화임을 주장하며 그것만이 여성차별의 원인임을 주장했다. 사실 모든 우리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태에 대해서 거기에 한 가지 원인만이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은 무리다.그것은 누구나 안다. 나도 알고 있지만 나는 그 글에서 그렇게 단정지었다. 왜인가? 나의 글쓰기 방식이 극단적이고 공격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그 표현방식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외형상 극단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내용'또한 극단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 내가 쓴 글에 그렇게 나와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은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었지, 그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경험하고 난 후 나는 나의 공격적 글쓰기, 극단적 글쓰기 방식을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는 꼬투리를 잡으려 할 것이고, 나의 극단적 글쓰기에서는 그들이 내 꼬투리를 잡기가 쉬워진다. 따라서 그들이 내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고, 내 생각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형식논리학'적인 측면에서 완벽성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나의 글이 쓸데없는 비난 내지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그들의 머리속에 침투시키기 위해 외형을 좀더 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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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는 기독인들이 참 많다. 친한 사람들은 거의가 기독인들이다. 그것도 아주 독실한... 철학과여서 유난히 기독인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신학과 철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주변인들로부터 많은 설득을 받아왔다. 종교가 없는 나를 기독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부터 교회나 성당을 몇번 간적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금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20살이 되어서도 친구를 따라 한번 순복음교회를 갔지만 그날로 끝이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려기 보다는 종교에 기대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 눈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기독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리고 내가 기독교에 그다지 내키지 않는 까닭은 그들은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나 기타 등등의 사회적 참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 그것을 고치려하는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인들은 나름대로 선하고 건강하며 바람직한 삶을 살려고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다.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런 점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보신주의, 안정을 추구하고 변화에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이들에게는 이들은 오히려 반대의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친한 기독인 선배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잠깐 동안의 대화였지만 선배는 그런 기독인들도 있지만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기독인들도 있다는 말을 했다. 기독교가 그 내부에서도 워낙 다양한 시각들을 내포하고 있어 외견상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좌파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학생신학운동을 하는 에스에프씨라고 하면서... 이 잠깐 동안의 선배와의 대화는 기독교에 대한 일방적인 나의 관점을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독교를 갖겠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그런 관점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갖지 않겠다는 나의 신념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선배와의 대화는 나의 일방적 편견을 깨는데는 기여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기독인들이 보수 안정희구 세력이라는 인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은 기독인들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 많은 기독인들이 실제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어떤 교리에 기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땅에는 많은 기독인들이 있고 이들을 끌어안고 진보된 사회를 꿈꾸기 위해서는 이들의 사고방식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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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우리생활에 깊숙히 파고들고 이제 인터넷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예쁜 편지지에 편지를 쓰기 보다는 이메일로 간단하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편리하고, 레포트를 쓰더라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더 편리하다. 심지어는 컴퓨터를 켜놓고 앞에 앉아있지 않으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인터넷은 또한 자유게시판을 통해 쌍방의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게시판을 통해 드러내고 이를 보고 그와 견해를 달리하는 다른 네티즌들은 또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터넷 게시판 사용은 자유로운 토론장으로 변모하기도 하며 새로운 토론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내 의견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해 누구보다도 이런 인터넷 자유게시판이나 토론장을 즐겨 찾게된다. 따라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내 의견을 인터넷에 올려놓기도 하며 내 의견에 반하는 다른 사람들의 '리플' 내지 '메일'을 받기도 한다. 그중 내가 어느 특정 집단의 민감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라도 하면 이들로부터 집단 공격을 받기도 한다. 물론 그 중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내 의견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절대적으로 높기라도 하면 내 의견에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공격을 모면하기 위해 본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개인 메일로 지지글을 보내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유게시판 상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이게 된다. 가운데 금을 긋고 한편에는 나 혼자, 한편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된다.

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 분노하며 이를 고쳐나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다. 일종의 '사회비평가' 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것인데, 이는 타인들로부터 '배척됨'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배척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들과 연대를 갖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들 '아웃사이더' 또한 사회의 소수임을 감안할 때 지극히 '혼자'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어찌보면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서 보면 그들이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간다는 점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외견상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면에서 철저하게 '혼자'이고 '아웃사이더'이며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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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의 한 여교수가 여교수 비율이 10%까지 올라갈 때까지 남녀 동등한 조건이라면 여교수를 채용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서울대 여학생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는데 비해 여교수의 비율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나마 여교수가 있는 곳은 간호대, 음대, 생활과학대 뿐이고, 공대, 법대, 경영대 등에는 아예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출판인은 " '여교수를 쓰면 불편하다' '여교수는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다' 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대학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차별'을 시정하라는 여교수들의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항변이라 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였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이를 군대식 문화와 연결지어 생각해보았다. '군대식 문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을 여러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모아 한가지로 요약한다면 '상하 명령과 복종의 문화' 라고 할 수 있겠다. 군대내에서는 계급이 낮은 사람에게는 계급이 높은 사람의 명령 앞에서 어떠한 개인적 의견이나 소신을 피력하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 국가는 군대의 창설시기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징병제! 대한민국의 모든 신체건강한 남성은 최소 2년 2개월동안 군에 복무해야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물론 편법을 동원해 알게 모르게 빠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우리 국가가 정하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일년에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죽어나가고 있다. 그것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간에 상관없이-만일 그것이 자살이라 해도 사회에서 멀쩡하던 한 젊은이가 '군대'에 들어갔다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군대'내부의 책임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필자는 여기서 의문사 문제를 들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군대의 개인의 인권이나 사상적 자유, 견해나 의견을 무시하는 작태, 오로지 명령과 복종의 관계만이 성립되는 그곳에서 최소 2년 2개월을 경험하고 사회에 나온 '교육된' 남성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는 과연 어떨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여권이 신장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지극히 남성중심의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고, 대부분의 사회 여러 분야를 남성이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발붙이기가 힘들다. 그것은 이미 '군대'를 통해 '교육된' 조직에 순응하고 명령과 복종에 익숙한 남성들이 사회 여러분야의 우두머리로 자리잡고, 그의 휘하에는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잘 부릴 수 있는 사람만을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군대'에서 '교육받은' 자기들끼리의 세상을 만들으려는 것이다.

대학사회 또한 남성들이 우두머리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사회와 총장이 휘하 교수들을 마음대로 부리며 조직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여성'교수 보다는 '남성'교수를 채용하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80년대 서울대의 여학생 비율은 20%가 될까말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30%까지 급증했고 올해는 37%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학생이 이렇게 많이 늘어나는 동안 서울대 여교수의 비율은 전체 교수 1,487명 중 겨우 104명으로 7%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그만큼 능력있는 여성박사가 없다는 말 아니겠느냐 라고 항변하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전국 162개 대학의 여학생이 36.25%이고, 석박사 과정의 학생은 37.68%라고 하니 그러한 주장은 37.68%의 여학생들이 모두 바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여교수의 비율이 이토록 낮은 것은 왜인가? (물론 이것은 서울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앞서 필자가 언급했듯 서울대의 수장들이 부리기 편한 '남성'들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인은 그것 뿐이다. 따라서 이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남성들에게 '교육된' 군대식 사고방식과 문화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제거하는가? 그것은 후에 필자가 다른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너무 논의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서는 문제점만을 파악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필자의 주장에 근거해 필자는 서울대 한 여교수의 그러한 주장을 적극 지지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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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가 자라서 사리를 분별하게 되면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말은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절기가 여름인지 가을인지를 제대로 알아서 더 이상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어린이는 철이 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때를 알아야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수한의 <역사에세이>에서 참고)

우리는 아직 군대갔다오지 않은 자유분방하고 혈기왕성한 진보적 성향을 띠며 사회비판을 하는 남성에 대해 군대갔다오면 철이 들거라는 말을 한다. 이는 군대갔다온 사람이라면 나이 많은 어른이든 갓 제대한 예비역이든 그 연령대를 초월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철이 든다'는 의미는 위에서 말한 철이 든다는 의미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떻게 다를까?

자유분방하고 혈기왕성하여 사회에 비판을 가하는 군미필자의 남성에게 군대갔다오면 '철이 든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네가 지금 그렇게 자유롭게 사회를 비판하고 그러는 것도 다 한때다, 군대갔다오면 다 달라진다 라는 식의 의미가 담겨있다. 즉 다시 풀어 이야기하면 군대가서 군대의 상하 조직문화와 명령과 복종체계를 몸으로 익히고 나오면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비로소 '철이 들었다'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이 든다'의 본래 의미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 같지 않은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 나아가 사리판단을 하는 것을 '철이 든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보다 그냥 조직에 따르고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이 말을 사용하니 이 말이 그 본래의 의미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어떤 사람에게 군대갔다오면 철이 들거라고 말하는 그 화자 본인이 '철이 들어야'하는 것이고, 그가 지칭했던 청자는 반대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화자에게 "넌 철이 들어야해"라고 말하는 것이 '철이 든다'의 본래 의미를 생각할 때 더 바람직할 것이다.

앞으로 누군가 당신에게 "군대갔다오면 철 들겠지" "군대갔다오고 철 들어야지"라고 말한다면 '철이 든다'는 것의 본래 의미를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당신도 그들에게 한 마디 하라. "너나 철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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