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점에 와서 이런 기사를 접하니 할 말을 잃는다. 이것이야 말로 신종 분서갱유다.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진 나라 시황제의 가혹한 법을 일컫는다. 천하통일후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시황제가 승상 이사의 진언을 받아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실용서적과 진나라 역사서를 제외한 각종 희귀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시황제를 비난한 선비들을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최근까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각종 소설과 철학서, 비평서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면서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 책의 목록을 살펴보자니, 소설가 황석영씨의 <오래된 정원>,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한겨레21에 연재중인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역사이야기', 노르웨이 출신 귀화 한국학 교수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세균 교수의 <자본주의의 미래>,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 <스콧니어링 자서전> 등이라 하니 그야말로 이 책들의 절반을 소지하고 있는 나는 당장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끌려가야할 판이다.

  마키아벨리, 촘스키, 하버마스, 그람시, 막스베버는 세계가 인정하는 유명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인데 이들의 서적을 국가불온물로 감정의뢰하다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동인문학상을 받은데다 교과서에 실려있는 책인데 이건 왜 감정의뢰하며,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인문사회과학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고, <스콧니어링 자서전> 또한 한때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책이다. 아니 책읽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보는 베스트셀러를 불온물로 규정하겠다면 이를 어찌 봐야하는가. 이 책들을 감정의뢰한 기무사를 사상검증해야할 판이다. 도대체 기무사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이야말로 국가에 해가되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무사는 저들의 책을 불온물로 규정 혹은 의뢰함으로써 '분서'를 했고, 다수의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혹은 학술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을 살아있는 채로 죽여버림으로써 '갱유'했다. 시대도 변하고, 정부도 변하는데 기무사는 아직도 죽은 박정희를 붙들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는가?

 어쩌면 난 또 불온물을 소지한 죄에 덧붙여 기무사를 비판했다는 죄로 내일이라도 잡혀갈지도 모르겠다. 에헤라 무덤 속 사자(死者)를 붙들고 있는 기무사는 그냥 같이 무덤으로 들어가라.

 P.S. 난 군에 있던 시절 맑스를 읽으려 했고, 한겨레21을 구독하려 했고, 각종 철학서, 비평서를 읽으려 했으나 대부분 검열에 걸릴 우려가 있는 나머지 고참 행정병이라는 나의 작은 권력을 이용해 정보병으로 있는 후임병에게만 말하고 책을 반입해 읽었다. 하긴 군조차 이렇게 폐쇄적인데 기무사라고 오죽하겠는가.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스스로 발전을 꾀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군대라면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들을 볼 수 있도록 허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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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 옮김 / 들녘미디어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는 사실 책의 내용은 모른채 책 제목에 끌렸고, 알라딘 서점에서 인문학 베스트 6위를 기록하고 있기에, 괜찮은 책이겠다 싶어 구입한 것이다.

 평소 글쓰기를 즐기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글과 관련된 책에 항상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전에 얼마전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중 하나인 <글쓰기와 차이>를 제목만 보고 구입했다 아직까지 읽지 못하고 책장에만 꽂아둔 경우도 있다. 자크 데리다가 '글쓰기'에 대해서 쓴 책임은 맞지만, 철학서이기에 내가 그냥 생각하는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난 철학을 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자크 데리다에게도 관심은 있다. 학부에 그의 철학을 다루는 과목이 개설되지 않아 그의 학문의 손톱의 때만큼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저 관심은 언제나 꾸준히 가져왔다. 언젠가는 책장 속에 묻힌 데리다의 저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서론이 길었다. 우선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이하 즐거운 글쓰기로 축약하겠음)를 읽으며 생각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초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느꼈고 부담없이 책장을 훨훨 넘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교양인이 되기 위한' 글쓰기였다. 다소 조금은 전문적이고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길 바랬던 나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난 지금껏 내가 해왔던 글쓰기가 이 책에서 말하는 글쓰기 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글쓰기를 꾸준하게 해왔는데 이 책은 나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듯 했다. 나만의 고유한 방식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나보다.

 <즐거운 글쓰기>는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창조적인 글쓰기를 위하여, 2장 창의력을 키워주는 글쓰기, 3장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4장 나를 찾기 위한 글쓰기, 5장 글을 쓸 때 나타나는 기회와 위기, 6장 글쓰기 모임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챕터들은 순차적으로 글쓰기의 대한 요령과 방식을 익히게 해준다.

 나는 6장 중에서 4장 나를 찾기 위한 글쓰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평소 내가 해오던 글쓰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내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나를 찾기 위함이고, 나를 알기 위함이다. 그런데 나는 철학을 하는 도구로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책에서 말하는 대로 나를 알아가게 된 것이 사실이다. 자아성찰이라고나 할까. 나는 글을 씀으로서 나를 인식하고 나를 찾아간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것보다 더 쉽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즐거운 글쓰기>는 문학적, 치료적, 철학적 글쓰기에 대해서, 그리고 글을 쓸 때의 자세와 느낌, 기회와 위기 등에 대해서 너무나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지시하는대로 곧이곧대로 할 독자가 과연 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책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독자는 이 책을 읽음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듯 하다. 그냥 읽고 아 그렇구나, 하고 흘려버리는 정도가 아닐까? 책에서 지시하는 글쓰기의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옆에서 글쓰기 도우미가 필요할 듯 하다. 물론 이 책이 그러한 도우미의 역할을 해주지만, 실질적으로 간섭해줄 도우미말이다. 책이 그런 것까지 책임져줄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이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에는 '독서'와 더불어 '실질적인 도우미'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픈 것이다.

 글쓰기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책이다. 더불어 나와같이 글쓰기에 어느정도 경험이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자가 읽어도 무방하다. 나름대로 전자와는 다른 면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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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1-1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인데 거기 나온 연습문제들을 직접 해 보려고 주문해서 샀어요 그런데 워낙 문제들이 많아서 쉽게 안 읽히네요 여기 나온대로 다 해 보려면 한 1년 걸릴 것 같아요

마늘빵 2004-11-15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 철학적 글쓰기를 비롯해 제 스스로 많이 해본 질문들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았어요.
 


 

 

 

 

 


 사진출처 : http://www.empas.com

 흔히 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다 보지 않고도 책의 목차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영화는 영화제목만으로 영화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물론 대놓고 이 영화는 어떤 영화다 라고 말해주는 경우도 있긴 하다. 오늘 본 영화 <바버샵>이 그렇다. 해석하면 '이발소'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발소'는 참 퇴폐적인 냄새를 풍긴다. 과거에는 그저 아저씨들이 머리카락 손질하는 곳, 면도하는 곳 정도로 생각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이 이발소는 이발소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 아닌 퇴폐윤락업소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영화 <바버샵>의 '이발소'는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면도를 하는 곳이 맞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은 시카고의 우울한 흑인동네의 컨트리클럽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발소 주인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할아버지 대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이발소를 고리대금업자에게 팔아버리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이발소를 자기집처럼 편히 드나드는 그곳 사람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서 이를 깨닫게 되어 결국 이발소를 다시 찾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흑인이다. 물론 백인도 있지만 그 백인 역시 흔히 말하는 흑인과 백인을 구분짓는 얼굴색이 아닌 뭔가 가지고 있는 자와 못 가진 자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이발소에서 일하는 백인은 '흑인'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흑인이다. 이발소 안에서의 다양한 개성과 삶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없는 대화 속에서 이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진솔하다.

 영화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미국 개봉당시 2003년 9월에 두주간이나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가 그리 대단해보지는 않는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만한 영화도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감동적인 영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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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자가, 철학을 하는 자가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나는 '일부러' 오류를 범하련다. 한 개별 사례를 토대로 그것을 보편화하여 모두가 다 그런 것처럼 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덧붙여 말해둘 것은, 지금 내가 드는 예는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지금껏 일상생활에서 느껴본 바에 의하면 이와 같은 사례가 여럿 있고, 이것이 '모두' 에게 해당되지는 않더라도 '다수'에게 해당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믿음'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덮어씌우려고 한다.

뭐 대단한 걸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리고 대단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마을버스가 도착했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서 줄이 생겼다. 그런데 내 뒤에서 웬 꼬마 녀석이 보이지도 않는 작은 몸을 비틀고 들어오며 나와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앞찌르고 제일 먼저 탑승해 자리에 앉았다. 아니 이런! 대한민국의 아줌마(아줌마를 비하할 생각은 아니다. 몇몇 아줌마들의 투철한 자리쟁탈전을 말하려는 것이다)도 아닌 대한민국 꼬마 아이가?! 아니 이 아이는 도대체 뭔가? 학교에서 도덕과 윤리을 가르치지 않던가?(공공장소에서의 도덕은 윤리이다. 도덕은 개인에 국한된 행위, 윤리는 공동체 내에서의 행위를 말한다.) 물론 학교에서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지 않을리는 없다. 단지 이 아이가 배운대로 실천하지 않을 뿐. 공공질서를 무시해버리는 이 아이. 결국 내릴 때도 출구에 서있는 사람 모두 제치고 내리는 할머니와 낑겨 내리면서까지 제일 먼저 내렸다. 대단한 아이다. 뭐가 그리 바빴던 걸까? 하지만 바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려서는 유유히 자기집으로 들어가는 듯 했으니까. 그리고 버스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이 아이에게서 상황의 긴박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비단 여기서는 공공질서에 대한 부분만을 언급했지만, 이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행동으로 미루어 아이는 참 어른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흉은 아니다. 나이 어린 아이가 어른스럽고 야무지고 똑똑하게 행동한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이 아이는 잘 살 것이고, 별 탈 없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릴적의 똑똑함과 야무짐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악함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똑똑함은 좋은 의도의 표현이지만, 영악함은 때로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영악하다는 말에는 어떤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사고와 행동이 포함되어 있다. 영악함은 그 아이 개인이 잘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사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공의 질서와 윤리를 무시하는 성인은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그는 무소불위의 행동으로 여러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존재이다. 아직 크지도 않은 아이이기에 성장하면서 있을 변수는 많다. 하지만 그 아이가 오늘 보인 그와같은 태도와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그는 그다지 바람직한 시민상이 되지는 못할 듯 하다.

이 아이에게서 느끼는 영악함을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서도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나는 미래 사회가 두렵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의 정신을 상실한 시대가 올까봐서다. 배려하는 사회, 관용하는 사회는 특정한 뛰어난 개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몇몇 성인군자가 나온다고 해서 그 사회가 군자다운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의 특성이 사회의 특성을 만드는 것이다. 난 저 아이들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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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해석학을 접한 이후 나는 해석학자들이 내놓은 말들에 푹 빠졌다. 그래서 싸이홈피의 제목을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의 핵심인 오해와 이해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라고 지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내가 슐라이어마허를 '오해'한 것이었다.

 문제의 지적은 몰래 내 싸이홈피를 보신 선생님께서 오늘 수업시간에 지적해주시면서 알게 됐다.

 "오해는 이해의 전제" 와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 는 것은,

 서로 다르다.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는 이해의 전제"라고 했지만, 나는 이를 문장으로 풀어쓴답시고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라고 함으로써 그를 '오해'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오해는 이해의 전제"라는 말은, 어떤 대상물, 텍스트를 놓고 우리가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는 문장은 우리가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오해를 해야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길고 긴 오해의 통로를 거쳐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이다. 오해를 통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 같아 보이는 둘의 차이를 알게되어 이제라도 다행이다.

 더이상 오해하지 말아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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