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이런 사람들이 부쩍 늘은 듯 하다. 육교 위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 지하철 계단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 지하철 내에서 구걸하는 사람, 길거리에서 껌을 파는 사람. 이들은 모두 생계를 위해 구걸을 하고 있다.

간혹 일부 어떤 이들은 그 배후에 조정자가 있고, 이들은 그 조정자를 위해 구걸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결국 이들은 어렵게 구걸해 번 돈을 가지지 못하고 '주인'에게 바쳐야한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구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서 구걸을 택한 사람들일 터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들의 구걸행위에 대해 응해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들을 별로 좋지 않게 보는 경우, 자꾸 사람들이 돈을 주게 되면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의견이 있다.

응해줘서는 안된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만다. 나 역시도 가끔은 안그럴때도 있지만 대부분 무시한다.

오늘도 지하철에서 반신마비로 추정되는 빼짝마른 젊은 남자가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자신의 사연이 적힌 종이를 하나씩 앉아있는 승객들의 무릎에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바퀴 쭉 돌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이 요청에 응해줬다. 안타깝게도 난 여기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리 편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하자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접하게 되는 이 수많은 사람들 모두의 도움요청에 내가 응해줄 수는 없는 거다. 이들 중 어느 한 사람만을 골라서 도와주자면 다른 이에게 또 미안해진다. 도움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움주는 이의 마음 속 복잡한 심정까지 추측할리는 없다. 항상 난 이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리곤 하던 일을 멈추고 또 고민에 빠진다. 난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런데 결국은 내가 이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있기는 하지만 요즘같이 버스비도 아끼려고 한번 낸 돈으로 모든 코스를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가 이들을 돕기에는 나도 경제적 압박이 있다.

먹을 거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책 사고, 매주 일요일마다 드럼치러 가서 합주비 내고, 밥먹고, 술먹고 이러는 돈. 사실 여기서 몇푼 아껴서 저들 도우면 된다. 그렇다. 난 돈이 없는게 아니라 남에게 베풀 마음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내가 쓸 돈에서 아껴서 저들 좀 나눠주면 되는건데 그걸 못한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항상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겨지질 않는다. 아마도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나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넘지 못하기 때문인가보다.

오늘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머리 속에서, 가슴 속에서 멤도는 그 생각과 심정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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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강사 한국 여대생 비하 발언에 대해

외국인 강사의 한국 여대생 비하 발언에 대한 짧은 생각을 끄적여봤는데 아무래도 계속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지 싶어 글을 지웠다. 분명 개인은 사회, 국가를 비롯한 집단에 우선시된다고 생각하고, 개인을 국가의 소유물로 보는 것은 '민족주의'적 발상이라 생각했다.

이를 일부 외국인 영어 강사와 한국 여대생들이 '놀아난' 일에 대해 적용시키면, 분명 난 저들의 개인적인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으며, 저들은 저들 대로 오히려 존중받아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왜 우리는 분노하는가? 생각을 해봐서 내린 짧은 결론이라는 것이 개인은 불가피하게 어느 집단-그것이 규정적이든 비규정적인 것이든 간에-에 포섭되게 마련이고 따라서 의도적으로 집단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개인은 집단에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또한 '민족주의'적 발상에 다름아니고, 결국은 집단을 개인보다 중요시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난 결국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 버렸고 결론은 모르겠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네티즌들이 저들의 행위에 분노하고 집단행동을 벌이는 것을 단지 민족주의적 정서로만 치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분노는 정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정당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가 저들을 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왜 인가? 단지 개인의 비윤리성을 탓할 문제 정도는 아닌 듯 하다.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좀더 고민해봐야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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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윤리에 관한 15가지 물음
가토 히사다케 지음, 표재명 외 옮김 / 서광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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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보는 데에는 상당한 돈이 지불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관심가는 책이 눈에 띄더라도 흥분된 마음을 자제하고 집에 묵혀둔 책들로 눈을 돌리곤 한다. 갈수록 돈 들어갈 데는 많고 사고픈 책들은 많은데 양자 사이에 절충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현대 윤리에 간한 15가지 물음> 이라는 책은 99년에 내가 경제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한 뒤 들은 첫학기의 수업 '윤리학'을 통해 알게 되었다. 주교재는 아니었고, 단지 수업중 교수님께서 잠깐 언급했을 뿐이었지만 처음 철학에 입문한 나는 뭘 읽어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수업중 언급되는 책들을 중심으로 사보기 시작했다.

<현대 윤리에 관한 15가지 물음>은 가토 히사다케라는 일본의 철학교수가 지은 책을 그의 제자인 경북대 윤리교육학과 출신 김일방, 이승연씨가 번역하고, 고려대 철학과 표재명 교수가 최종적으로 검토해 출간한 책이다.

가토 히사다케는 본래 도쿄대학 철학과를 나와 헤겔철학을 전공했으나, 이후에 윤리학에 관심을 보이며, 생명윤리, 환경윤리, 응용윤리 등 각종 윤리학 분야에서 다양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군.

본래 일본에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원고로 읽히던 것을 책으로 엮어낸 것인데, 일단 일본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혹은 윤리학을 다루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는 현실이 부럽다. 방송에서 이렇게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일단 이 방송 프로그램을 들을 만한 청자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라디오 방송의 원고를 듣는 형식이 아닌 읽는 형식으로 바꾸어 책으로 낸 것이 이 책인데,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대중을 상대로 썼다는 의도는 알겠는데, 대중이 이를 얼마나 알아들을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의 단점은 첫째가 그것이다. 일반 대중이 듣기에는 다소 어려운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하기 위해 각종 다양한 예시를 들은 것에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윤리학적 이론의 지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점에서는 그다지 대중적인 책이라고 하기엔 무리이지 싶다.

두번째 단점은 번역상의 문제다. 이 책에는 쉽게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이면서 철학자들만이 알아듣는 단어 사용을 한 곳이 곳곳에 눈에 보인다. 일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 프리오리(A priori)'라는 단어로 이는 본래 라틴어로서 '보다 앞선 것으로부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로는 '선천적'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이 개념은 좀더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학의 형식적 규칙들이 아프리오리하게 인식되는 유일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은 아프리오리한 요소에 근거를 둔다. 대상은 이 형식 안에 주어지며, 인식은 오성의 아프리오리한 개념에 근거를 둔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대상을 사유하고 경험을 조직한다. 칸트에게 아프리오리는 '선험적'과 '초월적' 두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독일어 tranzendental은 칸트에게 '선험적'이란 뜻이며, 이는 tranzendence 인 '초월'과 '경험'의 중간에 위치하는 개념이다. 뭐 '아프리오리'라는 개념의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 때문에 칸트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칸트가 언급되는 부분이 아니니 '선천적'이라는 우리말로 번역해도 무방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책은 별로 추천하고픈 책은 아니다. 언급한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에서의 부적절한 위치나 번역상의 다소간의 문제점, 그리고 각각의 15가지 질문들과 대답이 엮어내는 체계성과 완결성의 부족함으로 썩 읽고싶게 만드는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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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쇼
데이비드 에드워즈 지음, 송재우 옮김 / 모색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프리덤쇼>는 '세상의 모든 자유는 환상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화 <트루먼쇼>를 모방한 것으로 보여진다. 저자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던 일개 세일즈 맨이었으나, 이 세계를 떠나 집필과 교육에 열중하여, 이후 여러 저널과 잡지에 인권과 환경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첫 작품이다.

역자는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획득, 동국대학교 아나키즘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며, <프리덤쇼>라는 책이 아나키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해서 이를 번역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프리덤쇼>는 어떻게보면 음모론이다. 우리가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에 딴지를 걸고 이것은 음모라고 말한다. 물론 '음모'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가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극히 음모론적인 시각이다.

그는 책에서 노암촘스키를 자주 인용하며, 그의 미국에 대한, 환경에 대한, 권력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며 그의 입을 빌어서 음모론을 전개한다. 또 그의 지적들이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부터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내용면에서 받아들이기 거북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럴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개 회사원치고는 참 여러분야에 대해서 깊이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권위있는 지식인의 입을 빌어 말한다는 점은 그의 한계로 지적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고, 학위를 받지 못한 저자로서는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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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의 목소리가 높다. 좌파의 반성에서 시작된 '제 3의 길', 우파에 뿌리를 둔 '뉴 라이트'가 나온데 이어 자신들이 정말 순수한 중도라고 외치는 '신 중도포럼'이 등장했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의 이름을 난 모른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뭐라 말을 못하겠다. 다만 우후죽순 스스로 중도라고 내세우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좌파'와 '우파', '좌익'과 '우익', '진보' 와 '보수'의 논쟁 속에 지친 이들을 달래주겠다는 심성으로 이들이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쁘게 말하자면 난 이들이 새로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틈새를 파고든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좋게 말하자면 그들의 말대로 진정한 중도이겠지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단을 좋아하면서도 극단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고를 하기가 쉽고, 극단에 매력을 느낀다. 왜냐면 극단에서는 강한 주장을 낼 수 있고, 주장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도는 뭔가 어정쩡하고 아무것도 아닌 맹탕인 것 같이 보인다.

 과거에는 중도를 지칭하는 '회색분자'라는 말은 악의가 섞여있었다. 하지만 '회색분자'가 '중도주의자'로 둔갑하는 순간 '악의'는 사라진다. 최인훈은 자신의 소설 <회색인>을 통해 오늘날 '중도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최인훈은 한국적 이데올로기 자체는 집단 이념의 지배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때 이념은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것으로 또다른 체제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 개인은 개인의 생각을 떠나 집단 내부의 요구에 순응해야하고 집단 내부의 사고 때문에 자유로운 사고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 스스로 '중도주의자'라고 내세우는 이들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당파성을 지니지 않기를 원하고, 당파성을 벗어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가 '중도'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회색인'이 좋지 않은 단어로 간주된 것은, 사회가 개인의 이념의 소속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도인 '회색인'은 갈 곳을 잃어 방황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반대다. 사회가 개인의 이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유로움을 얻었고 자신의 자유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당파성을 갖길 거부하고 중도에 머무는 것이다. 중도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위치이고 그렇기에 지금에 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저런 중도주의자들이 자꾸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인 듯 하다.


 덧붙이며...

 어느 집단에 소속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나도 중도주의자인 셈이다. 하지만 난 스스로의 이념의 색깔을 좌파자유주의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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