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대전 나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주위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몇몇 사람들과 나의 결정에 대해 대화를 하면서 나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나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보통 남북의 분단 상황을 문제삼는다. 반면 내가 문제삼는 것은 개인의 양심, 개인의 사상, 개인의 정치적 견해이다. 한쪽은 현실을, 한쪽은 이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이 대립할 때 논쟁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린다. 우리 사회의 법이나 제도라고 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런데 이상이라는 것은 법이나 제도를 넘어서있다. 그 중에서도 자유와 평화와 관련된 문제는 항상 법과 제도의 간섭을 받게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나 사상적인 이유로 자신의 신념을 사회제도보다 우선시하면서 제도와 마찰을 빚게 되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선 무엇보다 무기와 군대의 제거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군대의 한 일원(군인)이 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국가는 그것을 강요한다.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현 제도를 무시하고 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회불순분자이다. 그러나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는 한 개인을 향해 제도적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린다. 한 가지 질문을 통해 그 꼬인 실타래를 풀어보자.

 "국가라는 것, 사회제도라는 것은 왜 생성된 것인가?"

 국가, 사회제도는 결국 사회의 혼란을 막고 안정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성된 국가, 사회제도는 개인을 향해 제도적 폭력을 가하고 있다. 그것도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이다. 사회제도는 사회 구성원의 보호와 안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연히 평화를 외치는 개인의 신념이 사회제도로 인해 보호받을 수 없다면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애초에 국가나 사회제도라는 것이 자유와 평화라는 이상적인 가치들을 위해 생겨난만큼 더 나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는 제도를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그 현실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태어났는가를 탐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없앨 수 있다. 다만 현실과 이상이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현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현실만 바라보고 그 현실의 기초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논쟁을 넘어선 '(변증법적)이상'에 이르게 되면 자연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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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 세계는 우연적인 것일까요, 필연적인 것일까요?"

 난 당시에 세계는 우연적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렇게 대답을 하고도 그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우선 나에게 '우연'과 '필연'에 대한 개념이 확고히 잡혀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았을 때 자신있게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마지막으로 내리게 될 결론 또한 그것이 우연과 필연에 대한 확고한 나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은 확고한 인식으로 가는 길에 한걸음을 내디뎠을 뿐일 것이다.

 우리는 평소 말을 하면서,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수많은 단어들을 입밖으로 내뱉는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라고 묻게 되면 그때만은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우리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만을 가지고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사람과 부딪치면서 자연스레 대화를 하게 되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어휘의 범위를 넓혀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간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형성하도록 도왔을지는 모르나 우리가 그것을 알게해주는데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깨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단어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일진대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 전에 분석철학 수업시간에 내가 앞에 나와 발제를 하고 난 뒤 선생님께서 어떤 문장 하나를 짚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하고 있었으나 그 문장 하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선생님은 피사의 사탑에서 중량이 다른 두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그것이 떨어지는 속도가 왜 같냐? 라고 물으시며 내가 묵묵부답이자 실제로 자신이 실험을 해보고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교과서에 써있으니까 당연히 그것을 외운 것이다. 실제 자신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렇게 되는지 의심을 해보고 깨달아야 진정한 지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과 '필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먼저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해보라.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연과 필연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려 했으나 나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공부한 뒤에 다시 다듬어보려 한다. 국어사전의 우연과 필연은 간단하게 나누어지나 사실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 필연이라 부르는 것에는 그보다 더 세부적이고 다양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철학사전과 철학자들의 생각을 공부해본 뒤 나름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이를 정의하기에 앞서 우리가 왜 이렇게 간단한 단어-일상생활에서 쉽게 사용하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으로 그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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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고려국의 박술희와 백제국의 애술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대화 중 서로 성격이 비슷하고 무예가 출중함을 안 애술이 박술희를 향해 자신이 머리가 나쁘고 힘만 세다고 말하며 박술희 또한 자신와 똑같을 거라고 단정짓는 발언을 하자, 박술희는 옛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이 학문에도 높은 경지에 올라왔음을 과시하며 되받아쳤다.

 무턱대고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의 박술희와 애술의 대화를 끄집어낸 것은, 박술희의 경전 인용에서 '학문'에 대한 생각으로 나의 사고가 확장됐기 때문이다. '학문'에 대한 생각을 하는데 있어 동기를 부여해줬다고 볼 수 있겠다.

 예로부터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의 옛 성인들의 말을 인용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학문의 일정 경지에 도달했음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강하게 하기도 해, 지식인들의 논쟁에 성인들의 말씀이 많이 이용되곤 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지 그들의 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그들이 그 시대의 한 획을 긋고 간 위대한 사상가이기에 이들의 발언이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성인의 말씀을 자신의 논리를 확고히 하는데 인용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학문의 발전으로 볼 때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매우 안일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경전을 해석하고 그것을 외우기만 해서는 지식은 신장될지 모르나 사고는 굳어지고 학문의 발전은 어렵다. 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거기서부터 또다른 학문의 재생산이 이루어져야만 학문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서양의 학문은 주장과 반론의 학문인데, 동양의 학문은 경전해석의 학문이다. 즉 이 말은 서양의 학문은 끊임없이 이전의 패러다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역사임에 반해, 동양의 학문은 옛 성인들의 말씀을 해석하고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발견된 문제점, 모순을 극복하도록 해야한다. 과거부터 당연하게 여겨왔으니 이건 완전무결한 선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고착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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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나는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지금 현재 나를 완벽주의자라 말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당시 나는 시험을 통해 어떤 희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힘들게 거의 한달 동안 시험공부를 하고서 시험지를 대했을 때 모든 문제의 답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면 나는 거기서 대단한 만족감을 느꼈다. 힘들게 공부하고 난 뒤의 보람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지만 '보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컸다. 시험 시작한지 10분도 안돼 모든 문제를 풀고 엎드려있으면 주위 친구들은 그런 나를 대단하게 봤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내가 시험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알아볼려고 자습서의 귀퉁이에 적혀있는, 교과서에도 나와있지 않은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철저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다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험공부를 완벽히 하고도 어이없이 한 두 문제 틀리는 경우가 있었다. 내딴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왜 정답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 답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채점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가채점을 해보고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질문들 드렸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난 너무 생각을 깊이해서 정답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 생각이 깊어서 정답을 찍지 못했다? 당시엔 그냥 내가 그런가부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라는 식의 깨달음(?)을 얻고서 나름대로 납득을 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지선다형의 문제형식의 사고방식을 하고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개의 보기중 하나만을 정답으로 정하고 그것을 찍어야만 동그라미가 그려질 수 있었던 사지선다형에서는 깊이 있는 사고는 필요없다. 그냥 정해진 정답을 잘 골라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깊이 생각했다. 내 답은 나름대로 나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정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미 정답이 정해져있는 사지선다형에서는 그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깊이있는 사고, 나름대로의 각자의 사고는 철저히 거부당한다.

 지금 철학과 대학시험에서는 정해진 답이란 애초에 없다. 답은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답을 산출하기까지의 논리와 기초지식이 있는가만이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창의력있는 교육을 하자고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네 시험제도는 아직도 창의력,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12년간의 수많은 시험을 통해 학생들은 사지선다형에 익숙해지고 '정답(정해진 답)'을 벗어난 사고는 하지 못한다. 너무 생각이 깊어서 정답을 가려내지 못한 나 같은 학생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시험제도를 고쳐야한다. 논술식으로. 어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학생들의 답안을 누가, 언제 채점을 하고, 객관적 기준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이 난리가 날 것이다" 라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맞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학시험에서의 학점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을 품지 않는데 비해 중·고등학교 시험에서는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일류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일류대학 이라는 것이 없어진다면 중·고등학교에서도 논술식 시험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라도 믿는다. 대학간의 서열화를 부추기지 말고 차라리 프랑스처럼 1대학, 2대학 등으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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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우리는 비슷한 단어를 명확한 구분을 짓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생각된다'와 '생각하다' 또한 그런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둘은 무엇이 다른가?

 이 둘은 사전에는 나와있지 않다. 사전에는 오로지 '생각', '생각 다'라는 단어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되다'와 '생각하다'. 두 가지 단어 각각에서 먼저 느껴지는 것은 하나는 수동태라는 것이고 하나는 능동태라는 것이다. '생각되다'는 수동태이며, '생각하다'는 능동태이다. 수동태라는 것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내가 그러한 행동 또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고, 능동태라는 것은 내 스스로의 사고나 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우리는 생각을 하게되는가? 생각을 하는가?

 '생각'이란 1.마음에 느끼는 의견 2.바라는 마음 3.관념 4.연구하는 마음 5.깨달음 6.추억 7.고려 8.의도,목적 9.사모 10.그렇다고 침, 간주 11.각오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들을 살펴보면 바라는 마음이나 고려, 의도, 목적, 각오 등의 의미에서는 능동태의 모습을 볼 수가 있고, 깨달음, 마음에 느끼는 의견 등의 의미에서는 수동태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즉 '생각하다'와 '생각되다' 모두 가능한 표현들이다. 단 그 두 가지가 차이가 나는 것은 '생각되다'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했을 때에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강도나 정도나 약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주관적으로 의도하고 바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진다라는 뜻, 즉 깨달음,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다.

 흔히 고등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칠 때 '생각되다'라는 표현이나 '∼하는것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고, '생각하다', '∼하다'라고 쓰라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나타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용 가능하지만 내 주장을 좀더 강하게 주장하고자 한다면 '생각되다'라는 표현보다는 '생각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확실치도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억지로 주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남이 나의 의견에 반박을 하고 다른 주장을 해온다면 나로서는 이에 대처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냥 느껴지는 것, 수동태로 표현했다면 이에 대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여지없이 구석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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