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르다'는 사전적 의미로

1. 둘러 막다
2. 바로 말하지 않고 둘러서 말을 하여 짐작하게 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에두르며 말하기를 좋아한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말하는 것은 왜 에두르는 것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겠다.

상대방에게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하거나, 혹은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상대방과 논쟁할 때 에둘러 말하기는 효력을 발휘한다. 어떤 사람들은 에둘러 말하기가 답답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듣고 나면 그만큼 시원하고 확실한 것도 없다.

나에게 있어 에둘러 말하기는 말하고자 하는 어떤 내용을 꺼내기 앞서 서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 내용을 말하고자 그것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내용을 먼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법과 산파술이 그것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비유법을 사용하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시간상 더 길어질 수도 있으나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내용상 더 풍부해지고, 그것이 설득을 필요로 하는 것일 경우에는 충분한 근거를 대줄수가 있다. 또, 산파술의 경우, 산파술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던 말하기법으로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할때 먼저 상대방이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말하도록 하고 그것의 잘못됨을 지적한 후 상황에 맞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산파술은 에둘러 말하기는 하지만 결국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에 일기장의 어떤 글에서 한두 차례 내가 말을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나는 차츰 내 자신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비유법과 산파술을 나의 말하기의 무기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쪽으로 훈련을 해 언젠간 한치의 오류도 허용하지 않는 언변을 과시할 날이 오리라.


p.s 내가 이 글을 쓴지가 몇 년인데 아직 나는 나아짐을 못느낀다.
     역시 말에는 소질이 없나보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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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천재는 악필이다" 라는 명제의 진리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었다. 글씨 전문가를 데려다가 흔히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의 글씨를 보여주고 평가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천재 베토벤이나 아인슈타인 등의 친필을 보여주었고, 그들 중 일부는 악필이었으나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또 우리나라에서 아이큐 150이상이라는 멘사단체에 가서 같은 실험을 하였고, 역시 위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다음으로 조수미나 김병지, 최용수, 조성모 등의 사인을 받아와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갖었고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담이지만 이들을 누가 천재라 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이 선발됐다는 것은 곧 이들이 천재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글씨 전문가가 악필과 그렇지 않은 글씨를 구분하는데 있어 사용하는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다른 전문가가 봤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문제를 따질 사안이 아니고,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든 생각은 나의 글씨는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경필대회를 했는데, 무슨 글씨를 썼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난 그때 동상인가를 받았다. 물론 이 심사가 객관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떠나서 내 글씨가 동상을 받을 만큼 잘 쓴 글씨였다는 것에 굉장히 기뻤었다. 다음 학년에 올라서는 이 사건 때문인지 나는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글씨를 봐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이 시기의 아이들은 글씨체를 가지고 우열을 가리곤 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두 여자아이가 서로 자신의 글씨가 더 낫다면서 나에게 심사를 의뢰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내가 뭔가 된 것인양 두 글씨를 평가해줬고, 어느 한쪽을 편든것 같지는 않았다. 둘 다 만족스럽게 평을 내렸던 듯...

 한편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이가 들수록 나의 글씨는 아주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것은 초등학교때는 수업시간에 필기를 많이 하지 않는데 비해, 중고등학교에서는 매 시간마다 엄청난 필기량을 소화해내야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빨리 쓸 수 밖에 없었고 여기서 내 글씨체가 엉망이 되어버린듯하다. 지금도 나는 정성껏 쓸래야 쓸 수가 없다. 그냥 쓰나 정성껏 쓰나 그 글씨가 그 글씨다. 그래서 나는 내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컴퓨터 키보드로 글을 쓰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속도도 더 빠르고, 나의 손이 나의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러나 글씨를 직접 쓸 때는 씌여지는 글씨체도 짜증나고, 내 손이 내 생각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속상할 때가 많다.

 미국 사람들은 주로 컴퓨터 키보드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악필이라고 한다. 그들은 키보드를 사용해서 악필이 된 것이지만 나의 경우는 악필이기때문에 키보드를 사용한다고 봐도 될 듯하다. 종이에 써도 될 것을 키보드로 쓰니 말이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사람들에게 메모 한 장을 남길 때도, 소중한 친구에게 좋은 글을 써서 줄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도, 악필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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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이 허락한다면 나는 원하는 책 모두 사다 읽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책을 많이 사면 뭐하러 돈 아깝게 사서 읽느냐며 핀잔을 준다. 도서관에 가면 다 있지 않냐, 도서관에 가서 읽어라 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읽은 것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사서 보는 것이다. 물론 도서관에 가면 웬만한 책은 다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책을 사서 내 책꽂이에 꽂아두고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꺼내 보는 것이다.

 책 뒤에 구입한 날짜를 적고, 내 사인을 하고, 표지, 머리말, 차례를 찬찬히 음미하며 보고 있느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다 내것이 된다는 것. 그것도 나에게는 기쁨이다. 무엇인가를 수집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에게는 있다. 예전에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던 때에는 음반을 수집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조금씩 사기 시작했던 씨디가 지금은 한 300여장 되는 듯하다. 물론 그 외에 테잎도 있다. 또 어릴적에는 책갈피와 성냥갑을 모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책갈피는 나의 책상 서랍 한켠에 들어가있다. 성냥갑은 한창 모으다가 이사할때 모두 버린듯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 뭔가를 수집하고자하는 욕구의 대상이 책으로 바뀐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소유욕'이라고만은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소유하고픈 심리이지만 그 심리 이면에는 소유한 책의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물적 소유욕과 동시에 '책의 내용'이라는 지적 소유욕도 내가 책을 사서 보는데에 이바지 하고 있다.

  나중에 내 집을 마련했을 때 그 중 방 한 칸에는 나의 서재를 가지고 싶다. 방안 가득 책을 쌓아두고 그곳에 가지런히 정돈되어있는- 혹은 어지럽게 널려있어도 나름대로 멋있을 듯하다-책들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 물론 그냥 책만 쌓아서는 의미가 없다. 그 책들이 내 머리속에 들어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방에는 방 안 가득 씨디를 쌓아두고 싶다. 마치 작은 레코드점을 차린 것 처럼. 언제쯤 그것이 실현될런지 모르지만...

 이렇게 작은 꿈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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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졸업 후 중학교 입학 때 시험을 봤다. 입학 때 보는 시험으로 반배정을 한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험은 의미가 없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않았다. 결국 본래 내 성적보다 낮게 나왔고 난 반의 5등인가 6등인가로 들어갔다. 그러나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루면서 나는 내 본래의 실력을 발휘했고 반 2등과 3등으로 시작해 중학교 2학년때는 전교 10등안에 들어갔고, 중학교 3학년때는 전교 1등을 했다. 한번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고 상승하기만 했다.

중학교 끝날 무렵에는 인문계 고등학교와 실업계 고등학교로 갈 학생들을 분류하기위해 연합고사라는 것을 본다. 중학교 3년 동안 역시 이 연합고사 준비를 위해 일년간 모의고사를 몇 차례 치룬다. 그러나 연합고사의 본래 목적은 인문계와 실업계를 나누기 위한 것이고, 모의고사는 연합고사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모의고사에 신경쓰지 않았고, 연합고사 역시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인문계와 실업계를 가르는 커트라인은 거뜬히 넘고도 남을 실력이 되기 때문이다.(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 이 글을 보면 욕할지 모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시험에 관한 것이므로 논점을 잘 파악해주시기 바란다. 또한 나는 내가 공부 잘했다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긴 하지만 그것으로 남들이 나를 판단하게 하는 우를 범하고 싶진 않다. 이 글에서 그것은 나의 시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남들 죽어라 공부할 때 책이나 보며 놀았다. 친구들은 내가 집에서는 엄청 공부할 것이라 했지만 친구들에게 시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해도 먹히지 않았고 더이상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으라지...

결국 난 연합고사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커트라인과는 충분히 먼 위치에 있었고 고등학교 1학년에 반 13등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나의 성적이 부끄러우신지 시험때 답안을 밀려썼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실제로는 중학교때 전교 1등도 한 아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이 거짓말을 묵과했다. 그러나 난 지금도 말할 수 있다. 반 13등으로 들어간 성적이 내가 제대로 시험친 성적이 맞노라고...

그후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나는 전교 4등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사람들은 어머니의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난 연합고사에 답안을 밀려썼노라고... 그후 고등학교 2학년에 이과반으로 진학하며 난 전교 1등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에도 역시 대학입학고사인 수능시험을 위해 모의고사를 본다. 이 모의고사는 중학교의 연합고사와는 다르게 하나의 기준을 중심으로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성적순대로 대학에 들어가는 지표가 된다. 그래서 나도 수능은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내신에 비해 모의고사는 한심한 점수가 나왔다. 그렇게 고생하다 어느 정도 선까지는 점수를 올려놨다. 그러나 올리면 뭐하랴? 실제 수능에서 못보면 그만인 것을...난 실제 수능에서 망쳤다.

그것으로 나의 택할 수 있는 대학은 그만큼 한정되었고 난 숭실대에 왔다. 그러나 난 수능을 못 본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고등학교 때 난 어느 대학을 가든 다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사람들이 서울, 연, 고대를 원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간판인가? 그렇다면 난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길을 가라고 강요하는데 있어서는 그만한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점수 높은 대학을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편해진다고... 그러나 난 그 논리를 거부했고 숭실대로 왔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경제국제통상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한 것 또한 내가 경제학과 경영학, 무역학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며, 나에게는 철학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난 그 논리에는 찬성할 수 없다. 숭실대에 온 나. 이번엔 영어와 컴퓨터, 자격증과의 싸움이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취직하기 위해선 영어, 컴퓨터,자격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 거부했다. 마지못해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 하나 땄다. 따고나니 뭔가 있긴 한거 같아 뿌듯하지만 필요는 없다. 쓸모는 없다. 난 대학내내 영어, 컴퓨터, 자격증 공부를 하지 않았다. 좀전에 언급한 워드프로세서와 운전면허빼고... 내 스스로 원하면, 필요하면 찾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가 원해서 나는 홈페이지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내 스스로 말이다. 필요하면 다 하기 마련이다. 굳이 먼저 나서서 강요할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군대갔다왔고, 한 학기를 마치고나면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다. 대학원에 가려면 전공지식과 영어점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선 영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필요'라는 것이 나온다. 필요하기 때문에 이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미리 공부하면 남주냐고? 미리 공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하겠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행해지면 된다. 필요하지 않으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한다 한들 나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남들 한다고 따라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라. 그리고 행하라. 그것이 내 삶의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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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동안 '현실' 안에서 철학함으로 인해 현실을 반성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현실 바깥에서' 철학함으로써 현실을 철학화하는 의식을 상실한 면이 없지 않았다. 우리는 '현실과 함께' 철학함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에만 서양의 텍스트를 읽든 동양의 텍스트를 읽든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현실에 대한 해석적 기능과 변혁적 기능의 무모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없는 현실은 맹목적이고 현실 없는 철학은 공허할 것이다. 이런 조건이 충실히 반영될 때에만 우리는 철학의 식민성을 극복하고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산 철학을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실 속의 철학 철학 속의 현실>(김석수 지음, 책세상)이라는 철학자 故 박종홍씨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담은 책의 겉표지에 쓰여져 있는 말이다.

이만큼 철학과 현실의 관계를 잘 설명한 말이 있을까 싶다. 어떤 철학자는 너무 구름에 붕 떠 이상만을 추구하고, 어떤 철학자는 너무 현실에 갇혀 이상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 중간에 자리잡는 것은 쉬울듯하면서도 매우 어렵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현실을 가까이 두고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나의 마음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있다. 즉 이상을 이루기 위해 현실을 바라보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나는 현실을 먼저 바라보기 보다 이상을 먼저 바라보고, 이상에 맞춰 현실을 개혁하고 혁명을 꿈꾸려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불가능한 이상이 되지 않도록 이상을 현실에 가까이 놓으려한다. 플라톤이나 헤겔 그들의 철학은 체계적이었으나 너무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 그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어느 정도 달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바라보지 못한,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를 바라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인간은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는데 마르크스는 평등을 외쳤다.

나는 계속해서 현실을 바라보며 이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이 언제 완성될지, 완성되기는 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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