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천재는 악필이다" 라는 명제의 진리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었다. 글씨 전문가를 데려다가 흔히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의 글씨를 보여주고 평가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천재 베토벤이나 아인슈타인 등의 친필을 보여주었고, 그들 중 일부는 악필이었으나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또 우리나라에서 아이큐 150이상이라는 멘사단체에 가서 같은 실험을 하였고, 역시 위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다음으로 조수미나 김병지, 최용수, 조성모 등의 사인을 받아와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갖었고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담이지만 이들을 누가 천재라 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이 선발됐다는 것은 곧 이들이 천재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글씨 전문가가 악필과 그렇지 않은 글씨를 구분하는데 있어 사용하는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다른 전문가가 봤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문제를 따질 사안이 아니고,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든 생각은 나의 글씨는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경필대회를 했는데, 무슨 글씨를 썼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난 그때 동상인가를 받았다. 물론 이 심사가 객관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떠나서 내 글씨가 동상을 받을 만큼 잘 쓴 글씨였다는 것에 굉장히 기뻤었다. 다음 학년에 올라서는 이 사건 때문인지 나는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글씨를 봐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이 시기의 아이들은 글씨체를 가지고 우열을 가리곤 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두 여자아이가 서로 자신의 글씨가 더 낫다면서 나에게 심사를 의뢰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내가 뭔가 된 것인양 두 글씨를 평가해줬고, 어느 한쪽을 편든것 같지는 않았다. 둘 다 만족스럽게 평을 내렸던 듯...

 한편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이가 들수록 나의 글씨는 아주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것은 초등학교때는 수업시간에 필기를 많이 하지 않는데 비해, 중고등학교에서는 매 시간마다 엄청난 필기량을 소화해내야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빨리 쓸 수 밖에 없었고 여기서 내 글씨체가 엉망이 되어버린듯하다. 지금도 나는 정성껏 쓸래야 쓸 수가 없다. 그냥 쓰나 정성껏 쓰나 그 글씨가 그 글씨다. 그래서 나는 내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컴퓨터 키보드로 글을 쓰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속도도 더 빠르고, 나의 손이 나의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러나 글씨를 직접 쓸 때는 씌여지는 글씨체도 짜증나고, 내 손이 내 생각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속상할 때가 많다.

 미국 사람들은 주로 컴퓨터 키보드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악필이라고 한다. 그들은 키보드를 사용해서 악필이 된 것이지만 나의 경우는 악필이기때문에 키보드를 사용한다고 봐도 될 듯하다. 종이에 써도 될 것을 키보드로 쓰니 말이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사람들에게 메모 한 장을 남길 때도, 소중한 친구에게 좋은 글을 써서 줄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도, 악필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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