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이 나 모르게 나의 습관이나 행동양식 등을 따라하는 것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싫어한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하려고 하지 않고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예외로 하고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아는 어떤 사람이 나의 행동이나 습관, 흔적들을 보고서 그것을 익히고 따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내 나름대로 필기를 하고 체크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남이 내 방식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따라하면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공부를 해오며 습득해온 나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자기 습관을 익히면 될터인데 나를 따라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지금과 같은 나의 글쓰기 방식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매우 불쾌할 것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방식이 있을텐데 남의 것을 왜 따라하느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그럼 넌 남의 방식 따라한 적 없느냐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어떤 분야에 미숙해 양해를 구하고 그들의 것을 배우거나 따라한 일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정말 그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 '모름'을 인정하고 행한 일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내가 나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모르기 때문에 배우겠다는 것, 따라하겠다는 것과 자신이 그것을 처음부터 사용한 것인양 행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후자의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속였고 남을 속였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라. 미숙하면 미숙하다 인정하라. 그렇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배우고, 모방하고, 가져오겠다면 그 누구든 그를 따뜻이 대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회의 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우리사회의 논객들 각각은 그 나름대로의 글쓰기의 스타일이 있다. 강준만 교수 같은 경우는 글을 거침없이 쓰면서도 모든 사람이 알아듣도록 쉽게 쓰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어떤가? 나는 글을 쓸 때 어떻게 쓰는가? 어렵게 쓰는가? 쉽게 쓰는가? 내가 글을 어려우면서도 쉽게 쓰려고 한다. 무슨 이상한 논리냐 할지 모르지만 할 말을 다 하면서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려 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지식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다음에 내가 쓸 글에서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생경한 용어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이 쉽게 쓴다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논리적인 글은 사람들이 읽기에 한눈에 들어오는 글을 말한다. 거기에는 함정이 없다. 그냥 읽으면 바로 들어올 뿐이다. 그런면에서 논리적인 글은 쉬운 글이다.  

전에 나는 내 글쓰기 방식을 자유연상식 글쓰기라고 한 적이 있다. 즉 붓가는대로, 키보드위에 손가는대로 쓰는 글이란 말이다. 어떤 것을 쓰다가 다른 것이 생각나면 거기에 연관시켜 또 쓰고, 또 쓰다 다른 것이 생각나면 또 연관시켜 또 쓰고...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선에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글쓰기의 단점은 쓰면서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고 지나갈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끊어줄 필요가 있다. 자유연상식 글쓰기는 독자가 읽기에 가장 편안한 글쓰기다. 그냥 따라오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실을 가지고 미궁속으로 들어갔다가 실을 따라 미궁을 빠져나오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다. 그럼 내 글은 쉬운글? 어려운글?
결론은 쉬운 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람마다 글을 쓸 때 어렵게 쓰는 사람이 있고, 쉽게 쓰는 사람이 있다. 어렵게 쓰여진 글에는 보통 사회학적, 철학적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외래어나 한자어의 사용이 잦다. 쉽게 쓰여진 글에는 가급적 한글전용으로 쓰려고 한 노력이 엿보이고, 어려운 외래어나 전문용어, 한자어는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둘 중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글의 성격에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적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렵게 쓰여진 글은 그것 나름대로, 쉽게 쓰여진 글은 그것 나름대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라면 쉽게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문용어가 많이 들어가고, 한자, 외래어가 많이 들어간 글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글이고, 머리아픈 글이다.

그러나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어렵게 쓴 글은 좋은 글이 아니지만 어려운 용어를 들어가며 쓸 수 밖에 없는 글이 있기도 하다. 철학책이 가장 대표적이다. 철학자들은 일부러 그들만의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철학을 논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쓸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석판명하게 드러내려면 그런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상의 용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야 했고 그것으로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용어들이 시대를 지나오며 계속 해서 만들어지고 지금의 철학책처럼 알 수 없는 글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철학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표면상 어렵게 보이지만 그 핵심 용어를 파악하고나면 그 구조가 쉽게 들어오는 것이 철학책이다.

그것은 어려우면서 쉬운 글이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집은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지금의 기억으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조선일보를 봤었다. 그러다가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 두 가지 모두 월 10,000원에 구독할 수 있다기에 한국일보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3학년때로 상당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를 보건, 한국일보를 보건, 한겨레를 보건 다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똑같다고 생각했다기 보다 그때까지는 세상 돌아가는 꼴(?)에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관심이 있었다면 그만큼 신문의 논조나 편집방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정치인은 누구건 다 똑같이 못된 놈들이고 맨날 욕하고 싸움질이나 하는 녀석들이다 라고 주장하는 정치인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는 부류이고, 또 하나는 분명 내 생각에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데 저 정치인은 그렇지 못하다 라고 생각하는 자기 주관적 생각에 비추어 이에 합당하지 않은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부류이다.(후자는 내 의견과 다르다고 무조건 비판하는 부류와 평화와 자유, 평등 등의 보편적 이념 차원에서 옳지 못한 의견을 비판하는 부류로도 나누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 2학년때까지는 전자의 '싸잡아비욕하기파'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투표권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 소중한 한 표를 난 쓰레통에 버린 것이다.

위의 예는 정치의 영역에 국한 시키기는 했지만 그만큼 내가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한국정치문제, 경제문제, 국제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각종 신문들의 '다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신문을 보면서 '글자'는 읽되, '내용'을 읽지 못한 문맹이었던 것이다.  

이제 눈을 뜬 나는 주된 몇몇 신문들을 보고서 나름대로 그것을 분류하는 기준이 생겼다. 이는 나보다 먼저 눈 뜬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먼저 한 부류는 보수적 시각으로 쓰여진 '조선''중앙'동아'일보이다. 이 세가지 신문의 특징을 말하자면 먼저 조선일보는 자칭 대한민국 1등 신문이라는 둥,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둥 외치고 다니고 있다. 할말은 하는 신문이라... 이에 대해 전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할말은 하는 신문'이 아니라 '못 할 말을 하는 신문''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는 신문'이라 평했다. 개인적으로 이는 아주 적절한 지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일보를 보고있노라면 마치 하나의 소설을 읽고 있는 기분이다. 어쩜 그리도 잘 짜맞추고 있는 말 없는 말 조각조각 잘 끼우는지. 그런데 그것이 순수하게 정말로 소설이라면 문제가 될게 없겠지만 사실을 소설화시킴으로써 국민을 우롱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조선일보를 보는 국민들은 대다수 그들의 논조에 '길들여져' 소설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로 중앙일보. 중앙일보에서는 조선일보와 같은 감수성(?) 깊은 소설과 같은 느낌은 받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극단적 시각이 들어가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그들은 극단적 비판을 일삼고 있다. 그것이 전혀 비판받을 개재가 없는 단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정부비판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매한 군중 중에서도 극히 우매한 군중(단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관심이 있는 군중에 한함)이 아니라면 그들의 기사를 보면서 매사에 극단적인 그들의 논조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1등 신문이 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셋째로 동아일보. 사실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크게 할 말이 없다. 위 두 신문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수우익의 논조를 가지고 있음은 더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음 부류는 한국일보 등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문이다. 한국일보를 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사안에 대해 항상 양쪽 모두의 의견을 실으려 한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객관적이면서도 어찌보면 주관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이들의 생존전략인지도 모른다. 간혹 한국일보 사장의 개인적인 견해에는 객관적인 듯하면서도 결국은 보수우익의 손을 드는 미묘한 글로써 한국일보를 중도우파로 끌어가려는 장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한국일보는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 함은 사안의 타당함, 옳음과는 상관없이 그 사안에 대해 편이 갈리는 양쪽의 주장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 고종석씨나 박래부 편집위원의 글은 반대편에서 신문의 논조를 이끌며 중립을 유지해준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와 같은 진보적 신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홀로 진보의 길을 걸으며 외로운 투쟁을 하는 신문이다. 어떤 이는 그들이 진정 진보적이냐 라며 아직 멀었다고 외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이 시대의 진보를 내세우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민, 억압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겨레를 가장 좋아한다.

여기서 그런데 왜 너는 한국일보를 보느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게다. 나는 한국일보와 한겨레 모두 보고 싶다. 그러나 집안 경제적 사정상 한 가지만을 봐야하고 서울경제신문을 보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한국일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한국일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조중동을 볼 바에야 한국일보같이 양쪽의 입장을 모두 보여주는 신문을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국일보를 읽으면 조중동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능하며 또한 한겨레가 이 사안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다루었겠구나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여담이지만 한겨레는 어머니께서 가끔씩 공짜로 가져오실때도 있고, 학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한겨레신문이기에 굳이 둘다 구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즉 나는 지금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른 신문에도 실렸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2001년 7월 24일자 서울경제신문 2면 하단에는 노동부의 광고가 실려있었다. 혹 이 광고내용이 HTML문서로 되어있나 노동부 홈페이지( http://www.molab.go.kr)에 가봤지만 광고내용에 대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여기서 그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광고박스를 기준으로, 좌측상단에는 작게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갑시다"라고 쓰여있었으며, 중앙에는 "떠나는 직원의 미래를 열어주겠습니다."라는 커다란 고딕체의 글씨와 아래로 " "노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이 공허한 구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불가피하게 함께 일하던 사원과 동료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해도 그 분들은 여전히 여러분들과 한가족이어야 합니다. 떠나는 직원의 앞길을 열어주는 일은 남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노사가 함께 하는 재취업 프로그램, 노동부가 지원합니다.", "노동부는 2001년 7월 23일부터 고용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직근로자 혹은 이직예정근로자가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회사에 장려금을 지원합니다.", "자세한 지원 절차는 노동부 고용안정센터로 문의 바랍니다. 전국 어디서나 1588-1919" 라는 문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노동부가 외치는 말은 좋다. 마냥 좋게만 들린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가자는데 도대체 누가 누구와 함께 가자는 것인가? 그 밑에 문구를 보고 추정하건대 아마도 함께 가는 사람은 노씨와 사씨라는 사람인가보다. 그런데 이를 어찌한다?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건대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가는 것은 노씨와 사씨가 아니라, 노씨와 노씨일 뿐이니 말이다. 아니 사씨는 그럼 어디갔나? 화장실에 갔나? 해외로 떴나?

 지금 나는 노동부의 광고문구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어려울수록 그들이 정부가 그들을 끌어안고있다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실의에 빠진 노동자에게 다시 한번 해보자는 희망과 의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 선전문구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정말로 정부가 그들을 끌어안고서 뛰든 걷든 기든간에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면이 많다. 나만 그렇게 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국민,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신 자유주의네, 세계화네, 구조조정이네 하는 단어들이 신문지상을 도배하는 동안 우리 국민들은 하나 둘 잘려나가고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이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면 할수록 평범하게 그럭저럭 살고 있던 더 많은 국민들이 노숙자가 되어가고, 가정이 파탄나고 있다. 이혼률로 볼때 과히 '선진국'이라 할 수 있으며, 고아원, 양로원에는 버림받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모습들이 정부가 외치는 '함께 가자'는 의미인가? 모두 함께 망하자, 파탄나자, 나 혼자는 못죽으니 너희들도 같이 다 죽자! 이런건가? 물귀신이 따로 없다.

 물론 국가경제가 무너지면 국민 개개인의 경제 또한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국가경제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그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것의 대상이 잘못 선정되었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왜 그 희생은 항상 국민이어야 하고, 노동자이어야 하는가? 열심히 회사를 위해 평생을 몸과 마음을 받쳐가며 일하던 사람을 회사가 어렵다고 쉽게 잘라버리고 한순간에 내쫓을수가 있는가? 그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것은 항상 노동자나 국민을 통해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회사는 말단 직원에게 "너 나가!"라고 외치면서, "어려우니까 봉급 삭감하자"라고 외치면서, 왜 정작 윗대가리들은 예전과 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가? (이에 대해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외칠 수 있는 분들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회사의 중책이면서 자신의 봉급을 먼저 삭감하고 직원들을 배려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 회사로부터 억울하게 쫓겨나고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희생에 대해서 회사나 국가에 당연히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있으며, 이는 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개인 각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힘들다. 들어줄 곳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약한 자는 자신의 억울함조차 말할수 없는 곳이 대한민국 아니었던가? 억울한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시선을 끌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탄압하려는 자가 있으니 그것이 경찰이요, 정부다. 부평 대우자동차 사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 하지만 한국에서는 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의 경찰들의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내 나이 이제 23살으로 직접 겪어보지 못한 말로만 들어오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군부탄압과 맞먹는 것이었다. 두 사건 모두 직접 현장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평 대우자동차 사태를 화면으로 접했을 때 나의 뇌리엔 광주 민주화 운동 사태가 스쳐지나갔다. 당시는 파시즘적 일인 독재자 박정희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평생 민주화를 외치던 김대중 정부가 아니었던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바로 그 꼴이다. 부천 대우자동차 사태에 대해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당시 그들 전경을 지휘한 간부급 경찰들이 직위해제 당했다가 최근에 다시 복직했다고 한다. 말로는 3개월간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직할 수 있다는 경찰 무슨 규정에 의거한다나 뭐라나. 당시 여론이 직위해제로 몰리자 해제했다가 이제 잠잠하니까 다시 돌려놓겠다 이건가?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아주 적절히 이용한 사례라 하겠다.

 결국 내가 이렇게 주절거리며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뭐냐고 물을 수 있겠다. 지금의 현실로 볼 때 노씨와 사씨가 함께 가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부는 '함께가자'라고 외치고 있다면 말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노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은 이제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노동부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다. 남은 사람들이 잘린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한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이 또한 노씨는 노씨를 돕는데, 사씨는 노씨를 안돕는다. 성이 틀려서 그런가? 여기서 나는 최근에 신문에 났던 한 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기초자의 서두칠 사장이라 했던가. 제품생산을 감산하기 위해 인력을 감축하라는 일본 본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 의하면 서두칠 사장은 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끌어올려 성공한 기업으로 만들었는데 이제와서 제품생산 감산을 위해 함께 한 직원들을 자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에 이를 거부하다 단칼에 목이 달아났다. 서 사장이 물러난 뒤로 이 회사의 주가는 쭉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를 일본 본사와 국내 자회사의 관계로만 보지 말자. 일본 본사를 정부나 우리나라 기업체에 비유하고, 서두칠사장을 노동자로 볼때, 쭉 떨어진 주가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인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나 정부가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노동자나 국민들 가벼이 볼 때 기업과 노동자, 정부와 국민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만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이끌고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 힘들어도 같이 힘들고, 쉬더라도 같이 쉬는 것이다. 진정 함께 할때 노동자와 국민은 기업과 정부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노동부가 외치듯 이제는 '노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도록 하자. 그것이 단순 선전문구로 그쳐서는 안된다. 진실된 행동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노동자와 국민을 감싸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이 살수있도록 길을 만들어주자. 날아오는 수 많은 화살을 앞서 뚫으며 나아가는 장군에게는 그만큼 따르는 병사가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