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신문에도 실렸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2001년 7월 24일자 서울경제신문 2면 하단에는 노동부의 광고가 실려있었다. 혹 이 광고내용이 HTML문서로 되어있나 노동부 홈페이지( http://www.molab.go.kr)에 가봤지만 광고내용에 대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여기서 그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광고박스를 기준으로, 좌측상단에는 작게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갑시다"라고 쓰여있었으며, 중앙에는 "떠나는 직원의 미래를 열어주겠습니다."라는 커다란 고딕체의 글씨와 아래로 " "노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이 공허한 구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불가피하게 함께 일하던 사원과 동료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해도 그 분들은 여전히 여러분들과 한가족이어야 합니다. 떠나는 직원의 앞길을 열어주는 일은 남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노사가 함께 하는 재취업 프로그램, 노동부가 지원합니다.", "노동부는 2001년 7월 23일부터 고용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직근로자 혹은 이직예정근로자가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회사에 장려금을 지원합니다.", "자세한 지원 절차는 노동부 고용안정센터로 문의 바랍니다. 전국 어디서나 1588-1919" 라는 문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노동부가 외치는 말은 좋다. 마냥 좋게만 들린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가자는데 도대체 누가 누구와 함께 가자는 것인가? 그 밑에 문구를 보고 추정하건대 아마도 함께 가는 사람은 노씨와 사씨라는 사람인가보다. 그런데 이를 어찌한다?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건대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가는 것은 노씨와 사씨가 아니라, 노씨와 노씨일 뿐이니 말이다. 아니 사씨는 그럼 어디갔나? 화장실에 갔나? 해외로 떴나?
지금 나는 노동부의 광고문구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어려울수록 그들이 정부가 그들을 끌어안고있다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실의에 빠진 노동자에게 다시 한번 해보자는 희망과 의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 선전문구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정말로 정부가 그들을 끌어안고서 뛰든 걷든 기든간에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면이 많다. 나만 그렇게 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국민,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신 자유주의네, 세계화네, 구조조정이네 하는 단어들이 신문지상을 도배하는 동안 우리 국민들은 하나 둘 잘려나가고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이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면 할수록 평범하게 그럭저럭 살고 있던 더 많은 국민들이 노숙자가 되어가고, 가정이 파탄나고 있다. 이혼률로 볼때 과히 '선진국'이라 할 수 있으며, 고아원, 양로원에는 버림받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모습들이 정부가 외치는 '함께 가자'는 의미인가? 모두 함께 망하자, 파탄나자, 나 혼자는 못죽으니 너희들도 같이 다 죽자! 이런건가? 물귀신이 따로 없다.
물론 국가경제가 무너지면 국민 개개인의 경제 또한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국가경제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그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것의 대상이 잘못 선정되었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왜 그 희생은 항상 국민이어야 하고, 노동자이어야 하는가? 열심히 회사를 위해 평생을 몸과 마음을 받쳐가며 일하던 사람을 회사가 어렵다고 쉽게 잘라버리고 한순간에 내쫓을수가 있는가? 그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것은 항상 노동자나 국민을 통해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회사는 말단 직원에게 "너 나가!"라고 외치면서, "어려우니까 봉급 삭감하자"라고 외치면서, 왜 정작 윗대가리들은 예전과 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가? (이에 대해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외칠 수 있는 분들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회사의 중책이면서 자신의 봉급을 먼저 삭감하고 직원들을 배려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 회사로부터 억울하게 쫓겨나고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희생에 대해서 회사나 국가에 당연히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있으며, 이는 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개인 각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힘들다. 들어줄 곳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약한 자는 자신의 억울함조차 말할수 없는 곳이 대한민국 아니었던가? 억울한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시선을 끌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탄압하려는 자가 있으니 그것이 경찰이요, 정부다. 부평 대우자동차 사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 하지만 한국에서는 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의 경찰들의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내 나이 이제 23살으로 직접 겪어보지 못한 말로만 들어오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군부탄압과 맞먹는 것이었다. 두 사건 모두 직접 현장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평 대우자동차 사태를 화면으로 접했을 때 나의 뇌리엔 광주 민주화 운동 사태가 스쳐지나갔다. 당시는 파시즘적 일인 독재자 박정희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평생 민주화를 외치던 김대중 정부가 아니었던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바로 그 꼴이다. 부천 대우자동차 사태에 대해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당시 그들 전경을 지휘한 간부급 경찰들이 직위해제 당했다가 최근에 다시 복직했다고 한다. 말로는 3개월간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직할 수 있다는 경찰 무슨 규정에 의거한다나 뭐라나. 당시 여론이 직위해제로 몰리자 해제했다가 이제 잠잠하니까 다시 돌려놓겠다 이건가?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아주 적절히 이용한 사례라 하겠다.
결국 내가 이렇게 주절거리며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뭐냐고 물을 수 있겠다. 지금의 현실로 볼 때 노씨와 사씨가 함께 가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부는 '함께가자'라고 외치고 있다면 말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노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은 이제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노동부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다. 남은 사람들이 잘린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한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이 또한 노씨는 노씨를 돕는데, 사씨는 노씨를 안돕는다. 성이 틀려서 그런가? 여기서 나는 최근에 신문에 났던 한 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기초자의 서두칠 사장이라 했던가. 제품생산을 감산하기 위해 인력을 감축하라는 일본 본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 의하면 서두칠 사장은 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끌어올려 성공한 기업으로 만들었는데 이제와서 제품생산 감산을 위해 함께 한 직원들을 자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에 이를 거부하다 단칼에 목이 달아났다. 서 사장이 물러난 뒤로 이 회사의 주가는 쭉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를 일본 본사와 국내 자회사의 관계로만 보지 말자. 일본 본사를 정부나 우리나라 기업체에 비유하고, 서두칠사장을 노동자로 볼때, 쭉 떨어진 주가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인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나 정부가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노동자나 국민들 가벼이 볼 때 기업과 노동자, 정부와 국민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만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이끌고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 힘들어도 같이 힘들고, 쉬더라도 같이 쉬는 것이다. 진정 함께 할때 노동자와 국민은 기업과 정부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노동부가 외치듯 이제는 '노사는 한 가족'이라는 말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도록 하자. 그것이 단순 선전문구로 그쳐서는 안된다. 진실된 행동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노동자와 국민을 감싸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이 살수있도록 길을 만들어주자. 날아오는 수 많은 화살을 앞서 뚫으며 나아가는 장군에게는 그만큼 따르는 병사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