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너무 삶의 한쪽만 보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홈페이지는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은 애써 감출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그 사람의 성향이나 취향, 성격 등이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래서 나는 내 홈페이지와 다른 사람의 홈페이지를 비교해봤다. 내 홈페이지는 비록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다녀간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홈페이지는 나보다 더 많이 다녀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숫자를 떠나서 온전히 홈페이지가 내보이는 이미지, 내용물만을 본다면, 내 홈페이지는 너무도 삭막하다. '이성'중심적으로 운영이 된달까? 내가 감성보다는 이성에 치우진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일테지만 갑자기 나는 이런 내가 싫어졌다. 그러나 이는 나의 '이성'중심적 삶이 싫다기 보다는 '감성'중심의 삶이 소외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때문에 싫어진 것이다. 둘다 살릴 수는 없을까?

사실 내게 감성이 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 때문에 감성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두렵다. 다른 이들이 나를 너무 딱딱한 존재로 보는 것이 말이다. 난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물어본 것은 아니다. 친한 몇몇 이들에게 물음을 던진 적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내가 그렇게 접근하기 어렵고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나에 대한 배려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이 실제 그들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인상이라면 나는 오히려 타인이 나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내 스스로의 허황된 이미지를 만들어놓고는 사람들이 나를 친숙하지 않은 존재로 파악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나는 가벼운 사람이 되기보다는 무거운 사람이 되고싶어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사람은 얕잡아보기 쉽고 무시당하기 쉽다. 하지만 무거운 사람은 함부로 대하기 어렵고 무시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타인이 나를 보는 이미지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을 싫어하면서 말이다. 이런 모순된 내가 있나...

모순덩어리.... 나...

마치 나는 나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럴 때 보면 나는 나를 모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쉽게 대답한다.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서전'을 쓸 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골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말이다. 나의 인생에서 밝히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면서 기억에서 삭제해버린다. 그리고 출간된 '자서전'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거짓덩어리... 어쩌면 나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거짓덩어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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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사회, 윤리 혹은 정치경제 교과서를 통해 그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상당 기간이 흘러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볼테르의 <관용론>, 존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과 함께 짝짓기 시험을 대비했던 기억이 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현재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본 책과 범우사에서 나온 또다른 번역본,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범우사 번역본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으나 이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다른 고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접해보고 실망감을 느꼈던지라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 게다가 범우사 번역본 보다는 서울대출판사 번역본이 판매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좀더 신뢰할 수 있을 것으로 미뤄 서울대 번역본을 읽었다.

 <에밀>을 정식으로 읽은 것이 아닌, 책세상문고판으로 1부만 번역된 책을 읽었고, 같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바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접함으로써 그를 세번째 만난다.

 <사회계약론>은 본래 루소가 젊은시절부터 평생의 대작으로 꿈꾸었던 <정치경제론>에서 발췌해 내놓은 저서이다. 그는 <정치경제론>을 집필하던중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느끼고 이미 집필된 논문 중 <사회계약론>만을 따로 묶어 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루소는 책의 앞머리 '독자에게'에서 밝혀두고 있다.

 제 1장의 제 1부의 주제에서는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루소의 명언이 나온다.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있다"

 이후로 그는 초기사회, 강자의 권리, 노예제도, 사회계약, 주권자, 물건, 사회신분, 생산권, 법, 국민, 입법, 정부, 투표, 선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사회계약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펼쳐놓고 있다.
 
 <사회계약론>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에 따라 몇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장들이 글이 길지 않은데다 쉽게 쓰여져있어 소설읽듯 읽어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

 1부에서는 사회계약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 초기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강자와 권력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는지, 노예와 권력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회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에 간하여 기본적인 사안들을 다룬다. 2부에서는 주권, 법, 국민의 관계에 대해서 논한다. 주권은 전체 의사의 행사로서 양도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다. 3부에서는 정부와 정부의 여러 형태, 즉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2부에서 말한 법을 집행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하며, 정부의 한 형태인 민주정치는 전 국민, 혹은 절대다수의 정부이고, 귀족정치는 소수에 의한 정부, 군주정치는 한 사람에 의한 정부형태이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로마 정치사를 예로 들며, 전체의사는 때때로 잘못 인식된다 해도 결코 파괴될 수 없고 항상 절대다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루소가 살던 시기는 18세기로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홉스, 볼테르, 로크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등장했던 시기이고, 이들이 함께 뭉쳐 백과전서파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루소가 디죵 아카데미의 논문현상공모에 응해 상받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출간하고,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내놓으면서 저들로부터 멀어져가게 된다. 심지어 볼테르는 그를 향해 "인간을 네 발로 기는 짐승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이는 볼테르 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관계를 맺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었고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루소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소는 사회와 문명 자체를 비판하고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회적 질서를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모든 악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잘못 통치한 인간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크게 위안이 되고 매우 유용한 것을 알게 할 것이다"(<나르시스>의 서문)

 루소는 결국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되돌리려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법의 인위적이고 예속적인 체제 가운데 자연적 법의 순수한 자유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은 그를 오해함으로써 루소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루소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은 그의 저서를 보면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 타인을 비판을 의식하며 어떤 문제가 제기될까 하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쟁이에게는 지나친 기대다. 대개의 비판은 글이 출간된 이후에 벌어지며 다수의 비판 속에 소외된 저자의 목소리는 이미 그들에게 묻혀버린 뒤다. 루소는 그래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내는데 그것이 <고백록>이고, 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다. 또,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자기 스스로를 위한 글을 묶어냈는데 이것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추가 언급할 것은,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 로크의 <시민정부론> 혹은 <통치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더불어 함께 읽으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아직 <사회계약론>이외에는 본 책이 없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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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행정수도를 이전하던말던 이에 관해서는 크게 의견이 없지만,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헌재의 판결결과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나는 민노당과 열린우리당 양당 지지자다. 유럽식의 좌파 우파 개념에서 볼 때 열린우리당은 너무나 우파이고, 민노당은 약간 좌파이다. 사실 한나라당은 극우는 아니라더라도 적극적 우익은 되기 때문에, 이념상 중간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념의 스펙트럼 위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사라지는 것이 옳다. 그리고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붙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당과 민노당을 지지한다.

 어쨌든 내가 지지정당을 밝힌 이유는 그렇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양당의 입장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행정수도를 이전하자고 했고, 민노당은 이전하지 말자고 했다. 물론 지지정당에 따라 나의 줏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기본적인 스스로의 사유를 기초로 한 뒤 지지정당이 결정되는 것인데, 나는 민노당과 열린우리당의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지역분배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정책이다. 하지만 굳이 행정수도 이전을 하지 않고도 지역의 고른 발전을 꾀할 방법은 있다고 본다. 반면, 나는 지역발전을 위해 행정수도이전을 하려는 정부의 장기적인 계획을 굳이 반대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열심히 일해보겠다는데 왜 반대하는가? 그게 그리 크게 문제될만한 정책도 아니지 않는가? 서울에 있던 행정기관이 충청도로 간다고 해서 서울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서울은 여전히 가장 큰 도시로 남을 것이다.

 한편,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매우 유감스럽다. 이들의 판결이 극히 정치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법학자도 아니고 법학도도 아니라 법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언론에 명시된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린 근거를 볼 때, 위헌 판결에 '관습법'을 끌어들인 것은 법을 모르는 내가 봐도 참 의아하다. 내가 법을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법이 해석되고, 적용된 내용이 이상하기 때문인가?

 위헌판결 이후 수도권 대학의 법학교수들을 대상으로 본 내용에 대한 의견을 조사했나보다. 그런데 대부분 위헌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일부 소수만이 동의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보고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법학교수들이 위헌이 아니라는데 그렇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는 '해석'의 문제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끊임없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 해석의 대상이 텍스트이든, 사람이든, 일상이든, 정치, 사회, 법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행위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 해석이 잘못될 경우 '오해'가 생겨날 수 있다. 해석을 제대로 해서 '이해'를 해야할텐데 잘못하면 '오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해가 발생한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이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성서를 연구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던 해석학을 최초로 학문으로 정립한 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는 이해의 전제"라고 말했다. 그래. 이해하려면 중간에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헌재 판결관들의 위헌판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들어있다. 이들은 수도이전이 아닌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판결임에도 불구하고, 신행정수도에 대해서 판결내린 것이 아니라 '수도이전'이라는 엉뚱한 사안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국가 정치, 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고 있는 수도로 건설되는 지역"이라는 특별법의 제 2조 1호와 2호를 근거로 해서 아예 판결대상을 '수도이전'으로 명시해버렸다. 처음부터 '오해'를 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자신들이 판결해야할 대상이 뭔지도 모르는 데 제대로 된 판결내용이 나올리 만무하다.

 또, 명문화 되지도 않은 관심법인지 관습법인지 하는 것을 끌어들여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국민들의 머리속에 인식되어온 개념이기에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투표에 붙여야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아니 지금 수도가 서울인 것은 알겠는데, 수도가 서울이어야하나? '서울이 수도이다' 라는 '사실명제'로부터 '서울이 수도여야한다'라는 당위명제가 나올 수는 없다. 논리적 비약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터 끌어올 것이 아니라 저 고조선부터 끌어들여오면 안되는 것인가? 왜 하필 조선시대인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관습법을 적용하면, 네티즌들의 말마따나 과거부터 남자가 호주라는 사실은 관습으로 굳어져왔기에 호주제를  폐지해서도 안되며, 과거부터 성매매가 없던 시기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 시행하고 있는 성매매특별법을 시행해서는 안되며, 과거부터 공대생들은 대장장이 정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므로 각종 고시를 볼 자격을 줘서는 안되며, 예로부터 여자는 집구석에 처박혀 집안일만 했으므로 직장을 따로 가져서는 안된다. 자 이제 조선시대로 돌아가자~ 얼씨구나~

 헌재가 이런 식으로 관습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다보면, 이제 정치는 헌재가 하게 될 것이다. 여야가 싸우다가 헌재로 툭 던져버리면 헌재는 '관심법'을 가지고 어허 이리이리하거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싸우던 여야는 예이~ 하고 명령을 곧장 수행해야한다. 이제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지 말고 헌법재판관을 뽑아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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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 제 1부, 제 2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사회 형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것은 바로 가족사회이다. 이 가족사회에서마저도 자식들은 자신의 생존에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한 동안만 부자간의 유대를 계속할 뿐이다. 이 필요성이 없어지자마자 이 자연적 유대도 이내 끊어진다. 그렇게 해서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양육의 의무에서 벗어나, 쌍방은 모두 똑같이 독립하게 된다. 그러고도 이들이 계속해서 결합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연적이 아니라 의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사회 자체도 결국은 규약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제2장의 제목은 '초기사회에 관하여'이다. 루소는 '사회계약'이 성립되는 가장 최초의 것을 가족으로 보고, 가족에서조차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닌 서로간의 계약을 통해 맺어진 사회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후의 발전된 사회 '정치적 사회'의 모형으로 '가족사회'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말이 가족이지, 우리는 실제로 가족이란 사회 내에서 서로의 암묵적인 계약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가족사회가 붕괴된다 어쩐다 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가족사회 내에서의 '계약이 해지되는 상태'라는 것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사회가 붕괴하고 있다는 현대사회에서뿐 아니라 루소가 살고 있던 근대사회 혹은 더 이전으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가족이 '계약관계'로 성립되어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가족사회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은, '계약이 해지되는 상태'가 숨어있는 것 이외에도 무언가가 더 있다는 말일테다. 예전에는 가족사회의 붕괴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상적인 계약관계에 추가적인 이상이 생겼다는 말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일단 루소가 언급한 가족조차도 계약으로 맺어졌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단지 그 '계약'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차갑고 딱딱하고 형식적이기에 서로가 언급하기를 꺼릴 뿐이다.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아버지, 어머니와 계약을 맺었고, 아직까지도 계약상태에 있다. 물론 구체적인 시한을 정해놓은 계약은 아니다.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교육을 받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온갖 것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무조건적으로 보이는 혜택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된다.

우리집에서는 아버지가 퇴직한 이후 뭔가를 하고 계시긴 한데 뭔지는 모르겠고, 정식으로 직장에 다니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에서야 돌아와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다음날 밥과 반찬을 해놓고 주무신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에 일찍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들어와서 저녁밥을 챙겨주기전까지는 스스로 차려서 드시는 적이 없다. 밥과 반찬이 모두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부분이 불만스러웠고,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내 계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침묵함으로써 복종했다.

아주 구체적인 일례만을 들었지만 이는 나와 아버지가 맺고 있는 계약으로 인한 나의 자발적 복종의 한가지 유형일 뿐이고,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데 이내 내가 이랬다가는 계약이 해지될거란 두려움 말이다. 이 계약은 아마도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순간 해지될 것이고, 그 때 이후로는 나의 발언수위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족사회가 계약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렇게 살펴봄으로써 증명이 됐고, 그렇담 현대사회에 와서 과거와는 달리 가족사회의 붕괴를 언급하는 하는 것은 왜일까?

이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아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찾아 볼수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또한 가족사회이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 또한 가족사회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가족의 붕괴는 부모와 자식이 아닌 남편과 아내의 가족개념인 것이다.

과거 남편은 돈을 벌고, 아내는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가족사회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 제도적으로 대대적인 수정이 이루어졌고, 이로써 여권이 신장했다. 여성들이 집안에 갇혀있지 않고 사회로 진출함으로써 돈을 벌어오게 되었고, 이제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경제적인 권력을 각자 손에 쥐게 됨으로써 과거 가족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아내가 남편에서 복종하는 형태의 계약관계는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계약이 느슨해지거나 없어짐으로써 이들은 손쉽게 미계약상태로 존재하게 되었고, 만남과 헤어짐이 쉬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로 구성된 가족사회는 쉽게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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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 서점 알라딘 편집장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내가 알라딘에 쓴 <책문>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KBS 'TV 책을 말하다' 제작진이 보고서 글이 좋다고 알라딘측으로 섭외요청을 해왔다는 것이다. 알라딘 편집장은 제안을 받겠으면 신상에 관한 정보를 달라고 했고, 나는 약간의 망설임끝에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KBS측으로부터 어제 저녁 전화가 왔다. 학교로 가겠노라고...

그리고 오늘. 수업이 끝나고 KBS 측에서 전화가 왔다. 학교 연구동에 있다면서 그곳으로 인터뷰를 하러 오라고. 가보니 김태완 선생님은 이미 인터뷰를 다 마친 상태였나보다. 김태완 선생님 인터뷰 후에 내 인터뷰를 한 것이다. 연구동 앞에서 조명잡고, 마이크 달고, 어찌어찌 진행할거란 짧은 안내를 듣고 인터뷰 시작.

어허 이런 허걱. 역시 카메라 들이대니 말을 못하겠는거다. 이런 질문/답, 질문/답 몇개를 주고 받았는데 너무 버벅댄거 같다. 글을 쓸 때는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나만의 사유를 통해서 정리해서 쓸 수 있어서 편한데 역시 말은 힘들다. ㅠ_ㅠ

어쨌든 이미 촬영은 끝났고 이제 보는 것만 남았다. 내 글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나를 섭외했다는 것에 일단 나는 기분이 좋다. 내 글빨이 좀 먹혔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 하지만 자만은 금물. 글을 일부러 잘 쓰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내 느낌 그대로 자연스럽게 뽑아져 나오는 글을 쓰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다.

방송은 11월 4일(목) 10시 티비9번 'TV 책을 말하다' 프로그램이다. 군입대 전에는 이 프로그램을 꼭꼭 챙겨봤었는데 군입대 이후로는, 제대후까지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아까 그 작가분 말대로라면 이제 탁석산 선생님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탁선생님이. 앞으로는 꼭 챙겨봐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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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0-20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기대하고 있겠습다.

이잘코군 2004-10-2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 버벅댈테니까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