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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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단순한 한 건의 파병이 한국 자본주의를 제국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절차적으로 이 사건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미 내부적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 한국 경제가 절실히 해외 시장과 해외 자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무이다. 두 번째 의미는, 조금 더 우울한데, 한국이 전쟁에 참가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과거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게 아니라 대단히 민주적이며 절차적으로 하자 없이, 그야말로 ‘국민들이 원해서’ - 그것도 ‘경제적인 이유’로 원하기 때문에 - 행해진다는 점이다. -71쪽

"왜 도대체 필요도 없는 이런 도로들을 지어야 하고, 지방 주민들을 위한 복지대책에 지방 예산을 쓰면 안 되는 거지요?"
"네, 국민 여러분, 우리는 곧 중국으로도 진출하고, 또 만주로도 진출할 것잉니까, 바로 여기에 새로운 도시가 필요하구요, 또 그렇게 멀리 가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에 도로가 필요한 거예요, 아시겠어요?"
국민경제가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가장 전형적인 패턴은 군수산업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기본인데, 한국의 경우는 건설산업이 보조 역할 정도가 아닌 주요 주체로서 제국주의화를 직접 추진하는, 약간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후의 노무현 정부는 건설 산업을 중심으로 국가의 제국주의적 재편을 아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는데, 그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에서 제시된 동북아 중심국가 개념이었던 셈이다. 물론 우리가 ‘삼족오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북방 진출에 대한 특수한 갈망이 바로 이 시기에 최초의 원형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87쪽

한국 자본주의가 이미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단독으로 제국주의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을 등에 업고 사실상 제국주의로서 기능하려고 한다는 가설에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은 해외에서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식민지에 해당하는 다른 나라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러 경제협약 중의 하나일 뿐인 한미FTA에 노무현 정부가 그토록 집착한 것은 - 그리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국민들이 이를 열렬히 지지한 것은 - 일종의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가 이로써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것이 사실상 국정홍보처가 얘기한 ‘경제영토’의 실질적 의미일 것이다. 그들은 ‘오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히 현실을 짚었던 셈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경제영토’의 확장, 그것이 바로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98쪽

한국 자본주의 내부에 누적된 다양한 불균형들이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이 커져서 외부의 식민지 혹은 식민지에 준하는 ‘경제영토’ 없이는 문제를 원활하게 풀기 어렵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시장과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장치로써 식민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이 고전적 정의는 현재 한미FTA를 바라보는 많은 정치 지도자 및 상당수 국민들의 시각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99-100쪽

다른 존재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지만, 의외로 증오는 집단 속에서 혹은 특정한 시스템 안에서 매우 쉽게 증폭된다. 또한 아주 먼 곳에 있는 나라들보다 자기 이웃 국가, 그리고 자기 주변의 존재 혹은 형제들이 더 쉽게 이런 증오의 대상이 되곤 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다. 전혀 다른 존재, 그리고 너무 먼 곳에 있는 존재와는 비교는 물론이고 별다른 감정도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모로 매우 비슷한 관계나 상태에서 나르시시즘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왜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학살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때 사회심리학은 때때로 이 개념을 사용한다. -168-169쪽

군인도 하나의 직업이고, 군인들이 모여서 하는 활동을 하나의 산업으로 본다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공공 서비스는 국가 안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적’ 혹은 ‘잠재적 적국’이 발생시킬지도 모르는 전쟁이야말로 이러한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원천인 셈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 - 한 편의 존재가 다른 편에게는 편익이 되고, 그 편익은 다시 다른 편에서의 편익이 되는 일종의 무한대의 ‘포지티브 피드백’ 구조- 를 가지고 있는 산업은 그야말로 군대라는 공공 서비스밖에 없다. 그러니 비록 적성국가라서 매일 ‘적’ 혹은 ‘원수’라고 서로를 증오하게 되어 있는 관계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이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현상을 둘러싸고 있는 파트너 관계인 셈이다. 한국군은 북한군을 주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고, 이는 북한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서로 만나고 협상도 하게 되는 고위 군장성들의 눈으로 남북 분단관계를 본다면, 기묘한 동업관계가 성립되는 셈이다. -175쪽

전쟁으로 덕을 보게 될 사람들이 직업군의 50%를 넘지 않게 하는 것이 산업구조적인 관점에서 본 평화의 1차 조건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쫄딱 망한다"라고 할 사람들이 50%를 넘어서는 것이 평화의 2차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회 전반에 평화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어야 할 텐데, 이 조건은 평화산업 없이는 만들어내기가 아주 어렵다. -214쪽

평화란 ‘불안한 균형’이라는 사실이다. ‘전쟁 없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는 평화는 고정되고 완료된 어떤 것이 아니라, 잠시 발생하는 불안한 균형과 같은 것이다. 이웃 나라끼리 무역 거래든 인적 교류든 이런저런 관계로 많이 얽히는 것은 전쟁을 줄여줄 수많은 필요조건 중 하나지만, 때때로 전쟁을 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충분조건까지 채워지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전쟁 없는 평화를 만족시키는 필요충분 조건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균형 상태일 뿐이다. -228쪽

평화가 지닌 공공재로서의 속성이다. 평화는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서비스 중의 하나로, 많은 공공재 혹은 공공 서비스들이 그렇듯, 이 서비스는 누군가 더 수혜를 누린다고 비용이 더 들지는 않는다. 그런 만큼 ‘전쟁 없는 상태’를 지키는 데 비용이 더 요구될 때 이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도 적다. (중략) ‘국방비 지출’이라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일 강한 한 개의 국가, 즉 ‘제국의 심장’이 최소한 ‘자기 땅에서의 전쟁은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임을 지난 2세기 동안 전 세계가 자본주의를 운용해오면서 이미 깨달았다. 전쟁으로 간주되는 테러까지를 포함한다면, 사실 그 제국의 심장이 누리는 평화란 것도 상당히 위태로운 개념일 뿐이다. -228-229쪽

아직 교육 파시즘은 미완성 상태이다. 대부분의 지배자들은 자식들을 이미 미국으로 빼돌린 상태라서,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감시와 억압은 그 자식들이 나중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조건이 되고 있다. 이 바보 나라에서 교육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약간의 제약 조건이 남아 있다. 지배자들이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영원히 세습하기 위해서는, 그들 중 일부는 장관을 비롯한 국가 권력을 틀어쥐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2세 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남아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이들이 가난한 아이들이나 중산층 따위와 같이 얽혀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재산의 유무로 학교를 나누려는 것이 한국 교육 파시즘이 나아가는 궁극의 이상향이다. 2년 내에 이 이상향은 한국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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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 Issue & Thinking 01
토머스 슈뢰터 지음, 유동환 옮김 / 푸른나무 / 2007년 12월
절판


케인스에 따르면, 국제수지에서 흑자를 낸 나라, 즉 수입보다 수출을 더 많이 한 나라가 받을 돈에 대한 이자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보다 빈곤한 나라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조금 이상한 논리 같지만 케인스는 경제를 ‘돈벌이’로 보지 않고 ‘순환’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미국은 해외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기록한 나라에게 부담을 넘기려 했다. ‘갚을 사람이 문다’라는 강자의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화이트는 각국의 경제력에 따라 기금을 조성하고 경제위기 시에는 그 한도 내에서 대출할 수 있지만, 먼저 대출 기관의 집행부가 제시하는 조건을 이행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72-73쪽

1971년 8월 금 태환 제도, 즉 언제나 금 1온스에 35달러의 가치로 교환하던 규정이 존슨의 후임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 끝장나고 말았다. 닉슨은 미국의 달러화를 평가절하(환율 인상)하고 금리를 올리는 조치를 동시에 취했다. 이것은 미국의 빚을 줄이는 동시에 그 짐을 다른 나라(대개는 개발도상국)에게 떠넘기는 조치였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자 미국이 외국에 진 빚의 실질 가치는 큰 폭으로 떨어져 엄청난 빚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 막대한 달러를 쌓아 놓고 있던 유럽 각국과 일본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 대신 미국은 금리를 인상해 주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자 유럽과 일본은 덩달아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에게서 대부분 달러로 차관을 얻어 갔던 개발도상국이 그 금리를 고스란히 물어낼 수밖에 없었다. 개발도상국이 마지막 피해자였던 것이다. -76-77쪽

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

긴축 정책의 수단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정부 지출을 줄이는 대신 세율은 인상함으로써 재정적자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 공기업의 비중이 큰 나라에서 공기업을 (특히 외국인에게) 매각하는 공기업 민영화도 하나의 방안이다. 금융기관이 대출 규모를 대폭 줄이는 긴축 금융도 안정화 프로그램의 한 요소다. 이 긴축 금융의 결과, 금리는 폭등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것도 안정화 프로그램의 핵심적 요소다.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면 해당국은 저성장, 심지어는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기업과 금융기관도 힘들겠지만, 그 고통은 대부분 실업률 상승과 실질 임금 인하를 통해 국민에게 전가된다. 이것이 바로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 책임을 전적으로 적자국이 지도록 만든 IMF 체제의 궁극적 효과다. -82쪽

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미국의 경제 질서를 세계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후진국은 대부분 시장 기능이 매우 취약하여 정부가 의욕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등 경제에 많이 개입하고 있다. 따라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규제 완화와 정부 개입을 줄인다는 명목을 내세워 자유화 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중략)
IMF의 자유화 정책에는 공기업의 민영화도 포함된다. 공기업 민영화는 재정 긴축의 수단인 동시에, 공기업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결정적 수단이기도 하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한 국가 내부의 자유화에 머물지 않으며 대외적 자유화, 즉 외국 기업에 대한 개방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이에 따라 선진국 자본이 싼값에 해당국 기업을 잡아먹을 수 있는 기회를 더욱 확대한다. -83쪽

제노바 2001

2001년 7워 20일과 21일 주말, 한편에 높은 산을 끼고 있는 제노바는 여느 때처럼 고요한 도시가 될 수도 있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이 도시에 들어와 있던 수많은 세계화 반대론자들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이 때문에 제노바 시민들은 경찰서장의 권유를 받아 억지로 짧은 휴가를 내고 이미 이 도시를 떠났다. 그 주말 이 도시에 투입된 경찰들을 보면 과거 1970년대의 시위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이 야만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던 과거의 그 장면이 다시 현실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리고 카를로 줄리아니라는 학생은 시위에 참여한 대가로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경찰청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붉은 선이 그어진 구역을 설정해 놓고 일반인은 물론 기자들까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곳은 국가원수들이 회의를 하는 장소였다.
시민의 시위 권한을 박탈하며 회의 참석자들을 눈에 띄지 않게 선상 호텔에 숨겨 놓고 끝내는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막을 내린 이 회의는 세계화의 냉혹한 단면을 숨김없이 보여 주었다. -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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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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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25쪽

철학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낯섦과 차이를 제공하는 학문이라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 철학은 현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친숙한 생각을 문제 삼으며, 항상 새롭게 그리고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음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6쪽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는 것은 여행하고, 번역하며, 교환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타자의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고, 질서 파괴적이라기보다는 횡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담보로서 보증된 상품을 서로 매매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헤르메스, 즉 네거리의 신, 메시지와 상인의 신이 있는 것이다. (세르, <헤르메스1 : 커뮤니케이션>)-43쪽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장자)-86쪽

장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유는 모두 개체의 삶보다는 초월적 이념을 긍정하는 철학, 다시 말해 삶의 유쾌함을 부정하고 죽음의 우울함 혹은 초월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철학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초월적 이념을 표방하는 모든 태도를 ‘꿈’이라고 비유하면서, 반드시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92-93쪽

타자의 발견은 항상 자신의 선입견이 좌절되는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타자와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이다. 이 말은 결국 타자가 자신의 선입견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104쪽

"규칙을 다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105쪽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오직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121쪽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139쪽

판단중지의 상태가 중요한 이유는 저공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타자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이쓴 마음 상태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만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143쪽

송견은 타자와 갈등하고 대립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모욕을 받아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준칙을 제안하였다. 모욕을 당한 수치감에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면서, 우리는 타자와 갈등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보통 우리는 남이 모욕을 하면 수치심을 느끼고 남이 칭찬을 하면 흥분하고 기뻐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수치심과 명예욕이라는 욕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추론하기 쉽다. 그러나 송견에게 있어 이것은 위계적 사회에 살면서 불가피하게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 구조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수치심과 명예욕은 결코 본질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욕망은 우리에게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외적’인 것을 ‘내적’인 것으로 착각한다면, 혹은 이런 선입견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타자와 치명적인 갈등 관계에 놓이고 말 것이다. -167쪽

국가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진단은 기본적으로 루소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를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한다. 물론 그 대가로 국가는 피지배층에게 일정 정도의 권력, 부 그리고 미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이로부터 국가는 피지배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전도된 생각이 출현한다. 이런 착각으로부터 피지배층은 국가나 군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심지어 지고한 영광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복종을 마치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28-229쪽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與物爲春)(장자)-234쪽

노자에게서 도는 모든 개체들 앞에 미리 존재하는 바탕이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근거, 모든 것을 지탱하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장자에게서 도는 모든 개체들 앞에 먼저 올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뒤에 때늦게 찾아온다. 더구나 개체들이 소통을 거부하면, 소통의 결과로서의 도는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결국 장자에게 있어 애초에 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타자와 만나서 그와 소통함으로써 사후적으로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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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8-0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리라이팅도 재미없는 글도 있고 어설픈 글도 있는데... 장자를 한번 사 볼까나~

마늘빵 2008-08-05 09:2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습니다만, 미리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별 넷이에요. 리라이팅 컨셉과는 조금 맞지 않아보이는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새로운 해석이긴 한데, 뭐랄까 흐음. 내용의 서술 흐름이 새롭지는 않달까요.
 




 갑자기 예전에 재밌게 봤던 그렘린이 떠올라서 토욜 퇴근 후 집에 와서 1,2편을 연달아 봤는데, 이거 대단한 영화였습니다. 전에 봤을 땐 그냥 아 귀여워 귀여워, 이러면서 봤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이건 굉장한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1984년, 1990년 미국에서 나온 그렘린은 지금의 미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는 듯 했달까요.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모습, 그리고 현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렘린 1,2편에서 제가 본 것들을 나열하자면,

* 스포일러 경고

1. 이명박식 불도저 개발계획
- 2편에서 무슨 거대한 센터를 세운다고 포크레인으로 다 찍어누른다. 놀란 우리의 귀염둥이 기즈모는 쭐래쭐래 겨우 도망나오지만. 그곳에서 살겠다고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할아버지 윙이 병으로 죽자 요때다 하고 바로 삽질. 그래도 명박이보다 양심은 있는 게, 떠나지 않겠다는 할아버지 죽고 난 뒤에 포크레인으로 부숴버린다는 거. 살아있을 때는 돈으로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다. 명박이는? 청계천 공사를 떠올리자.

2. 이명박식 친환경 개발
- 우석훈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랬다. 지금의 청계천은 수도꼭지에서 물틀어 연결해놓고, 진짜 청계천은 그 아래 흐르고 있다고. 우리(?)가 데이트 장소로 종종 활용했던 그 청계천은 청계천이 아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 친환경 친환경 하면서 보기 좋은 공원이나 분수나 이런 것들 세우지만, 그건 친환경이 아니다. 그냥 인공환경이지. 나무 있고, 풀 있고, 물이 흐른다고 다 친환경이 아니란 말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3. 효율과 경쟁 시스템 
- 이명박식, 공정택식 경제 논리. 뭐든지 경쟁시키면 다 되는줄 안다. 경쟁 시켜서 올라갈 놈 올라가고 안되는 놈 떨어지고. 클램프 센터의 7단계 승진 시스템. 주인공 촌놈이 클램프 센터에 취직한 후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뭐든지 효율이 최고고, 경쟁이 최고다는 식의 사고.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그렘린 2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4. 유위(有爲)
-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인위적으로 조치를 취하려 하면 안 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된다. 무위가 최선의 해결책이다. 유위의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5. 바보상자 
- 그렘린을 티비를 좋아한다. 부우우우웅 자동차 경주도 좋아하고, 야한 것도 보고, 폭력적인 영화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는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따라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티비를 못보게 한다. 바보상자라고. 맞다. 티비는 바보상자다. 20년전에도 티비는 바보 상자였고, 지금도 바보 상자다. 티비 볼 시간도 없지만, 시간 돼도 티비는 잘 안 본다. 한번 보고 있으면 계속 보게 되는데 얻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다.

6. 80년대 미국은 그래도 살만했다?
- 오늘날의 미국은 살기 안좋은 국가 중 하나. 부자들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닌 듯 하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영화 속 미국 사회는 지금의 한국을 보는 듯 하다. 점차 각박해져가는,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그렇다.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그때는 아직 과도기였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지.  

7.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샐러리맨의 삶 
-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달이 봉급받는 월급쟁이들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장소를 한국으로, 때를 현대로 옮겨놓으면 가장 극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OECD국가 중 근로시간이 압도적 1위인 국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주말에는 출근하는 삶은 이땅에선 흔히 볼 수 있다. 

8. 유전자 실험 
-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코 좋아할 게 못된다.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막무가내 유전자 실험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각종 유전액(?)을 먹은 그렘린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변해가는가를 2편에서 목격할 수 있다. 바퀴벌레도 웬만해서는 약 먹고 안 죽는다. 예전에는 바퀴약 설치해놓으면 먹고 나와서 헤롱헤롱 거렸는데 요새 바퀴들은 먹어도 도통 발걸음이 느리지 않다. 쌩쌩하니 잘 달리는데 이젠 더 센 약을 뿌리고 먹여야 한다. 약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퀴도 내성이 강해진다. 거기에 아예 유전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돌연변이가 출연한다면? -_-

9. 쉬운 고용과 쉬운 해고
- 클램프 센터는 엄청나게 크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줄곧 5%안에 들어온 수재들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삼성 같달까. 그런데 회사 안을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공부만 잘해 자기 이익은 잘 챙기는 엘리트 유형과 박봉에 시달리며 온갖 굳은 일은 다 하는 소외된 비정규직 유형을 볼 수 있다. 고용된 배우가 투덜대며 문을 박차고 나오고, 일하는 시간에 몰래 담배를 피던 노동자 한 명이 즉각 해고 당한다. 거대 기업은 필요할 때 쉽게 사람을 채용하고, 쉽게 사람을 버린다.

10. 미국 우파 할아버지 
-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사람인 듯 한데, 러시아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우파 할아버지를 잠깐 볼 수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냉혈한들의 모습이 아닌 다정다감한 인간적인 모습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놀라운 발언을 한다. 마치 대한민국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아버리면 바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러시아인이 그런 대상이 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러시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11. 동거 커플 
- 영화는 1990년의 미국. 지금 보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그래도 얼굴은 잘생기고 이쁜 두 남녀가 동거생활을 한다. 같은 직장에 다니고,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결혼은 아직 아닌 두 사람의 동거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동거는 문란함의 극치이다. 어떻게 동거를 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지, 동거를 하느냐 마느냐가 기준이 되어선 곤란하다.

12. 최신식 건물의 잦은 고장 
- 최신식이라고 좋을 게 하나 없다. 과거에 손으로 하던 걸 지금은 손도 안대고 리모콘 버튼만 눌러 실행시키거나 손가락 까딱도 하지 않고 모든 걸 하려고 하는데 그런 물건일수록 고장이 잦다. 한번 고장나면 고칠 수가 없다. 최신식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발상, 수동보다는 자동,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이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 

13. 약한 학생 무차별 폭행, 왕따, 고문
- 영화에 학생은 안나온다. 그런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즈모로부터 나온 나쁜 그렘린들이 약한 기즈모를 어떻게 괴롭히고 학대하는가를 보면 그게 딱 우리네 교실 안 모습이다. 어제 기사였던가 여고생들이 친구 하나를 변기통에 처박고 물을 먹이고 사진을 찍고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어디 하루 이틀 벌이지는 일이랴만. 이런 게 아직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뉴스란 모름지기 일반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데 이런 건 너무 흔하잖아. 폭행하고 왕따시키고 감금하고 전기고문하고. -_-

14. 어리버리한 경찰
-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언제나 경찰은 사건이 다 해결된 뒤에 나타난다. 아니면 해결되지 않고 해결할 수 없는 시점에 나타나거나. 사건종료되고 나타나 어리버리하게 여기저기 부딪치며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경찰들을 이 영화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도처에서 강간이 벌어지고, 시체가 발견되지만 그곳에 경찰은 없다. 권력에 빌붙고 엄한 사람들 잡아가려고 어떻게 법을 적용할까를 고민하느라구. 촛불집회 현장에서 뻘짓하지말고 돈 빼돌리는 교수들, 국회의원들, 기업인들, 정치인들이나 잡아라.

15. 공동체로의 복귀
- 크게 한 탕 벌어지고나서 다행히도(?) 클램프 사장은 깨달음을 얻고 공동체로 가자고 하는데, 내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은 비현실적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고 수습하다가 사장이 깨달음을 얻어 자연과 공동체로의 복귀를 외치는 경우는 없다. 반성하는 척 잠깐 쇼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데 뭐하러 깨달음을 얻어. 권총들이민 한화그룹 회장이나 국가를 지배하려한 삼성그룹 회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갑자기 정의로워지고 착해지는 경우는 없다. 
 
16. 전지적 작가 시점
- 요건 그냥 보너스인데 중간에 깜짝 놀랐다. 영화 끝난 줄 알고. 감독은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찍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영화에 개입했다. 잠시 등장한 그 사람이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굴을 몰라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던 영화가 갑자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깜짝 전환한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17. 총평
- 온갖 사회적 문제를 곳곳에 맛깔나게 버무려 메세지를 잃지 않은, 재밌고 귀엽고 괴기스러운(?) 완벽한 영화다. 이명박과 똘마니들이 함께 모여 감상해야 할 영화. 청와대에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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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 : 이제 소수를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4
이남석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구판절판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지배 집단에게도 불이익이다. 왜냐하면 비교 대상이 없음으로 인해, 지배 집단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를 무시한 정치가 전횡적으로 진행된다면,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문화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그 강요가 강화되면 될 수록 차이 집단은 스스로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들의 존재 이유마저도 상실한다. 결국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렇듯 차이의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은 위와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차이를 배제함으로써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지배 집단이나 차이 집단이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롭지 못하다. 이것은 특정 차이 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이 집단에 적용된다. 따라서 모든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억압적이며 배제적인 권력에 저항하게 마련이다. -19쪽

차이의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현대 국가의 정부는 대부분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므로, 국민 개개인이 지닌 다양한 차이는 그 정부 아래서 은폐된 채 하나의 동일성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동일성에 의해 다양한 차이는 ‘국민’이라는 통칭 명상로 통합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 점에서 차이의 정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동일성의 정치’라고 한다. -20쪽

개인은 모두 평등한 존재로서 법적․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은 ‘동일성’으로 존재하며, 법적․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근대 정치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정치의 주체인 개인은 자연적 성이나 사회적 성, 타고난 부, 지위, 인종과 무관하다. 개인은 모두 기본적으로 동등하며, 차이와 불평등을 거부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든 인간의 구체성을 사상해버린 추상 명사이다. ‘개인’이란 말 속에는 형태상의 차이와 질적인 차이는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추상 명사로서의 ‘개인’만 남는다. (중략)
근대 정치의 주체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인은 지배 권력을 구축하는 존재로서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단일 규범을 제시한다. 이 규범이 곧 지배 규범이 된다. 지배 규범이 강하면 강할수록 차이의 주체는 대다수 사람들이 속해 있는 규범 밖의 주변적 존재로 전락한다. -22쪽

대의제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형식적 평등 아래, 차이 집단은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출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직접 대표하지 못한다. 또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성을 강조한 나머지 차이 집단의 견해를 수용하지도 못하고, 차이 집단의 대표성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로써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는 한계성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민의 형식적 평등을 정당화할 뿐 실질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38쪽

차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진리는 의견의 무제한적인 충돌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으며, 경쟁은 조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이르기는커녕 조화도 창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는 지배 이익의 봉사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이 곧 그 사회의 주류 구성원이자 주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차이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41쪽

권력 교체의 이면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있다. 다수결의 원리는 자유토론의 보장, 다수의 소수 포용,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존중,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수결의 원리는 다수와 소수의 항구 불변을 초래하여 정당성을 잃게 된다. 소수가 자유로운 토론과 설득에 의해 다수가 될 수 없다면, 그 국가는 이미 다수에 의한 전횡 국가이다. 따라서 다수결 원리의 존재만이 전횡 국가를 막을 수 있고,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다. 상대적 소수는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다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해 ‘진정한 동의’를 하고,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중략) (계속)-43-45쪽

(이어서) 그러나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은 다수결의 원리의 한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다수결의 원리의 근본적인 한계는 사회적 약자와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이들(소수)에게 ‘1인 1표’는 소수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감옥에 영원히 묶어두는 주술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다수 가능성은 그 정치 체제의 주류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소수이고 영원한 약자이다. 어떤 조건이 변화해도, 소수는 투표를 통해 다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수가 다수결의 원리에 의한 결정에 순응하는 것은 ‘진정한 동의’가 아닌 ‘마지못한 동의’일 뿐이다. -43-45쪽

다수의 견해는 사회 내에서 보편성으로서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는 반면, 소수의 견해는 도덕적 지위를 상실하고서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마저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다. (중략) 보편성을 획득한 집단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집단에게 보편성에 따를 것을 강요함과 동시에 고유한 정치적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소수 집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가치에 회의를 품게 되어 결국 가치의 자포자기 상태를 초래한다. -49-50쪽

하버마스는 권력과 관련된 ‘진리의 생산’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억압과 왜곡이 없는 이상적 담화 상황에서 토론한 결과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이상적인 담화 상황에 근거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진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이상적 담화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루소주의적 환상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그 개인이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인간의 마음이 소통할 수 있으며, 각 개인의 관점이 장애물에 가로막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견해가 각 개인의 견해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몽상이다."-66-67쪽

차이 몰이해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차이 집단의 특수성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하는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며 존엄성을 지닌 주체이므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가 최대한 보장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고, 존엄성을 존중받는 인간은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을 받지 않으므로 사회에 차이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차이 집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고 자연스럽게 차이 집단에 대한 중립성을 지키게 된다. -75쪽

개인은 최대의 사회적 선의 실현이라고 하는 목적을 위한 대체 가능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을 보호해주며, 다른 자유의 행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아미 거트먼)

국가에게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허용되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정부는 내 동료 시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가치 있다 할지라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 동의 없이 내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아미 거트먼)-80-81쪽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의 구속을 받는 개인과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하며, 이러한 공동체는 중앙 국가의 기능 중 일부를 양도받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 구현을 전제한다. 이와 같이 가정함으로써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혁명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의미 상실, 신사회 운동과 다양한 주체의 성장에 따른 사회주의 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탕에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깔려 있다. -86쪽

울린에 따르면 정치란 집단의 공적 권위에 유용한 자원을 둘러싸고서 조직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권력들이 합법적인 동시에 공적으로 경쟁함을 의미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이란 공적인 협의에 의해서 권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될 때, 다양성으로 구성된 자유로운 사회가 공공선의 계기들을 향유할 수 있는 데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치적인 것‘이란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협의를 거쳐 하나의 공통점에 이를 수 있는 공동선을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상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양한 차이 집단들이 정치적인 소외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 구성의 한 주체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90쪽

무페는 정치를 정형화된 고정체로 파악하여, 정치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고 통일체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페는 이러한 포괄적인 공동체와 최종 심급의 통일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가정하는 어떤 정치 공동체도 그 안에 포용되지 못한 소수 집단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이익 갈등은 균형에 이르고 의견 분열은 동의에 이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균형과 동의는 항상 부분적이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는 적대적 행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정치는 항상 ‘갈등과 분열’로 특징지워진다.
무페는 갈등과 균열로 특징지워지는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을 제안한다. 무페의 ‘정치적인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다원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사회적 성과 자연적 성, 인종, 계급, 환경 등의 민주주의 투쟁의 구체화된 범주를 수용할 수 있다. -91-92쪽

개인이 아닌 집단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히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집단을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차이를 권리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로크 이후 근대 정치의 주체인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천부적인 권리의 양도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천부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권리는 양도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100쪽

인간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함께 결사를 구성해야만 하고, 자유 선택의 토대 위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허스트)-101쪽

차이의 권리는 양도 불가능하다.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나 동양인 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성적 소수자, 가난한 자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소수 의견의 주장자라는 이유로, 기타의 이유로 권리르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 집단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이익을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 (중략)
이 차이 집단이 권리를 특정 정부에게 양도하는 것은 그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정치적 권리를 보호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차이 집단과 결사 집단은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 (후략)-104-105쪽

차이의 정치는 집단이 정책의 피동적 대상에서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집단 해방의 논리이다. 집단의 해방 논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배제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집단이 스스로 정치적 권리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배 사회에 문제를 던지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다. 차이의 정치는 모든 집단이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평등’이라는 등식을 본질적 의미에 더 가깝게 만든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는 민주주의 지향적이다. -112쪽

토론은 다양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해준다. 그 결론은 다수의 견해가 모아진 것으로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사회의 구성원은 다수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수결의 결과는 사회의 구성원이 수용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차이 집단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가 ‘문턱이 높은’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토론과정에 진입하는 것조차 힘들 뿐만 아니라, 토론 과정에 진입했다 해도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수용시킬 만한 결론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토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토론 과정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토론 결과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과정에서 배제된 집단이거나 차이 집단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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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3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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