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25쪽
철학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낯섦과 차이를 제공하는 학문이라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 철학은 현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친숙한 생각을 문제 삼으며, 항상 새롭게 그리고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음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6쪽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는 것은 여행하고, 번역하며, 교환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타자의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고, 질서 파괴적이라기보다는 횡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담보로서 보증된 상품을 서로 매매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헤르메스, 즉 네거리의 신, 메시지와 상인의 신이 있는 것이다. (세르, <헤르메스1 : 커뮤니케이션>)-43쪽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장자)-86쪽
장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유는 모두 개체의 삶보다는 초월적 이념을 긍정하는 철학, 다시 말해 삶의 유쾌함을 부정하고 죽음의 우울함 혹은 초월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철학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초월적 이념을 표방하는 모든 태도를 ‘꿈’이라고 비유하면서, 반드시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92-93쪽
타자의 발견은 항상 자신의 선입견이 좌절되는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타자와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이다. 이 말은 결국 타자가 자신의 선입견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104쪽
"규칙을 다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105쪽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오직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121쪽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139쪽
판단중지의 상태가 중요한 이유는 저공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타자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이쓴 마음 상태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만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143쪽
송견은 타자와 갈등하고 대립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모욕을 받아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준칙을 제안하였다. 모욕을 당한 수치감에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면서, 우리는 타자와 갈등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보통 우리는 남이 모욕을 하면 수치심을 느끼고 남이 칭찬을 하면 흥분하고 기뻐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수치심과 명예욕이라는 욕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추론하기 쉽다. 그러나 송견에게 있어 이것은 위계적 사회에 살면서 불가피하게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 구조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수치심과 명예욕은 결코 본질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욕망은 우리에게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외적’인 것을 ‘내적’인 것으로 착각한다면, 혹은 이런 선입견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타자와 치명적인 갈등 관계에 놓이고 말 것이다. -167쪽
국가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진단은 기본적으로 루소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를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한다. 물론 그 대가로 국가는 피지배층에게 일정 정도의 권력, 부 그리고 미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이로부터 국가는 피지배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전도된 생각이 출현한다. 이런 착각으로부터 피지배층은 국가나 군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심지어 지고한 영광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복종을 마치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28-229쪽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與物爲春)(장자)-234쪽
노자에게서 도는 모든 개체들 앞에 미리 존재하는 바탕이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근거, 모든 것을 지탱하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장자에게서 도는 모든 개체들 앞에 먼저 올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뒤에 때늦게 찾아온다. 더구나 개체들이 소통을 거부하면, 소통의 결과로서의 도는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결국 장자에게 있어 애초에 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타자와 만나서 그와 소통함으로써 사후적으로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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