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품절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 조너선 색스 -5쪽

<서문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폭력을 막는 단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는 '대화'이다. 서로서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대화이다. -16쪽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 철학자 존 롤스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공적 이성'이다. 그것은 정치 논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만 우리가 -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 "서로 변론"(이사야 1장 18절)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서로 변론한다'는 생각은, 도덕적 언어가 붕괴하고 '나는 해야 한다'는 어법이 '나는 원한다', '나는 선택한다', '나는 느낀다'는 어법으로 바뀐 20세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의무는 우리가 서로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시각을 강조하는 텔레비젼은 소리의 문화가 아니라 보기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크게 말하고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결과 가장 시각적인 항의나 가장 목소리가 큰 분노의 외침, 극단적인 구호 등이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17-18쪽

"(종교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히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조나단 스위프트)-19쪽

종교는 불화의 원천일 수 있다. 또한 종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전자다. 반면 종교를 갈등 해결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도록 인류의 연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희망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위대한 종교들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그리고 평화의 필수 조건인 정의와 자비를 널리 퍼뜨리는 데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20쪽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헨리 메인 경)-26쪽

"종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표현이자 그런 고통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학대받는 자들의 한숨이고 감정 없는 세상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칼 마르크스) -31쪽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의 제도가 본래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와 논리나 동력이 다른 주변 영역을 식민화할 때는 위험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런 경우였다. 18세기에는 과학이 그러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정치가 그러했다. 21세기에는 시장이 그렇다. 화폐교환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거래에 대해서만 적합한 기제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가족이나 공동체, 교단, 자발적인 모임 등 경제적 계산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관계이다. 이런 관계들은 시민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집단이지만,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39쪽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은 이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은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단지 서양 현대성의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퇴폐의 한 형태로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살 테러범을 내가 무슨 근거로 반대할 수 있겠는가? -43-44쪽

그것은 우리가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하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특수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인 반면, 진리는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특수성이 전쟁을 낳는다면 진리는 평화를 낳는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45쪽

그러나 갈등의 시기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그 때에는 국외자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띠면서 이웃을 분열시키고 예전의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이라고 불렀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점이라 해도 정체성의 표지, 그래서 서로를 소원하게 하게 특징을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48-49쪽

하나의 문화가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체계에 인위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체계가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비극에서 나온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세상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공헌한 바는 하나같이 소중한 것이다. ... 중략 ...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 패배한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하는 것이다.-50-51쪽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대한 논박에서 진리가 움터나온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편적인 문명이 서로 충돌하면, 세상이 흔들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문화와 문명과 종교가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갈 하나의 세상만 주었다. 그 세상은 줄곧 작아지고 있다.-51-52쪽

<세계화 속의 불만>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만큼 분열시킨다.
분열의 원인은 지구의 통합을 촉진하는 원인과 동일하다.
- 지그문트 바우마 <세계화>-54쪽

20세기 초에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시간 경험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별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고" 앞으로는 더욱 짧아질 것이다.-56쪽

매튜 아놀드의 말을 빌리면, 마치 우리는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57쪽

"사실 우리는 도덕성의 시물라크르(환영)를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저긍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 상실하고 말았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65쪽

세계화 시대에서는 무엇이 행동의 주역인가? 서양에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점점 더 강조된 것은 두 가지 제도이다. 하나는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현재 자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시장은 본래 도덕과 상관없이 거래를 하는 곳이고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다루는 곳이다. 다시 말해 시장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교환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교환의 장일 뿐이다. 한편 서양에서 정치는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도덕적 질문을 건너뛴 채 오직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더욱 더 절차적으로 관리적인 무엇이 되고 말았다. 존 롤스는 현대의 자유주의의 신조 가운데 하나인 이런 점을 두고 "선보다 정당함이 우선한다"고 지적했다.-68쪽

사람에 관련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느 부의 소유주와 생산자 사이에 접촉이 활발했다. 봉건 영주와 산업 자본가는 비록 피고용인을 착취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복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의 글로벌 엘리트들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는 편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도덕적 책임은 단지 추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서 움터나온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69-70쪽

간단히 말해서 시장은 빈부 격차만을 극대화 한 것이 아니다. 시자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운명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 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를 개인적인 생활 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따. 여기서 공공선이란 공원에서부터 공공 서비스와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거나 소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71쪽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나는 어떤 이야기에 속하는가?'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기에 대답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날 종교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이데올로기 저치는 아마도 죽고 말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다. -79쪽

정치는 차이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종교는 그 차이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묶는다. 정치는 중재하고 조정한다. 정치에서 타협, 다의성, 외교, 공존 같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악덕으로 보이는 덕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81쪽

종교와 정치는 인간 조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말을 건다. 하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묶어주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차이를 평화롭게 중재한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은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 국가(파시즘)나 이론체계(공산주의)가 절대화되고 신격화되었을 때 생겨났다. 21세기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즉, 정치가 종교화될 때가 아니라 종교가 정치화될 때다. 종교는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공화국을 비판한 근거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국가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가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한때는 이러한 것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82쪽

<차이의 존엄 :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이 있다. 종교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정체성은 배제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모든 '우리'에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즉 '그들'이 있다. 혈족과 비혈족, 친구와 이방인, 형제와 남이 있고, 이러한 경계가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은 무리의 일원이 아니면 생명을 지킬 수 없었던 인류사의 새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식자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무리에 들어가지 못한 개인들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한 어떤 본능들은 이때부터 유쾌한 것이며, 그 본능들은 우리가 인간관계에 맺고 소속 집단에 애착과 충성심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부족적'이라고 부른다.
-87-88쪽

유대교는 한 분인 하느님을 믿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진 명령을 인류 전체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유대교에는 extra ecclesam non est salus, 즉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에 해당되는 교리가 없다. 오히려 고대의 유대 현인들은 "여러 민족의 경건한 자들은 다음 세상에서 제 몫을 얻으리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97-98쪽

마이클 왈저는 '얇은' 혹은 보편적인 도덕성보다 '두꺼운' 혹은 맥락으로 가득 찬 도덕성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사회는 특수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 고유의 성원과 기억, 다시 말해서 제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삶에 대한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성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류는 성원만 있고 기억은 없는, 따라서 역사도 문화도 관습도 익숙한 생활방식도 축제도 사회적 재화에 대한 공동의 이해도 없는 집단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갖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방식잉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온갖 다양한 사회의 성원들은 인간이기에 서로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며 - 때로는 - 다른 이들의 행진에 동참할 줄도 아는 것이다."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106-107쪽

<통제 : 책임의 의무>

20세기 초반에 윌리엄 오그번은 '문화지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늘날처럼 기술을 비롯한 물질문화가 통치 방법이나 사회 규범 같은 비물질 문화에 비해 빠르게 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바깥 세계가 우리의 내부 세계(정신적, 정서적 반응)보다 빠르게 변할 때 우리의 환경은 당혹스럽고 위협적이다. 사회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125-126쪽

과거에는 엘빈 토플러가 '안정적인 사적 영역'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삶에는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 종사하는 직업이고 평생 지속되는 결혼 생활이며 평생 살아가는 장소이다. 이것들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경제적, 개인적, 지리적 연속성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낯선 것에 대처할 힘을 주는 친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것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든 실정이다.-12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상태, 아무에게도 진실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135-136쪽

인간관계가 정체성과 자존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계약과 시자 거래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이웃, 조언자들은 우리와 도덕적 호혜성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다시 말해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듣기 싫은 충고를 해준다. 이런 면을 로버트 라이시가 인용하는 '개인 코치' 광고의 상품화된 우정과 비교해 보라.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함께 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전문가입니까?" 이 수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 것은 우정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137-138쪽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고 숭배하다시피 하지만 가난하고 하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은 우리의 도덕감이 타락하게 된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애덤 스미스)-138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이 아니라 대상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서 내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이해시키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 둘 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내 생각과는 다른 의견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이다. 논쟁에서는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쪽이 패배하지만 애초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대화는 어느 쪽도 패배하지 않지만 양쪽 다 변화한다.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현실이 어떤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쪽도 애초에 가졌던 확신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대화가 아니다. 남의 의견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상대방도 - 내 의견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원 사회에서 공공도덕이 성립되는 방식이다. 즉 하나의 목소리가 앞장서거나 도덕 문제를 가정이나 지역 주민에게 일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만 공공도덕은 성립할 수 있다. -146-147쪽

'나'를 기꺼이 '우리'에 맞추어 형성하려는 태도에서 공동체가 이루어지듯, 사회 역시 개별 공동체의 '우리'가 기꺼이 다른 공동체들과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이루어진다. 사회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대화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적 힘이라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써가는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서다.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147-148쪽

<공헌 : 시장 경제의 도덕>

시장 경제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역사에 기여한 것은 그것이 태곳적부터 전해 오는 인간의 싸움 본능을 억제하는 힘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세기에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예언했다. "상업의 자연스러운 영향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있다. 무역을 하는 나라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한 나라가 파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면 다른 나라는 사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 모든 제휴와 연합은 상호 필요에 기반을 둔다. 지난 세기에 두 번에 걸친 대전쟁을 일으킨 유럽 국가들이 화폐 통합을 이룬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한 경우가 없다는 이른바 '글로벌 아치'이론을 만들어냈다.-177-178쪽

<자선 : 사회 정의>

이(체다카)는 점유와 소유의 차이를 강조한 유대 신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세상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이다. 우리는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한 게 아니다. 하느님이 맡긴 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한 사례다.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장 23절) 우리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다면, 정의(억지로 주어야 하는 행위)와 자선(아량으로 베푸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이며, 후자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의 촉구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리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한 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신탁의 조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법체계에서 자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법의 엄격한 요구 사항이며 필요할 때면 법정이 강제로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체다카는 흔히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니 누구나 삶의 기본 요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잉여의 일부를 덜 가진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망하던 사회, 즉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언약으로 맺은 공동체에서 평등한 시민이 되는 사회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195-196쪽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의료 수단이 없는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병과 피할 수 있는 죽음의 희생자만 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반노예살이나 마찬가지인 채무 노동자, 억압적인 사회에 숨이 막히는 여자 어린이, 실질적인 벌이 수단이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들은 행복이라는 면에서도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여기에는 기본적인 자유가 꼭 필요하다)이라는 면에서도 모든 걸 빼앗긴 이들이다. 책임 있는 삶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아마르티아 센)

센의 말은 절대적으로 옿다. 개인의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제약에서 벗어난 없는 상태(성경의 초페쉬)를 뜻한다. 집단의 자유(성경의 체루트)는 그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게 아니다. 다수가 굶는 마당에 소수가 잘 사는 사회,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혜택과 쾌적한 편의 시설을 누리는 사회는 자유로운 해방의 땅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억압과 압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198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 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 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랍비들이 빈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203쪽

체다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선'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자의 선의에 달린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강제하는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제 원리에 의존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고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유 시장과 양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인용하는 조지 소로스의 말은 옳다.

"국제 무역과 세계 금융 시장은 부를 창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평화 유지나 빈곤 완화, 환경 보호, 노동 조건 개선, 인권 보호와 같은 다른 사회적 요구, 일괄해서 '공공선'이라 불리는 것에는 신경 쓸 능력이 없다.-208쪽

극단적인 가난과 기아를 종식시키고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막을 수 있는 질병에 맞서 싸우고 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실패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경제적 잉여를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리하여 체다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209-210쪽

<창조성 : 교육의 책무>

월터 J. 옹의 말을 빌리면 "글은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구술 문화에서는 지식의 전달이 언제나 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특정한 때에 특정 장소에서 화자와 청자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반면에 저자는 누가 자기 글을 읽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독자도 보통은 눈앞에 저자를 두고 구절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의 모든 관행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글은 기억력의 상실과 수동적인 배움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논쟁을 낳는다. 양자가 만나서 결론에 이를 때까지 논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서로가 쓴 글에 대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글은 추상화하는 경향이 크다. 말은 모든 인간 집단이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인데 반해 글은 인공적이다. 게다가 규칙과 관례가 필요하며 이것들은 의식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글은 추상적 사고를 촉진하고, 이야기의 반복으로만 과거를 알 수 있는 구술 문화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과거를 고정시킬 수 있다. -219쪽

<협동 : 시민 사회와 그 제도>

계약이 자아에 관한 것이라면, 언약은 우리가 그 안에 정체성을 키우는 보다 큰 집단에 관한 것이다. 언약 안에서 '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언약의 관계는 신뢰로 유지된다.-249쪽

언약은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묶인 유대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소속감으로 묶인 관계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우리'를 이룰 때 언약이 맺어진다. 언약은 제한이 없고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언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수반하며, 어려운 상황에도 곁에 있어 주는 신의의 개념을 내포한다. 언약은 때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251쪽

<보존 : 지속 가능한 환경>

"우리는 윤리가 전부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고 있다. ... 우리는 - 철부지 아이가 아니라(옮긴이) - 언약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맹세로써 그 언약을 지켜낼 필요성을 받아들인 어른이다. ... 우리의 유전적 본성을 기계의 도움을 빌린 추론에 내맡긴다면, 그리고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해서 오래된 유산에서 벗어나와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의 윤리와 예술과 우리 자신의 의미를 그 기계적인 추론에만 맡긴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284쪽

<화해 :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핍박을 받은 모든 종교는 핍박을 가한다.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자기를 핍박한 종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

"(민족주의는) 보통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존심이나 영토에 가한 상처의 산물(이다)" (이사야 벌린) -294쪽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 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적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만으로는 피해자의 감저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저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307쪽

<희망의 언약>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첫째, 언약은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제약되지 않는다. 둘째, 언약은 한계가 없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언약은 다른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개인의 만남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언약은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계약에는 그것을 맺는 장소가 선행하지만, 언약은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엇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인 상호성의 모형이다.-331-332쪽

"모든 진정한 언약은 도덕성의 기본적인 측면을 재진술하고 재확인한다. 자율적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판단의 원천에 대한 존경, 건설적인 자애심, 타인의 행복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생활 방식의 원천을 수립한다. ... 그것은 추상적인 도덕이 아니다." (필립 셀즈닉) -332쪽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라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맏늘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338쪽

<옮긴이의 말>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둘 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주의(<문명의 충돌>)와 보편주의(<역사의 종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셈인데, 그 외줄타기의 이름이 바로 '차이의 존엄'이며 그 중심 논리는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이다.

서양 근대 사상이 자랑하는 '관용'의 원칙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옳다'라는 단언에 담긴 무게이다. 관용의 원칙은 '나는 옳다'는 확신보다는 '내가 틀린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더 바탕을 둔 가치이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잠정적 도덕'의 논리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부족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도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관용의 원칙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남의 일에 상관 않는 개인주의(혹은 냉소주의, 더나아가서는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종교적 열정의 폭풍우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열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옳다'는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들(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을 시정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신이 속한 유대교 전통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체다카, 언약, 시장친화적 태도 등)을 뽑아내고 풀어내면서,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자 시급하다고 본 인류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리라.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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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책 읽는 것 보다 이거 쓰는게 더 힘드셨겠어요 ㅎㅎ 공부하신다더니, 독서중에 시간 내신건가봐요 ^^

찬찬히 읽어보니, 저 책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끙 언제다읽지 -_-;; 책 소유욕도 병인데 말예요 ㅋㅋ

마늘빵 2007-08-17 15:16   좋아요 0 | URL
어 과외 안가고 뭐해요. 불량선생 :p
저 책 논문 관련해서 본건데, 약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약간'말고 조금 더. 근데 주석정도에서 써먹을 부분도 있어서 일단 옮겨놨어요. 저 중에 몇 군데 써먹을 데가 있어보여서. 이거 치느라 힘들었어요. -_-
 
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절판


정치는 철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현상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 즉 이미 이성적으로 구성된 어떤 이론을 가지고 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무(無)이론적 태도로 관찰하여 그 현상의 가장 독특한 특성을 파악하려는 자세를 현상학적 태도라고 한다.-14쪽

동물에게도 다양한 욕구가 존재하지만 인간과 같은 복수성은 없다. 인간의 복수성은 인간 개체의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간은 모두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성을 표출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철저히 무시당할 때 견딜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개성과 자존심을 철저히 배제하고 정치적 이해 관계를 위해 자신의 상전에게 봉사하는 사람을 비난하여 부르는 표현 중에 '주구(走拘)'라는 말이 있따.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같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행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를 드러내는 행동 간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정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밑줄그은이 주 : 인간의 복수성이란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다양한 갈등 양상들을 일컫는다. 자존심, 명예, 열등감, 정의, 체면 등등의 것들.-23쪽

우리의 행위는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와 언어 행위로 구별할 수 있다.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는 행위의 의미가 본인이나 타인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공동 생활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언어 행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없는 행위는 언어 행위에 의존하여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것은 결국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에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언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9쪽

정치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상에 속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의 노동과 작업이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모습인 것처럼, 개성을 표현하고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 생활을 하는 것도 인간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를 이해할 때, 정치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32-33쪽

공적 시선을 받지 마라야 할 것이란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 생리적 필요에 부합한 것 등이다. 밥하기, 밥먹기, 성행위 등과 같이 동물로서의 인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은 공적인 시선 속에서 행해질 필요가 없다. 이런 활동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즉 가정이 사적 영역으로 존재했다. 가정은 생존에 가장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 사적 경제의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장소였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가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경제 문제가 절실한 만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의 지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것이 경제활동이라는 사실에서, 경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다.

* 밑줄그은이 주 : 위와 같은 의미의 사적 영역은 '고대'의 의미. 현대는 이와 달리 해석된다. -41쪽

한편 공적 영역은 아고라처럼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이는 개인의 차이, 인간의 복수성을 핵심으로 하는 행위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개성을 드러내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보아주고 들어줄 때 의미가 있따. 이는 마치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과 같다. 관객이 있음으로써 배우의 연기가 의미 있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공동의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의 드러내기 활동이 계속될 수 있고, 이를 통한 공동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41-42쪽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각각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위한 자리로서 마련된 것인데, 이런 구분이 필요한 것은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이 공적 영역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생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는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생의 필연성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인정된다. 필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사적인 문제를 공적인 영역에서 다루게 되면, 필연성의 힘에서 그보다 약해 보이는 공적 문제들은 뒷전으로 물러나 앉게 된다. 자유의 문제보다 빵의 문제가 더욱 시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다.-42쪽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는 노예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이 구체적인 생산 활동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중세의 봉건제 사회는 영지 내의 생산활동 구조가 정치 구조와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적인 것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에서 민주적 토론에 의한 정치 영역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중세의 봉건적 사회국조에서는 왕을 정점으로하는 수직적, 경제적 생산 관계가 곧 정치 관계를 의미한 것이다. -44-45쪽

현대에서는 사적 문제와 공적 문제의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개인 생활에서 개인의 중요성까지도 변화되어 버렸다. 이제 오늘날 사적인 문제란 더 이상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프라이버시 문제로 전환되어 버렸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은, 사적인 관심과 보호 대상인 사유 재산이 공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환되어버린 현상이다. 즉 경제 문제가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45쪽

자본은 재산과는 달리 소비를 통해 없어지지 않는 일종의 항구성을 갖고 있다. 자본의 항구성은 정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고 과정의 특성을 가진다. 지속적으로 자본을 움직이는 과정을 유지하지 않으면 자본은 다시 소비되어 소멸하고 만다. 즉 돌고 도는 돈은 계속 돌려야 한다. 따라서 자본은 자기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과정을 수행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게 된다. 이로써 공적 관심이 자본 유지와 존속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는 현상, 즉 공적 관심이 사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는 현상을 낳는다.-46쪽

사적인 것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왔다고 해서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인 것을 위해 기능하는 것으로 전환시켜버리고, 이와 더불어 공적 영역에서만 가능한 인간의 복수성에 바탕을 둔 인간의 활동을 잠식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47쪽

정리하자면,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이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55쪽

철학은 확실한 진리의 준거를 가지고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정치는 그러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진리의 준거가 존중되는 것은 사회적인 것에서이다. 준거와 기준이 존재하는 한 복수성은 존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은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놀라운 경험에서 시작된다. 모든 언어 활동은 진리 발견 과정에서는 중요하지만 지닐 발견과 더불어 언어 활동은 중지된다. 진리가 등장하는 곳에서 정치적 인간인 쏘온 로곤 에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정치 영역은 진리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79쪽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이때의 진리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관련된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배후에 진리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이 연관된 진리 개념이다. 이러한 진리 개념은 흔히 말하는 진리 판별의 두 기준, 즉 대응설과 정합설 가운데 대응설의 근본 원리와 연결된다. 대응설이란 주장된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주장된 말의 진위를 검토하는 것이고, 정합설이란 주장된 내용 가운데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가를 따지는 것, 즉 논리성에 대한 검토를 의미한다.-81쪽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이해가 아니라 대화 당사자 사이의 상호 이해이며, 이는 구체적인 대화 행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실제의 언어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행위에서는 사실상 두 가지 차원에서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말하는 내용의 교환이다. 둘째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 당사자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후자는 세 가지 차원, 즉 말하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 말한 내용에 대한 말하는 사람의 입장, 그리고 이런 대화가 그 상황에 적합한지의 문제 등이다.

이 두 차원의 상호 작용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합의를 이룰 때, 세 차원에서 타당성의 검증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 밑줄그은 이 주 : '세 차원'이란, "첫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둘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내용이 실현 가능한 상황에 있는지를 따져볼 것", "셋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 말이 과연 적절하게 한 말인지를 문제삼을 것"을 지칭한다. 이는 하버마스의 형식 화용론을 요약한 것이다.-89쪽

동정은 특히 루소가 정치적 행위의 원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성선설을 바탕에 두고 이러한 동정의 힘을 신뢰했다. 그러나 동정과 감정 이입에 의한 행동이 파괴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파시즘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변혁을 가능하게 한 혁명적 힘을 생각하면 그것이 차가운 이성적 합의보다는 정서적 합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이는 연대가 이성보다 감정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 중략 ... 나아가 정치적 설득 또한 이성적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정치적 연대 또한 이성적 합의가 자동적으로 수반되지 않는 어떤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감정적인 차원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공동 행위자를 결속하는 것은 감정의 직접적 일치가 아니라 참여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이 원리란 위대성, 명예, 위엄, 영광, 평등, 공포, 불신, 증오와 같은 것들이다.-108-109쪽

시민의 판단이 이와 같은 세계적인 차원으로까지 관점이 확장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시민이 판단을 내려본 후에야 알 수 있다. 실제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함께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채, 선험적으로 판단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따라서 판단을 내리는 행위 자체는 바람직한 정치 영역의 보존과 정치적 삶을 통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험한 것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 밑줄그은 이 주 : 마지막 줄 명언. 밑줄 쫙.-111쪽

세계적 연대의 싹은 시민이 내리는 정치적 판단에 이미 존재한다. 판단 자체가 지역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편파성을 극복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 연대를 기능하게 하는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되어 비판받을 것을 감수하고 행하는 판단 행위 그 자체다.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이 소통되게 하는 정치 영역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판단을 내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판단 불능이나 혼자 머리 속에서만 하는 판단으로는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 수 없으며 오히려 세계에서 소외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쏘온 로곤 에콘의 언어 사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대화하는 것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117쪽

시민은 항상 확장된 사고를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의 판단을 필요에 따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통해 형성된 시민의 공동 행위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져야 한다. 다수의 의지와 괴리된 법은 수정되어야 하고 저항을 받아야 한다. 시민의 준법 정신이 투철해야 하는 만큼 시민의 저항정신도 투철해야 한다. 맹목적인 법 준수와 판단의 중지는 간접적으로 제도적 폭력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21-122쪽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며, 법은 진리 자체가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복수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관점을 언어적 판단과 의견을 드러냄으로써 이룩되고, 이러한 의견과 판단을 제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적 영역, 즉 정치 영역이 소멸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은 의견과 판단을 제시해야 하고, 이렇게 제시하는 의견과 판단을 중심으로 공동 행위가 형성된다. 이 공동 행위가 곧 정치적 권력의 유일한 근거다. 법은 이 근거에 의존해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122쪽

[미주12]

"언어의 본질적 사용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문제는 항상 정치적이다." (한나 아렌트) -133쪽

[미주61]

그러면 폭력이 불합리한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종종 폭력을 비합리성의 범주에 넣지만, 폭력 자체는 이성의 반의어가 아니다. 이성과는 무관하다. 폭력은 오히려 목적을 위한 '합리적' 계획하에 행사되기도 한다. 때때로는 격렬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목격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분노를 터뜨린다. 이 분노에 반대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몰이해일 뿐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분노를 억누르거나 없애려는 것은 비인간화를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폭력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효과적인 경우는, 마치 정당 방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처럼 아주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폭력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이 전략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사용될 때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142쪽

[미주61]

폭력의 경우는 다른 정치적 행위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즉 폭력은 본질상 수단적이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 의도된 목적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은 폭력 행위에서 정당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좋은 목적이 폭력적 수단에 의해 산출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목적이 수단에 의해 다시 쉽게 압도되어버리는 것이 폭력이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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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7
존 그레이 지음, 손철성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절판


나는 자유주의적 실천의 토대를 탐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정권은 바람직한 보편적 통치 형태와는 거리가 멀고, 단지 근대 후기 또는 탈근대의 초기에나 정당화될 수 있는 제도들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글 中) -11쪽

어떤 정권이 정당한지의 여부는 그 정권이 자국 국민들의 문화적 전통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긜고 자국 국민들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감사의 글 中)-12쪽

1장 근대 이전 : 자유주의의 예비적 모습

근대인에게 자유는 법의 지배에 의해 보호되는 간섭받지 않는 독립된 영역을 의미하지만, 고대인에게 자유는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서 발언권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21쪽

그리스인들에게 그리고 아마 로마인들에게도 자유 관념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됐는데, 이런 공동체 차원에서 자유는 외부 통제가 없는 상태, 즉 자치를 의미했다. 심지어 자유 관념이 개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도 공동체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공동체의 협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닫는 의미로만 사용됐다. 이처럼 고대와 근대의 자유관은 상당히 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21-22쪽

"정의란 잘못을 범하지 않거나 잘못을 당하지 않기 위한 계약이다"(글라우콘) 아리스토텔레스가 들려준 바에 따르면, 소피스트인 뤼코프론은 법의 유일한 목적은 개인의 안전 보장이며 국가는 정의롭지 못한 일의 방지 같은 소극적 기능을 담당하기에 법과 국가는 일종의 계약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연과 관습을 구분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자연적 노예 상태라는 관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수사학자인 알키다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신은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자연은 아무도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22쪽

"모든 시민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 그래서 개인들이 지위와는 상관없이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은 허용하지만, 특정한 개인에게는 이익이 되고 타인에게는 피해를 주는 특권이나 법률은 제정되어서는 안된다." (로마 12표법 공법 제 1항) -27쪽

2장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

"자연법이 자기 보존의 욕구에서 도출되어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 보존의 욕구가 모든 정의와 도덕성의 근원이라면, 근본적인 도덕적 사실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다. 즉 모든 의무는 자기 보존이라는 근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절대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의무는 없으며, 의무는 그것의 수행이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구속력이 있다.오직 자기 보존의 권리만이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자연적 의무를 정식화 해주는 자연법은 아닌 것이다. ... 중략 ... 즉 의무와 구별되는 인간의 권리를 기본적인 정치적 사실로 간주하고 국가의 기능을 그런 권리의 보호나 보존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교설로 생각해도 좋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의 창시자가 홉스였다고 말해야 한다." (슈트라우스) -31-32쪽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 존재는 (자연의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우선 자기 보존의 성향을 가진다고 봤으며, 그런 필연적인 자기 충족 행위들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인간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는 밑줄그은이가 첨가한 것-33쪽

[홉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법의 침묵과 같은 것으로서, 개인이 현재의 욕구를 추구하려고 행동할 때 방해받지 않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33쪽

홉스와는 다르게 스피노자에게 개인의 자유란 욕구 충족을 막는 장애물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최고 목적이다. -33쪽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유를 본질적 가치롤 간주한다는 점에서, 즉 가장 훌륭한 삶을 위한 필수 요소이자 선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홉스보다는 자유주의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스피노자와 홉스는 자유주의의 사회개량주의적 관점, 즉 인간사는 열려진 미래를 향해서 무한정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성찰이 제대로 적용된다면 인간의 운명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영원한 무능력 탓에 사회 개량의 전망은 어둡다고 봤다. -35쪽

로크는 영구적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설립하는 데 어떤 선천적인 장애물도 없다고 본 점에서 자유주의자에 속한다. 로크는 자기 자신의 사회에서 일어난 절대군주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 자연법이 요구하는 자의적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의 모범적 사례이며 시민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40쪽

3장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서 오직 법에만 종속될 수 있으며, 한 개인이나 많은 개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거나 고통 받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자유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소질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왕래하고 연합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끝으로 자유는 행정부 공직자들 전원이나 일부를 선출하거나, 권력자가 많든 적든 고려해야만 하는 충고, 요구, 청원을 통해서 국가 행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콩스탕) -51쪽

영국의 자유주의는 고대의 권리들과 역사적으로 선행했던 것들에서 자유권의 근거를 찾았던 반면에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연권이라는 추상적 원리에 호소했다.-53쪽

5장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바로 그 뒤를 이은 시기에도, 현대 자유주의나 수정자유주의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충실한 사상가들이 지적 영역에 훨씬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1944)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은 대담하고 과감했으며, 모든 진보적 견해와는 반대로 나치즘의 뿌리는 사회주의 사상과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하이에크는 서구 국가가 사회주의 정책을 선택한다면 결국에는 전체주의라는 인과응보식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구 문명에 용인될 수 있는 미래는 사회주의 이념을 맹세코 부인해야하며, 그동안 포기됐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길(법의 지배를 받은 제한적 정부)을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77-78쪽

특히 노직의 작업은 자유주의 전통을 위해 유토피아적 전망을 복원, 활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실 (하이에크를 제외한)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이념이 요구하는 다원주의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이런 유토피아적 전망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노직은 유토피아를 거부하지 않은 채 최소 국가의 제도들이 자유주의적 메타 유토피아의 구조틀, 즉 각자의 다양한 유토피아적 전망들을 실제로 실현하고자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려 하는 정치 질서를 구성해 준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노직의 작업은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비경제적 개인적 자유(언론이나 생활 방식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어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재론한 노직의 주장은 오랫동안 미국 우파의 전통이 되어 왔던 자유 시장에 대한 보수주의적 옹호와는 뚜렷하게 대조된다.-84쪽

6장 토대에 대한 탐구

자연법이란 독립적으로 독자성을 지니는 인간의 선에서 직접 도출되는 옳은 행위의 원리나 도덕적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90쪽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는 자유의 원칙은, 밀이 원하는 자유주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피해라는 개념 자체는 매우 어려운 논쟁을 야기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비록 피해라는 개념을 적절히 규정한다고 할지라도 자유의 원칙은 행동을 이끌기에는 여전히 불충분한 안내자이기 때문이다.-101쪽

밀의 원칙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이해관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적 영역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럴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늘 정당화되며, 또한 효용성을 계산해 본 결과 그런 제한이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입증된다면 자유의 제한은 늘 정당화될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밀의 원칙은 결국 자유와 부자유가 형평성 있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개, 피해를 막고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며 자유를 제한하는 정책은 특정 사회집단들에게 훨씬 불평등하거나 불공정한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다. 이런 결과를 막으려면 밀의 원칙은 공정성이나 형평성의 원칙(즉 전체의 복지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과 경쟁관계에 있는 원칙)을 더 많이 보완할 필요가 있다. 밀이 효용성의 원칙에서 자유의 원칙을 도출하는 데 성공할지라도, 자유의 분배를 규제하는 공정성의 원칙은 분명히 전체 복지의 증진과 갈등을 빚을 것이다. 자유의 분배에서 공정성을 보증해주는 그런 원칙은,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래서 공리주의 관점에서는 옹호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밀의 기획이 전체 복지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과 자유의 우선성과 자유의 평등한 분배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심을 화해시키련느 기획이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닌 기획이었다. 왜냐하면 피해 방지라는 공리주의적 정책이, 결과적인 부자유의 분배에 공정성이 제한을 가하는 일을 항상 존중해 주리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102-103쪽

계약론적 방법이 산출한 자유의 원칙은 애매하고 위험하기 그지 없는 밀의 피해 원칙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말하는 최대의 평등한 자유 원칙(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일체의 복지주의 정책을 제한하는 원칙)과 비슷하다. 롤즈의 이론이 밀의 자유주의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가까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롤즈의 최소극대화 원칙이 사회에서 가장 처지가 나쁜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불평등은 부당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지만, 롤즈는 제 1원칙인 최대의 평등한 자유 원칙은 밀의 원칙이 허용하는 부자유의 부당한 분배를 금지한다. 게다가 롤즈는 차등의 원칙에 따른 [부, 소득, 기회 등의] 재분배만을 정부의 기능으로 부과하는데, 이것은 자유의 보호와도 상관없고, 예술이나 과학의 장려를 위한 완전주의적, 공리주의적 정책들과도 상관없으며, 정의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되었던 전체 복지와도 상관없다. 롤즈의 계약주의적 방법은 윤리학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갖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공리주의 이론들보다도 자유주의적 자유를 옹호하는 데 고유한 장점을 갖고 있다. -103-104쪽

7장 자유 개념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현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준들 중의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나 수정자유주의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비나 시장의 작동 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정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해, 그리고 경제 조직의 작동과 관련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기본적 자유가 계약의 자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적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112쪽

7장 자유 개념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현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준들 중의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나 수정자유주의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비나 시장의 작동 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정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해, 그리고 경제 조직의 작동과 관련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기본적 자유가 계약의 자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적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113쪽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소한 그가 자신의 재능, 능력,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만약 이런 자기 소유권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는 (노예 제도에서처럼)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회주의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의 자원 같은 한낱 물건으로 전락한다. 내게 내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나는 내 목표를 성취하거나 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없으며, 내 자신의 목표를 다른 사람의 목표나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의 요구에 종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에 수반해 계약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결사와 운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자유를 갖는다는 말일 수 있으며, 이런 소유권은 그런 자유들이 축소될 때마다 손상된다. 이럴 경우 소유권과 기본적 자유들 사이의 연관성은 본질적인 것이지 단지 수단적인 것은 아니다.-114쪽

완전한 자유주의적 소유권 체계에서는 개인이 불가피하게 자신의 재능이나 자원에 의해서 제한되더라도, 자신의 이웃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나 의견에 의해서는 제한되지 않는다는 통찰이 그것이다. 오직 대지의 법에만 종속되는 개인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이 선택한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누구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그 누구에게서 허가를 받을 필요로 없다. 즉 지나치게 위험하다거나 관습적인 도덕적 견해를 벗어났다며 이웃들이 비판할 수도 있는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 -117쪽

"이전의 노력들이 이미 공동의 견해를 산출한 경우, 무엇이 바람직한지 의견이 모아진 경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반적으로 인정된 가능성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일 경우에만 집단적 동의에 의한 행동은 이뤄진다." (하이에크)

... 중략 ... 왜냐하면 사적 소유 제도와는 달리, 공동체적 소유 제도에서는 개인의 계획이 실제적으로 실현될 수 있으려면 그 계획이 자신이 속한 사회나 자신이 속한 협동체의 다른 성원들에게 지배적 견해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권의 옹호는 단지 사적 소유권을 소극적 자유와 연결시키기보다는 개인의 자율성, 즉 자신의 인생 계획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연결시킨다. 자유주의 질서의 입헌적 구조는 기본적 자유를 형식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인데 비해, 사적 소유권은 기본적 자유를 실질적이거나 적극적으로 구체화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17-118쪽

비록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소유물을 가진 사람보다 덜 자율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더 자율적이다. -118쪽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는 저항이 굶주림에 의해 천천히 진행되는 죽음을 뜻한다.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로운 원칙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낡은 원칙을 대체했다." (트로츠키) -120-121쪽

9장 자유주의 국가

특히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로크적 자연 상태의 권리를 상실한 개인은 국가가 제공한 권리 보호 기능에 따라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노직의 제안을 봐도, 그가 설명한 최소 국가주의는 명백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권리 양도는 동의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노직의 이론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권리들이 축소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이 제안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133쪽

결론 : 탈자유주의

"자유주의 사회란, 강제력보다는 설득에 의해서, 혁명보다는 개선에 의해서, 현재의 언어적 실천이나 다른 형태의 실천들과 새로운 실천들을 위한 제안들 사이의 자유롭고 열린 만남에 의해서 그 이념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상적인 자유주의 사회가 자유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보면서 그 결과를 준수하려는 자발성 이외에는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라는 점이다." (리처드 로티)-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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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로저 트리그 / 자작나무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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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란 누구인가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들어가는 말 中)-11쪽

<홉스>

홉스는 결정론자였고, 인간과 동물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의지하거나 의지하지 않음에 있어서 다른 생물체에 비해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님을 단호히 주장한다. 홉스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현대 철학자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거나, 우리가 의지한대로 행위하는 능력으로 자유를 정의했다. 그러나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행위로 옮기는 자유를 일차적인 선택의 자유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묶이지 않은 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홉스에게 인간의 자유는 단순히 강제의 부재에 불과하다. 언덕 아래로 구르는 돌이 자유롭듯이, 우리가 그렇게 자유롭다고 그는 생각한다.-25-26쪽

홉스는 사람들이 응분의 처벌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자체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26쪽

홉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연스런 애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으며, 우리가 우리와 가까운 타인에 대해 애저을 품을 수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낯설은 사람을 돕는 행위에 대해서는 좀더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행위란 '우정을 구매하려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공포감에서 유발된 '평화를 구매하려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있어 자기 집착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과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도 배려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33쪽

"강제력이 없다면 계약은 한낱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을 안심시킬 수 있는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사람들은 합의에 이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근본적 경향이 변한다거나 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성은 계약의 준수가 그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국가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 지상명령이 되며,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힘을 어떤 집단이나 한 사람에게 양도하게 된다. 홉스는 군주제를 선호했지만, 그러한 선호를 철저하게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양도한 힘을 갖고서 주권자는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우리에게 의무가 강제되는 절차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주권자가 하는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36쪽

<흄>

오로지 욕구와 감정만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 생기는 동기가 원인이 되어야만, 인간의 행위는 설명될 수 있다. 동기 없는 인간 행위가 가능할지라도, 그것이 합리적일 수는 없다. 자유의지가 신성한 것으로 정의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이성적 행위를 모델로 삼아서 행위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흄은 그러한 일체의 시도를 배격한다.-49-50쪽

"인간이란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이거나 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서로를 결합시키며, 상호운동을 하는 항구적인 유동상태에 있다." -53쪽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56쪽

이제 도덕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명령이나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특성의 결과일 뿐이다. 흄에 있어서 도덕은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도덕은 인간 본성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58-59쪽

정의란 '인위적' 덕이며, 따라서 사회는 정의를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 본성의 허약함과 고약함에 관해 흄은 "인간은 그들이 치유할 수 없는 특성을 완화하는데 전력해야 한다"고 말한다.-59쪽

"인간의 선의나 자연의 재화를 충분히 증대시키면, 당신에게 정의란 무용해진다" 사회의 관습이 생기는 까닭은 정의와 재산 때문이다. 사회의 보존이 우리의 공동 이익이긴 해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운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임을 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60쪽

"인간은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 뿐이다"-60쪽

<다윈>

도덕은 공감처럼 우리 본성의 일부인 욕구와 도덕적 감정에서 발생한다. 다윈은 우리의 '사회적 본능'이 '저급한' 충동과 충돌하는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말한다. "미래 세대를 바라보면, 사회적 본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공포감은 생기지 않ㅎ는다. 우리는 덕있는 습관이 점점 더 강해져서 유전적으로 고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래에 우리의 고급한 충동과 저급한 충동간의 갈등은 덜 격렬해질 것이며, 마침내 덕이 승리할 것이다." -79쪽

다윈은 도덕이 개인에게 이득이 될 수 없을지라도, 부족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싶어했다. 그는 말한다. "애국심, 성실, 복종, 용기, 공감을 상당한 수준까지 소유함으로써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 하고, 일반적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는 부족은 다른 부족을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도태가 될 것이다." -82쪽

<니체>

"엄밀히 말해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95쪽

우리가 이 '세계 내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범주일 뿐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결부되어 있으며, 결저되어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말한다. "진리는 일조의 오류로서, 그것 없이는 어떤 종족의 삶은 영위될 수 없다" 그는 사상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정신'이나 이성, 사유나 의식, 정신, 의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쓸데없는 허구이다. '주체와 객체'의 문제도 없다." -98쪽

'이 세계'와 '이 세계에 관한 주장과 믿음'의 이원론은 결코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다면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주장이나 믿음도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의 결론이다. 이제 일관된 니힐리스트는 오직 침묵할 뿐이다.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면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을 전제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 니힐리즘은 그 어떤 것에의 집착도 허용하지 않는다.-99-100쪽

"나는 현재의 태양, 현재의 대지, 현재의 독수리, 현재의 뱀과 함께 돌아가련다. 새로운 삶이라든가, 더 유복한 생활이라든가, 그와 유사한 삶은 필요없다. 나는 만물의 영원회귀를 다시 한번 가르치기 위해서, 가장 큰 일이든 가장 작은 일이든 지금과 똑같은 동일한 자아를 유지하는 삶으로 영원히 돌아가련다." -103쪽

삶이 현재와 같은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삶을 가치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느낌 때문에 기독교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정치적 차원에서든, 구원의 문제가 등장한다. 분명히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우리가 현재 신이 의도한 대로 살고 있지 못함을 암시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이 어떤 방향을 갖는다는 확신은 현재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한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암울한 묘사로서 어떠한 처방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 의한 지배욕구를 옹호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115쪽

<마르크스>

"(미래 공산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먹이는 일을,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 -117쪽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117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 -119쪽

우리는 우리가 처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그것을 변혁시키기를 바랄 수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들이 처한 여건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중요한 절차가 된다. 경제적 여건은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지만, 그것의 불가피성은 무엇이 그들에게 진정한 환경인가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분명히 환경이 인간을 만들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도 믿었다. -121-122쪽

흄이 자원의 결핍과 선의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스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128쪽

마르크스는 사회적 전통이나 개인적 습관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흄처럼 관습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습관적 행동에 의한 덕 있는 성품의 계발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놓인 우리의 기본 시념과 성향이 특정한 경제체제의 작용에서 유래하낟고 믿기 때문에, 대규모의 혁명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133쪽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는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잘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선견지명을 갖춘 혁명주의자는 지독한 이타주의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역할을 마르크스는 강조함으로써, 자기 충족적이며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결단하는 원자론적 개인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개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필요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것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 모델을 악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면적 혁명의 과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자이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압박과 억압의 기제를 수립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혁명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내적 모순을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은 내적 모순을 예정하고 있다.-136쪽

<프로이트>

"에고와 이드의 관계에서 에고는 말을 탄 사람과 같다. 그는 말의 넘치는 힘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141쪽

<플라톤>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국가는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165쪽

동일성의 절대적 기준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해야 하며, 그러한 기준에 호소할 때에만 우리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잣대라도 똑같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도덕 기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모양이나 소리를 초월한 다른 세계로부터 나온다. 선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형상'의 이름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공통으로 갖는 그 무엇으로, 사물들은 모두 그 공통 성질을 나누어 갖고(분유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선 그 자체'란 우리의 일상 세계의 특징과는 구별되며, 분명한 것은 그것의 타당성이 인간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닫는 것이다. 다른 형상들처럼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영향받지 않는다.-170-171쪽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안의 최선의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91쪽

"국가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면서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는데, 그 지점에서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면서도 합창이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작은 공동체가 된다." -194쪽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인간이든 가정이든 가족이든, 그것이 완전히 계발되었을 때의 그 무엇을 우리는 그것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목적인과 목적은 최선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목적과 최선의 상태는 자기 충족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또 인간이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196쪽

개인은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은 노동의 분화, 따라서 계급의 분화가 존재하는 정치 체제를 산출했다. 사회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는 신과 짐승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려는 본능이 우리에겐 주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언제나 함께 연합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197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아무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반복한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공동체는 적절한 목적을 갖지만,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그들의 적절한 목적을 실현하는 경우에는 최상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자주 입증하고 있다.-198쪽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식물과 동물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활동을 한다. 동물도 사물을 감각하고 그에 따라 활동한다. 그러나 이성을 소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함축하는 영혼의 활동에 있다"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선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성과 도덕적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202-203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해 주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이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서로 다른 근본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역해서 행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바에 따를면, 우리의 참된 본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도덕적이어야 한다.-21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와 관습을 강조함으로써, 자유분방한 개인주의의 범람을 피하려 했다. 법과 도덕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국가론의 근거는 각 개인의 도덕적 책임에 있으며, 집단의 강제력에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을 결집시키는 바탕은 가족간의 자연스런 애정이며 국민들 간의 친애이다. 남은 대안이 전체주의적 통치, 아니면 타인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 간의 갈등상태뿐인 것처럼 보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력적인 중도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를 수천 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그리스 도시국가의 맥락으로부터 수백만 명으로 구성된 근대국가로 옮겨 놓을 때 분명히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214쪽

<토마스 아퀴나스>

자유와 합리성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자유롭지 않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기 때문에 비난받을 수 없다. 이러한 유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의지의 박약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아퀴나스가 제시하는 한 가지 답변은 습관, 성향, 정념은 이성에 의해 간접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229쪽

도덕과 법이 아퀴나스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 까닭은, 도덕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법은 도덕 기능의 하나이다. 법은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부당해질 수 있으며, 그것의 목적은 반드시 공동선이어야 한다. 아퀴나스는 법이 상이한 도덕적 관점들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 그 역시 현대 자유주의의 여러 양상들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는 법이란 사람들의 도덕적 충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고 부도덕한 충동을 억누를 수 있도록 하는 규범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법적 제재의 위협이 필요한 젊은이들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길들여지면서, 그들은 과거에 두려움 때문에 하게 되었던 행위를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덕있는 사람이 된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강제하는 이러한 종류의 제재가 바로 법적 제재이다." –-234쪽

<비트겐슈타인>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하여야 한다." -243쪽

"신비로운 것은 사물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245쪽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실재와 관련시켜 그것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미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어와는 독립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언어에 우선성이 부여될 때, 개인의 사적 믿음과 객관적 세계는 서로 대비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갖는 공적 언어는 규범을 형성한다. 이 세계는 언어의 가능성에 의해 제한되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서의 우리의 개념은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사유방식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혹은 일정하게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50-251쪽

"의도는 상황 속에, 인간의 관습 속에 그리고 인간의 제도 속에 새겨져 있다." -251쪽

고통을 기술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고통은 가려움, 전기충격, 구역질, 여타의 불쾌한 감각과 구별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한 개인에게만 인지되고, 그 개인의 사적 감각과 결부되는 사적 언어란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중요한 사항은 그가 언어와 관련하여서만 일정한 개인적 경험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질 수 없는 언어란 있을 수가 없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253쪽

기억을 통해서 언제나 우리의 판단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고통이 지난 주에 겪은 고통과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기억을 통해서 그때의 고통을 기술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따. 그렇지만 여전히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개잉ㄴ의 내면 경험에 의존하는 정당화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다른 믿음에 호소하여 내 마음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과정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고 조간신문을 여러개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적 대상에 대한 관념을 항상 제거하라. 즉 사적대상의 관념은 항상 변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항상 당신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없다고 전제하라."

우리는 우리의 사적 경험이 마치 공적 세계의 대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듯이, 어떠한 기술이 정확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오류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면, 정확성과 오류도 구별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254-255쪽

그에게 세계란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파악되지 않고 그와 별개로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적 경험을 언어사용과 분리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사적 경험이 일차적으로 언어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경험은 말해짐으로써 공적 세계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으며, 개념적으로 나의 행태와 연관되게 된다. 사적 경험이 언어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언어의 규제를 받으면서 경험이 형성되는 것이다.-257-258쪽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동일한 개념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판단은 일반적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의 일치는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심각한 불일치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개념을 사용할 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259쪽

"본능이 우선하며, 이성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언어게임이 생길 때까지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63쪽

"나의 정체성이 어떤 형이상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개입된 사회적 언어적 활동 때문이라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언어로부터 추상할 수 없으며 언어적 범주의 도움 없이는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언어가 자아를 형성하며 실재를 결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성을 초월하는 문제로 번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언어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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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09 23: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책 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신경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_- 알아먹기 힘든 문장이 많아서요. 첫째 질문은 그렇게 해석하는게 더 맞는거 같고요 - 번역상의 문제라고 해야하나 - 두번째 질문은 솔직히 저도 문장과 맥락이 완전히 머리에 들어온건 아닙니다. 훑어보는 책으로 보고 넘겼어요. 원서는 -_- 휴. 영어가 안되는지라 읽으려면 매우 오래걸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읽더라도 매우 중요한 일차서적에 한해서만 봐야겠죠. 이런 책은 그 정도의 정력을 투자하기에는...

아마도 홉스에게 있어 일차적인 자유란, '강제성의 부재' 상태가 일차적이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행위로 옮기는 자유'를 일차적이지 않다고 본거 같습니다. '언덕 아래로 구르는 돌이 자유롭'다는 말은, 그런 구르는 돌에겐 강제가 부과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유한 듯 합니다. :)

비로그인 2007-08-0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많았는데, 날아가버리기도 했고..힘이 빠져서..

그러나 다음의 글은 마음에 드는군요.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 117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


마늘빵 2007-08-09 23:36   좋아요 0 | URL
유명한 말이죠. :) 둘 다 마르크스의 말인데, 뒤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한 말입니다. 그걸 일부러 인용을 하고 있는데, 결국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를 떠난 생산은 생각할 수 없고, 사회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비로그인 2007-08-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간 핵심정리 요약 리뷰 써주세요. 정말 인간본성에 대한 해석들이 궁금하단 말이예요.

마늘빵 2007-08-10 00:00   좋아요 0 | URL
헙. 리뷰는 좀 미뤄두고 있는데욤. 쓸지 안쓸지도 모르겠어요. 요새 계속 관련 책 '읽기만'하는 중이에요. 리뷰 못쓴지 넘 오래됐다. -_-

비로그인 2007-08-10 13:00   좋아요 0 | URL
저도 리뷰 잘안쓰는데..안쓰면 잊어버리더라구요. 요즘 안그래도 진짜 이카테고리처럼 형광펜을 들고 긋고있어요

비로그인 2007-08-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홉스: 그러나 그는 낯설은 사람을 돕는 행위에 대해서는 좀더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행위란 '우정을 구매하려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공포감에서 유발된 '평화를 구매하려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 참 마음에 안드는 아저씨네. ^^;;; [리바이던]의 저자군요. 아부지 서재에 꽂혀있는데, 읽을 가능성이 이제 더 낮아졌어요 ㅡ.,ㅡ

마늘빵 2007-08-10 13:07   좋아요 0 | URL
크크크. 홉스 재밌어요. 알고보면. 나름 일관된 논지를 펼치고. 요새 논술이다뭐다해서 쉽게 다시 쓴 <리바이어던> 같은 책들이 나와있더라고요.

비로그인 2007-08-10 13:36   좋아요 0 | URL
한사람의 이론이나 생각이 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찌하면 정말, 그 뭐라고 그러죠? 하나에만 목을 맨 똘아이 (^^;;;)를 뭐라고 표현하드라?가 되겠지만, 여하간 서로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거죠

마늘빵 2007-08-10 18:43   좋아요 0 | URL
삶에 있어서 자기모순을 점차 제거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저보고 자기모순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학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부분 저도 공감합니다. 하물며 사회, 정치, 국가를 논했던 홉스같은 철학자야말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시키려면 자기모순부터 제거해야했겠죠.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자기모순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흄: "인간은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 뿐이다" ==> 가장 냉철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 하지만,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수긍하기가 어렵네요

마늘빵 2007-08-10 13:09   좋아요 0 | URL
흄에게 있어서 기본은 "오로지 욕구와 감정만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킬 수는 없다."이기 때문에, 내 손가락의 상처가 당장 아프니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장 아픈 내 손가락을 돌보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죠. 하핫. 흄도 나름 재밌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윈 : "미래 세대를 바라보면, 사회적 본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공포감은 생기지 않ㅎ는다. 우리는 덕있는 습관이 점점 더 강해져서 유전적으로 고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래에 우리의 고급한 충동과 저급한 충동간의 갈등은 덜 격렬해질 것이며, 마침내 덕이 승리할 것이다."

==>과연 유전자가 이를 기억할지는 의문이 되는데요. 여하간, 무척이나 긍정적인 분이셨군요. 전 사회적 본능, 타인배려에 대한 것이 점점 희미해져간다고 생각하는데요.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 하고, 일반적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는 부족은 다른 부족을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도태가 될 것이다

==> 이건 당최 이해가 안가는 걸요? 도와주고 희생하는 쪽이 지배를 하니까, 누가 자연도태가 된다는 건가요? ^^;;

마늘빵 2007-08-10 18:40   좋아요 0 | URL
너무 낙관적인 견해죠? -_- 다윈이 죽은지 오래인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결국 덕있는 습관을 유전적으로 고정시킨 부족이 그렇지 않은 부족을 '자연에서' 지배하고 압도한다는 말인데, 그다지...

비로그인 2007-08-1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부분은 어려워요. 결국 이거 번역 너무 엉망인거 같아요. 뭐 전공자들은 뭔얘기인지 알고 넘어가겠지만 말이죠.

"나는 현재의 태양, 현재의 대지, 현재의 독수리, 현재의 뱀과 함께 돌아가련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니체는 힘 (power)를 좋아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용한 것들이 강한 것들이니까요.

마늘빵 2007-08-10 19:49   좋아요 0 | URL
크크. 이게 일부분을 툭 잘라서 밑줄긋기를 해놔서 그럴거에요. 전후 문맥을 보면 쉬울텐데. 그렇다고 제가 다 쳐서 올릴 수도 없고. :) 크크크.

이건 고대 페르시아의 창시자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말을 인용한건데요, 이 책엔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답변을 나타낸 대목이라고 써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긍정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게 된다고" 생각했으며 "삶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으며, 더욱이 종착점도 없이 불가피하게 반복되는, 지극히 가공스러운 상태, 즉 '영원회귀'라는 것을 생각해보자."면서, 결국 해방이니 구원도 없고, 진보도 죄의식도 후회도 없고, 에라 "지금과 똑같은 동일한 자아를 유지하는 삶으로 영원히 돌아가련다"고 말합니다. :)

뱀이나, 독수리, 대지, 태양 등을 끄집어 낸건 글쎄요, 저도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 니체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대자연의 만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 "미래 공산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먹이는 일을,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제시한 공산주의는 환타스틱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더 깊숙한 인식이 없고서는 어떤 이즘이 성공적으로 실현된다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인간의 소유욕이나 집착 등 그런 부정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실현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놓인 우리의 기본 시념과 성향이 특정한 경제체제의 작용에서 유래하낟고 믿기 때문에, 대규모의 혁명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이것도 이상적인 생각인거 같네요.

"흄이 자원의 결핍과 선의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스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 완전한 사회란 어떤건지, 공산주의 모델이 성공한 사회란 거 같은데.. 전체가 풍요롭지 않고 전체가 모두 가난하다면, 전체의 파이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인간본성을 잘못 전제하고 있다면 후자가 될터인데...


마늘빵 2007-08-10 19:53   좋아요 0 | URL
요 대목들만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상향은 대략 짐작이 되는데, 실현 방법이 안나와있죠. 이상적인 세계를 상정해놓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건 여기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인간본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어떤 관점들을 가지고 접근했느냐를 보기 때문에. 결국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게, 그는 '자아실현'인데, '자유'와 '노동'을 '개인의 자아실현'에 일치시키려고 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가 자유롭다 느끼고, 그것이 자아실현으로 이어지는.

비로그인 2007-08-1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 : 에고(ego)는 'me'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건가요? 말을 제어하기는 커녕, 사람들은 다 미미미미거리는데..

마늘빵 2007-08-10 19:54   좋아요 0 | URL
아 이런건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_-a

비로그인 2007-08-1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무지 많아서 조금 귀찮으시죠? ^^;;; 근데 너무나도 흥미로운 얘기인데다 모르는게 많아서...

마늘빵 2007-08-10 19:54   좋아요 0 | URL
크크크. 밑줄그어진것만 보면 앞뒤 맥락이 빠져서 이해하기 힘들텐데, 책을 보심이 어떨까요.

비로그인 2007-08-10 20:52   좋아요 0 | URL
네.

마늘빵 2007-08-10 20:59   좋아요 0 | URL
하하핫. 귀찮아서 그런게 아니구요. 물어보시면 저도 한번 더 확인해서 도움은 되는데, 제가 잘 몰라서. -_-a

비로그인 2007-08-1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참 마음에 드네요 ^^

=>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식물과 동물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활동을 한다. 동물도 사물을 감각하고 그에 따라 활동한다. 그러나 이성을 소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함축하는 영혼의 활동에 있다"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선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성과 도덕적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안의 최선의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마늘빵 2007-08-13 22:41   좋아요 0 | URL
^^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이 마음에 드는건, 우리의 상식과 부합하는 내용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7-08-1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해 주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이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서로 다른 근본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역해서 행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바에 따를면, 우리의 참된 본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 여기서 국가라는 데에 좀 꺄우뚱하지만 말이죠

마늘빵 2007-08-13 22:43   좋아요 0 | URL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교되곤 하는데, 둘 다 어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은 무엇인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고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억울하게 죽어버린 이후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 체제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배우면서도 플라톤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더랬죠. 인간의 본성은 결국 국가의 기능이나 역할로까지 확대되며 논의됩니다.

비로그인 2007-08-1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비트겐슈타인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사실 예전에 칸트돠 비트겐슈타인을 들춰본 적은 있는데 그때도 그랬는데. 아, 이 참을 수 없는 알고픔 때문에 그래24의 철학강의 신청할 거예요.

마늘빵 2007-08-13 23:08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은 저도 간접적으로라도 접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책 읽다가 중간중간 나오면 그때나 조금 읽어보고 그랬어요. <서양철학사> 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다루지 않아요. 아무래도 근래의 철학자이고 하다보니. 이 사람 맛보기로 조금 접해본 바로는 매우 끌립니다. :)

사실상 자신으로서 철학을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죠. 철학이란건 언제나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박과 또 반박 또 반박이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위에 나온 부분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란 것은 몸으로 직접 부딪힘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바를 '언어'를 통해서 재생시킬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는 것이죠.

비로그인 2007-08-13 22:51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건 언제나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박과 또 반박 또 반박이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이란 말 참으로 마음에 드네요.

비로그인 2007-08-13 22:52   좋아요 0 | URL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란 것은 몸으로 직접 부딪힘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바를 '언어'를 통해서 재생시킬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는 것이죠."==> 이건 좀 생각해볼래요.

마늘빵 2007-08-13 23:07   좋아요 0 | URL
:)
 
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2007. 7. 31 예스 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6473&ref=82&m_type=0





* 스포일러 경고

  2년전 대한민국의 여름밤을 서늘하게 만들어준 영화 <셔터>를 기억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봤던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가장 무섭고 소름 끼쳤던, 정말 닭살 돋았던, 최고의 영화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남자주인공이 목 아프다고 하던, 체중계에 몸을 실은 뒤 눈금을 보고 놀라던 간호사의 모습이, 어두컴컴한 밤길 여자친구와 차를 몰며 도로를 질주하던 장면, 모두 생생하다. 차마 <셔터>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어디에서 뭐가 나오고, 어떻게 놀래켰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긴 뭣하다. 잠깐 언급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포일러 경고 감이다.

  2년 전의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반종 피산다나쿤과 팍품 웡품 이라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태국의 두 젊은 감독이 두 번째 합작품을 들고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원래는 <셔터> 성공 이후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작품을 준비하려다가 어찌하여 다시 만나 또 한 번의 공포물을 만들게 되었다는데, 어느 인터뷰에서 보니 실은 공포영화보다는 다큐나 드라마 류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아마도 다음 작품은 공포물을 피하지 않을까 생각.

  <샴>을 이미 극장에서 '체험'한 관객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제대로 만든 공포영화다, 는 입장과 전작을 벗어나지 못했다 혹은 뻔한 결말로 치달았다, 라는 입장. 아직 극장가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몇몇 영화 중 한 편으로,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한번 체험해 봐도 실망하진 않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다.



* 핌과 플로이는 참 사이가 좋은 쌍둥이였다. 이들은 팔, 다리가 모두 보통의 사람처럼 두개씩 달렸고 오로지 몸만 붙어있는 상태로 태어났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분리수술을 원하지 않았고 평생을 함께 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샴쌍둥이. 내가 태어난 후로 현재까지 샴쌍둥이를 주변에서 본 적은 없다. 사실 한국에 샴쌍둥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 두 눈으로 바로 앞에서 보게 된다면 좀 섬뜩할지도 모르겠다. <샴>이라는 샴쌍둥이를 소재로 만든 공포 영화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을 보게 되면, 특히 그 사람의 외형이 우리와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 한 번 더 보게 되고, 눈살 찌푸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머리로 생각하고 명령을 내리지만, 충분히 지금도 우리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외형이 이상한 사람을 보고서 주변을 멀리하게 되는 행동양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성의 목소리와 나의 몸뚱아리는 별개로 작동한다.  

  샴쌍둥이는 불완전한 분할로 수정란이 나뉘어져 신체의 일부가 결합된 상태로 태어난 쌍둥이를 일컫는다. 착상 후 분열되는 과정에서 일란성 쌍둥이의 배아가 완전한 분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수정 2주 만에 분리과정이 중지되면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대로 자라나 그 상태로 태어나게 된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렇게 태어날 확률은 10만에서 20만 분의 1 정도라고 하며, 여아가 75% 정도, 남아가 25% 정도 된다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쌍둥이도 여아이다. 

  샴쌍둥이가 맨 처음 발견된 곳은 태국으로, 창과 엥 형제는 신체 일부가 붙은 채 출생하였고, 의사들에게 몸을 분리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당시 의학 수준으로 너무 위험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결국 붙은 채로 63살까지 살았으니 보통 사람의 평균 수명 만큼 산 셈이다. 이후 태국의 옛 이름 siam 에서 따서 siam 쌍둥이라 이름 붙여졌다. 샴쌍둥이는 여러 형태로 태어난다. 머리만 붙어있는 경우도 있고 - 이란에서는 50여 시간의 수술 끝에 한명이 사망했고 다른 한명은 90분간 생존 후 사망했다고 한다 - 몸만 붙은 경우도 있으며, 너무 달라붙어 머리와 팔과 다리가 각각 하나씩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 붙어나든 붙어있으면 샴쌍둥이라 칭하는 것이다.




* 한명은 죽고 한명은 살았다. "내 몸은 떼어냈지만 절대 너를 떠나지 않아..." 


  샴쌍둥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원해 분리수술이 시행됐을 때 대개는 하나가 죽고 하나는 생존한다. 영화 속 핌과 플로이 또한 그랬다. 한 명은 분리수술을 원했고 결국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았다. 살아남은 핌은 이전에 병원에서 만났던 남학생 위와 함께 사랑을 나눴고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홀로 남은 핌이 마음이 편했을리 없다. 공포 영화인지라 수술 중 죽은 플로이가 귀신 되어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공포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핌은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몸은 분명 연결되어있지만 마음은 둘인 샴쌍둥이는 함께 해왔지만 어느 순간 둘이 되었고, 하나만 살아남았다. 영화는 쌍둥이의 심리적 공포와 두려움으로 카메라를 끌어온다. 분명 붙어있을 때도 마음은 둘이었다. 하지만 수술 후 마음도 몸도 둘이 되었을 때 - 둘 다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 그들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서로를 타자로서 대하는 그들은 서로가 친숙하면서도 낯선 타인이다. 

  분리수술을 원한 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귀찮아한다는 뜻이고, 자기도 보통 사람들처럼 하나의 신체를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개체가 둘이 되길 원하고, 현대 의학에 의해 강제로 성공적으로 분리됐다 하더라도, 둘은 하나이다. 몸이 마음이 따로 라고 하여 서로를 타자대하듯 할 수는 없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면 심한 고통을 느낀다. 하물며 한 몸으로 살아오며 함께 이야기하고 놀던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쌍둥이가 내가 원한 분리수술로 인해 죽었다면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공포는 나를 엄습해온다. 죽은 쌍둥이의 귀신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병 때문이다. 나만 살자고, 사랑하는 남자와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나의 일부를 떼어난, 내 몸에 대한, 나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다.  "내 몸은 떼어냈지만 절대 너를 떠나지 않아..." 그건 죽은 쌍둥이가 살아남은 쌍둥이에게 보다는, 살아남은 쌍둥이가 죽은 쌍둥이에게 해야 할 말이다. 
 
  하나의 온전한 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건 세상 모든 샴쌍둥이의 소망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선 다른 하나의 쌍둥이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나마도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하나의 개체가 되길 원한다면 그 정도의 죄책감과 미안함은 생존의 전제조건이어야 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각기 다른 개체로 태어나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이들처럼 평생 붙어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자주 다툰다. 우리는 독립된 신체를 갖고 있음에 감사하고, 독립된 생각을 갖고 있음에 감사하고, 독립된 마음을 갖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한다. 온전히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마음과 생각은 둘인데 몸이 하나인 샴쌍둥이에겐 그저 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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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3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를 무서워하는건 자기의 무의식안에 약간의 상처가 있어서라던데 ..
저는 암튼 공포물을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여름에는 .. 공포물이 !!
샴이라는 영화가 괜찮나봐요.. 아프님 평을 들으니..
@.@~

마늘빵 2007-07-31 17:10   좋아요 0 | URL
저는 공포 잘 보는데 잘 놀라긴 합니다. -_- 의외로 공포영화를 잘 못보는 분들 많습니다. 애, 어른 할 거 없이. 글쎄 상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저는 몰입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 주인공에. 원인이 참 궁금한데 이에 대해 이야기한 글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