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구판절판


사람들에게는 세속의 권력자 또는 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노예근성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법이나 여론이 특정 행동을 촉구하거나 금지시키는 행동 규칙을 결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노예근성은 이기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위선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술사나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증오심을 낳는다. 한 사회의 도덕 감정이 형성되는 데는 여러 요소들이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그 사회 전체가 크게 의미를 부여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당연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보면 그런 이해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공감과 반감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의 이해관계와 그다지 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공감과 반감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26쪽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35-36쪽

사람들이 마음 놓고 믿는 것일수록 온 세상 앞에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런 검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일단 검증을 받았으나 허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도, 인간의 현재 이성이 허용하는 수준 안에서 검증을 받은 데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확신할 일은 결코 아니다.-50쪽

기존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그에 대해 자유 토론을 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그저 사람들이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해 잘 모르게 되는 것뿐이라면, 자유 토론을 하지 않은 것이 지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크게 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면에서 볼 때 그 주장이 갖는 가치에도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히 그 주장의 근거만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 그 주장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특별한 생각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처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일부분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생생한 개념과 분명한 확신 대신에 그저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고만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이런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고 심사숙고하더라도 모자랄 지경이다.-78-79쪽

기존의 통성일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와 다른 의견이 진리일 수 있다. 또는 통설이 진리일 경우, 그 반대 의견은 오류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진리와 오류 사이의 논쟁은 진리를 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또 깊이 깨닫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럴 때 통설이 채우지 못하는 진리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도록 그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주제에 관한 대중의 주장이 흔히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거의 또는 전혀 없다. 그런 주장은 상황에 따라 진리를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담고 있기는 하나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 대체로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존재하는, 그래서 상충되는 내용을 담은 진리들과는 거리가 멀다. -89-90쪽

진보라는 것도 진리를 새로 덧붙이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중략) 다수가 받아들이는 의견이 비록 올바른 기초 위에 서 있을지라도 이처럼 부분적인 진리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통설이 빠뜨리고 있는 진리의 어떤 부분을 구현하는 다른 모든 생각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오류와 큰 혼돈을 초래하더라도, 마땅히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세상살이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자칫 우리가 어떤 진리를 빠뜨리고 놓칠까봐 윽박지르면서 정작 우리는 알고 있는 진리의 어느 부분에 대해 모른다고 그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수의 주장이 일방적인 한, 일부의 의견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일방이 존재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소수파가 아주 강력하게 유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실은 부분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그 소수 의견에 대해 억지로라도 관시믕ㄹ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90-91쪽

"인간의 목적, 또는 막연하고 덧없는 욕망이 아니라 영원하거나 변함없는 이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능력을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최대한, 그리고 가장 조화 있게 발전시킬 것을 명령한다." 그러므로 그는 "각자의 개별성에 맞게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을 이끌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목적을 향해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훔볼트는 이를 위해서 '자유 및 상황의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개별적 활력과 고도의 다양성'이 생기는데, 이들이 곧 '독창성'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101쪽

인간은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을 획일적으로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창작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이,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한껏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인간이 발전하게 되면 우리 삶도 풍요로워지고 다양해지며 활력이 넘칠 것이다. 고귀한 생각과 고결한 감정을 더욱 북돋워주게 되고,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끈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119쪽

이 원리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타인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서로의 행복이나 성공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이 이기적인 무관심을 조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 원리는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심없는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심 없이 남을 돕는 것도, 글자 그대로 또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채찍질을 하거나 혼을 내는 것보다는, 그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 하도록 설득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자기중심적 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사회적 덕목을 꼽아야 할 것이다. -142-143쪽

(위에 이어서)

교육자들은 이 둘을 동일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교육도 강압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확신과 설득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한다. 그래서 일정한 교육 기간이 지나고 나면 오직 후자, 즉 설득과 확신을 통해서만 자기중심적 덕목을 배양해야 한다. 사람은 서로 도와가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며,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취하도록 서로 격려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높은 능력과 감정과 목표가 현명하게, 그리고 품위를 유지한 채 고상한 목표와 계획을 점점 더 지향하도록 서로 자극을 주며 살아야 한다.-143쪽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문제가 되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의 이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어떤 행동과 성격 때문에 무언가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데 대해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주는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달리 취급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정당한 권리 없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타격을 입히는 것, 거짓으로 또는 표리부동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 불공정하게 또는 관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에게서 이득을 얻는 것,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이기적인 마음에서 모른척하는 것 등, 이 모두는 도덕적 비난 또는 심각할 경우에는 도덕적 징벌잉나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기질도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잘못하면 혐오감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146-147쪽

사려 깊지 못하고 인간적 존엄을 지니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타인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한 까닭에 비난을 받는 것은, 단순한 명목상의 차이 이상으로 다르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그를 통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일에서 불쾌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행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사람이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면 우리는 싫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 일은 물론이고 그 사람도 멀리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로 그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모든 벌을 벌써 받고 있다고 또는 받게 되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일을 잘못 처리해서 이미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데, 그러한 잘못을 이유로 그의 삶을 더 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148-149쪽

(위에 이어서)

그 사람을 처벌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에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나쁜 일들을 어떻게 피하거나 치유할 수 있을지 가르쳐줌으로써 그가 받는 벌을 경감시켜줄 방도를 열심히 찾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노여움이나 분노의 대상은 아니다. 그를 사회의 공적인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흥미나 관심을 보임으로써 선의로 간섭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정당한 범위 안에서 그를 가장 심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위반했다면, 그런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하므로, 그에게 응징을 가해야 하고 명백한 징계의 표시로 고통을 주어야 하며 그 처벌이 충분히 무겁도록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149쪽

사회적 윤리나 타인에 대한 의무 같은 문제를 놓고 공공 여론, 즉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 가끔씩 틀리기는 하지만 옳을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ㅁ누제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 그리고 어떤 특정한 행동 양식이 실제로 실천에 옮겨질 경우 자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해서만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다수 의견이라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관계되는 행동에 대해 하나의 법으로서 군림하는 의견은, 옳을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틀리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공공 여론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제 대부분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쾌락이나 편의에 대해 그저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은 전부 자신에게 해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며 극단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마치 몹시 완고한 신자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하낟고 비난을 받자 오히려 그들이 이상한 의식과 교리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무시한다고 반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156-157쪽

우리가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박해할 수 있지만 저들은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떤 정의롭지 못한 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런 것을 함부로 남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마땅하다.-160쪽

그러나 포주가 되는 자유, 도박장을 운영하는 자유도 허용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우는 정확하게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경계선 위에 있어서 둘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운지 즉각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양쪽 모두 주장할 근거가 있다. 관용을 주장하는 쪽에서 본다면, 생계를 잇거나 이윤을 얻기 위해 직업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범죄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전부 허용되든지, 아니면 전부 금지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주장해온 원리가 옳은 것이라면, 사회가 - 글자 그대로 사회가 - 한 개인만 관계 되는 일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이라고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하도록 또는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데 똑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183-184쪽

다른 사람이 문제 되지 않는 한,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가 자발적으로 무엇인가 선택했다는 것은, 그 일이 자기에게 바람직한 또는 적어도 참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최선이라고 판단한 수단을 동원해서 그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준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그러나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자유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한번 이렇게 하고 나면 나중에 다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이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도 허용해주는 원리, 즉 자유의 목적을 본인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른없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자유 상태에 있을 때 누리는 이점을 향유할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이 자유롭지 않을 자유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포기한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189쪽

국가는 각 개인에게만 특별히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의 행사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 깊게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무 사항이 가족들의 관계 속에서는 - 인간의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관계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함에도 - 거의 완전히 무시되다시피 하고 있다.-192쪽

"인간은 그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밀)-223쪽

"인간의 삶에서 각자가 최대한 다양하게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다."(<자유론>의 표지)-229쪽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밀)-230쪽

각주63)

그러나 밀은 자유를 향유할 '성인'의 자격 요건을 매우 낮게 설정하고 있다. 즉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 또는 '충분히 나이가 들고 보통 수준의 이해 능력'만 갖추면 '확신과 설득에 의해 자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능력'을 갖추고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에 의해 정신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밀은 자신의 <자유론>이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화되어서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를 누릴 만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고 본다. '문명사회'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생각하며 살 정도'의 도덕적, 지적 능력을 어느 정도는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낙관론을 바탕으로 밀은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선의의 독재'라는 것이 '악 중의 악'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선의의 독재는 그 포장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리에 어긋나는, 가공할 만한 위험한 괴물로 탈바꿈하고 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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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22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운 개인이 중요하지요.
떼거리, 집단, 사회.. 등등을 경멸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옳든 그르든..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라는 선동적인 메세지는 이 책의 내용과 저자의 메세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인생의 초반부터 삶을 포기한 듯한 무기력한 20대들에게 힘을 준다. 자발적으로 연대해 문제제기하지 못하는 20대들을, 행동하지 못하는 20대들을, 뒤에서 퍽퍽 밀어붙여 올라가게 도와준다. 절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그마한 희망을 안겨줬지만, 그나마 남은 조그만 희망을 키우는건 그들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매달 88만원보단 많이 벌었지만, 아마 일년동안 번 돈을 평균내면 88만원을 약간 초과할 것이다. 동시에 나는 20대이고, 비정규직이었다. 지금은 백수다. 고학력 백수. '그 누구보다'라고 말할 만큼은 아니지만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었고,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뻑뻑한 일상인지를 알고 있다. 내가 경험한 비정규직은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다른 비정규직 20대들의 일상은 나보다 심하면 심했지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려 책을 읽지 않은 이들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한번쯤 접해봤을 즈음, 주변에 있는 공업고졸, 전문대졸 학력의 두 살 어린 직장인에게 '88만원 세대'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아이 曰 "에이 그건, 다 20대가 게을러서 그렇지, 예전에는 막노동도 뛰고 이 일 저 일 닥치는대로 다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20대들은 그렇게 안하잖아. 다 찾으면 일은 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받는 금액이 딱 88만원 맞긴 한데, 이건 너무 오버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지금의 20대들은 예전보다 눈이 높아졌고, 막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돈과 시간을 좀 더 쏟아서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직장에 안착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주변에 보여지는 작은 모습들을 묘사한 것이고,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봤을 때 '괜찮은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건 확실하다.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고를 떠나서 모든 일반 기업체와 대형 마트들, 그리고 심지어는 대학과 중고등학교에까지 비정규직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현격히 늘어나고 있고, 이 시스템은 '당분간'이 아닌 '지속적'으로 저렴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 싸게 부려먹는 셈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피 터지게 싸우는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프랜차이즈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얼마전 대학로를 갔다왔는데 딱 하나 있던 그 영화관이 - 비싸서 잘 안가긴 했지만 - 씨지비로 바뀌어있더라.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관이고 슈퍼마켓이고 커피전문점이고 모든 것이 싹 다 거대자본에 의해 싹쓸이 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타벅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스타벅스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20대들은 취업을 할래도 해봐야 비정규직이고, 취업 말고 장사를 하려고 해도 망할게 뻔히 보이니 갈 곳이 없다. 20대에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무리가 있지만, 20대가 돈을 모아 장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자본의 침투를 저지해야 한다.

  내가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건 내 문제는 아닌데 뭐, 하는 식의 사고방식, 그래도 스타벅스가 맛있는걸 어떡해, 라며 '88만원 세대 이론'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스타벅스와 커피빈 등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그 영향이 나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인데, 당장은 내게 피해가 없을지 몰라도 결국 나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어있다. 우석훈 씨는 이 책에서 20대의 일부분 약 5% 정도는, 소위 말하는 학벌을 갖추고 좋은 직장에 안정적으로 취업하여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딴세상 이야기로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지금의 386세대들은 당시 민주화 투쟁에 열을 올리며 오늘날의 그나마 민주적인 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했지만, 없는 학벌에 낮은 학점이어도 취업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직장을 골라 잡아 갈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그들은 대접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의 20대들이 자신들이 완성한 민주화의 틀을 깨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따라서 20대들에게 호의적이지 못하다. 4,50대들은 어떤가 하면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쉽게 취업했고, 지금은 각 기업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양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의 20대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윗 세대들의 배려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래서 우석훈씨는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고 일어나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 비정규직을 갖게 될, 혹은 비정규직에 있는, 혹은 그나마도 못한 젊은 실업자들은, 연대해야 한다. 적어도 같은 처지에 있는 20대가 20대를 배반하는 상황을 연출해선 안 된다. 지금 우리는 비정규직이고 실업자일지 모르지만 함께 뭉치면 살 수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있는 5%의 다른 20대들을 제외한 나머지 95%의 20대들이 그나마 남은 괜찮은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발버둥치는건 깊은 구덩이 속에서 서로 나오겠다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과 같다.

  연대, 연대 외치지만 사실상 연대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다. 기껏해야 거대자본에 저항하면서 소극적인 실천을 할 수 밖에 없다. 거대 자본에 그게 먹히느냐 하면 모든 20대들이 연대해 거부한다면 몰라도, 소수만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20대의 주머니를 털기 위한 어떤 기업의 상품을 이들이 연대해서 사주지 않으면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닌 소수라면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우석훈씨는 강연회에서 자신이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일부러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그런 상황에 처한 20대들이 연대해서 머리싸매고 해결해야 할 숙제이지 누군가가 어떻게 하라고 지시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했다. 

  중요한건 연대다. 같은 처지에 있는 20대들이 뭉쳐서 -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라도 -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해야 한다. 거대 자본에, 또 앞선 세대들에 대해서 자신의 몫을 찾아와야한다. 매우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20대의 모습이지만 깨고 나가야 한다. 더불어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양심있는 윗 세대들이 그들이 가진 자본과 권력을 (내놓으면 더 좋겠지만) 가지고 최소한 20대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

 
p.s.

  지금까지 홍세화를 비롯하여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20대들이 책도 안 읽고 생각 없이 산다고 비판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결과적으론 그들의 말이 맞다. 책도 안 읽고 오로지 생각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에서 비롯된 재테크, 혹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토플 토익 공부, 자격득 취득에만 몰입해있다. 돈 좀 있는 집 아이들은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 공부에만 올인한다. 돈 없는 집 아이는 그나마 매달려봐서 안 되면 일찌감치 때려쳐야한다. 시기를 놓쳐 백수가 되지 않도록.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이제 절반만 맞다. 이들은 이들이 처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들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 아씨 상황이 그런걸 어떡해. 너 같으면 먹고 살 길 막막한데 고상하게 헤겔의 <정신현상학> 들고 앉아있겠냐 머리아프게. 대선을 앞둔 시점에 수능점수 상위권 학교 몇몇을 설문조사한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이 제일 높다고 한다. '이해'는 된다. 경제와 효율을 앞세우는 이명박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머물 자리 하나라도 더 나오길 기대하는 듯 하다. 다 말아먹은 이명박이 정말 경제 대통령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과 지적을 토대로 그들이 스스로를 무조건 감싸고 돌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는 의식보다는 현실이 이러니 뚫고 나가자, 는 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과 지적을 핑계로 그들이 재테크와 토익책에 더 몰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너희들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함께' 살아나갈 길을 제시해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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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20대 취업 난의 책임은 지난 10년간 국정을 펼쳤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있습니다.


마늘빵 2007-12-1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어느 특정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는건 '정치적'인 견해일 뿐이라 봅니다.

살청님 / 현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눈을 뜨면 현실인걸요. -_-

미즈행복 2007-12-1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하기 전부터 연대에 대한 희망이 없는것 같아요. 연대해서 이겨본 경험이 없고, 그런걸 본 적도 없으니까요. 연대하다가 망하느니 차라리 혼자 앞가림하자는 것 같아 보이는데...
모두가 너무 경제적인 것에 올인하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경제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지만, 예전보다 더욱 경제적인 것에만 다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돈 이외에도 많은데 그건 보지 않고 돈만 보고 있는것 같아요. 전에 누군가와 얘기하다가 '안빈낙도' 를 얘기했더니 제 3자가 옆에 있다가 코웃음을 치더라고요. 돈이 좀 없어도,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아도, 집이 좀 좁아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게 더욱 문제가 아닐까요? 피천득씨 수필에도 보면 그런 얘기가 있어요. 집이 좁아서 팔고 옮기려고 했더니 가진 돈과 맞지 않아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괜히 이런 일 벌였다고 후회하는 얘기요. 자유를 팔아버렸다고요. -결국 집값의 반은 오랜기간에 걸쳐 상환하는 조건으로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고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늘빵 2007-12-11 10:12   좋아요 0 | URL
그쵸. 경험이 없다는게 가장 큰 장벽이에요. 그러니까 다들 꺼려하는 것이고, 해봐야 뭐 되겠어, 라고 생각하는거겠죠. 지금 시대에 안빈낙도는 정말 속세에 미련이 없는 혹은 도통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안빈낙도도 돈 많은 사람들의 특권이 되어버린거 같은...
 
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
이철호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도서검색창에서  '메이데이'라고 쓰고 클릭하면 대략 출판사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책 뿐 아니라 읽은 책 중에서도 메이데이 에서 나온 책은 이 책이 유일한 것 같은데, 이렇게 출판사명을 가지고 궁시렁 거리고 있는 건 별다른 딴지를 걸려는게 아니고, 책장을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는 말을 하고파서다. 대략 교육 문제에 관한 여러 주제들에 관해 평소 관심을 갖고 신문이나 뉴스를 꼼꼼히 챙기신 분들에겐 이 책이 필요없다. 진보성향의 단체 소속의 개인에 의해 한 꼭지씩 쓰여져 엮인 대한민국 교육 비판서이기 때문에 여기 담겨있는 주의주장들은 평소 언론에서 대립구조를 이루는 한쪽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가지 걸고 넘어지면 나는 전교조에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평소 사회에 관한 내 생각들을 따라가면 전교조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전교조와 또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교총이 맘에 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교총은 전교조보다 조금 더 싫다. 전교조는 단지 그보다 아주 조금 덜 싫을 뿐. 아무래도 하나의 '단체' 안에 여러 다양한 의견을 가진 분들이 모이다보니 내부에 진통이 지속되기도 하는데, 그리하여 나오는 주의주장이나 결론은 그다지 동의해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교육 현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비정규직 교원에 대한 태도나 학생을 대하는 태도도 전교조에 소속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전교조는 이래야 한다, 라고 감당 못할 기대감을 떠안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한국 교육이 제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학교 교육이 평등하고 중립적이다, 라는 세간의 시선은 왜곡된 것이라고 시작하며,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이 번성하는 것인가, 대학입시제도를 고치면 교육문제가 해결되는가, 교원을 평가하면 교육의 질이 높아지는가, 간판이 품질을 보장하는가, 등등의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각각의 글은 여러 사람들이 하나씩 도맡아 작성했다. 필자에 이름 올린 이들은 홍세화씨를 비롯 참교육연구소 소장 이철호, 민노당 정책연구원 송경원, 대안교육연대 사무국장 이치열, 진보교육연구소 사무차장 박유리 등 단체의 이름을 걸고 나온 이들과 교육 현장에 있는 중고등학교 교사들이다.

  머릿글에서 이철호 저자 대표는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학생들이 현 교육제도 아래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은 영어와 컴퓨터에 능숙한 젊은이들을 많이 육성해낼 수 있을지 모르나, 창조적 지식, 높은 수준의 과학적 지식, 문화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을 양성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 의식에 동의한다.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는 평준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이다. 사회에서, 기업에서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국가의 공교육에 떠맡기고, '大學'의 이름을 먹칠하면서 학원화시키고 있다.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은 용납되고, 마치 '경쟁'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양 부추기고 있는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빈부격차 벌어지듯 학력까지 벌어지고 있다. 잘하는 놈은 잘하는 놈들끼리 묶고, 못하는 놈은 못하는 놈들끼리 묶어서, 잘하는 놈들은 더 잘하게 만들고, 못하는 놈들은 더 못하게 만든다. 여기에 개입하는 게 '자본'이다. 건너들은 어떤 분의 말씀따라 강남에선 초등학생들이 카프카며 니체며 읽고 있고, 강북이나 지방에선 산수와 한글을 배우고 있다. 태어나면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에 따라 맞춤형 교육이 시작되고, 친구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타자가 되어간다.

  한국 교육은 결코 평등하지 못하다. 과거에 교육에 있어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했지만 이제 더 이상 기회의 평등은 껍데기만 남았다. 애초 시작이 다른 학생들을 놓고 기회의 평등을 논하고, 경쟁에서 진 아이에게 기회를 똑같이 줬는데 네가 졌으니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건 폭력이다. 이제 기회의 평등은 그 의미가 정정되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논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차별'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받으며 자란 아이의 문을 더 좁게 만듦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논해야 한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며 누린 혜택부터가 이미 역차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또다른 역차별을 막기 위해선 사사로이 가진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차이를 충분히 인위적으로 메꿔줘야 할 것이다.   

  한달 평균 50만원의 비용이 사교육에 지출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왜 사교육을 멈출 수 없을까. 안보내면 그만인데, 안보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왜? 학급의 친구들이, 같은 동네 영희, 쳘수도 다 그만큼의 사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불안해서 불안해서 안보낼 수가 없다. 내 아이만 뒤쳐질까봐. 똑같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만의 비용을 매달 지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그들 모두가 함께 멈추면 된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영희가 학원 가면 철수도 학원 가고 철수가 학원 가면 순이, 갑수, 말자 다 따라 간다. 그래야 보통이라도 유지를 하니까. 사실 시작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우수해지기 위해서, 더 앞서나가기 위해서였는데, 종국엔 모두가 평균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 다니고 있다. 비극이다.

  사교육 번성의 원인은 결코 공교육 부실에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생겨난다. 근데 모두가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하다보니 종국엔 사교육이 공교육보다 우선시 된다. 학교에서 우수해지기 위해서, 그래서 점수를 잘받고 내신을 다지고,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에 잘 가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면 결국은 대학이다. 그런데 그냥 대학이 아니라, 일류대학이다. 이미 고등학교 정원보다 대학 정원 수가 더 많고, 지방의 몇몇 대학들은 망할 위기에 처해있는 판에, 대학에 가려고 그 고생을 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하늘대학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늘대학 나와서 대접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공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어서.

  민노당 송경원 정책위원장은 이 책에서 이 짓을 멈추기 위해서 첫째, 일류대 거품을 빼자. 둘째, 60만 명의 희망자에 맞게 일류대 문을 더 열자. 더불어 국공립대통합네트워크를 만들자. 나라에 속한 국공립대만이라도 먼저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뽑고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학 이상은 평생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고3 마치고 들어가는 코스가 아니라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나 기업이 노동자의 평생교육을 위해 학습휴가제나 학습비 지원 등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멈추기 위해서는 공교육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저들이 경쟁을 멈출리는 없으므로 경쟁을 멈출 수 있게끔 문을 활짝 열어버리고 같이 뽑고 같이 교육시키는 마인드를 가진다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는 것이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하겠다는 합의만 있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왜 부모는 자식을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만들고 싶어할까.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럼 잘 사는게 뭔데? 특목고와 일류대학과 대기업이 잘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자. 돈 많이 벌고 풍족하게 살면 그걸로 충분할까. 왜 스스로의 몸만 살찌우려 하고 영혼을 돌보지 않는가. 결국 부모가 꿈꾸고, 아이들이 꿈꾸는 것은, '행복'이라 할 수 있을텐데, 정말 그것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걸까. 부모가 자식이고 교사고 기타 등등 동일한 공동체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미친 짓을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들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은 또 무엇이고, 또 무엇이고, 또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의 욕심에 의해서, 혹은 부모가 주입한, 사회가 주입한 대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건 아닐까, 를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공교육과 사교육의 문제, 평준화의 문제 뿐 아니라 교원평가, 학벌사회, 대학선발, 대안교육, 조기영어교육, 자립형사립고, 로스쿨, 구조조정 등에 대해서도 다룬다. 우리가 각각의 커다란 주제들을 살펴보며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복잡한 제도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하지만 이 책엔 그런 근본적 물음은 들어있지 않다. 그보다는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맥락에 대해, 또 그들이 가진 정치적 교리에 따라 각 주제를 살펴보고 있다. 틀렸다고 말하고픈 것이 아니다. 나는 대략 여기 쓰여져있는 주장에 대해 90%는 동의한다. 10%를 뺀 것은 근본적으로 더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미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탕에 두고서 작성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정치적 맥락을 치고서 시작했다면 더 좋은 생각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p.s. 진보교육연구소, 범국민교육연대, 참교육연구소 등이 전교조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모른다. 앞에서 전교조를 이야기한 것은, 느끼기에 전교조의 주의주장과 여기 거론된 단체들의 대표로 나온 이들의 주의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서이다. 사실상 관련 없는 단체들을 임의로 엮어 개인적 견해를 드러낸데서 오해가 빚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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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12-07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총은 전교조보다 조금 더 싫다. 전교조는 단지 그보다 아주 조금 더 싫을 뿐."
어느 쪽이 더 싫다는 겁니까 -_-;

마늘빵 2007-12-07 09:10   좋아요 0 | URL
-_- 흐음. 이래서 쓰고나면 한번은 읽어봐야해. 수정하겠습니다. 리을 하나의 차이가 크군요.

미즈행복 2007-12-0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기 전교조와 지금의 전교조는 차이가 많지요. 초기에는 정말 열혈분자(?)들의 집합이었으나 이제는 특별한 생각없이 가입해요. 세 늘리기죠. 전교조 사람들도 '교총보다는 낫지 않냐, 그냥 한달에 만원 회비 내는거 아깝지 않으면 좀 들어달라'고 말하면서 회원을 모집하니까요.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지면 순수한 열정은 희석되기 마련일테니까요.

마늘빵 2007-12-09 00:40   좋아요 0 | URL
큰 조직이다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죠. 그 안에서도 각기 다른 생각으로 갈등이 있을테고. 교총도 마찬가지겠죠. 조직이 커지면 어쩔 수 없나봐요. 그 안에서 자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겠죠.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품절


"우리들이 진보한다는 것의 잣대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풍요에 뭔가를 더 주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아주 적게 가지거나 거의 못 가진 사람들에게 견딜 만큼 마련해 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이다." (프랭크린 델라노 루즈벨트)-9쪽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출발선을 같게 하자"라는 '형평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찾고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고,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 셈인데,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이 '형평성'이라는 것이다. 국민들 입장으로서는 '평등(equality)'을 포기하는 대신 형평성이라는 보다 완화된 가치에 동의를 해준 셈이다. 그리고 그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바로 교육이다. 최소한 안정적 시장 경제를 운용하고 있는 선진국 정부와 국민들이 합의한 내용은 고등교육, 즉 대학교육에까지 형평성을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나라마다 제도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따라서 "동거하는 주제에 대학은 뭐하러 다녀?"라고 말을 한다면 이건 이 사회의 근간을 깨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 되는 셈이다.-46쪽

현재의 시스템에서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나의 해법은 해법이다. 두 번째는 등록금 융자와 같은 개인융자로 비용을 지출하고, 나중에 고소득의 연봉으로 빚을 상환하는 방법이다. 전형적인 인간자본론 이론에 따른 해법인데, 만약 대학 졸업 이후 고소득의 연봉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평생 초기 출발 때의 빚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개인의 삶을 전체적으로 디자인하면서 위험부담이 상당히 큰 방식인데, 투자 이론에서는 이를 '위험선호도'가 높다고 표현하고, 이러한 행위를 '위험감수형 행동'이라고 부른다. 세번째 해법은 부모의 재정에 기대는 것인데, 이는 세대 간 소득 이전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동거와 같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50쪽

'세대'라는 용어는 이런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종종 세대 담론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것이 '역사성'과 '공간성'이라는 구체성을 추상성에 덧붙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금 20대'라는 개념은 매년 20대가 갱신되기 때문에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물'과 같은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21세기 초반이라는 특수한 구체성을 부여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세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보편주의적 접근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맥락이라는 또 다른 매력 때문이다.-77-78쪽

마케팅 세력이 아닌 어른들은 10대가 독서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예산과 제도를 비롯한 많은 지원을 해주겠지만, 마케팅 세력은 10대들에게 주어진 용돈을 독서가 아닌 다른 곳에 사용하도록 계속 유도할 것이다. 작지만 이 두 가지 힘의 싸움이 대한민국의 미래와 나머지 힘들 사이의 균형을 결정할 가장 큰 요소이다. 마케팅 세력과 비마케팅 세력은 10대의 용돈이라는 1318 시장에서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여기에 한국의 미래가 걸려있다. 이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는 지표는 간단하다. 10대들이 상대적으로 책을 사는데 더 많은 용돈과 에너지를 지출할지 아니면, 1318 마케팅 세력을 지시하는 화장품과 소비재를 사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바뀌는 셈이다. -142쪽

지금의 20대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며, 곧 비정규직이 될 운명 앞에 서 있다. 8백만 명을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평균은 119만원이며, 전체 임금에서 20대가 평균적으로 받는 비율을 적용하면 88만원이 된다. 그나마도 세전 금액이다. 따라서 하루 8시간을 일하는 20대 비정규직이 한 달에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은 그보다 적다. 이 임금을 기준으로 한 달에 50만원을 저축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려면 죽음과 같은 삶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10년을 모으면 6천 만원이고, 20년을 모으면 1억 2천만 원이 된다. 그리고 50대가 되었을 때, 그나마 비정규직 일자리조차 남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20대는 평균적으로 전세는 물론 결혼도 하기 어려운 세대이다. 결혼을 해서 손에 얻는 돈은 중산층이 자녀 한 명에게 들이는 사교육비 정도이다. 아니, 이들도 전부 그만한 돈을 들여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아닌가? TV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사들이고, 잡지가 시키는 삶의 방식을 채택한다면, 20년 후에 1억 2천만 원의 자산 대신 그만큼의 빚이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20대, 그들이 바로 '88만 원 세대'이다. -143쪽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즉, 대학 국유화를 쟁취한 뒤 다음 단계로 진화했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우리의 386은 대학개혁에 대해 거의 아무런 청사진이나 의미 있는 노력을 개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벌사회를 더욱 강화시키며 교육 엘리트주의를 강화시키는, 일종의 역사에 대한 배신을 행한 세대이다.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경제 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점은 세대원들끼리 서로 지원하며 일종의 경쟁력을 가지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177-178쪽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학번 중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시절에 대학생 정원을 대폭 늘리면서 운 좋게 대학원만 졸업을 하고도 대학교수가 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교수가 된 상태에서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에 대학에 다녔던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박사과정에 진학하거나 유학 붐을 만들며 교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문은 잠깐 동안만 열렸고,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교수가 될 수 있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박사를 수용할 수 있는 대학교수직이나 연구직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박사들 특히 인문학이나 특수전공을 가진 사람들은 후에 개인적으로 아주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발생한 운명을 우리나라에서는 '고학력 실업'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일이 유럽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걸 '과잉 교육'이라고 불렀다.-182쪽

다른 세대와의 경쟁에서 20대는 서로를 소외시킬 확률이 높은데, 여러 가지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단결하고 뭉치도록 배우고 또 그렇게 살아온 앞의 세대와는 살아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에서 인사권을 가진 세대는 유신 세대이지만, 곧 그 권한은 386세대로 넘어갈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별도의 그룹을 만들지 않을 확률이 높은 20대의 아주 일부가 윗세대에게 '포섭'되어 대다수의 20대를 소외시키는 일들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연공서열제가 사라진 상탵에서 발생할 첫 번째 일이 바로 이것인데, 사회적으로 새로운 균형 상태가 나타날 때까지는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들에게 인사권을 비롯한 경제적 권력이 쥐어질 날을 기다리면서 버티는 것이 대부분의 20대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 패턴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밖에서 보면 '20대가 20대의 적'이라는 상황으로 해석될 것이다. 20대에게 주어진 승자 독식 게임에서 사실 세대 간 경쟁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매우 거칠고 불행한 승자 독식 게임이다. -191-192쪽

불행을 비교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극단적인 승자독식 체제로 흘러가면서, 승자와 패자만 나뉘는 것이 아니라 패자들 사이에서도 또다시 변종 승자독식 게임이 벌어지게 된다. 젊은 세대 내부에서 극소수에 해당하는 승자들이 갈리고 나면 패자들끼리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지는 것이다. 여성, 고졸 이하 학력자, 지방대학 출신, 전문대 출신 등등의 집단이 벌이는 경쟁이다. 실업 문제와 비정규직의 여성화라는 문제는 '패배한 다수 가운데' 에도 계층이 나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여성이면서 지방대학 출신일 수 있고, 남성이면서 전문대 출신일 수도 있으므로 각 집단은 독립적인 게 아니라 중층적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벌어지는 승자독식 게임은 '패자부활전'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개미지옥 게임'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197-198쪽

현재의 20대가 맞게 된 사회적 고통들의 원인은 20대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경제 구조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요인 두 가지를 꼽으라면 결국은 한국 경제의 영광의 30년 동안 화려하게 활동했던 중소기업이 지난 5년 동안 붕괴하게 된 것과 사회적으로 경제적 약자들의 탈출구였던 자영업의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한국 경제의 독과점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하나는 생산자본에서 발생한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통자본에서 발생한 일이다.
-241쪽

중소기업의 붕괴는 단기적으로는 20대 실업과 10% 미만의 소위 '우아한 직업'에 대한 과잉 경쟁을 만들어내고, 구조적으로 90% 정도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원치 않았던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자신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니므로 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게다가 기존의 경제조직에서 완전히 내몰린 사람들이 자영업에 대한 창업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이미 유통에서도 대형 할인매장과 편의점을 중심으로 독과점화가 거의 완료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90%의 젊은이들에게는 불만족 상태에서 '메뚜기'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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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에서 하승우씨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 물리적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힘의 논리가 만연해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똘레랑스를 제안하고, 차이와 다양성에 관용적이지 못한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강조하고 나선다. 얇은 책세상 문고판 책이지만 하승우 씨는 이 안에 똘레랑스의 등장배경부터 미국의 털러런스와 프랑스의 똘레랑스의 차이를 설명하고, 인권, 양심, 토론, 설득, 다양성의 존중 등에 걸쳐 적용한다. 또한 똘레랑스의 한계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똘레랑스'는 '참다', '견디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tolerare 에서 나왔다. "서구 사회에서 인종, 문화, 종교의 차이는 격렬한 갈등의 씨앗을 뿌렸고, 결국 많은 피로 그것을 수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똘레랑스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572년 기독교 구교과 신교 사이의 갈등으로 빚어진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이란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 3천을 비롯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2만여명이 죽었는데,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에 반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종교전쟁으로 번졌다. 

  유럽의 중세 13세기부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들이 '종교재판'이라는 합법적 제도를 통해 이단과 이교도에 대한 처형과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세우고, 비진리를 제거했는데, 15세기 종교 개혁 이후로 지난한 전쟁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서 '종교적 관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피에르 베일이며 홉스며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관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승우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와 짝을 이"룬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즉 똘레랑스는 그 자체에 이미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똘레랑스의 원리로 몇 가지를 들자면, 첫째,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을 들 수 있는데,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의 저자 필리프 사시에에 따르면 "자기 중심주의의 포기"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자기 중심주의를 버릴 때 타인의 목소리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롤즈와 비교해보면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합리적인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같은 자발적인 포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롤즈는 원초적 상황에서 무지의 베일이란 장치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하승우의 논의와 별개로 칼 포퍼는 <관용과 지적 책임>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제 1원칙,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제 2원칙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 제 3원칙 "만약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하승우가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를 언급한 것은, 이와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극단을 거부하고 서로 토론을 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은 셋째 원리인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 넷째 원리인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은 모두 첫째, 둘째 원리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토론과 설득은 분명 이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싫고 좋음의 마음의 문제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또한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것도 다양한 여러 의견들이 광장에 나와 논의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승우는 이후 홍세화와 그람시, 마르쿠제, 루쉰 등을 끌어들이며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논의를 전개한다.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가 절실히 필요함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똘레랑스'이라는 개념이 자비나 베풂과 동일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똘레랑스는 '관용'으로 표기할 수 있는데, 똘레랑스, 라고 지칭했을 때와 관용, 이라고 지칭했을 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편의상 그것을 '관용'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지만 전적으로 우리말에서의 관용이 똘레랑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용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한남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그의 책 <관용과 열린 사회>를 통해서 우리말 관용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우리말 '관용'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 내지는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의 본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해선 곤란하다. 우리말 '관용'은 그 뒤에 '베풀다'라는 동사가 붙는 반면, '똘레랑스' 뒤에는 '하다'라는 동사가 붙는다. 즉 우리말 관용은 상대에 대한 나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고, 똘레랑스는 대등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p.s.  

  프랑스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홍세화씨가 한국에 돌아와 똘레랑스를 외친지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었다. 그는 책에서나  강연회서나 똘레랑스를 외쳤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똘레랑스를 전파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한번쯤을 다 들어봤을만한 용어가 됐다. 그런데 똘레랑스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연구서나 학술서가 많지 않고, 해외에 이미 나와있는 유명 철학자의 책조차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으로는 프레스톤 킹의 <관용론>, 로크의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 포퍼의 <관용과 지적책임>을 들 수 있다. 로크의 <통치론>이나 <시민정부론>은 번역되었지만,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는 번역되지 않았고, 포퍼의 수많은 저서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1987년에 쓴 <관용과 지적책임>이라는 책은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되어 나와도 그다지 팔릴 것 같지 않은 책들이지만, 의식있는 출판사에서 이 책들의 번역을 추진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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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는 우리가 '똘레랑스'해야 할 때
    from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007-12-11 01:13 
    '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