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예전에 재밌게 봤던 그렘린이 떠올라서 토욜 퇴근 후 집에 와서 1,2편을 연달아 봤는데, 이거 대단한 영화였습니다. 전에 봤을 땐 그냥 아 귀여워 귀여워, 이러면서 봤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이건 굉장한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1984년, 1990년 미국에서 나온 그렘린은 지금의 미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는 듯 했달까요.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모습, 그리고 현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렘린 1,2편에서 제가 본 것들을 나열하자면,

* 스포일러 경고

1. 이명박식 불도저 개발계획
- 2편에서 무슨 거대한 센터를 세운다고 포크레인으로 다 찍어누른다. 놀란 우리의 귀염둥이 기즈모는 쭐래쭐래 겨우 도망나오지만. 그곳에서 살겠다고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할아버지 윙이 병으로 죽자 요때다 하고 바로 삽질. 그래도 명박이보다 양심은 있는 게, 떠나지 않겠다는 할아버지 죽고 난 뒤에 포크레인으로 부숴버린다는 거. 살아있을 때는 돈으로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다. 명박이는? 청계천 공사를 떠올리자.

2. 이명박식 친환경 개발
- 우석훈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랬다. 지금의 청계천은 수도꼭지에서 물틀어 연결해놓고, 진짜 청계천은 그 아래 흐르고 있다고. 우리(?)가 데이트 장소로 종종 활용했던 그 청계천은 청계천이 아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 친환경 친환경 하면서 보기 좋은 공원이나 분수나 이런 것들 세우지만, 그건 친환경이 아니다. 그냥 인공환경이지. 나무 있고, 풀 있고, 물이 흐른다고 다 친환경이 아니란 말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3. 효율과 경쟁 시스템 
- 이명박식, 공정택식 경제 논리. 뭐든지 경쟁시키면 다 되는줄 안다. 경쟁 시켜서 올라갈 놈 올라가고 안되는 놈 떨어지고. 클램프 센터의 7단계 승진 시스템. 주인공 촌놈이 클램프 센터에 취직한 후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뭐든지 효율이 최고고, 경쟁이 최고다는 식의 사고.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그렘린 2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4. 유위(有爲)
-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인위적으로 조치를 취하려 하면 안 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된다. 무위가 최선의 해결책이다. 유위의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5. 바보상자 
- 그렘린을 티비를 좋아한다. 부우우우웅 자동차 경주도 좋아하고, 야한 것도 보고, 폭력적인 영화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는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따라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티비를 못보게 한다. 바보상자라고. 맞다. 티비는 바보상자다. 20년전에도 티비는 바보 상자였고, 지금도 바보 상자다. 티비 볼 시간도 없지만, 시간 돼도 티비는 잘 안 본다. 한번 보고 있으면 계속 보게 되는데 얻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다.

6. 80년대 미국은 그래도 살만했다?
- 오늘날의 미국은 살기 안좋은 국가 중 하나. 부자들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닌 듯 하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영화 속 미국 사회는 지금의 한국을 보는 듯 하다. 점차 각박해져가는,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그렇다.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그때는 아직 과도기였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지.  

7.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샐러리맨의 삶 
-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달이 봉급받는 월급쟁이들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장소를 한국으로, 때를 현대로 옮겨놓으면 가장 극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OECD국가 중 근로시간이 압도적 1위인 국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주말에는 출근하는 삶은 이땅에선 흔히 볼 수 있다. 

8. 유전자 실험 
-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코 좋아할 게 못된다.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막무가내 유전자 실험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각종 유전액(?)을 먹은 그렘린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변해가는가를 2편에서 목격할 수 있다. 바퀴벌레도 웬만해서는 약 먹고 안 죽는다. 예전에는 바퀴약 설치해놓으면 먹고 나와서 헤롱헤롱 거렸는데 요새 바퀴들은 먹어도 도통 발걸음이 느리지 않다. 쌩쌩하니 잘 달리는데 이젠 더 센 약을 뿌리고 먹여야 한다. 약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퀴도 내성이 강해진다. 거기에 아예 유전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돌연변이가 출연한다면? -_-

9. 쉬운 고용과 쉬운 해고
- 클램프 센터는 엄청나게 크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줄곧 5%안에 들어온 수재들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삼성 같달까. 그런데 회사 안을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공부만 잘해 자기 이익은 잘 챙기는 엘리트 유형과 박봉에 시달리며 온갖 굳은 일은 다 하는 소외된 비정규직 유형을 볼 수 있다. 고용된 배우가 투덜대며 문을 박차고 나오고, 일하는 시간에 몰래 담배를 피던 노동자 한 명이 즉각 해고 당한다. 거대 기업은 필요할 때 쉽게 사람을 채용하고, 쉽게 사람을 버린다.

10. 미국 우파 할아버지 
-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사람인 듯 한데, 러시아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우파 할아버지를 잠깐 볼 수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냉혈한들의 모습이 아닌 다정다감한 인간적인 모습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놀라운 발언을 한다. 마치 대한민국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아버리면 바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러시아인이 그런 대상이 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러시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11. 동거 커플 
- 영화는 1990년의 미국. 지금 보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그래도 얼굴은 잘생기고 이쁜 두 남녀가 동거생활을 한다. 같은 직장에 다니고,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결혼은 아직 아닌 두 사람의 동거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동거는 문란함의 극치이다. 어떻게 동거를 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지, 동거를 하느냐 마느냐가 기준이 되어선 곤란하다.

12. 최신식 건물의 잦은 고장 
- 최신식이라고 좋을 게 하나 없다. 과거에 손으로 하던 걸 지금은 손도 안대고 리모콘 버튼만 눌러 실행시키거나 손가락 까딱도 하지 않고 모든 걸 하려고 하는데 그런 물건일수록 고장이 잦다. 한번 고장나면 고칠 수가 없다. 최신식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발상, 수동보다는 자동,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이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 

13. 약한 학생 무차별 폭행, 왕따, 고문
- 영화에 학생은 안나온다. 그런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즈모로부터 나온 나쁜 그렘린들이 약한 기즈모를 어떻게 괴롭히고 학대하는가를 보면 그게 딱 우리네 교실 안 모습이다. 어제 기사였던가 여고생들이 친구 하나를 변기통에 처박고 물을 먹이고 사진을 찍고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어디 하루 이틀 벌이지는 일이랴만. 이런 게 아직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뉴스란 모름지기 일반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데 이런 건 너무 흔하잖아. 폭행하고 왕따시키고 감금하고 전기고문하고. -_-

14. 어리버리한 경찰
-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언제나 경찰은 사건이 다 해결된 뒤에 나타난다. 아니면 해결되지 않고 해결할 수 없는 시점에 나타나거나. 사건종료되고 나타나 어리버리하게 여기저기 부딪치며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경찰들을 이 영화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도처에서 강간이 벌어지고, 시체가 발견되지만 그곳에 경찰은 없다. 권력에 빌붙고 엄한 사람들 잡아가려고 어떻게 법을 적용할까를 고민하느라구. 촛불집회 현장에서 뻘짓하지말고 돈 빼돌리는 교수들, 국회의원들, 기업인들, 정치인들이나 잡아라.

15. 공동체로의 복귀
- 크게 한 탕 벌어지고나서 다행히도(?) 클램프 사장은 깨달음을 얻고 공동체로 가자고 하는데, 내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은 비현실적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고 수습하다가 사장이 깨달음을 얻어 자연과 공동체로의 복귀를 외치는 경우는 없다. 반성하는 척 잠깐 쇼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데 뭐하러 깨달음을 얻어. 권총들이민 한화그룹 회장이나 국가를 지배하려한 삼성그룹 회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갑자기 정의로워지고 착해지는 경우는 없다. 
 
16. 전지적 작가 시점
- 요건 그냥 보너스인데 중간에 깜짝 놀랐다. 영화 끝난 줄 알고. 감독은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찍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영화에 개입했다. 잠시 등장한 그 사람이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굴을 몰라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던 영화가 갑자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깜짝 전환한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17. 총평
- 온갖 사회적 문제를 곳곳에 맛깔나게 버무려 메세지를 잃지 않은, 재밌고 귀엽고 괴기스러운(?) 완벽한 영화다. 이명박과 똘마니들이 함께 모여 감상해야 할 영화. 청와대에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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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 : 이제 소수를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4
이남석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구판절판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지배 집단에게도 불이익이다. 왜냐하면 비교 대상이 없음으로 인해, 지배 집단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를 무시한 정치가 전횡적으로 진행된다면,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문화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그 강요가 강화되면 될 수록 차이 집단은 스스로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들의 존재 이유마저도 상실한다. 결국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렇듯 차이의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은 위와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차이를 배제함으로써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지배 집단이나 차이 집단이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롭지 못하다. 이것은 특정 차이 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이 집단에 적용된다. 따라서 모든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억압적이며 배제적인 권력에 저항하게 마련이다. -19쪽

차이의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현대 국가의 정부는 대부분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므로, 국민 개개인이 지닌 다양한 차이는 그 정부 아래서 은폐된 채 하나의 동일성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동일성에 의해 다양한 차이는 ‘국민’이라는 통칭 명상로 통합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 점에서 차이의 정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동일성의 정치’라고 한다. -20쪽

개인은 모두 평등한 존재로서 법적․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은 ‘동일성’으로 존재하며, 법적․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근대 정치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정치의 주체인 개인은 자연적 성이나 사회적 성, 타고난 부, 지위, 인종과 무관하다. 개인은 모두 기본적으로 동등하며, 차이와 불평등을 거부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든 인간의 구체성을 사상해버린 추상 명사이다. ‘개인’이란 말 속에는 형태상의 차이와 질적인 차이는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추상 명사로서의 ‘개인’만 남는다. (중략)
근대 정치의 주체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인은 지배 권력을 구축하는 존재로서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단일 규범을 제시한다. 이 규범이 곧 지배 규범이 된다. 지배 규범이 강하면 강할수록 차이의 주체는 대다수 사람들이 속해 있는 규범 밖의 주변적 존재로 전락한다. -22쪽

대의제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형식적 평등 아래, 차이 집단은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출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직접 대표하지 못한다. 또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성을 강조한 나머지 차이 집단의 견해를 수용하지도 못하고, 차이 집단의 대표성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로써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는 한계성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민의 형식적 평등을 정당화할 뿐 실질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38쪽

차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진리는 의견의 무제한적인 충돌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으며, 경쟁은 조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이르기는커녕 조화도 창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는 지배 이익의 봉사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이 곧 그 사회의 주류 구성원이자 주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차이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41쪽

권력 교체의 이면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있다. 다수결의 원리는 자유토론의 보장, 다수의 소수 포용,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존중,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수결의 원리는 다수와 소수의 항구 불변을 초래하여 정당성을 잃게 된다. 소수가 자유로운 토론과 설득에 의해 다수가 될 수 없다면, 그 국가는 이미 다수에 의한 전횡 국가이다. 따라서 다수결 원리의 존재만이 전횡 국가를 막을 수 있고,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다. 상대적 소수는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다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해 ‘진정한 동의’를 하고,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중략) (계속)-43-45쪽

(이어서) 그러나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은 다수결의 원리의 한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다수결의 원리의 근본적인 한계는 사회적 약자와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이들(소수)에게 ‘1인 1표’는 소수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감옥에 영원히 묶어두는 주술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다수 가능성은 그 정치 체제의 주류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소수이고 영원한 약자이다. 어떤 조건이 변화해도, 소수는 투표를 통해 다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수가 다수결의 원리에 의한 결정에 순응하는 것은 ‘진정한 동의’가 아닌 ‘마지못한 동의’일 뿐이다. -43-45쪽

다수의 견해는 사회 내에서 보편성으로서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는 반면, 소수의 견해는 도덕적 지위를 상실하고서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마저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다. (중략) 보편성을 획득한 집단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집단에게 보편성에 따를 것을 강요함과 동시에 고유한 정치적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소수 집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가치에 회의를 품게 되어 결국 가치의 자포자기 상태를 초래한다. -49-50쪽

하버마스는 권력과 관련된 ‘진리의 생산’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억압과 왜곡이 없는 이상적 담화 상황에서 토론한 결과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이상적인 담화 상황에 근거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진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이상적 담화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루소주의적 환상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그 개인이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인간의 마음이 소통할 수 있으며, 각 개인의 관점이 장애물에 가로막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견해가 각 개인의 견해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몽상이다."-66-67쪽

차이 몰이해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차이 집단의 특수성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하는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며 존엄성을 지닌 주체이므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가 최대한 보장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고, 존엄성을 존중받는 인간은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을 받지 않으므로 사회에 차이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차이 집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고 자연스럽게 차이 집단에 대한 중립성을 지키게 된다. -75쪽

개인은 최대의 사회적 선의 실현이라고 하는 목적을 위한 대체 가능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을 보호해주며, 다른 자유의 행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아미 거트먼)

국가에게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허용되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정부는 내 동료 시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가치 있다 할지라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 동의 없이 내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아미 거트먼)-80-81쪽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의 구속을 받는 개인과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하며, 이러한 공동체는 중앙 국가의 기능 중 일부를 양도받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 구현을 전제한다. 이와 같이 가정함으로써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혁명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의미 상실, 신사회 운동과 다양한 주체의 성장에 따른 사회주의 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탕에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깔려 있다. -86쪽

울린에 따르면 정치란 집단의 공적 권위에 유용한 자원을 둘러싸고서 조직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권력들이 합법적인 동시에 공적으로 경쟁함을 의미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이란 공적인 협의에 의해서 권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될 때, 다양성으로 구성된 자유로운 사회가 공공선의 계기들을 향유할 수 있는 데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치적인 것‘이란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협의를 거쳐 하나의 공통점에 이를 수 있는 공동선을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상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양한 차이 집단들이 정치적인 소외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 구성의 한 주체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90쪽

무페는 정치를 정형화된 고정체로 파악하여, 정치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고 통일체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페는 이러한 포괄적인 공동체와 최종 심급의 통일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가정하는 어떤 정치 공동체도 그 안에 포용되지 못한 소수 집단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이익 갈등은 균형에 이르고 의견 분열은 동의에 이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균형과 동의는 항상 부분적이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는 적대적 행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정치는 항상 ‘갈등과 분열’로 특징지워진다.
무페는 갈등과 균열로 특징지워지는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을 제안한다. 무페의 ‘정치적인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다원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사회적 성과 자연적 성, 인종, 계급, 환경 등의 민주주의 투쟁의 구체화된 범주를 수용할 수 있다. -91-92쪽

개인이 아닌 집단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히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집단을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차이를 권리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로크 이후 근대 정치의 주체인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천부적인 권리의 양도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천부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권리는 양도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100쪽

인간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함께 결사를 구성해야만 하고, 자유 선택의 토대 위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허스트)-101쪽

차이의 권리는 양도 불가능하다.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나 동양인 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성적 소수자, 가난한 자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소수 의견의 주장자라는 이유로, 기타의 이유로 권리르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 집단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이익을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 (중략)
이 차이 집단이 권리를 특정 정부에게 양도하는 것은 그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정치적 권리를 보호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차이 집단과 결사 집단은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 (후략)-104-105쪽

차이의 정치는 집단이 정책의 피동적 대상에서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집단 해방의 논리이다. 집단의 해방 논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배제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집단이 스스로 정치적 권리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배 사회에 문제를 던지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다. 차이의 정치는 모든 집단이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평등’이라는 등식을 본질적 의미에 더 가깝게 만든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는 민주주의 지향적이다. -112쪽

토론은 다양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해준다. 그 결론은 다수의 견해가 모아진 것으로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사회의 구성원은 다수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수결의 결과는 사회의 구성원이 수용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차이 집단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가 ‘문턱이 높은’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토론과정에 진입하는 것조차 힘들 뿐만 아니라, 토론 과정에 진입했다 해도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수용시킬 만한 결론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토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토론 과정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토론 결과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과정에서 배제된 집단이거나 차이 집단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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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3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읽으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 싶습니다... 한민족의 참견하는 습관,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쌩무시하는 무시무시한 단결력... 이런 것 정말 무섭지요. 한국도 자꾸 유목적 사고에 접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 - 기획의 발상부터 인간관계까지
와시오 켄야 지음, 김성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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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머리에 떠오른 기획이 저자의 두뇌를 통과한다. 그럼녀 누에가 실을 분비하듯 저자는 글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집필을 뜻한다. 그런데 글만으로는 명주실이 될 수 없다. 분비물을 모아 가공하고 처리해야 비로소 명주실이 완성된다. 편집공정이란 저자라는 누에를 발견하고 분비된 것을 명주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보면 된다. 저자를 누에 취급해서 실례짐나 양질의 누에 없이는 양질의 명주실을 얻을 수 없다. 가공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획과 저자는 세트다. 한몸이다. 그래서 뛰어난 저자를 발견하는 능력도 기획력에 들어간다. -63-64쪽

인터넷은 과거의 정보를 정리한 데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지식을 축적한 데 불과하다. 그러나 앞으로 짜내려 하는 누에에서 어떠한 명주실이 나올지는 예상하기 힘들다. 누에에 따라 달라진다. 더군다나 성격도 행동양식도 모두 다르다. 기획이란 그러한 누에를 상대해야만 하는 일이다. 편집자가 발로 뛰는 걸 귀찮아하고, 호기심도 희박하며, 생산 현장을 겁낸다든지, 저자가 오타쿠화하면 기획은 당연히 무미건조해지고 만다. 오늘날 있으나마다g나 책이 홍수를 이루는 배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72쪽

원고를 읽을 때는 다음 사항을 늘 염두에 두자.

-의미가 있다. 학문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임팩트가 있다.
-화제성이 충분하다. 사회의 반향을 기대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읽힐 만한 근원적 주제를 다룬다.
-신선한 주제, 새로운 접근방식, 새로운 발상.
-저자가 대중성이 있다.
-오랜 세월을 들인 역작이다. 귀중한 자료를 발견했다.
-문장력이 뛰어나다. -125쪽

넘치는 것은 지우고 모자라는 것은 채우도록 요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편집자의 시점에 서서다. 이미 말했듯이 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를 잊어버리는 존재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책을 사주는 독자보다 증정하는 동업자 쪽으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넘치는 부분은 동업 경쟁자에 대한 경쟁심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점(주장)과 독자가 흥미 있는 부분이 다른 사례도 많다. 편집자는 그 양쪽을 볼 줄 안다. 저자의 의견도 이해한다. 동시에 독자가 그 책을 내동댕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편집자의 실력이 요구된다. 어느 장은 빼자, 라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저자는 한번 완성된 원고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저자의 씁쓸한 얼굴을 보면 편집자도 마음이 약해지지만 타협은 금물이다.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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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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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어느 책에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영화와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식의 책은 그 소재 자체가 식상해져버렸다. 그러나 참 꾸준히도 비슷한 컨셉을 가진 책들이 나오는데 새 책이 담아내는 내용에 따라서 어떤 책은 기존에 나온 수많은 비슷한 책들을 놔두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조용히 나왔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았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단지 이 책이 기존에 나온 '영화와 무엇의 이종교배'식의 다른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배한 씨가 '지리'라는 것이다.

  영화와 물리학, 영화와 과학, 영화와 사회, 영화와 철학 등은 이미 써먹을대로 써먹어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영화와 지리가 만난 책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 조금 색다르긴 했다. 물론 물리학이나 철학 대신 같은 자리에 지리가 들어갔을뿐이라는 점에서는 식상하지만. 지리를 공부하고 지리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 대학교 교수 세 사람이 대학원 시절부터 만나 박사학위를 받는 시점까지 함께 공부하고 답사를 다니면서 유익하고 재밌는 지리책을 하나 써보자 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을 쓰게 되기까지 근 5년간 그들은 영화를 오로지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봤다고 한다. 이거 무지 고통스럽다. 사실 영화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또다른 문화적 재미를 찾기 위해 보기 마련인데, 5년 간 모든 영화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각 영화들에서 지리학적 요소를 끄집어내고자 했다면, 이건 저자들에겐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을 것이다. 자발적인 작업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에겐 '즐거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얹어놓으며 평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간접적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리라. 같은 영화라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의 경우 군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란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어버려 미친 여자의 입장이 되어 감상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과 같이 영화 내용은 잠시 접어둔 채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갯벌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단지 지리학적 지식을 안내하기 위해서 영화를 재료로만 삼은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지역이 물론 저자들이 가장 먼저 관심갖는 부분이긴 하겠지만,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왜 감독이 그 지역을 배경으로 했을까, 를 생각해보면서, 감독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찍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영화 감독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세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왜 여기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추측해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메세지와 닿아있다. 지리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만나는 지점이다.

  가령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카르스트 지형인 것은 주인공들의 "비극적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불규칙적으로 갈라진 깊은 틈과 울퉁불퉁한 표면의 회색빛 돌무더기 위로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황야.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장소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운명을 예언한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지만 지금은 가물가물한 여러 지형의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기본 지식에 대한 간단하고 친절한 해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내 상식이 부족하려니 하고 책보다는 나를 탓해본다. 이 책에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 대표가 미안했던지 머리말에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에 삽입된 영화 사진들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선명하지도 못할 뿐더러 잘 포착한 장면도 아니고, 게다가 사진 테두리의 검은 띠는 어설픈 사진마저 더 어설퍼보이게 만든다. 완성한 글에 어떻게든 시각적 요소를 집어넣고자 툭툭 던져놓은 듯 했다. 이 책의 기본 컨셉이 '영화와 지리'인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에서 에러가 났다.

   대체로 내가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지역이나 지형에 관심가질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봤던 영화를 - 이 책의 재료가 된 영화 중 내가 본 영화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 다시 한번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해줬다는데에서 독서의 의미를 찾는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풀어놨는데, 나아가 이 책으로부터 얻은 영화 속 지리 지식을 토대로 실제 그 지역을 찾아가 본다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그땐 이 책이 여행의 재료가 되겠지. 책은 영화를 재료로 삼고, 여행은 책을 재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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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7-17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이었군요. 얼마 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 볼까말까 하고 있었거든요. 친절한 리뷰에 감사 드려요~~
다시 보니 저자 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이네요. ^^

마늘빵 2008-07-17 08:59   좋아요 0 | URL
엇 저자를 안다구요? 전공영역이 비슷하신가봅니다. 아니면 동종업계? ^^ 별로 기대 안하고 보면 괜찮습니다.
 
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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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살아갈 이유가 필요합니다. 힘든 순간마다 희망은 그 이유가 됩니다. 물론 그건 아주 추상적이죠. 그러나 목마른 자들에게 그건 물이고, 배고픈 자들에게 그건 빵이며, 외로운 자들에게 그건 사랑이고, 철저히 가려진 여자들에게 희망은 언젠간 자신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영화 <칸다하르>의 사히브)-181쪽

"하늘 위에서 들으면 비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내릴 거야. 우리가 듣는 빗소리란 건, 비가 땅에 부딪치고 지붕에 부딪치고 우산에 부딪치고, 그러면서 내는 소리잖아. 그래서 우린 비가 와야지 우리 주위에 잠자고 있던 사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영화 <가을로>의 민주)-241쪽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 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영화 <가을로>의 민주)-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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