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왜 이제야 나한테 왔어? 귀국하고 내가 몇 번 수녀원으로 전활 했는데 늘 안 계시더라구."
"그래...... 고모가 많이 바빴어. 그래서 미안해. 변명하자면 난 네가 이제 그만 서른이 넘었으니...... 다 큰 줄 알았던 거지."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서늘해왔다. 고모가 내게 미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미안했다. 서른이 넘도록 아직 다 크지도 못해서, 나는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표현들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같은 말들을, 그냥 건성으로 하는거 말고 진정 그 말이 필요할 때, 그 말이 아니면 안 되는 바로 그때에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31쪽

신기하게도 기억은 그 당시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보게 해준다. 무대 구석에서 작은 제스처를 하는 엑스트라에게 비추어지는 핀 라이트처럼, 기억은 우리에게 그 순간을 다시 살게 해줄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때로 우리가 우리의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 -129쪽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
바보같이.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하고 나는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 내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내 속옷 깊은 곳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처럼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는 앞에 가는 승합차를 한 대 추월해버렸다. 차가 휘청하자 고모가 손잡이를 잡았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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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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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머릿속이 온통 까매지고 정신이 아뜩해져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침대 시트를 샅샅이 살피고 타월을 뒤집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짧고 구불구불한 몇 올의 털만 떨어져있을 뿐, 내 몸에서 흘러나왔어야 할 붉은 꽃잎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33쪽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아주 잠깐 우리의 손끝이 스쳤지만 우리의 눈빛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의 운전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건 다른 남자애들한테도 흔한 일이었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괜찮았다. "통금이 열시라면서? 좀 늦었네." 나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줄게 있었는데. 잊어버릴 뻔했네." 그는 뒷좌석에 손을 뻗쳐 쇼핑백을 집었다. 실내등을 켜자 황갈색 쇼핑백에 선명히 아로새겨진 루이뷔통의 로고가 드러났다. 쇼핑백 안에는 백과 똑같은 재질의 종이 상자가 들어있었다. 조심조심 상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반투명하고 매끄러운 습자지로 한 겹 덮인 그것은 모노그램 캔버스 라인의 진짜 루이뷔통 백이었다. 짝퉁이 아닌 진짜 명품을 갖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면세점에서 그냥 하나 사놨던 거야."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 -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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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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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리타>를 마지막으로 오늘을 기준으로 하여 지금까지 나온 그녀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 무슨 니체 읽기 독파 같은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작업도 아니고 대뜸 왜 내가 그녀의 모든 소설들을 다 읽고 싶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처음 읽었던 그녀의 어떤 소설이 너무나 좋았던 나머지 다른 모든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시도했겠지만 전 권을 다 읽은 지금 처음의 그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소설은 모두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각기 다른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하는데도 마치 전에 읽은 그녀의 소설을 또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다. 내용은 이어지지 않는 시리즈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그녀만의 독특함을 각인시켜주기도 하지만 지루함과 따분함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일본 소설가들 중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는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끼와 요시모토 바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읽기에 거부감이 없고 편안하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펼쳐놓는 문장들은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며 때로는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쓰리다. 그것은 문장이 쓰린 것이 아니라 삶이 쓰린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어찌보면 내용면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어두운 삶의 모습들을 들여다보기에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인상을 줄 법도 한데 막상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런 생각은 나지 않는다. 근친, 강간, 이복형제, 부모의 죽음 등등 암울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지만 우리가 곧 그 암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털썩 주저 앉아있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다른 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절망에 빠져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혀 혼자 엉엉 눈물 쏙 빼고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경험이라고나 할까.

  고통과 토닥임과 치유와 정화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녀의 소설은 이제 읽지 않아도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또 그녀의 소설을 읽은 후 리뷰를 쓰면서 언급했듯, 다 알면서도 접하게 되는 것은 그때마다 내가 안고 있는 나의 고통을 치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홀로 된 나에게 쉽게 손 내밀어 줄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건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고민과 고통을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위로의 수단으로서 기분전환의 수단으로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함께 울어줌으로써 그도 나도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뭔가 뿌듯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길이 가겠지만 내가 다시 그녀의 소설을 볼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별스런 재미나 감동이나 쾌락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중독된 상태인지도. 다시 그녀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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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품절


그래서 나는 살아가는 의미 같은 것만 내내 생각하고 있고, 더욱이 그 일만큼은 타인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은 잠자코 있어도 알게 모르게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서로 얘기를 나누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관계가 나빠지고 만다. 처음 얘기를 꺼낸 수간부터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 사라져간다. 없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윤곽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데 안심한다. 그런 기분이 든다. -96쪽

바닷가에서 사람은 늘 시인이다.
뭐니뭐니 해도 바다는 늘 예상치보다 20퍼센트는 크니까.
마음으로 어지간히 크기를 그리고 가보아도, 그보다 20퍼센트는 항상 크다. 더 크게 생각하고 가도 그 생각의 20퍼센트는 늘 크다. 철썩이는 파도로 가슴을 온통 채우고 가보아도, 좁다란 해변을 상상하고 가보아도, 역시 20퍼센트.
이런 것을 무한이라고 하는가. -169쪽

"보통 때도 늘 몸에 지니고 있는 거잖아. 난 잘 때도 귀걸이하고 반지는 빼지 않거든, 그래서 말이야, 피부랑 연결돼 있는 듯한 느낌을 품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내 목욕가운을 뚫고 배로 칼이 들어왔을 때, 정말 처음으로 느꼈어. 나와 금속은 소재가 다르다는 걸. 그런 느낌 밖에 없었어. 상당한 이질감이었어."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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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사전
A. C. 그레일링 지음, 남경태 옮김 / 에코의서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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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에 봐도 제목에서 확 끌리는 제목을 달고 있는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 사전>은 도대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글을 담아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려운 강단 철학이 아닌 아마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하지만 그 단어가 내뱉는 무게감은 상당한 그런 주제를 가지고 가볍게 또 진지하게 쓰고 있을 것만 같은 이 책 매우 끌린다.

  제 1부 성찰해야 할 것들, 제 2부 버려야 할 것들, 제 3부 아껴야 할 것들로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일단 목차부터 재밌다. 저 큼지막한 제목들 아래로는 작은 여러가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성찰해야 할 것' 에는, 도덕주의, 관용, 자비, 예의, 타협, 두려움, 용기, 패배, 슬픔, 죽음, 희망, 인내, 신중함, 솔직함, 거짓말, 위증, 배반, 충성, 비난, 처벌, 망상, 사랑, 행복이 위치해있고, '버려야 할 것들'에는 민족주의, 인종차별, 동물차별, 증오, 보복, 무절제, 우울, 그리스도교, 죄, 회개, 신앙, 기적, 예언, 순결, 이교, 신성모독, 외설, 빈곤, 자본주의가, 마지막으로 '아껴야 할 것들'에는 이성, 교육, 소질, 야망, 연기, 예술, 건강, 여가, 평화, 독서, 기억, 역사, 리더쉽, 여행, 사생활, 가족, 나이, 선물, 사소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작은 항목들을 보고 있노라면 재밌는 점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버려야 할 것들에 신앙과 신성모독, 그리스도교와 이교가 함께 있는 것이 재밌다. 신앙을 버리라하면서 신성모독을 버리라한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 허나 엄밀하게 신앙과 신성모독은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으로 살폈을 때 얼핏 대립되어 보이는 이것들이 함께 있다는 것은 재밌다.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는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이 강하고, 이교는 그리스도교와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녀석이다. 둘이 함께 버려야 할 것들 안에 있다는 점은 재밌다.

  때로 어떤 이들은 아껴야 할 것들에 있는 요소들을 버려야 할 것들로, 버려야 할 것들에 있는 요소들을 아껴야 할 것들로 옮기고픈 욕망을 느낄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을 떠나 세 카테고리에 담겨있는 녀석들은 대개 우리가 수용할 만한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기준으로 나뉘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머릿말에는 이 책의 서문을 대신하여 줄리어스 헤어의 수필집 <진리를 향한 추측>의 서문의 일부를 발췌했다.

  "이 책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할 것이다. ...... 생각이라기보다는 거의 꿈이라고 할 만큼 어렴풋하고 희미한 내용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이미 다른 책을 읽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모든 설비를 갖춘 완성된 집을 사고 싶은 사람이 굳이 재료를 구하러 채석장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구성하고 싶다면,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재료를 찾고 있다면 이 책에서 여러분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본래 런던대 철학교수이자 옥스퍼드 객원교수인 A.C.그레일링이 <가디언>지에 <유념해야 할 한 마디>라는 제목으로 매주 기고하던 것을 모아 다듬고 재배열하여 묶어낸 것이다. 각각의 글은 매우 독립적이며 또한 매우 짧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짧은 글이지만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다. 저자 그레일링은 강단철학보다 일상생활의 철학을 하는 자로 철학의 대중화라고까지 하면 뭔가 거창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우리가 접하는 철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디언지 말고도 타임즈, 파이넌셜 타임스, 옵저버,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언 선데이,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 뉴 스테이츠먼 등의 신문과 잡지에, 또 BBC 방송의 여러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자신만의 철학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주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며 주의주장을 담아내기보다는 편안하게 사색하고자 우리를 이끈다. 사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일상의 소재에서 찾아낸 사색은 좀더 무겁고 심층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런 차원에서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 사전>은 일종의 입문서이다.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사색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하는 철학 입문서이다.

  분류체계나 주제는 맘에 들었지만 내용이 아무래도 매주 신문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보니 좀더 깊이있는 사색을 기대했던 나에겐 약간의 실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지나친 기대 때문이지 이 책이 결코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책은 충실하게 독자를 안내해줬으며 독자를 남겨놓은 채 빠져나왔다. 비슷한 책을 원한다면 우리네 철학자인 김용석 씨의 <두 글자의 철학>을 권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책보다는 <두 글자의 철학>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둘 모두 일상의 철학을 담은 철학책이긴 하지만 <두 글자의 철학>이 좀더 사색의 깊이가 담겨있다고나 할까. 또한 아무래도 번역서가 주는 텁텁함보다 본래 한글로 쓰여진 자연스러움이 더 편안함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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