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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발터 뫼르스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차모니아 4부작 중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통해서였다. '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환타지 소설을 쓴 것도 신기했지만, 그 내용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네 책방의 환타지 소설과는 그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그 때의 그 신선함이란. 차모니아 4부작 중 또 한편이 번역되었다.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발터 뫼르스는 역시나 이 책에서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만들어준다. 아직 읽지 않은 차모니아 4부작의 나머지 작품들에도 흥미가 가는 것은 지금 읽은 두 작품이 내게 안겨준 신선한 자극에 기인한다.
발터 뫼르스의 환타지를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처음에 지루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 것. 에이 이게 머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너무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적응하기 힘들어, 등등등의 불만들. 사실 그렇다. 9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분량의 환타지는 초반에 등장인물의 캐릭터 묘사와 배경, 환경에 대한 역사적 개괄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일종의 지금까지 우리가 머리 속에 지니고 있던 모든 사물에 대한 편견을 지우는 작업이다. 집은 당연히 출입문이 있고, 안에 들어가면 화장실과 방과 부엌이 있을테고, 환기를 위해 창문도 있겠지, 사람이란 눈 두개, 코 하나, 귀 두개, 입 하나, 그리고 목, 머리, 몸땡이, 팔 다리로 이루어진 동물이지, 돼지는 꿀꿀 거리며 밥을 많이 먹는 코가 납작한 귀가 쫑긋 서고 짧은 네 다리는 짧아서 뒤뚱뒤뚱 거리는 그런 동물이지, 등등의 이런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발터 뫼르스의 소설을 읽음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초반의 그런 길고 긴 새로운 등장인물과 환경, 역사에 대한 설명 부분을 인내를 가지고 읽을 필요가 있다.
초반의 인물묘사를 지나고 나면 이야기는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왜냐면 이미 우리의 머리 속엔 백지 상태에서 소설읽기에 꼭 필요한 지식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제대로 익히고 나면 이야기는 매우 재밌게 진행된다. 간혹 우리가 지워버린 우리의 일상의 지식의 흔적들이 새로운 등장인물의 생김새와 행위묘사에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아 뭐야, 그때 나왔던 바로 이 놈은, 현실 속의 이 동물이잖아! 하하하. 뭐 이런 즐거움 이랄까.
루모는 볼퍼팅어 종족이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쉽게 볼 수 있는 그 동물과도 생김새가 닮아있는 이 녀석은 우리처럼 학교에서 국어, 수학 수업도 받고, 검도와 복싱 등의 무술 훈련도 받는다. 꼬마 녀석, 아직 이성에 눈뜨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가 어떻게 다른지,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한지 그에겐 인식이 없다. 그러다 필 꽂혔다. 아 이쁘다. 소설의 제목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에서 볼 수 있듯 주인공 루모는 볼퍼팅어 종족을 위해 뭔가 대단한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낸다. 위기상황마다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며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그들을 구원해내는 그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영웅은 아니다. '앉으나 서나 언제나 당신 생각'이지만 그녀 앞에서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이 녀석, 고백해 고백해 사랑한다고, 너를 좋아한다고. 그러나 쉽게 고백하면 재미 없잖아. 어렵게 어렵게 힘들게 나오는 그 한마디를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볼퍼팅어라면 누구나 은띠를 찾아 헤맨다. 은띠는 바로 여기있다. 뭔가 대단한 보물단지가 아니다. 너의 마음 속에 있다. 이제 한 명(?)의 볼퍼팅어가 되어 소설에 빠져들 일만 남았다. 자 당신은 이제 볼퍼팅어다.
하나 더. 신비스럽고 재미난 차모니아 4부작을 엮어낸 작가 발터 뫼르스는 독일에서 온전히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자라나진 않았다. 그는 고 2때 학교를 자퇴하고선 이런저런 일들을 전전하다 만화가, 작가의 길을 걸으며 성공한 인물이다. 정규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어쩌면 제대로 된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아직 날이 어둡거나 추운데도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노라 말했다. 그는 스스로 "순수한 상상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자극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리얼리스트다"라고 말하며, 이 같은 대작을 쓸 수 있었던 자신의 상상력의 풍부함을 '일상적인 현실'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그렇다. 작가는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창출해 내는 인물이다. 작가가 사는 세계도 독자가 사는 사는 세계와 다르지 않고, 결국 같은 환경에서 같은 사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간접적으로 나마 상상력의 풍요를 느끼고 싶다면 여지 없이 이 책을 손에 들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