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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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맞선에서 만난 비뇨기과 의사를 대관절 '왜' 사랑하느냐는, 재인을 향한 유희의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7-18 쪽

"잘 모르는 남자와, 아니, .......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43쪽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 내가 유준을 만나러 온 이유는, 어쩌면 고백하기 위해서였다. 애정 문제와 관련된 카운슬링엔, 맑고 담담한 사이의 이성이 제격이니까. -106쪽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 일 뿐더러, 그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햐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114쪽

'어리다'는 말이 반드시 생물학적 연령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리다는 것은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꿈의 대부분이 몹시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점. 비록 제 딴에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칠 것이다. "왜 안 돼? 하면 돼. 나는 나니까!" 맞다. 그것이 스물 다섯 살에 어울리는 세계관이다. 스물 다섯 살이므로, 그럴 수 있다. 문제는 내게 있었다. '당연하지, 다 잘 될 거야' 라고 마냥 북돋워줄 수가 없는 건, 내 인생의 시계추를 다시 칠 년 전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188쪽

"웃기는 얘기 하나 해줄까? 용가리 말야. 한 번 결혼했다 왔으면서 어떻게 그 실력은 하나도 안 늘 수가 있니?"
"그렇게 못해?"
"응. 죽음이야. 첨부터 끝까지 딱 정상체위. 오직 피스톤 운동. 헤어진 와이프랑 섹스리스였다더니 진짠가봐."
이럴 때보면, 유희가 발랑 까진 척하지만 실은 꽤나 멍청하고 순진하던 스무 살에서 그대로 멈춰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야 그걸 믿냐? 그럼 그 집 애는 어디 황새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까 봐? 그런거 다 뻥이고 그 남자는 다만 '원래 잘 못할' 뿐이야"라고 일러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사실 옛날에 내가 뭘 알았겠니. 하지만 그동안 나도 자연스럽게 학습해온 부분이 있잖아? 그런 거 다 무시하고 걔한테 맞춰서 하향 평준화시키려니까 아주 좀 쑤셔 미치겠다. 미적분 다 떼고 나서 다시 일차방정식 푸는 기분이야."
-232쪽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와 영원을 기약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이별 여정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할 때보다 어쩌면 헤어질 때, 한 인간의 밑바닥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끔은 행복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보다 평화롭게 이별하는 연인들이 더 부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헤어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316쪽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하낟.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ㅇ러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 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유희가 만나는 남자가 이혼남이든 유부남이든 수도승이든 내가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한 다스의 남자를 만나든 한 두름의 남자를 만나든 유희 식의 윤리로 재단되고 싶지는 않았다.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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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2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많이 서늘했어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구절 한 구절 마음 속에 박히더라구요.

씩씩하니 2006-10-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4,316,330이..저랑,,,,일치해요,,ㅎㅎㅎ
솔직한 문장들이 가슴에 와닿았던 책 같애요...

마늘빵 2006-10-2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 아 저 정이현한테 반했어요.
씩씩하니님 / ^^ 네. 역시 좋은 문장은 누구나 다 알아보는 법이죠. 참 좋았어요. 즐겁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