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몇몇 여성들에게 물어봤다. 여자에게 있어서 행복한 사건이 뭐일 것 같아요? 어떤 이는 남자, 어떤 이는 소개팅, 어떤 이는 결혼, 어떤 이는 임신, 어떤 이는 남편의 죽음 이라 했다. 남편의 죽음은 제일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대답. -_-  엘리에트 아베카시스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작가의 소설 <행복한 사건>은 저들의 대답 중 어느 한 가지를 다룬 책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써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정 반대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여성에게 있어 '임신'이라는 것은 나와 사랑하는 남자의(물론 강간이나 원나잇 등의 원인으로 임신도 가능하지만 이런 것은 예외로 치고) 아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일종의 하나의 사랑의 결실이기에 임신한 여성에게도, 임신한 여성을 아내로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도 행복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임신과 동시에 출산과 동시에 모든 환상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 행복했던 나날이여. 연애는 달콤했고 신혼생활 또한 달콤했으나, 임신과 출산으로 달콤함은 쓴 맛이 되어버렸다. 아아 행복했던 나날이여.

  "니콜라는 내 배에 올려진 아기를 보았다. 그제야 겨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에 천사의 얼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는 내가 기대하던 장밋빛 뺨에 미소를 띤 얼굴이기는커녕, 이게 왠 원숭이 새끼인가 싶었다. 털 많고, 지저분하며, 태지와 분비물을 뚝뚝 흘리고, 온몸이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얼룩덜룩하며,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P72)

  "그보다도, 이 애는 누구인가?
레아.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괴물, 오로지 제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써먹는 아이, 타인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존재, 그저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식충이. 아기는 오로지 먹기 위해 살았다. 아기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어느새 소화시켜 버리고는 다시 배를 채워야만 했다. 아기에게는 먹는 것 말고는 뭐든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권력은 예외일지도. 아기는 권력을 좋아했다. 아기가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지, 안그러면 분노를 터뜨렸다. 아기는 화가 나기 시작하면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히스테리,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 광기의 온갖 징후를 여실히 드러냈다. " (P94)

  아아 세상에 어느 엄마가 어디 다리밑에서 주워온 아이도 아니고, 남편이 바람피다 생긴 아이를 데려온 것도 아닌, 제 아이를 향해 이토록 가혹한 말을 쏟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진정 '행복한 사건'이란 말인가. '행복'은 어느새 '불행'으로 치환되어버렸다. 나는 불행해 나는 불행해 나는 불행해. 어서 이 괴물을 어떻게 좀 해줘.

  철학 박사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는 그녀는 갑작스레 닥쳐버린 이 현실이, 헤어나올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힘겹다.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내 인생은, 내 할 일은. 다 끝났지 뭐. 이놈의 애새끼가 애물단지로 둔갑하고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다. 이눔의 시끼, 이눔의 시끼.

  하지만 그녀는 곧 이런 혼란 속에서 주변의 다른 엄마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편과의 다툼, 외도, 돌아온 현실 속에서 생각한다. 그녀는 어느새 철학자가 되어있다. 인생의 철학자가.

  "아이를 갖고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데도 배턴을 넘겨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방정식을 풀거나 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아이를 낳고, 번성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부모에게 꽉 매여 살고, 좀 자유로워지는가 싶으면 이제 자식들에게 더 꽉 매여 살아간다. 행복, 그래 행복이다. 하지만 한 순간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다...... " (P238)

  소설 제목 '행복한 사건'은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사건'의 요약된 제목이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둘만의 신혼생활은 매우 달콤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닥쳐오는 일상의 변화들은 너무도 이전의 달콤함에 비해 쓰디 쓰다. 애 새끼는 밤낮으로 울어대지, 밥달라 칭얼거리지, 밥먹이고 나면 끅끅 대며 한 시간 동안 트름해야지, 똥오줌도 못가리고, 싱긋싱긋 웃다가 앙앙 울어대기도 하고, 집안의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다. 애 새끼가 어떤 행동을 하면 마당쇠와 무수리는 개그맨도 됐다가, 요리사도 된다. 원하는대로 - 원하는 바가 뭔지를 차라리 말이나 해줬으면 좋으련만 - 최고의 권력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한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현실이고, 인생임을 그리고 행복임을 깨닫는다. 다만 이전의 달콤함과는 다른 따뜻함의 느낌으로 행복은 찾아왔다. 그것이 아기가 사랑하는 두 남녀에게 선사한 선물과도 같은 또다른 사랑이다.

  분명코 결혼한 부부가 아기를 낳느냐, 안낳느냐 하는 부분은 두 사람의 인생에 있어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아기를 낳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두 사람은 좀더 많은 문화생활과 여행을 향유할 수 있다. 또한 아이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집안일들에 치여살 필요도 없고 오직 두 사람의 즐거움을 그리고 각자의 원하는 바의 인생을 살면 된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순간 그것은 소설 속에서 작가가 그려낸 천국에서 지옥으로 옮겨간 듯한 인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천국이 되는가 지옥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 사랑하는 서로의 모습을 아기를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활짝 벌어지는 행복한 일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생각컨대 후자를 택한다 할지라도 갑작스레 변한 현실이 고달프기는 하겠지만 '고달픔=불행'은 아니리라. 변화는 언제나 두렵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평온이 찾아온다.

  "책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사르트르와 카프카 만큼이나 염세적이고 어둡지는 않지만, 오히려 밝고 재밌지만, 내면 묘사에 있어서는 사르트르 못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이 소설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며 줄거리가 진행된다기보다 정체된 상태에서 '임신'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주인공의 심리변화에 따라 시선을 옮겨가고 있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던 작품이다. 평생 임신과 출산을 경험해 보지 못할 내가, 임신한 여성이 겪는 심리적 변화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혹여 언젠가 결혼을 해서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되는 날, 아마도 나는 이 소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행복한 사건>  표지 뒷면에 실린 나의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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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리뷰 쓰셨네요^^ 전 아직입니다.. 뒤쪽 책날개에 있는 님의 서평을 읽어보았어요. 그러잖아도 이름을 보고 님이길래 알라딘에 밝혀서 공개하고 소문 퍼뜨릴까^^ 생각중이었는데요.. 그래도 되나요? 리뷰도 멋집니다..

마늘빵 2006-10-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배혜경님 제 이름을 알고 계셨나요? ^^ 쑥쓰... 제가 머 여기에 인용하면서 밝혔는데요 뭐. ^^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6-10-0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특한 시선이네요. 보통 아이를 낳으면 낳는 고통보다 키우는 기쁨을 먼저 더 크게 이야기하곤 하는데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육아를 버거워하는가봅니다.그래도 아이가 커가는 과정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까지 하잖아요. 님께서 혹시 이 책을 읽고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실까봐 강조하는데 아이 키우기 정말 재밌어요. 다시 하라면 못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