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동물원에 가기>에 대한 잡설

  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던가. 그가 어서 책을 쓰기를, 그의 책이 어서 번역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의 짧은 에세이 묶음집을 접한건,  아직 번역되지 않은 <행복의 구조(?)> 를 읽고픈 - 사실 영어가 되면 원서를 보면 되는데 난 영어문맹이라 - 그에 대한 나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

  생각보다 매우 가볍고 짧은 글이었지만 그래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보고 싶었어요 보통씨.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동물원에 가기>는 2005년에 나온 원서 을 번역한 책이다. 왜 이렇게 늦은게야. 나는 나온 즉 바로바로 번역된 책을 읽고 싶다고. 번역서와 원서의 동시출간은 꿈도 못 꿀 터이니 그런건 바라지도 않아. 한 가지 불평을 늘어놓자면, 왜 원서 제목을 자꾸만 맘대로 바꾸는거야. 난 원제가 붙어있는 책을 보고 싶다고. 그럼 원서로 봐! 라고 하면 나는 역시나 나는 영어문맹이잖아 라고 대답할 밖에. -_-

  왜 출판사가 번역서의 제목을 <동물원에 가기>로 붙여놨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이 책 안에 담겨있는 아홉개의 에세이들 중 한 가지로부터 제목을 달았다고는 하지만 이 제목이 독자들에게 그다지 끌리는 제목은 아니라는 생각. 또한 그렇다고 이 제목이 이 책을 대변해줄 수도 없다는 생각. 그.래.도. 우얏건 그의 책이 너무나 기다려졌고, 기대됐고, 단숨에 읽었고, 너무나 좋았던 것은 사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 내게 주는 효과. 게으르고 지루해진 책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한참 <우리는 사랑일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등등 그의 책들을 해치우던(?) 그 때에 '독서침체증상'은 사라졌다. 역시나 이번에도 게으른 나의 책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그의 책을 읽고 나면 이 책 안에 언급된 온갖 철학자들과 화가와 작가들의 책들을 더불어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을 읽고 다음 주문목록에 올려놓은 것만 해도 수두룩. 일단 플로베르의 책들, <부바르와 페퀴셰>, <통상관념사전>, <마담 보바리>, 또 에드워드 호퍼의 사진집, 레너드 코헨의 음반들. 보통씨가 좋아하는 음악, 영화, 그림, 책이라면 나도 좋아 정도의 수준 쯤이면 심각한 보통 사랑 아닌가. 내가 그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객관적인 평가를 넘어서 별 다섯개를 모두 주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은 아닐런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그만큼 그가 좋다.

 - 본 리뷰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철학적이지만 철학적이지 않다. 이런 범주에 드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로는 레디오헤드나 신해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중심 주제는 삶이다. 보통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괴로움과 슬픔을 안고 있다. 그들은 헤어진 남자친구를 기억에서 되살리며 이미 지나간 과거의 슬픔과 그리움을 떠올리기도 하며, 어떤 남자는 맘에 드는 여자에게 "말 한마디 붙여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사과 주스 팩과 내 머리 속의 결혼 계획만 뒤에 남겨놓은 채 다음 역에서 내려버린 여자 때문에 며칠씩 마음아파" 한다. (<슬픔이 주는 기쁨> 도입부 문장 구조를 고대로 가져다 씀)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여러가지 면에서 철학적이다. 첫째, 연애소설이건 에세이건 장르를 가리지 않고 - 사실 그의 글은 장르구분하기가 힘들다 - 그가 알고 있는 온갖 다양한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연애소설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마르크스가 등장하며, 스탕달, 세네카, 니체, 헤겔,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콩트, 스피노자, 데카르트, 몽테뉴, 파스칼, 에피쿠로스, 쇼펜하우어  등등 등장철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나열하면 몇 줄이다. 둘째, 그의 글은 매우 철학적이다. 아주 조그마한 사건들, 사물들을 관찰함에 있어서도 그의 시선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가 매우 익숙해하는 침대, 기차, 터널, 사과 주스 등등의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에서 그는 많은 생각을 펼친다. 그의 머리 속엔 흰 구름 둥둥 떠다니며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그 무엇도 알랭 드 보통을 통하면 쉽게 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철학적이다.

  그러나. 그의 글은 철학적이지 않다. 왜냐면, 그의 글은 너무나 쉽다. 대개의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이라는 것은 용어조차 쉽게 해석되지 않는, 자기들끼리의 언어세계를 가지고 있는 듯한, 어려운 말로 쓰여진 사색의 흔적들이다. 저 멀리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푸코와 데리다,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도통 이해하기 쉽지 않다. 라깡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라깡만이 사용한 언어를 가지고 사전을 냈을 정도니깐. 그런데 보통의 글은 온갖 철학자들을 뒤집어 까놓고 버무리고 으깨지만 너무나 쉽다.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된다. 그의 책 첫문장을 읽는 순간 우리는 마법에 걸린 채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마지막 장을 덮어버린다. 왜 재밌으니까, 또 쉬우니까.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서들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고로 철학적이지 않다. 맛배기 하나.

 "어쩌면 침묵과 어줍음은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능란한 유혹 솜씨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어줍게 유혹하는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p48)(<진정성>中)

 "여자들은 홀로 있는 남자들의 절망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충서와 이타심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로맨스라는 면에서 잘나가는 유형의 남자들을 의심할 만한 이유도 되겠다. 그런 남자들은 넘치는 매력 때문에 내가 겪었던 이런 희비극적 과정을 알지 못한다. 말 한마디 붙여볼 기회도 주지 않고, 사과 주스 팩과 내 머릿속의 결혼 계획만 뒤에 남겨놓은 채 다음 역에서 내려버린 여자 때문에 며칠씩 마음 아파하는 그 과정을. "(p99-100)(<독신남> 中)

   <슬픔이 주는 기쁨> <공항에 가기> <진정성> <일과 행복> <동물원에 가기> <독신남> <따분한 장소의 매력> <글쓰기와 송어> <희극> 의 아홉개의 에세이들은 모두 각각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껏 우리가 접해왔던 알랭 드 보통의 여러 책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고루 분배되어있어 일종의 종합판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글은 그의 로맨스 3부작을 보는 듯 하고, 어떤 글은 <불안>을 연상시키며, 어떤 글은 <여행의 기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글들 또한 어떤 특정한 전작을 떠올리게 하지 않더라도, 모두 지극히 '보통스럽다'. 보통은 첫 글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 "에드워드 호퍼적인"이란 말을 쓰는데, 같은 차원에서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다보면 지극히 "보통적인" "보통스러운" 뭔가를 감지하게 된다. 내 머리에 돋아난 촉수가 그를 자연스럽게 알아본다고나 할까. 추상적인 것에 대해  혹은 사소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 다 톡 까놓고 얘기하자 하고, 한편으로 이런 저런 인용구와 비유를 들어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안착한다.

  보통의 저서들이 줄줄히 번역되어 출간된지 시간이 꽤 흐른 지금, 그의 인기가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하면 이는 착각. 여전히 나와 같이 보통을 짝사랑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있으며 이 책이 그들의 사랑을 받을 것임은 '사.실.' 혹여 아직도 그를 모르는 이가 있다면 이 책 하나로 보통의 매력에 푹 빠질 기회가 다시 왔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 것. 꽝은 절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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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채 2006-08-2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알랭 드 보통 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프락사스 님과 밑에 하이드님에 견줄 정도가 못되네요 ㅠㅠ.. 사실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은 혼자보기아까운, 아니 그래서 아무한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그런 작가이거든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죠? ㅋㅋㅋ

마늘빵 2006-08-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반갑습니다. 저도 사실 그렇습니다. 꼭꼭 숨겨놓고 보고픈 작가인데 너무 많이 알려져서 이제 그런거 포기했습니다. -_- 제가 숨겨도 다 드러나는데요 뭐. 아 정말 맘에 드는 작가입니다. 통독하고선 또 곱씹어서 다시 보고 들춰보고픈 책들이에요.

이매지 2006-08-2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봤는데 엄청 얇고, 엄청 가볍더군요. 하이드님과 아프락사스님의 보통씨 사랑은 정말 ^^;

마늘빵 2006-08-2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이 내거에요 건들지마세욧. -_-+

하이드 2006-08-2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나온 건축.에 관한책도 완전 재미있는데 =3=3

안나채 2006-08-27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은 벌써 원서로 읽으셨네요. 저도 며칠 전에 <행복의 건축>주문했어요. 번역본이 나올때까지 못기다리겠더라구요.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사볼껄. 기다리다 결국 ㅠ,ㅠ

마늘빵 2006-08-2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 막 약올리고 가시네. -_- 번역되면 후딱 사봐야지.
지젤님 / 옷 님두. ㅠ_ㅡ

안나채 2006-08-2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아프락사스님- 본이 아니게 그런 셈이 되었네요. 죄송/ >_ㅠ]
저도 아직 술술 읽을 정도의 실력은 못되서, 영어 공부도 할겸. 겸사겸사루ㅋㅋㅋ

마늘빵 2006-08-2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