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냄새가 짙게 풍겨나는 영화였다. 앞서 본 <레밍>에서의 그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레밍>이 더 재미났다. 물론 <레밍>과 <친밀한 타인들> 사이에는 '프랑스 영화'라는 점을 빼고는 어떠한 연관관계도 찾을 수가 없었지만, '낯선 이들을 통해 느끼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보며 <레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친밀한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낯선이에게서 사랑을' 이라는 개념과 <레밍>이 가지고 있는 '낯선이에게서 사랑을'이라는 개념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것이지만(두 영화 모두 본 사람들이라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터).
전혀 면식이 없는 누군가가 내게 그의 사생활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 한다면.
그 혹은 그녀가 미남이거나 미녀라면.
그 혹은 그녀가 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밀한 타인들>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이루어지는 '친밀한 관계'를 그려낸다. '타인'이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낯섦'과 '친밀한'이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친근함' 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나 묘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말을 만들어낸다. 친근하면서 낯선? 그건 어떤 느낌일까. 그건 하나의 감정일까.

* 이 여자. 담배를 펴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때로는 쇼파에 누워 야릇한 포즈를 취하기도 하는 이 여자. 그 남자에게 다가간다. 그녀가 의도 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 남자는 그녀에게 빠졌다. "남편이 내 몸에 손 안댄지가 6개월이나 됐쬬. 예전엔 정말 좋았는데..."

* 이 남자. 어떻게 하면 세금을 적게 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상담을 해주는 이 남자. 어느날 갑자기 예약도 없이 찾아온 한 여자의 엉뚱한 이야기에 빠지고 만다. "나를 심리치료사로 착각했군... 뭐라고 말한담?"
그대를 심리치료사로 착각하고 찾아와 오자마자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대뜸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녀는 황당할 뿐이다. 나는 돈에 관한 상담을 받지, 성생활 상담은 받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재무상담사이지, 심리치료사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걸. 그리고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처음엔 나도 몰랐다. 그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내게서 편안함을 느끼는 그녀에게 잘못된 만남을 되돌려놓고 싶지 않았다. 되려 나는 이 고민을 진짜 심리치료사에게 가 돈을 주고 상담까지 받고 있으니 내가 제정신이야? 한번, 두번 만남이 이루어지고, 약속된 시간에 오지 않는 그녀,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비맞은 채 들이닥친 그녀가 나는 너무도 그리웠다. 사랑이었다.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그래. 이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하지만 깨닫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비로소 그녀가 치료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남편과의 결단을 내리며 홀로 떠난 그 빈공간 속에서 그는 사랑의 여운을 느낀다. 그리고 찾는다. 나의 사랑을.
누군가의 비밀을 듣는다는건 놀라운 체험이다. 그는 내게 자신을 내던졌다. 그리고 나는 죄책감과 동시에 그 은밀한 쾌락을 즐기고 있다. 누군가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상대가 내게 털어놓은 비밀은 아니지만, 내가 상대의 비밀을 엿보는 듯한 쾌락이 아닐까. 영화는 종종 커튼 밖의 여러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비춰준다. 그 묘한 매력. 한 집에선 남녀가 서로를 탐닉하고, 한집에선 남녀가 서로 다투고 있고, 한집에선 노인이 신문을 읽고 있다. 누군가를 엿보는 이 짜릿함. 비밀은 나만이 상대를 알고있다는 특별함을 선사해준다. 상대가 털어놓은 비밀이든, 아니면 내가 몰래 훔쳐본 비밀이든.
남녀가 만나 데이트를 하고, 밥을 함께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그 시간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혹은 그녀가 내게 아무한테나 말하지 못할 비밀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혹은 그녀는 불쑥 나에게 다가온다. 나도 그 혹은 그녀에게 다가간다. 사랑은 비밀을 타고 전해온다. 또 비밀은 사랑을 타고 전해진다. '비밀'과 '사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닐까. 서로의 비밀을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