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오웰의 '1984년'과 매트릭스의 만남, 이퀼리브리엄

"매트릭스는 잊어라" 라는 문구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인 영화 포스터.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그 뜻을 알지 못하고는 쉽게 기억하기 힘든 저 제목 '이퀼리브리엄'은 홍보용으로는 부적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우리말로 번역해서 '평온'이라고 하면 그건 그냥 원래 제목을 놔두느니만 못하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듯 하다. 지난주 주말에 티비에서 밤12시에 해줬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그 전에 비디오를 빌려다 봤다. 예전에 군대에서 휴가 나와 극장에서 본 영화이기도 하지만 본지 꽤 지났기에 다시 봤지만 내용은 생소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조지오웰의 <1984년>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1984년>을 영화로도 봤고, 책으로 본지라 그 줄거리와 충격이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뭐 레포트나 논문을 쓰면 으레 나오는 현재 사회는 과거 사회에 비해 어떻게 변했고 어떤 병폐가 있다 라는 식의 서문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소설화, 영화화 한 작품은 그 표현력이 매우 빼어났다. 원작이 <1984년>은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흡사했다는 면에서. 



* 이 화려한 존 프레스턴의 총술. 이걸 영화 속에선 '건카타'라고 한다. 최단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총술. <매트릭스>이후 액션은 끝났다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 속 액션은 또다른 놀라움을 선사해준다.



* 존 프레스턴의 건카타에 순식간에 쓰러지는 클레릭들.

  <이퀼리브리엄>은 '감정'이 없는 사회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 두 가지 영역을 모두 갖고 있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는 '감정' 이 없다.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들 또한 이 사회에서는 없어진다. 피카소의 추상화를 비롯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 거울, 음악, 미술, 예술적 가치가 있는 모든 작품들과 물건들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감정을 없애기 위해 하루 세번씩 꼬박꼬박 프레지움이란 약을 주사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로보트와도 같이 딱딱한 메마른 사람들로 변한다. 감정이 없으니 당연지사. 하얗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무런 감정 없는 딱딱한 말투는 가족 사이라고 해서 달라질건 없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칭해 '반군'이라 하고 이들은 주어진 약을 먹지 않고 몰래 버리거나 숨겨놓으며 '감정의 제거됨'을 거부한다. 또 이들을 잡는 이들이 있었으니 '클레릭'이었다. 이들은 군인, 경찰과 같은 존재들이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이 두 그룹들간의 싸움이다. 총사령관 하에 클레릭은 반군들을 색출하고 반군들은 이들에 대항하고... 극중 한 클레릭 존 프레스턴은 그의 파트너가 범죄현장에서 책을 하나 들고 증거물수집과에 넘기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그가 투약을 거부하고 책을 읽고 있는 현장을 목격 그를 사살한다. 그러나 그를 사살한 존 프레스턴이 결국 나중에는 자신이 죽인 동료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여자를 대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동정, 안타까움, 분노 등등의 감정을 지니게 되면서 그는 반군에 협력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 존재하지도 않는 총사령관의 얼굴을 한 부총령관을 사살함으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람들에게 '감정'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년>은 이와 비슷하다. 감정을 느껴서는 안된다. 사랑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러나 소설속의 주인공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현장을 목격당해 끌려간다.

  '감정'이 없는 삶이란 과연 가능할까. 영화에서 존 프레스턴이 사랑한 반군 여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이란 당신에게 어떤 것인가?" 존 프레스턴은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그 조차도 자신이 사는 목적과 의미에 대해 의심을 한다.
 
  우리는 신문기사와 저녁뉴스에서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의 현실상을 볼 때마다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으로써 해결해라 라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또 그것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또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감정이 없이 이성만으로 된 사회는 너무나 메마르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슬픔, 기쁨, 분노, 동정, 연인 등의 감정을 느끼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좋아함과 사랑 등의 긍정적인 감정도 있지만, 증오함과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존재한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 갈래로 나누었지만 엄격히 어느 하나가 긍정이고 부정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때에 따라서는 분노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고 사랑이 부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감정을 통해 살아가고 삶이란 곧 감정의 표출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감정이 제거된 사회의 단면을 지켜봄으로써 새삼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으로써 행동해라' 라고 한 절대진리의 명제처럼 보이는 문장이 왜 이렇게 거짓으로만 느껴지는건지.

다음은 에롤 파트리지(숀 빈)가 존 프레스턴에게 죽으면서 낭송한 시이다.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 William Yeats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half-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하늘의 융단을 소망하며 - 윌리엄 예이츠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파란, 침침한,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오로지 꿈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 드렸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p.s 중학생 아이들에게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 말해주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영화를 보여주면 전반부의 지루한 장면들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후반부의 화려한 존 프레스턴의 총술에 주목하며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그저 영화의 의미를 배제한 채 재밌는 영화로서 보여줌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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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2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이츠의 시가 죽입니다.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캬~
영화줄거리를 보니 '트래블러'란 최근에 나온 책도 생각나네요.

플라시보 2005-12-2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이 영화 비디오로 빌려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어제 가 보니까 동네 비디오 가게가 말도 없이 이사를 갔더라구요. 이제 어느 비디오 가게를 뚫어야 할지..쩝

마늘빵 2005-12-20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 ^^ 비됴에선 저렇게 해석하진 않았는데 어떻게 해석하건 캬~ 소리 하오죠. '트래블러'는 뭔가요. 그거 검색해봐야겠네요.

플라시보님 / 주변에 비됴가게 없어진데 많아요. 저희 집 근처에도 한군데 밖에 없다는. 훔. 세군덴가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재밌습니다.

바람구두 2005-12-2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아프락사스님!
그런데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을 단순히 "평온"이라고 보기엔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철학 용어로는 의지(意志)의 자유를 주장하는 비결정론(非決定論)으로서의 "균형설"을 의미하거든요. 백과사전에 나오는 말을 옮겨 보면 이 영화의 제목으로서 단순히 "평온"이 아니라 좀 더 철학적인 제목이란 걸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상반(相反)하는 두 동기(動機)가 같은 힘과 가치에 의해 균형상태에 있을 때, 의지는 어떠한 외적 원인에 의해서도 제약·규제되지 않고 자유롭게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며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어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이퀄리브리엄"은 서로 대조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일종의 결정론이니까요. 그리고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이란 이름은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청교도 신학자의 이름이자,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란 동방의 전설 기독교 왕의 이름하고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좀 더 생각해볼 일이긴 하지만...

마늘빵 2005-12-2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바람구두님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진 못했는데요. 그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서요. ^^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