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터넷 가상공간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와서 유니텔,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의 인터넷 통신이 유행했었고, 난 그 중 생긴지 얼마 안된 유니텔에 들어가서 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사이버 공간의 채팅방은 건전했다. 요새는 순수한 의도의 채팅방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학교홈을 찾아 가입을 했고, 거기서 놀았으며, 록 동호회와 철학 동호회에도 기웃거렸다.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에 비해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끼리의 친밀함은 더욱 따스했다. 주로 학교홈에서 활동을 하던 어느날 처음으로 벙개 라는 것을 했고, 5-6명이 모인 그 자리는 정말 편안했다. 이곳에 우리학교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오빠가 우리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우리 학교홈에 가입해 놀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얼굴을 모른 채 평소 그녀가 쓰는 글을 읽고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약간 엽기적인 면도 있는 듯 하고, 생각이 깊은 것 같고, 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두운 면도 있어 보이는 그녀를 나는 좋아했었나보다.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참을 만나지 못했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사이버 상에서 대화를 하고 서로의 글을 읽었다.
그러다 언제나와같이 학교홈에서 벙개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그녀가 처음으로 나왔다. 학교 근처의 어느 한 호프집에서의 만남. 겨울이었다. 털스웨터같은 것을 입고 앉아있는 그녀를 난 처음 봤지만 한순간에 알았다. 글로 접했던 채팅으로 접했던 그녀의 이미지와 일치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학교홈에 있는 다른 선배가 있었고, 나는 먼 발치에서 마냥 볼 수 밖에 없었다. 남친이 있음에도 그녀와 나는 가상공간에서는 여전히 대화를 나누었고, 문자질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그 선배와 깨졌고, 내게 전화했다.
"뭐하니?"
한살 어리지만 항상 내게 반말이었다.
"어 동아리 방에서 애들이랑 드럼치구 기타치구 해"
전화속 목소리에서 약간 우울함을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영화보여줄까?"
"그래 좋아"
그리곤 단 둘이 처음 만남을 갖었고, 아마도 그때 영화 '가위'를 봤을 것이다.
이후 잦은 만남이 있었고, 햇빛 내리쬐는 날 서울대공원에 놀러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깊숙히 공원안으로 들어왔을 때 비가 내렸다. 소나기였다. 쏴아쏴아. 이런! 난 우산이 없었다. 그녀는 우산을 가지고 있었다. 우산을 펴고 내가 손에 쥐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저어기 멀리 정자에 피해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가지고 느긋하게 내려왔다. 천천히. 갑자기 내린 소나기는 바닥에 흥건히 빗물을 고이게 만들었고, 신발이고 양말이고 바지고 다 젖었다. 우산을 받쳐 든 나는 그녀가 비를 맞을까봐 그쪽으로 기울였고, 내 오른쪽 어깨는 죄 젖었다. 그녀가 내쪽으로 다시 기울이면 난 다시 그녀쪽으로 기울이고. 천천히 내려와 정자에 도달했다. 우리는 앉아 비를 피했고 젖은 내 어깨를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아마도 그때였지 싶다. 서로 눈이 맞은 것이. 그리곤 다음에 만났을 때 여의도 공원에서 한참을 돌아댕기다가 난 어렵게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앉아서 한 세시간은 보냈을 것이다. 사귀자고. 조건이 있단다. 집에는 알리지 말자고 한다. 집에서 남자친구 사귀는거 안좋아한다고. 그러자고 했다. 또 두 가지인가 더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두 다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사귀었다. 여의도 공원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길.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약 3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우린 헤어졌다. 어느날 밤 걸려온 전화.
"우리 헤어지자"
"... "
난 울먹이며 말했다.
"왜...."
"오빠를 좋아하는거 같지만 사랑하는거 같진 않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순간 머리 속에 이 생각이 떠올랐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면 될 거 같았다. 하지만 답은 내 머리 속에 없었다. 가슴 속에도 없었다.
"... "
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날 우린 만났다. 전에 그녀가 종로를 지나가다 이쁘다고 했던 목걸이를 난 어젯밤 그녀의 전화를 받기 전에 준비해놨었다. 돈이 없어 그때 당시 사주지 못했지만 점심 굶고 용돈 모아 목걸이를 샀고, 다음에 만나면 주려고 했는데... 주기전에 이별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목걸이인 것을. 헤어지는 마당에 난 그거을 전해주었다. 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날 안아줬다. 그녀의 집으로 바래다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다시 시간이 많이 흘러 일년쯤 지나고, 난 군에 입대했고, 100일 휴가를 앞두고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에게서. 그녀가 내게 메일을 보냈노라고. 난 내 홈페이지와 메일계정을 동생에게 맡기고 갔다. 동생이 알려준 것이다.
"보고싶다. 100일 휴가 나온다며? 만나자... "
기뻤다. 하지만 순간이었다. 또 다시 우리가 만난 날은 세차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왜 만나기만 하면 비가 오는건지. 이번에도 옷이 죄다 젖었다. 커피숍.
"우리 다시 사귀자"
내가 말했다.
"아냐. 그건 아닌거 같아."
그녀가 말했다.
부대 복귀. 몇 차례 편지를 보냈고, 전화를 했지만 다시 연락이 끊겼고 그게 다였다. 나와는 달리 인터넷 공간을 별로 안좋아하던 그녀는 다음메일도 쓰지 않았고, 싸이도 안했으며, 그 어느 곳에도 터를 만들지 않았다. 절대 찾을 수 없다. 집도 이사갔다.
시간이 많이 흘러 제대했고, 졸업했으며, 돈벌이에 나섰다. 그리고 한 사람을 다시 만났다. 함께 면접을 봤고, 함께 교육을 받았고, 함께 일했다. 함께 밥을 먹었으며, 함께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며 손을 잡았고, 우린 사귀자는 말 없이 사귀었다. 서로 열정적으로. 시간이 흘렀고 난 다른 곳에 갔고 만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난 바빴고 이것저것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며, 그녀를 만나는 동안에도 다른 생각이 항상 머리 속을 채우고 있었다. 잠깐 헤어졌고, 다시 만났으며, 또다시 헤어졌다.
"헤어지자"
내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순간 냉정히 돌아서버린 내 모습에 적잖이 충격받은 듯 했고, 실망한 듯 했으며, 배신감을 느낀 듯 했다. 당연했다. 정말 한순간이었으니까. 나도 놀랐을 정도로. 나도 이유를 모를 정도로. 다만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현존하는 나의 마음, 실존하는 나의 마음은 이미 멀어졌다는 것이었으니깐. 난 그것만 믿고 돌아섰다.
욕도 많이 먹었다. 난 침묵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므로.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들었다. 이번에도 침묵했다. 내 마음은 이미 돌아섰으므로.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사랑한 적도 처음이었고, 짧은 시간 동안 여러곳을 돌아다니고, 서로의 주변 사람들을 소개받고 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녀 때문에 밤을 샌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던 것도 처음이었다. 이전의 사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본래 이런 주제로 글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연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처음에 내가 쓰려던 것은 가상공간에서의 집짓기였는데...
첫번째 그녀가 헤어짐의 이유로 든 말.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 를 나는 아직 모른다. 좋아함이 깊어지면 사랑하는거 아냐? 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두번째 그녀와 헤어지게 된 원인. 그것은 어쩌면 나의 현실도피였는지도 모른다. 주어진 현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사랑을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그러나 헤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미안하다. 처음의 그녀 YS에게도, 나로 인해 상처받은 그녀 MA에게도. 난 부족하고 미숙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