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87년 6월 민주 항쟁. 내겐 아무런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1학년, 신문이나 뉴스도 안 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에 대해 내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기억엔 없지만 경찰이었던 아버지는 당시 무척 바빴으리라 생각한다.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경찰 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들은 바 없다. 가끔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오며 경찰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대답이 나올까 두려워 묻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가 그를 미워하게 될까봐. 다행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현장을 뛰는 쪽에 소속되지는 않았다는 것.  

  8살,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집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십여분 거리의 골목이 전부였다. 8시면 냉큼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전날 시간표대로 싸두었던 책가방을 들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며 집을 나섰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방과 후엔 친구의 책가방 뒤를 붙잡고 기차놀이하며 집으로 왔다. 방 안에서 숙제를 하고, 레고를 가지고 놀다, 아버지가 빌려온 비디오를 보다 잠드는 게 전부였다. 내게 87년 6월은 그냥 긴팔 옷에서 반팔 옷으로 갈아입는, 조금 더워지는 시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후에도 한참 동안 나는 87년 6월에 관심이 없었다. 그건 그 누구도 내게 그 일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대학에 오고 나서도 87년 6월은 얼핏 들은 것도 같지만,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게 87년 6월이었는지, 80년 5월이었는지, 60년 4월이었는지 알 수 없는 무참히 피터진 시민, 경찰이 곤봉으로 내려찍고 짓밟는 사진 몇 장을 정말, 얼핏, 본 것이 전부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배웠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시 역사 교과서에는 87년 6월을 싣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은 그나마 암기의 대상으로서 87년 6월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87년 6월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나 알게 된 '숨겨진 진실'이다.

  흔히 대학에서 '교양'이라 하여 선배들이 후배들을 강제로 데려다 앉혀놓고 가르치던 때도 아니었고, 운동권이 서서히 대학에서 사라지고 노는 동아리들이 많아지던 때, 딱 주식 동아리나 재테크 동아리 등이 생기기 바로 전에 학교를 다녔다. 시위나 집회는 당연히 나간 경험이 없고, 오히려 보도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노점상을 보고 왜 이렇게 길을 다 막아놓은거야, 불평불만을 하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재수없는 녀석이었다. 불과 십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더이상 노점상을 걸어다니기 불편하게 만드는, 치워야 할 것으로 생각지 않고, 철거민을 불법 폭력 집단으로 보지도 않으며, 머리에 빨간 띠 두르고 집단적으로 구호를 외치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거부감을 갖지도 않는다.      

  87년에 그랬듯이 여전히 국가에게 철거민은 국민이 아닌 불법 폭력 분자이고, 사회 구조로 인해 비관 자살하는 이들은 그냥 우울증에 걸린 좀 안쓰러운 시민일 뿐이다. 퇴근길 촛불 한 자루 들고 시청 광장에 모인 이들은 할일 없는 촛불 좀비들이고, 대규모 상경해 가투를 벌이겠다는 화물 연대 노동자들은 그냥 큰 트럭을 가지고 거리를 막고 나라 경제 파탄내는 주범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국민이 아니다. 국가는 그렇게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이들,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 시위와 집회에 참가하는 이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고, 비국민을 싹쓸이의 대상으로 치부한다. 이 모든 것에 화가 난다. 불과 1년 사이 우리 사회의 온도는 끓는 점을 향해 가고 있다. 
 
  한숨에 읽어나갔다. 최규석의 6월 항쟁 본편을 읽으며 몸이 뜨거워졌다. 본편도 본편이지만, 이 만화책이 지금 사람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본편이 아닌 부록에 있다. "그래서 어쩌자고?" 시민교육센터 강사로 활동 중인 이한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교육안'을 만화로 그린 이 부록은, 청소년뿐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시민들이 봐야 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떤지 알고, 이 현실을 바꿔나가기 위해 공부할 것을 권장한다. 이한과 최규석의 말마따나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99도씨. 지금 우리의 마음은 99도씨다.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는다. 이 만화 속의 누군가의 말처럼, 그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금만, 조그만 더 가열하면 우리 가슴은 100도씨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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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6-23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당시엔 파출소도 습격하고 했습니다. 그래야 병력이 분산되니까요. 파출소 앞마다 철망을 가득 가렸고, 그래도 툭하면 불타곤 했지요.

마늘빵 2009-06-23 10:31   좋아요 0 | URL
촛불 집회 게릴라전과 비슷하네요. 경찰들 분산시키려고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머큐리 2009-06-23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수없는 녀석이 이렇게 멋지게 변할 수도 있군요...명박이한테 감사해야 하나?...ㅎㅎ

마늘빵 2009-06-23 10:30   좋아요 0 | URL
깜짝이야! ^^a

2009-06-23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3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6-2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진지하고 충실한 리뷰에요, 아프락사스님. 추천 하나 더해 화제의 서재글로 보냅니다.

마늘빵 2009-06-24 20:52   좋아요 0 | URL
아 부끄럽게... 리뷰를 띄엄띄엄 써서...

무해한모리군 2009-06-2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올리신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렇죠 우리 또래에겐 머리론 알아도 마음으로 느끼기 쉽지 않은 사건이지요.
작가도 그랬기에, 촌스러울 정도로 정공법으로 이 만화를 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나저나 99도가 아니라 80도쯤 되는듯해 큰일 입니다 --;;

마늘빵 2009-06-24 20:53   좋아요 0 | URL
네, 마음으로도 잘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도 잘 알지도 못해요. 최규석은 그래도 이 만화를 그리면서 공부라도 했겠지만, 저는 이제 공부를 해야죠.

rumie0201 2010-06-09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어쩌다 들르게 됐는데 진지한 글 반갑네요.
우리세대는 87년 한복판에 섰던 세대들이고,
살면서 잊지 않으려 애쓰며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
아직도 그렇게 살아?란 동기의 말을 들을때 가슴이 싸해지지만,
그래도 뜨겁게 자기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그들이 있기에 세상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100도라....그 뜨거운 삶의 열정을 다시 지피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