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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 창의적인 삶으로 나아간 천재들의 비밀
월터 아이작슨 지음, 정영목.신지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엔 10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진법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http://me2.do/GGJMcEYz 에서>
어린 시절 저는 서유기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얼마나 서유기를 좋아했던지 한 권짜리 요약본에서 어른들이 읽는 열 권이 넘는 전집까지 모조리 독파했습니다. 서유기에 대한 애정은 다른 중국 문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당시 삼국지와 수호지는 저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서유기보다 삼국지 조자룡의 충정과 간웅인 조조의 처세를 놓고 저울질 하기에 바빴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친구를 파악할 때 서유기파 VS. 삼국지파로 나누어 구별하곤 했습니다. 이런 경향은 제가 취향이 변하면서 셜록 홈즈 VS. 아르센 뤼팽이 되었다가 또다시 슈퍼맨 vs. 배트맨으로 옮겨가곤 했습니다. 배움을 더하고 경험이 쌓이면서 저는 이런 방식이 명확한 사고의 장점만큼이나 강렬하게 배타적인 독선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보다 다원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고 관점으로서 이분법이 흑백논리라는 결함으로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반면, 수학적 이분법인 이진법(binary notation, 二進法)은 컴퓨터의 바탕이 되어 디지털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이진법을 통해 아날로그 방식은 디지털로 바뀌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전자식 진공관, 트랜지스터, 반도체를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다양한 문제에 대응하는 범용성은 역시 이진법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래밍을 통해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뛰어난 천재의 능력덕분일까요? 사회적 발전에 따른 당연한 발전 과정일까요? 국내에서만 70만 부가 넘게 팔린 『스티브 잡스』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의 신간 『이노베이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용감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23년간 『타임』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전기 전문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저자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디지털 역사 탐험에 나서보겠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전기 중 하나로 기록된 『스티브 잡스』를 쓴 월터 아이작슨의 신작 『이노베이터』는 디지털 혁명을 선도한 창의적인 천재들의 이야기이다. 비전 있는 아이디어를 실현 가능한 현실로 바꾼 그들만의 재능은 무엇인가? 왜 어떤 이는 성공한 반면, 또 다른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마치 대하드라마 같은 그의 역작은 무려 1840년대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를 개척한 디지털 선지자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중략) 구글의 래리 페이지 등 현대 디지털 혁명 주역들의 대단히 흥미로운 성격을 탐구한다.
-책 뒤표지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이진법과 마찬가지로)두 가지 있습니다. 거시사가 전쟁, 혁명, 왕조의 교체, 경제체제의 변화, 사회세력의 대두 같은 사회 구조를 다룬다면, 미시사는 개인 또는 소수집단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인물은 거시사에서 다루는 '위인'들이 아니라 하층민, 농민, 여성 등 그 동안 주목 받지 못했던 비주류를 칭합니다. 저자 월터 아이작슨은 개인의 능력이냐 문화적 흐름이냐는 선택 앞에서 제 3의 관점을 취합니다. 작가는 "다양한 개인적 힘과 문화적 힘이 모두 자기 역할을 하기 때문에"(p.6에서) 이 둘을 엮어내는 '협업'을 강조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혁신이 대개 선지자와 엔지니어의 협업이 포함된 집단적 노력이고, 창조성은 많은 출처에서 나온다는 것"(p.127에서)입니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작가는 차분 기관을 발명한 찰스 배비지와 그의 논문에 더욱 독창적이며 본문의 두 배가 넘는 주석을 단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반도체, 비디오 게임, 인터넷 등의 발전이 천재들의 발상과 엔지니어들의 구현, 동시대와 세대간 다양한 협조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와 수많은 관련 인물을 담고 있기에 748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그래서인지 주석은 있지만 아쉽게도 색인이 없습니다.)은 넘치기보다는 적당하거나 부족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개인용 컴퓨터(p.373~442)'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자는 1970년대 히피 문화에 젖어있던 관련 인물들의 삶을 시시콜콜하게 묘사했기에 읽는 내내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반면에 소소한 재미를 주는 부분 또한 많았습니다. 초창기 컴퓨터 작업시에는 (단단한) 하드웨어는 남성의 일로 (부드러운) 소프트웨어는 여성의 일로 간주해서 덕분에 많은 여성들이 프로그래밍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나 지금은 첨단 산업의 메카인 실리콘 밸리가 원래는 살구 과수원이었다는 사실, 전형적인 모범생처럼 보이는 빌 게이츠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과속을 자주 해서 구속까지 되었다는 점, 덕분에 경찰서에서 찍힌 그의 사진에 열광하는 팬들도 생겼다는 가십 또한 놓칠 수 없는 흥밋거리입니다. 특히 주목해야 점은 스티브 잡스가 강박적으로 추구했던 직관적 인터페이스나 사업적 기질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가 처음 일했던 게임회사 아타리에서 얻은 값진 교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게이츠의 무계획적인 하버드 생활은 2학년이 절반 정도 지난 1974년 12월, 앨런이 게이츠의 기숙사 방이 있는 커리어 하우스로 《파퓰러 일렉트로닉스》를 사가지고 온 순간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표지에는 알테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것 봐. 우리 빼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 앨런의 안타까운 외침과 함께 게이츠는 행동을 개시한다.
-p.470에서
저자 월터 아이작슨이 '천재'와 '그들의 협업'을 강조하고 있다면, 제가 주목한 것은 그들이 성장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었습니다.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고, 소통과 협업 또한 (적어도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쉽게 이루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경제적 격차 또한 많이 좁혀졌고, 교육 수준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혁신은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혁신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혁신의 뒤를 따르기 바쁩니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혁신이라는 말로 포장한 표절입니다. 어디선가 본듯한 제품,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서로 자기는 다르다고 우기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답을 쉽게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주입식 교육, 권위주의적 문화, 제도적 규제....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부분입니다. 저 또한 한 때는 그런 것들이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점들이 우리만의 단점일까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해답은 점점 저에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해답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기술은 이진법을 기초로 디지털 방식으로 발전해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아웃라이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와 공동체, 기회, 유산의 산물이다. 그들의 성공은 예외적인 것도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그들의 성공은 물려받거나, 자신들이 성취했거나 혹은 순전히 운이 좋아 손에 넣게 된 장점 및 유산의 거미줄 위에 놓여 있다."라고 말입니다. 혁신의 방정식은 결국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혁신은 영웅이나 위인의 탄생이라는 불확실한 확률과 통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우리에게도 김연아양이 있고, 박지성 선수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혁신이라는 파랑새를 좇기보다는 현실의 기본기에 더욱 충실해야 때입니다. 불현듯 날아온 혁신의 씨앗에게도 마음껏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