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과 경제학
아마티아 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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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경제학의 시조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은 사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애초에 경제학은 가정경제학이었고, 정치경제학이었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 경제학의 역사적 진화 과정에서 경제학과 윤리학은 서로를 타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양자의 관계는 단순한 불신의 상태를 넘어 상호부정의 단계에 이르렀다. 근대의 산물인 이러한 거리두기가 두 학문분과 모두에게 이론적 엄밀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논리적 체계화로부터 언제나 미끄러지는 현실세계 역시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2) 센에 따르면 ‘합리성’, 다시 말해 ‘자기이익의 (이기적) 극대화’라는 경제학의 편협한 가정은 행위(동기)와 시장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복잡한 태도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세상에는 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 같은 이들의 몫이 있게 마련이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유형의 인간들이 우리 교과서를 채우더라도, 세상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는 효율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로 군림하게 된 ‘파레토 효율성’을 비판하면서(단적으로 말해, 극도의 빈곤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상태라도 빈곤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호사를 줄이지 않고는 유복해질 수 없다면, 이 기준에 따를 때 그것은 ‘파레토 최적상태’가 된다) 후생경제학 제1정리와 제2정리의 현실적인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경제학과 윤리학의 불행한 분리 때문에 현실 분석의 중요한 부분들이 가로막혔음을 센은 한탄한다.


  센은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사회적 문제이고 윤리적 성찰의 영향을 받는 만큼, (후생)경제학이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윤리학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보다 풍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에서 참여자들은 상호의존성을 인식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목표를 고려하기 때문에 (비반복 게임에서도) 협조적 행위를 전략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기적 행위로부터의 이와 같은 이탈을 경제분석에 체계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면 더 정확한 현실분석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불평등의 재검토』에서처럼 센은 복지(후생)가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며, 효용만으로 복지가 적절하게 표현될 수도 없다는 점을 근거로 ‘복지 측면’과 ‘행위능력(자유) 측면’을 구별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시각을 취하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다양한 목표들 뿐 아니라 그러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복수로 존재한다. 경제적 분석에 관련된 요인과 변수들은 확대되고 다양화되어야 한다.



3) 일원론적 틀에 집착할 때 이론은 편협해지고 배타적으로 된다. 다원성 그 자체는 물론 복잡하고 모호하다. 그것이 하나의 장애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저, 망설임,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갈등과 난관은 경제학의 대상인 인간 행위가 직면하는 장벽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딜레마는 경제학과 무관할 수 없다. 딜레마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딜레마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평가하고 예측하는 길이다. 경제학에 다양한 차원을 도입해 윤리학과 결합하려는 시도는 결국 현실과 인간 행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움켜쥐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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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재검토
아마티아 센 지음, 이상호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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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Amartya Sen의 대표작,

『Inequality reexamined』의 번역본.


1) 평등에 대한 올바른 질문 방식은 ‘왜 평등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이다. 인간의 다양성에 따라 평등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불평등에 대한 판단과 측정은 비교되는 중심변수(공간)의 선택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한 변수의 평등이 다른 변수와 관련해서는 심각한 불평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균등한 기회는 아주 불균등한 소득을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이론들은 어떤 의미에서 ‘평등주의’이다. 이론들의 기본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더 중요성을 부여하는 특정 영역(공간)에 대한 평등을 요구하는 대가로 다른 부차적인 영역(공간)에서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反평등주의’로 알려지고 저자 자신들조차 그렇게 표현하는 이론들도 다른 기준에서 보면 평등주의가 된다. 예컨대 재화의 분배 상태를 문제 삼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효용 극대화)’만을 지상목표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고전적 공리주의는 기실 목적함수에서 모든 사람의 효용에 ‘평등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이론이다. 이렇게 어떤 변수에 대한 평등의 거부 이면에 모종의(다른 변수에 대한 어느 정도 적절하고 실질적인 수준의) 평등주의를 내포하지 않고서는 (표준)이론으로서 지지받는 데 필요한 객관성, 신뢰성 내지 사회적 개연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지만, 따라서 모든 평등론은 ‘불평등 옹호론’이기도 하다. ‘기본’으로 여겨지는 것의 평등이 하찮은 ‘주변부’의 불평등을 논리적으로 옹호할 뿐 아니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론이 설득력을 갖추는 기본적인 전략에 속한다.


  따라서 평등에 대한 논쟁을 평등‘옹호’론 대 ‘반대’론의 구도로 파악한다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어떤 평등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결코 평등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평등 그 자체는 독자적으로 어떤 실질적 내용도 갖추지 못한 공허한 개념일 수 있다. 우리는 불평등을 검토해야 한다.


  이는 결국 ‘자유와 평등의 관계’ 논제와 다르지 않은데,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을 대당항으로 놓는 것은 ‘범주상의 오류’이다. 자유는 평등의 가능한 적용분야에 속하고 평등은 자유의 가능한 분배유형에 속한다. 센의 이러한 언설에서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처벌하는 조건들의 예는 역사상 없었고,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자유를 제한하지 않기 위해 평등이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외연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것이기에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 역시 필연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제한된 평등은 더 많은 자유로 피어나지 않으며, 억압된 자유가 더 많은 평등으로 분배되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불평등을 재검토해야 한다.



2) “이제 정치철학자들은 롤즈의 이론틀 내부에서 연구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Robert Nozick(동의 여부를 떠나서 Nozick의 자유지상주의는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하나의 유력한 비판론이다)의 말처럼 롤즈의 관점은 우리가 정의나 평등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의 이론은 오로지 결과와 성취의 불평등에만 머물렀던 우리의 관심 방향을 기회와 수단-자유(롤즈에 있어서는 특히 ‘기초재’)-의 불평등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센에 따르면 이는 부족할 뿐 아니라(평등성취의 수단으로서 자유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해주었지만) 적절한 관점이 될 수 없다. 자원이나 기초재를 평등하게 보유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실제로 누리는 실질적 자유의 평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수준의 자원과 기초재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목표하는 바의 자유(성취)로 전환시키는 ‘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소득, 부, 자유와 같은 기초재를 많이 갖고서도 노령, 장애, 질병으로 인해 실제로 향유하는 능력이 제한받을 수 있다. 따라서 평등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선택하고 누리는 자유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고, 이런 현실적인 자유는 바로 개인들이 다양하고 대안적인 기능조합들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요컨대, 불평등의 문제는 평등하지 못한 ‘자유’의 문제이다!



3) 불평등을 취급하는 후생경제학 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지금껏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정확히 비슷한 존재로 취급했다. 사회후생을 개인효용의 총합으로 측정했으며 개인효용은 ‘소득’의 함수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주어진 총소득을 균등하게 분배하면 사회후생이 틀림없이 극대화된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불평등에 대한 관점을 제한한다. 이는 개인의 소득을 복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개인별로 실질적인 (능력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으며 나아가 좋은 사회의 구성요소이자 사회후생을 결정짓는 한 가지 요인인 ‘자유’의 중요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불평등의 한 표징인 ‘빈곤’을 정의함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관점은 소득공간에만 의탁했고, 그것은 손쉽게 ‘저소득’과 등치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빈곤은 개인별 특성과 무관한 소득결핍의 문제가 아나라, 어떤 최소 수용수준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기본‘능력’의 ‘부적합성’-불충분성을 포함한-으로 봄이 타당하다.


  소득크기만을 기준으로 평가할 경우 부유한 사회에서 굶주림이 지속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나라의 중산층보다 소득이 높지만 전자는 굶주리는 반면 후자는 특별히 굶주림 때문에 고통 받지는 않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번창한 도시인 뉴욕의 할렘가 거주 남성들은 방글라데시의 남성들보다 40세가 넘게 살 확률이 낮다. 그것은 물가 탓에 부유한 나라의 화폐로는 더 적은 상품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식량이 상대적으로 싼 품목이 아니기도 하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옷을 차려입고 전화를 사용하는 등)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원 분배의 왜곡이 건강 등 최소의 생존에 이용 가능한 금융수단을 고갈시키기도 한다.


  요컨대 빈곤문제에 있어서도 소득에 대한 정보를 넘어 사회적 상황과 특성의 다양성으로 나아가야 하며, 소득과 다른 자원들을 복지로 전환시키는 다양한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른 공간에 주목함으로서 우리는 정확한 빈곤구제책도 도출할 수 있다. Kerala 주(州)는 인도에서도 1인당 실질소득이 낮은 편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장기 평균 수명은 가장 높고, 유아사망률은 인도 평균보다 훨씬 낮으며, 그밖에 문자해독율과 여성권 등 수많은 핵심 기능에서 다른 주보다 훨씬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의 관심을 국민소득과 소득분배 향상을 넘어 폭넓은 개발 노력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를테면, ‘건강상태’를 측정함에 있어서 공중위생이나 의료시설, 이웃 등 공동체 생활, 사회적 호혜평등, 자연환경과의 지속가능한 상호작용, 문화 인프라 등을 도외시한 채 ‘수명’의 척도로만 환원해볼 수는 없지 않은가.



4) 아마르티야 센은 개념을 워낙에 꼼꼼하고 엄밀하게 구사하는데, 번역의 과정에서 의미전달력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책을 읽는 내내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 할 책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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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존 파이어 레임디어.리처드 얼도즈 지음, 정도윤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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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고방식대로 하면 인디언들의 상징은 둥근 원이야. 자연은 사물이 둥글기를 원하거든. 사람이나 짐승 몸에는 모서리가 없어. 우리에게 원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 담뱃대가 손에서 손으로 넘겨지는 동안 평화로 연결되는 친척과 친구들의 연대를 뜻하지. 각각의 티피가 나름의 자리에 앉은 캠프 형태도 둥글었어. 티피 자체도 사람들이 둘러앉게 되어 있는 둥근 모양이어서, 마을의 모든 가족들이 더 큰 원 안에서 원을 그리지. 그리고 그건 하나의 나라를 나타내는 수우족의 일곱 ‘모닥불 모임’(부족)이라는 그보다 더 큰 원의 일부였고, 그리고 한 나라는, 둥근 지구와 둥근 태양과 둥근 별들로 이루어진 그 자체로 둥글게 순환하는 우주의 일부일 뿐이고 말일세. 달과 지평선과 무지개도 시작도 끝도 없는 원 안의 원들이지.


이건 우리에게 아름다움인 동시에 타당함이고 상징인 동시에 현실이라네. 생명과 자연의 조화를 표현하는 거지. 우리의 원은 영원한 흐름을 뜻한다네. 이건 죽음에서 새로운 삶이 솟아나고, 생명이 죽음을 이기고 나온다는 뜻이지.


백인의 상징은 네모야. 백인들의 집도 그렇고, 사람들을 서로 떼어놓는 벽이 있는 사무실 건물들도 그래. 낯선 사람들을 들이지 않는 문도, 달러도, 감옥도 모두 네모야. 가전제품들, 텔레비전 세트와 라디오와 세탁기와 컴퓨터와 자동차들도 모두 상자, 상자, 또 상자들이지. 이것들에는 모서리와 예리한 날이 있지. 정시(定時)라든가 약속시간에 딱 맞추기, 타임워치와 러시아워, 이런 게 내가 말하는 모서리야. 자네들은 이런 상자들에 갇힌 죄수가 되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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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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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표현할 수 없다. 어떤 표정의일그러짐도, 어떤 아비규환도, 어떤 호소도, 어떤 눈물도, 어떤 미친듯한웃음도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고통의 이런 불가능한 영역, 즉 감각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펼쳐져 있는 고통, 그것이 바로 `게르니카`의 고요함이다(사까자끼 오쯔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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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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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 맞닥뜨리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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