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사 - 상 - 고대와 중세 서양 철학사 - 상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 이문출판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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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은 `체계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비록 저의 공부가 하찮기 짝이 없는 수준이지만 부족한 깜냥으로 보아도 공부를 튼튼히 쌓아나가려면 지성사의 씨줄과 날줄을 촘촘하게 잘 엮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 안에 나름의 체계를 정립해 주소 정리를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결국 공부란 어제 공부와 오늘 공부의 연쇄를 통해 야무지게 뼈대를 세우고, 비어 있는 고리가 어디인지를 발견해 보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차로 살을 붙여나가는 과정의 반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는 까닭은 내가 이전에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를 알기 위함이고(공부하지 않고서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진리인식의 기초는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사`는 그러한 골조공사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사 공부는 `대뇌 전두엽`에 근육을 잡고 시냅스를 유연하게 스트레칭해 학문의 기초체력을 기르는 공부입니다. 정신의 성장사이자 자기발견, 자기반성 과정인 철학사를 음미함으로써 우리는, 개인적 시공간 제약을 무너뜨리고, 이런저런 주관적인 전제와 아집을 벗어나, 영원한 상 아래에 있는 참된 세계에로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의해서만 역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는 평생에 걸쳐 해야 하는 것으로서,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다 싶으면 더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게 되기 쉬운데 이는 공부의 균형을 허무는 일...이라고 합니다. 안 살아봐서 모르겠습니다^^;;;

힐쉬베르거가 전 생애를 바쳐 썼다는(그는 교수자격을 얻기 위해 쓴 책을 제외하고는 이 책 외에 다른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서양 철학사`는 강유원 님께서 대학시절에 반년 동안인가 하루 18시간씩 50회독했다고 해서, 심지어 필사까지 했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책인데요, 이제 겨우 (상)권을 읽은 것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과연 좋은 책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용이 매우 튼실합니다. 번역도 좋습니다(1992년 제3회 서우 철학상 번역 부문 수상). `헐, 내가 이걸 다 읽긴 읽었구나.` 싶어 기분도 좋습니다. 단, (물론 50번 반복하는 동안에도 매번 새로움이 느껴질 만큼 좋은 책일 것임이 분명하고, 그런 우직한 반복이 도움은 되겠으나,) 강유원 님처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합니다. 20대에야 몇 개월쯤 버리는 셈치고 그렇게 해볼 수도 있겠는데, 그런 반복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커보입니다ㅠ 어찌되었든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와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저자는 크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두 축 삼아 철학사를 기술해나가고 있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플라톤과 대립시키기보다는 되도록 플라톤의 연장선상에 두려는 입장입니다[˝플라톤의 눈을 가지고 세계를 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준 최초의 그리스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예거).˝]. 철학에는 시간을 벗어난 무언가가 있고, 철학의 문제가 완전히 낡아버리는 일은 없는 만큼, 고대와 중세의 철학을 이만큼 꼼꼼하게 공부하고 나면 시나브로 아랫배가 든든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한 화이트헤드의 말도 유명하거니와, ˝그리스 철학에서 세계관적인 사고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빠짐없이 다 논의되었고, 오늘날까지 문제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다 발견되었으며, 또 오늘날의 우리들이 아직도 따라가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길이 다 제시되었다(호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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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미학 동문선 문예신서 358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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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에도 불꽃은 떨리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빛이 떨릴 때에는 모든 것이 떨린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흐르고 시간은 출렁거린다.
푸른색 뿌리로부터 어떤 피안을 향해 끄집어 올려진 한 송이 장미꽃
그 수직의 메아리가 저녁의 어둠과 나지막이 상의하는 동안 존재와 비존재는 끊임없이 공존한다.
수동과 능동, 태워지는 것과 태우는 것, 과거분사와 현재분사 사이의 변증법.
불꽃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다리이다.

밤에 켜놓은 작은 촛불과 꿈꾸는 영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모두에게 시간은 느리다. 꿈 속에서는 희미한 빛 속에서와 꼭 같은 인내가 견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간은 심화된다. 이미지와 추억이 뒤섞인다. 불꽃의 몽상가는 자신이 보는 것과 본 것을 결합한다. 상상력과 기억을 융합한다.
불꽃은 위를 향해 흘러가는 모래시계이다. 불꽃이 주는 꿈과 몽상은 아득한 과거에 뿌리박고 있고, 높은 곳에서 불꽃은 자신의 옷을 벗어던진다.

불꽃은 빈 독방을 밝히는 게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밝힌다.
세계라는 책을.
불꽃 앞에서 밤샘을 하는 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흰 페이지의 별이 비추는 서늘한 이마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우주까지 손쉽게 이동한다.

˝꺼진다˝, 이 낱말은 얼마나 대단한 울림을 주는가. 꺼진다는 동사의 가장 큰 주어는 무엇일까? 생명인가 촛불인가?
불꽃은 살아 있다. 연약하면서도 꿋꿋한 생명이다. 바람이 한번만 불어도 방해받지만 이내 다시 일어선다. 어떤 상승력이 그것의 위신을 회복시켜준다. 불꽃은 끊임없이 자신을 재점화시켜야 하고 불순물과 싸우면서-그래서 악은 선의 양식(糧食)이다- 빛에 대한 자신의 지휘를 유지해야 한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불꽃 안에서 삶과 죽음은 곧잘 병치된다.
하지만 불꽃은 자기자신을 넘어 뛰어오른다. 의식과 불꽃은 동일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잘 태울수록 높이 타오르고, 잘 태울수록 높이 날아오른다. 뾰족한 끝으로 심지 전체를 빨아들이는 순수한 빛이 고독한 몽상가의 깜빡거리는 심장을 일으켜 세운다.

촛불은 홀로 탄다. 자신을 갱생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태운다.
우리의 내부에는 흔들거리는 불빛만을 받아들이는 어두운 구석들이 있다. 예민한 마음은 깨지기 쉬운 가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것은 투쟁하는 가치들, 그러니까 어둠에 대항하는 약한 불빛들과 교감한다.
촛불의 불꽃은 가치와 반가치가 서로 싸우는 폐쇄된 전투장이다. 불꽃은 자신에게 자양을 주는 조잡하고 부정한 것들을 일소하고 파괴해야 한다. 자신을 정화해야 하고, 자신을 소멸시켜야 한다.
모든 작은 고통은 세상의 고통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불꽃이 괴롭게 신음하며 자신의 외피를 찢어버리는 동안 눈물의 홈을 따라 눈물, 숨겨진 눈물이 흐른다.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책과 촛불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을 비추는 두 개의 빛이다.
그리하여 밤 독서란,
하늘의 색깔을 띤 채 실존의 책상에 앉아 드리는 완만한 철야기도.


덧. 『촛불의 불꽃 La flamme d`une chandelle』은 바슐라르가 살아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저작으로, 푸코의 말대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품입니다. 바슐라르 철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지훈, 『예술과 연금술 :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창비)이 매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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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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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징아는 (자신이 책으로도 쓴 적이 있는 『에라스무스』만큼이나) 우울증에 시달렸다지만, 놀이하듯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독서야말로 가장 신성한 놀이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단, 저자 스스로가 서문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한 마지막 저작, 『호모 루덴스』에 이르기까지도 놀이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충분히 심화, 체계화시키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구사된 용어들에 대하여 자세한 참고문헌을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문화의 일반적 문제들을 다루다 보니 그 방면의 전문가조차도 아직 충분히 탐구하지 못한 여러 분야를 약탈자처럼 침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약탈로 인한 지식의 부족분을 모두 채워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당장 글을 써 나가느냐, 아니면 그만 두느냐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놀이는 곧 승복입니다. 놀이 정신을 잃고 승부에만 집착할 때 사회는 야만으로 타락하고 원시 사회의 폭력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됩니다.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라 게임(인용자 주 : 게임의 과정 자체)˝입니다(네덜란드 속담). 놀이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고, 놀이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연성과 유머의 결핍이야말로 지독히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의 대립관계를 초월하는 `무사무욕(無私無慾)`한 것입니다. 그것은 `일상적` 생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는 생활인 논리의 바깥에 있습니다. 놀이는 일상 속의 `인터메조(Intermezzo, 간주곡)`로서 놀이가 주는 긴장 이완은 개인과 사회의 필수품입니다.

놀이는 질서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질서가 됩니다. 놀이는 질서로서 리듬과 하모니를 갖습니다. 게임의 규칙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놀이의 본질은 규칙을 지키는 것, 즉 페어플레이이기도 합니다. 페어플레이는 놀이의 관점에서 표현된 `신의성실의 원칙`으로서,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아의 제약과 통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자신의 이기적 경향을 더 높은 궁극적 목표와 혼동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인 일정한 한계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해 `놀이되는` 것이고, 속이거나 놀이정신을 망치는 행위는 문명 자체를 동요시킵니다. 한계를 인식하고 절제하는 자발적인 놀이정신이 우리를 진정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하위징아는 법률, 과학, 시, 신화, 철학, 예술 등의 성취가 어떻게 놀이본능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는가를 폭넓게 예증하고 있는데, 저자는 전쟁 역시 `게임`, 즉 놀이의 관점으로 봅니다. (놀이정신에 충실해)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하며 일정한 제약 사항들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전쟁은 문명의 영역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전쟁관으로부터 기사도 정신이 나오고, 나아가 국제법의 아이디어가 탄생합니다. 국제법은 놀이와 마찬가지로 상호 인정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놀이와 법률의 상관성에 대해서도 하위징아는 길게 서술하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소송은 경기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지요.

한 가지 덧붙여, 어원적 기원을 탐구해 들어가 문화사적 의의를 끄집어 내는 저자의 역량이 인상 깊었습니다. 하위징아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에 두각을 드러내다가 산스크리트어 전문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이 있는데, `school(학교)`이라는 단어는 원래 `여가`라는 의미의 `σχολή(skole)`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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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130] 모짜르트 - 클라리넷 5중주곡 가장조 K.581
한국악보연구회 / 태림출판사 / 198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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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Stadler Quintet`. 클라리넷 참 매력적인 악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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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재발견 - 한국 자본주의와 기업이 빠진 조직의 덫, 개정판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2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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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의 개정판으로, 강력히 추천해드립니다. 재미도 있고, 이 분은 어떻게 이렇게 독창적인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을까 감탄스러울 정도로 저자의 통찰이 신선합니다. 경영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나 지금 회사에 다니고 계시는 분들, 정부조직에서 일하시는 분들께는 특히 더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저자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발전 단계라는 틀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 징후를 두 가지로 짚어냅니다. 먼저, 신생 업체의 시장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창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큰 기술적 변화는 `기업의 탄생`과 맞물려 있는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답시고 규제를 다 풀어놓고 나니 신규 업체의 시장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져 역설적으로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는 속도는 줄어들었습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선두 3~4개 업체에 의해 독과점되어 버린 상황에서 기업가정신, 창업의 문화가 먼 나라의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꿔 말해, 기업 생태계에서 생성-성장-사망의 정상적인 사이클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기업하기 좋은`이라는 말이 `기업 만들기 좋은`이라는 말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 인력과 자본이 생산 부문이 아니라 금융(및 서비스) 부문 내지는 지하경제 부문으로 급속하게 흡수되고 있습니다. 지하경제야 앞으로 `활성화`시키시겠다고 하니 일단 접어두고, 어떤 선진국도 산업활동을 이렇게 전격적으로 포기하고 금융 부문만 기계적으로 특화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생산비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임금이 높은 나라에 있는 대규모 공장들이 다 외국으로 이전할 것 같지만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스위스 같은 곳의 대도시에도 수천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규모 제조업 공장들이 여전히 가동되고 있습니다. `내포적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국민소득이 적어도 3만 달러에 이를 때까지는 각 산업 부문은 충분히 중요한 기능을 다 할 수 있고(그래야 경제의 잠재적 능력을 최대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국민경제의 기반이 작동해야 금융과 서비스업도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경제는 실물 경제를 포기하면서 금융화, 또 그 반면으로서의 비정규직화(에티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만 가속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위험한 자본주의`의 입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조직론적 관점에서 기업의 위기, 즉 포스트 포디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조직 모델을 찾지 못한 데서 오는 위기로 진단합니다.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조직은 가족(세습형 소유구조)을 원형으로 하고 여기에 군대식 직제를 결합시킨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구조가 대기업이라는 틀을 통해 전 사회적으로 확산, 하다못해 학교재단이나 교회까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진화했습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병영과 비슷하게 된 셈입니다(세계은행은 한국 경제의 특징을 `동원경제`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조직구조가 빠지게 되는 함정을 다양한 국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지나친 획일화를 통한 대형화로 인해 포스트 포디즘 시대 사람들의 감성에 적응하는 데 문제가 생긴 대형교회의 사례도 언급됩니다. 즉, 포디즘 시절의 고성장, 대형화를 특징으로 하는 대형교회는 중산층이 붕괴하는 상황에서-이는 역사적으로 극우파들이 등장하는 시점과도 대체로 일치하는데- 고급화하면 빈민층이 떨어져 나가고, 기존의 중산층 모델을 유지하면 상층부가 떨어져 나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깨어지자 진짜로 구매력을 갖춘 하이엔드 소비자들은 그 대체재인 점집으로 갈 가능성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교회의 고급 간부들이 유명한 점집에서 마주쳤다는 식의 이야기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최근 들어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참고로, 저자에 따르면 중앙형 단일 교단인 불교는 집중형 의사결정시스템으로 도리어 시대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고, 유럽에서는 공공 심리상담소가 교회와 경쟁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키워드를 다섯 가지 제시합니다. 첫째, 조직이 구성원들에게 장기적 (고용) 안정성을 주어 숙련도와 창조잠재력을 보존해야 합니다. 캐비아를 먹을 수 있는 일부만 조직 내부에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외부화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식의 `캐비아 자본주의`는 포스트 포디즘 이후 극도로 높아진 창조능력 경쟁에서 버텨나갈 수 없습니다(창조나 혁신은 많은 경우 정규직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늘리는 조직은 장기적으로 볼 때 `숙련도` 뿐 아니라 `창조 잠재력`이라는 면에서도 불리합니다). 둘째, 지금의 경제는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리기는 커녕(그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정치경제적 구조와 사회문화적 조건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입니다), (무기력하고, 한 달에 책 한 권을 제대로 안 읽고, 대신 술집에는 일주일에 두번씩 꼬박꼬박 가면서, 마케팅에 너무나 잘 속는) `엄마표 귀공자` 한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10만 명이 비정규직, 저임금, 경제 소외로 핍박받아야 하는 `귀공자 자본주의`인바, 업무 숙련도와 거의 상관이 없는 영어점수나 출신 학교 등 획일화된 선발기준에서 탈피해 일부러라도 조직 내의 ‘다양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마초들의 `주지육림 자본주의`를 넘어 여성들과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넷째, 토호들의 ‘짝패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폭 자본주의`를 탈피해 중소기업의 창조능력을 극대화하는 협동진화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두서없이 쓰느라 책의 진가를 잘 전달하지 못했네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하고 일단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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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15-03-0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일보 모바일] [삶의 향기] 한국이 영국 꼴 나지 않으려면 -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7297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