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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와 만나다 -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한 운명의 책 비아 만나다 시리즈
마크 래리모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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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전문가), 비전문가(3)


주님에 다가선지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심자 수준인 나의 신앙심을 제고하기 위해

본 작품을 선정해 읽게 되었다.

성서 욥기는 대체적으로 위로를 주는 책, 자기 수양을 돕는 책, 혼란을 대변하는 책이라는

세인들의 평가를 가슴에 담고 또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욥에 대한, 욥기가 품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알아보자는 아주 단순 무식한 수준에서 작품에 도전했는데 결론적으로 아주

혼쭐이 난 작품이었다.

종교학 및 종교철학 공부를 3년 이상(?) 하였거나 현직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는 분 아니면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높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나와 같은 무지몽매인 종교적 문외한은 가급적 도전하지 않기를 권유합니다.

 

생뚱맞게 욥기는 누가 지었는가, 욥기는 여러 작품이 짜깁기 된 것이다. 욥은 유대인인가?

등등 성경을 단편적으로 접한 나에게 작품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런 질문은 작품을 읽는

내내 나를 시련의 연속으로 몰고가는 질문이었다.

따라서 나와 같은 종교적 깊이가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품이 던지는 심오한 질문이나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기신 저명하신 분들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여러 사항을 단문 위주로 정리하는 수준에서 해당 작품을 정리해 보았다.

그 내용도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것은 확신이 서지를 않지만 .......

 

참고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욥의 유언 필사본은 10세기 사본이며 오늘날까지도 욥의 전설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설명이 담긴 문헌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종교적 깊이가 낮은 분들은 가급적 본 작품을 외면하시기 바랍니다.

궁금하더라도 말입니다.

 

[서 론]

- ‘욥기는 분명 성서에 속한 어떤 책보다도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데 악의 문제에 관한

  성서의 답변으로 이해되곤 한다.

-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에서 무고한 이들은 언제나 고통 받는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시지만 동시에 언제나 그들은 도울 방편을 마련해 두신다고 말한다.(P 9)

- 그리스도교 장례 의식을 치를 때 성직자들은 의 연설을 인용하곤 했다

  이 인내의 한계를 규정해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P 21)

- 손쉬운 이해를 거부하는 욥기의 면모는 그 자체로 욥기를 둘러싼 신비의 일부가

  되었다.(P 24)

- ‘욥기가 제기하는 물음들, 섭리와 악, 무고한 이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 하느님의 본성,

   피조물 가운데 인간의 지위 등은 모두 손쉽게 종결될 수 없는, 종결되기를 거부하는

  물음들이다.(P 24)

- ‘욥기의 중심 대목은 널리 통용되는 지혜를 늘어놓는 의 친구들(엘리바즈, 빌닷소바르)을 

  하느님이 질책하는 부분이다.(P 25)

- ‘욥기의 전기는 수 세기 동안 등장한 욥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

   즉 자신이 이라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그와 관련된 이야기의 의미를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한 독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P 32)



[고대 해석자들이 바라본 욥기]

- ‘욥기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해석인 인내하는 욥이다.(P 36)

- 그리스도교들은 을 그리스도의 예형(type)으로 보았다. 히에로니무스는 욥기주석에서

  욥이라는 이름은 슬픔과 고통을 뜻한다고 주장. 그는 그리스도의 원형이었다’(P 39)

- 번영은 재앙을 수반한다. 절망이 희망을 수반하듯(P 48)

- ‘의 유언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P 50)

-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네 우리가 주님에게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보여 주실 때까지 인내합시다.

- ‘제임스 쿠걸이라는 유대인 성서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고대 해석자들의 작품

  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빌론 유수 이후 지신들의 경전에 새로운 해석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

   1) 성서는 근본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문헌이다. , 성서에 A라고 적혀 있을 때 흔히 실제 

     의미는 B.

   2) 성서는 당대 독자를 위한 교훈을 담고 있다. 성서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역사책이 아니다. 성서는 유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3) 성서는 모순이 없으며 실수도 없다.

   4) 성서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주셨으며 하느님은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혹은 예언자들을 

     거쳐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P 60)

- 절망에 사로잡힌 채 울부짖는 의 말, 그의 분노 어린 말들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성서 

  전체의 것,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의 것이다.(P 62)

- 그리스도교 해석자들에게 구약 성서를 해석하는 열쇠는 신약 성서였다.(P 75)

- 모세의 율법을 읽는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으며 이 너울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이 주님(예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진다.(P 75)

- 중세 그리스도교의 토대가 된 기에 관한 저작은 하나다. 바로 기원후 578년에서 595

  사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저술한 욥기의 교훈들이다.(P 77)

- ‘은 경건한 인물이지만 더 많은 의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상징이기도 하다.(P 78)

- 자신이 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영혼을 해지는 것은 없다.

-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평온함이다.(P 82)

- '고통'은 죄라는 ''을 퇴치할 때 필요한 '화학요법'이다. 문제는 하느님이 사악한 

  이들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선한 사람들을 치료

  하지 않는 것이다.(P 83)

- 어떤 행동이 그 당시에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가치 있는 예언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종종 있듯 

  어떤 상황이 역사적 차원에서는 미덕이지만 그 의미와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악인 경우가 

  자주 있다.(P 85)


 

[논쟁 속 욥기]

- 에피크로스는 물었다.

  “신은 악을 없애고자 하나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사악하다. 신은 악을 없앨 수 있으며

  악을 없애려 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악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P 92)

- ‘욥기는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묻기보다는 하느님의 본성을 묻는 책이다.(P 93)

- ‘욥기는 신성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서곡,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섭리에 관해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문헌이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과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욥기는 섭리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 참여하는

  (그리고 참여하지 않는) 방법을 보여 주는 책이다.(P 95)

- ‘욥기는 인간이 가장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철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P 96)

- ‘과 친구들의 발언은 그것이 긍정하는 내용보다는 부정하는 내용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P105)

- 악은 엄밀한 의미의 실체가 아니며 본질상 선한 모든 피조물에게 기생충처럼 붙은 결핍

  혹은 왜곡이다.(P110)

- 중요한 것은 섭리(우리는 이를 알 수 없다)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다(P115)

-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칼뱅에게 욥기가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이 피조물보다 너무나 높이 있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올바름의 규범조차 궁극적이지 않음을 욥기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컬뱅이 보기에 욥기를 읽는 실마리, ‘욥기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논쟁에서 은 

  선한 편을 고수하는 반면, 그의 적대자들은 악한 편을 고수한다는 점이다”(P121)

  "‘과 친구들이 재기하는 물음은 동일하다. 즉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

  하는가? 그에 따르면 은 우리가 고통을 겪게 될 때 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의 친구들은 다른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의 친구들처럼 응답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P122)

-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는 겸손과 침묵을 지키며 다른 이가 고통 받을 

  때는 그를 배려하고 위로한다.(P125)

- 섭리문제를 정직하게 마주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자리,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기는 하지만)하느님에게서는 멀고 인간 동료들에게는 가까운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P130)

 


[공연되는 욥기]

- 수 세기에 걸쳐 성인은 나병 환자, 음악가, 공처가, 심지어 매독 환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P135)

- 그리스도교인들은 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을 배웠다.(P139)

- ‘이야기는 참되고 확실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이야기인 것 못지않게 거짓 위안과

  감언이설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P150)

- 구원에 대한 믿음은 섭리에 대한 확신과 인내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렵고 유지하기 힘들다.

-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인내를 통해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P160)

- 짧은 생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계속 애통해하고 불평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현명한 이들은 이 세계라는 깊은 구렁텅이를 순례하는 동안 인내심을 기른다.(P163) 

- 철학자들은 이성 너머 저편에서 오는 도움이나 통찰을 받아들이기 위해 혹은 적어도 고결한 

  습관을 갖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의심을 다른 의심으로 대치하곤 했다.(P168)

 


[신정론과 욥기]

* 신정론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하나님의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는가를

  학문적으로 모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데, 왜 세상에 악이 존재 하는가? 이 세상에 모순이

  이렇게도 많은가?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것을 볼 때, 혹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은

  아니신가? 하는 회의(懷疑)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 신정론이다.

   그리스어로 을 뜻하는 테오스(theos)'와 올바름을 뜻하는 디케(dike)'를 합쳐

  신정론(theodicy)'라는 말이 나왔다.(p186)

 

-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

  설령 활동한다 해도 신이 정녕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물었다.(P182)

- 하느님은 왜 악을 용납하는가? 사람들이 악을 당연하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여기지 않게되자 

  악은 독특한 철학적 문제가 되었다.(P185)

- 칸트는 욥기를 성서, 교회 전통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채 도덕적 자율성을 지니고 신과 

  대면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보았다.(P192)

- 자신의 동기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이해의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진다.(P197)

- 참으로 고귀한 일은 고통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이다.(P197)

- 종교는 도덕 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칸트), 종교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코헨) (P198)

- 고통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처벌이다.

-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은 성서에 나오는 주장이나 성서가 그리는 사건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 너머 핵심에 있는 시적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욥기는 그 중심이 

  되었다.(P202)

- ‘욥기에 담긴 신의 선물은 욥기가 표현하고 또 빚어내는 인간의 감정이다.(P205)

- 자신의 경건함으로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하면서도, 경건함 때문에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인정했다. 바로 그 사이에서 사탄이 나왔다.(P222)

- 모든 고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여정의

  결과다.(P223)

 

 

[추방당한 욥기]

- 하느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경이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욥기 28:28)

  이 구절을 욥기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P234)

- 역사 비평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준 가장 좋은 도구를 활용해 성서를 이해하려는 선의를 담은 

  노력이라 할 수 있다.(P237)

- ‘이 보여 주는 인내는 그의 비판과 저항을 포함할 때 더욱 심오해진다.(P250)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침묵만이 궁극적으로 기억과 희망이라는 역설적 임무에 온전히

  부합하는 실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침묵이 전도서의 지혜와 같은 지혜를 보여 주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P259)

- 신앙은 답이 아니라 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이름 (EL)'은 물음을 뜻하는 말인 셰엘라(she'elah)'안에 머물고 있다.

  ‘은 자신이 차갑고 냉소적인 세계(참된 친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배웠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하느님은 외로운 인간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한다.(P260)

- 하느님과 투쟁을 할 때조차 은 하느님이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계속 요구할 뿐이다.(P265)

-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임을 알았다. 동시에 그분이 자신들을 

  박해함을 받아들일 때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P266)

- ‘은 커다란 상실 가운데 길을 찾아 헤매는 모든 현대인의 인도자다.

   기도서 이후로 은 개인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P273)

- ‘욥기는 신이 부재한 것처럼 보일 때, 세계가 윤리적으로 불합리해 보일 때, 특히 정의가 

  실추되고 의미가 부정되어 상실과 고통을 겪을 때 오히려 신의 존재를 가장 예리하게 감지

  할 수 있다는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P273)

- ‘욥기는 예언적 행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관상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는 책이기도 하다.(P281)

- ‘욥기는 삶의 한가운데서 상실을 겪은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천민들, 희생양들, 사대의 

  이단자들이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준다.(P283)

 

 

주워들은 이야기

 

- ‘성서를 뜻하는 영어 단어 바이블(Bible)'책들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비블리아에서

  나왔다.

- ‘미드라시란 히브리 용어로 성경 주석의 설교 방식을 뜻한다

- 성무도일 : 매일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성직자, 수동자들이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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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광야길로 부르셔서 만나를 먹이신 하나님!
임형근 지음 / 더드림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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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나는 주기적으로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또 내가 처음 교회의 문을 두드렸을 당시 가졌던 나의 신앙적 초심을 점검하기 위해 나와 같이 주님을 사모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살아가려 노력하는지를 알고 싶어 이런 간증 서적을 접하고는 한다.

비록 시간적으로 꽤 오래 전의 작품이기는 하나 오늘 읽어도 시기적인 괴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작품이라 판단되었기에 여기에 좋다고 생각되는 문구를 정리해 올려 보았다.


이런 간증서를 읽을 때 항상 뭔가를 찾으려 노력(?)하는 데 나는 본 작품을 읽으며 크게 느낀 사항을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 2천 년 전 십자가를 지셨을 때 나를 위해 필요한 모든 죄의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작업이라는 점을 작품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오늘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긴급 전화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다.’

라는 것이다

위 문구와 함께 작품에서 크게 느낀 몇 가지 문구를 하단에 함께 정리해 보았다.

 

- 하나님께서 계획 없이 부르신 인생은 없다.

- ‘구원이란 하늘에서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사건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그리고

  그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이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내 이름을 기록하신다.

  ---> 구원 받았다고 해서 육신의 삶이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더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위에서 선포하신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섬기고 드려야 한다.

-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그대로 순종한다.

- 믿음이란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 전도할 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닌 성령의 감동이다. 전하는 자가 성령 충만하고 듣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

- 기적은 하나님을 보는 창구이며 기적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준다.

-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지식보다는 성령의 감동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 변화되기 원하는 사람은 변화를 결단해냐 한다. 그리고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하나님께 보여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변화되려 하지 않는 데에도 변화시키시는 분이 

  아니시다.

-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 기도할 때는 환경을 보고 낙망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 하나님이 우리를 내실 때 다 다르게 내셨다. 단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다.

- 순종은 우리의 몫이고 인도와 돌보심은 하나님의 일이시다.

-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에 앞서서 이것은 구해도 된다. 저것은 구하면 안 된다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 먼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의 지갑이 열린다.

-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낫다.


작품을 통해 크게 느끼게 한 문구

1. 믿음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는 마음이다. 눈이 있다고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빛을 주시지 않았으면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다. 내가 귀가

   있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공기를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다리가 있다고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땅을 딱딱하고 요동하지 않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뛰어다니며 활동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을 말한다.(P135)


2.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긍휼이 은혜의 출발점이다. (P220)


3. 기도가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변화시키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도구요 방법이다. (P220)


4.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감사는 하나님을 믿는 증거이다.

   감사는 가장 차원 높은 믿음의 단계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없고,

   감사하지 못할 것이 없다. 감사가 빠진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다. (P236)


5. 광야는 결코 절망의 늪이 아니다. 광야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알고 만나는 곳이다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쓰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가르치시려고 광야로 부르신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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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거하라 - 포도나무와 하나된 가지처럼
유기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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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어느 작품이던 작품의 특징 내지는 작품의 집필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프롤로그는 

굉장한 의미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데, 책을 접하면 해당 부분을 세세히 읽으며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사고의 핵심을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는데 독서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작품은 오늘날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순수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는 저성장의 늪에 빠진 교회와 신앙적 저열정에 대한 반성적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선 저자께서는 위와 같은 부진한 대한 단정적인 이유를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무시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낙심하고 

 시험에 들고 영적으로 메말라지는 이유는 환경이나 사람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

이라는 지적을 저자는 하고 있다.

종교적 무지랭이 수준을 갓 벗어난 나도 이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으니 하여간 문제는 문제라고 보여진다중언부언하는 이야기지만 저자의 이런 주장에 대해 종교력이 깊지 않은 내가 보아도 

저자인 목사님의 분석이 맞아도 아주 정확히 맞다고 본다.

완전히 공감할 정도의 종교적 지식이나 개신교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

  에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 고 판단하기에 또 과거 한때 무신론을 주장하다 어느날 갑자기 내게

부어진 성령의 힘에 의해 주님의 어린 양으로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나의 과거 행적을 잘 아는 이들이 내가 무신론에 심취해 기독인과 기독교를 비난하거나 사회적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종교, 종교인들의 행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때 내가 과거 그런 사건에 대해 사용했던 언사와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나의 주변인들이 알고 있기에 그들이 나를 향해 내가 했던 용어를 사용하며 비난할 때 나는 합리적으로 대응할 변명을 찾지 못해 괴로웠고 - 내가 기독교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그  구성원으로서의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에 - 또 얼굴을 들기가 정말로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는데, 저자의 이런 위와 같은 한말씀을 통해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는 논리를 나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논리가 있음 무엇하겠는가 문제는 문제인 것을 온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사건에 앞장서 

난리치는 종교인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로서 특정 지역에서 공권력을 무시하고 알박기에 가까운 난동질하다 정권을 상대로 별 희한한 짓을 합법과 종교자유를 사칭하여 벌이는 질낮은 행동의 목사들, 어떻게 해서든 권력자를 흠집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속한 집단을 띄워보려는 수준 낮은 자칭 목사와 그 조무래기들, 낮에는 

호날두를 능가하는 축구 능력을 보여 주고 밤에는 여신도를 농락했음이 수사와 법의 심판을 통해 명명백백 밝혀졌음에도 구세주라 외치고 난리치는 모지리 목사와 이를 추종하는 그 심복들

사회적 보호 대상을 이용해 온갖 비리란 비리를 저지른 저질 인간임에도 자신이 목사라고 우기는 인간들, 양의 탈을 쓴 짐승처럼 평신도와 친한 교역자 돈 떼먹고 튄 어느 중견 신도부터 평신도를 가스라이팅하는 간부 신도들, 이 모든 게 잘못되어 우리의 기독교가 이런 꼬라지가 되었다고 핏대 올리는 평신도인 나는 또 어떤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며 수양이 덜 된 인간인 내가 이런 글 쓰는 것 자체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지만 나라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런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고역을 자청하고 있다.

 

나는 말과 글로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듯한 자세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속성은 세상의 때에 물들대로 물든 그런 인간으로 

예수님을 기도의 제목으로만 여기지, 진짜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축복이고 기도의

 응답이며세상적 성공이다.‘

결론적으로 나 역시 위선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여타의 종교인들처럼 내가 할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마치 하나님이 채무자이고 내가 

채권자인양 무조건 달라기만 하고 달라고 한 것을 잘 주지 않으시면 삐진다.

하나님도 지치셨을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사던 신도들이건 간에 앞 뒤 구분치 않고 자신들의 본분은 잊어버리고 막장에 가까운 활개를 치다보니 주님께서도 창피하셨던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신도, 비신도들 보기에 민망해 그러신지는 잘 모르겠으나 요즘 기적을 잘 보여주지 않고 계시다.

그러면 또 그런 잡스런 목사나 간부 신도들은 여타의 교인들과 신입 성도를 향해 기도빨이 약해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조용히 살아가려는 모두를 향해 

난리를 쳐대며 힘들게 하고 있다. 하여간 짜증나는 세월이다.

이런 시기에 저자이신 유기성 목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작품에 여러 성경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문구는 없을 것이지만 

해당 작품의 주제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두 개의 문구를 너무도 사랑한다.

1.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요 그분의 지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이다.

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 7)

나는 이 두 문구가 갖는 참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며 이 문구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정한

의미를 믿고 또 믿는다!!! 아멘, 아멘, 아멘!!!

 

여러 이야기를 하기 전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내가 항시 의문을 갖고 있던 

특정 부분에 대한 결론적인 이야기이기에 여기에 먼저 정리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P 23)

 ---> 누구도 예수님읕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 6)

 

- 예수님 안에서 내가 죽었음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라고 하는 말이 곧 

  ‘나는 죽었다는 뜻입니다. (P 36)

- 예수님 안에서 문제를 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더 깊은 은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P 40)

- 영생을 얻는 사람은 예수님을 인생의 기초로 삼고 말씀에 순종하며 삽니다.(P 52)

   ---> 우리 인생은 주님의 말씀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로 

         영생과 지옥이 갈라진다.

- 요한3: 16절에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에서 그를 믿는 자마다의 진실된 뜻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믿는 자마다혹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 머물러 있는 자마다라는 

  의미이다.(P 54)

- 영어 성경 속에서 ‘Believe in him'(그분 안에서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자신을 맡긴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이다.(P 55)

-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삶의 기초가 된 

  사람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났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삶은 변화되지 못하는 것일까?

  ---> 예수님을 믿으면 성경이 말한 대로 놀랍게 변화된 삶, 거듭난 삶이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다.(P 63)


*** 예수님을 영접한 초창기에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던 내가 갖고 있던 마음 속의 예수님을 

     표현한  내용 ***

   ‘예수님을 믿어도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만 예수님이 자신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다고 고백은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마음에 임하셨다고 하면

    서도 문제와 질병과 시험앞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건성으로 믿고

    있는 것으로 엄밀히 이야기하면 안 믿는 것이다.‘


-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절이 164회 언급되고 있는 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다. (P 67)

- 어떻게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P 72)

   ---> 믿음은 가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맡기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러한 믿음을 가졌음에도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진정으로 자신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는 할 수 없음을 감사합니다’, ‘나의 실패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능히 주께서 저를 

  주님과 하나 된 자로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

  합니다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자세입니다.(P 78)

- 예수님을 진짜 믿고, 진짜 맡기면 때때로 실패가 오고 좌절이 와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예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고

  예수님이 역사하실 것을 선포하게 됩니다.(P 78)

- 우리가 예수님만을 따르며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신다.

   --->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역사는 나타날 수 없다.(P 89)

   ---> 감사가 나오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P 97)

-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면 염려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다.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라.

-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P102)

- '오늘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까? 어떻게 이끄실까?‘ 하며 늘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그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 예수님은 우리가 계속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P105)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확실하고 빠른 응답이 아니라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P106)

  ---> 진정한 성공이나 행복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누려지는 것.

- ‘항상 기뻐하라는 말음 항상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뜻(P127)

- '내가 있잖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P128)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 말을 다시 표현해보면

          ‘예수님을 바라보라, 나를 바라봐, 내가 있잖아라는 의미다.(P138)

-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핵심이다.(P135)

- 어떤 시험이 와도 마음을 지켰다면 승리한 것이다.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이다.(P148)

  ---> 마음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P152)

- 성경 말씀이 갖고 있는 5가지 능력(프린스 목사, P155)

  첫째, 생명의 양식이다 

  둘째, 하나님의 약병이다

  셋째, 삶의 힘이 된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지혜이다

  다섯째, 구원의 능력이다

-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자꾸 마음에 들어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와 고백.(P169)

-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긴다는 것으로 주님을 완전히 믿는 

  것이다.(P181)

-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일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되고, 주님을 완전히 믿을 때 주님이 역사하신다.(P184)

- 예수를 믿는 성도가 영적인 충만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목마름이 느껴지든 느껴지지    않든 꾸준히 주님 안에 거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것.(P192)

- 가장 무서운 죄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도 예수님이 왕이심을 거부하는 것(P205)

-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확신이 

  생겨야 한다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P218)

- 예수님만 원하고, 예수님만 만나고 싶고, 예수님 안에서만 거하고 싶고, 예수님만으로만 살고 

  싶을 뿐이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다.(P226)

-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살면 인생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P241)

   ---> 인간사 모든 문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아 생기는 문제입니다.

   ---> 무릎을 꿇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꺽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 감정, 계획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각에 맞추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해 가는 것이 무릎을 꿇는 

         것이다.(P249)

- 기도의 열쇠는 주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 어떤 형편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실 수 있다.(P259)

-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기도하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기도

  하는 것이다.(P262)

  --->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P267)

  ---> 예수님 앞에 거하는 자세란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운전해하는 자세를 말한다,

- 끝모를 장시간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언제쯤 풀려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대신 매 순간 예수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버틸

  수 있었다.(P270)

- 왕이신 예수님의 지시를 받지 못했다면 잠잠히 기다려야 하고, 어떤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우리가 늘 가까이하는 사람의 얼굴은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여 살면 반드시 예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P280)

- 우리가 진정으로 죄를 애통해 하며 죄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주님께 나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용서하고 사랑하신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 죄를 끊어버리려는 확실한 결단 

  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찬양한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P282)

-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받게 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모두 

  받는데에베소서에서는 그 복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다

  둘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았다

  셋째,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다.

-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이유는 우리가 약속받은 하늘에 속한 모든 복,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것과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보증해 주시기 위해서이다.(P302)

- 우리는 앞으로 복을 받을 사람이 아니고 이미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P308)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받을 은혜가 아닌 받고 있는 은혜를 아는 것.(P314)


* 2024117일 가정예배 365의 말씀 중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오늘날 교회 연약함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곧 하나님의 도(way)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knowing about God)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

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문제 앞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눈앞에 보이는 문제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 문제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커집니다.

 

사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원망과 낙심이 들 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기록합니다(8:32).

삶에서 흔들리고 두려울 때,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을 

명확히 붙든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어려움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신앙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그 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삶의 모든 문제는 작아지게 됩니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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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자리로 - 영광의 그분과 거룩한 발맞춤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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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종교 관련자  7,  일반신도 2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분의 작품으로 이전에도 저자의 작품 몇 권을 접해 보았었던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난해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거의 매 쳅터를 3~4번씩 읽으며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완독은 

했지만 무엇을 읽었고,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 내가 정리한 아래 요약 사항을 읽어 

보아도 기억이 잘 나지를 않으니 성공한 독서의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미안할 정도이다.

종교적 소양이 나처럼 그다지 높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본 작품을 쉽게 선정하지 말 

것을 권합니다짜증부터 날 수 있으니....

 

 

[ 1. 내 기도가 통하는지 검증할 수 있는가?]

- 모든 일이 사람들이 기도한 대로 되지는 않는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그 사실로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기도의 효력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기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 생각 없는 기도는 천국에 상달되지 않는다. 말로만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신다. 그분이 기도에 응답

 하시는 것은 그 계시에 따르는 부수적 결과이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그분이 행하시는 일도 알 수 있다.

- 하나님이 기도를 만드신 목적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유발하는 존재로서의 특권을 부여

  하시기 위해서이다.(파스칼)

- 내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보완될 일은 없다

 즉 그분의 전체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목적이 실현되는 방식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달라지며,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 기도는 자동판매기가 아니다. 마법이 아니다. 하나님께 건네는 조언도 아니다.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하는 행위도 끊임없는 하나님의 행위와 분리되서는 

 안 된다모든 유한한 존재가 어떤 일을 유발하는 행위를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만

 존립한다.

- 가망성이 전혀 없던 우리의 기도가 승낙되어도 성급히 자기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비약

  해서 결론짓지 않는 게 좋다. 우리가 강하다면 그분이 우리를 덜 살살 대하실지도 

  모른다우리가 용감하다면 그분이 우리를 격전지로 보내 훨씬 적게 지원하시면서 

  훨씬 위급한 진지를  방어하게 하실지도 모른다.

-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이자 그의 안에서 그가 기도하도록 추동하시는 분이다

  즉 도달하려는 목적지이자 원동력이시다. 아울러 그분은 목적지로 향해 가는 길 내지는 

  다리이시다.

 

[ 2. 하나님이 내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데 굳이 왜 구하는가?]

- 기도의 효력은 일단 나타났다 하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모두 뛰어넘는다.

  그래서 기도를 들어주시거나 거부하실 재량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이 조건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 때문에 망할 것이다.

 

[ 3. 기도가 짐스러운가?]

- 기도를 할 때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생각도 실어야 한다.

- 아침 기도를 아직 아무 것도 하기 전이니 오늘 하루를 흠 없이 시작하게 하소서와 같이 드려라.

 

[ 4. 시시콜콜 내 일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건 염치없는 일인가?]

- 우리가 숨김없이 기도 내용을 다 내놓으면 하나님이 지나친 부분을 알맞게 조정해 주신다.

- 질서가 바로 잡힌 사고방식은 기도로 구할 복이지 기도하기 위해 꾸며 입는 옷이 아니다.

- 하나님께 유치한 것을 구할 줄 모르면 아마 큰 것도 쉽게 구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고상해서도 안 되나 우리가 작은 일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보다는 우리의 체면 때문이다.

 

[ 5.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맞물리는가?]

- 자연의 모든 사건은 자연법의 작용이 아니라 모두 앞서 일어난 사건이 낳은 결과이다.

- 창조의 순간에 하나님은 최초의 사건을 법칙의 틀에 넣어 시동을 거셨고, 그리하여 자연사

  전체를 정해 놓으셨다. 역사의 모든 부분을 내다보고 그렇게 의도하신 것이다.

  ---> 결국 모든 물리적 사건은 수많은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미 결정된 상태다.

- 하나님은 우주를 먼 옛날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순간(매순간) 창조하고 계시다.

- 어떤 일은 정말 내 선택에 달려 있다. 나의 자유로운 행위가 우주의 형성에 기여한다

 이 기여는 영원 속에서 또는 창세전부터이루어졌으나 다만 순차를 따라 특정 시점에 내게 

 인식될 뿐이다---> 모든 사건이 예외 없이 기도 응답임을 믿어야 한다.

-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들으시되 무조건 다 구하는 대로 주시지는 않는다.

- 일이 기도한 대로 되는 경우 당신의 기도는 늘 거기에 기여했다. 일이 반대로 되더라도 당신의

  기도는 무시되지 않고 참작되었다. 다만 당신의 궁극적 유익과 온 우주의 유익을 위해 거부

  되었을 뿐이다.

 

[ 6. 기도하려면 병적이리만치 내 죄를 성찰해야 하는가?]

- 자신의 아는 결점을 꾸준히 직시하고, 변명 없이 하나님 앞에 가져가 진지하게 용서와 은혜를 

  구하며 힘닿는 한 더 나아지기로 결심할 때 치명적 결점도 서서히 눈에 들어 온다.

-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벌충하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

- 자신의 죄를 제대로 알고 회개하려는 진지한 시도는 결국 홀가분하게 짐을 더는 과정이다.

  ---> 치통이 있어 치과에 가야 할 때와 썩은 이를 뽑고 나서 개운한 통증이 점차 가라앉고 

       있음을 알 때의 차이와도 같다.

 

[ 7.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할 덫은 무엇인가?]

- 기도를 하려면 자기 속에 막연한 감정이 아닌 의지와 지식에 올바로 집중해야 한다.

- 기도자의 시선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에게 집중되도록 해야 한다.

  ---> 기도 중에 영혼의 속살이 다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 기도는 솔직한 회개를 기본으로 하는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거짓 영성을 조장하지 말라.

- 이웃이나 우리의 원수를 외면하여 모든 관심의 중심이 자기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 8. 기도를 꾸준히 실천하려면?]

-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것은 성령의 실재 임재이지 임재의 느낌이 아니다. 임재 의식은 

  덤으로 선물이며, 주실 때 감사하면 그뿐이다.

- 양손에 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짐이 늘 죄나 세상 염려는 

  아닐 겁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그분을 예배하려는 조급한 시도도 때로는 짐이 되니까요.

  가장 단골로 기도를 방해하는 잡념은 중대한 내용이 아니라 잠시 후에 하거나 삼가야 할 일과

  같은 자잘한 내용이다.


[ 9. 적당히 내 것을 챙기며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 하나님은 우리의 거듭되는 실패에 무한히 자비로우시지만, 고의적 타협을 용납하기로 약속하신

  적은 없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것도 결국은 다름 아닌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자신을 주실 수 있으려면 우리가 아집을 버리고 영혼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 그분은 사랑이시며 복을 주셔야만 하기에 권한도 절대적이다. 그분이 복을 주시려면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

- 위와 같은 사상에 경각심을 일깨운 말들

  1) 만일 하나님을 얼마나 섬길지에 대해 그분과 함께 계약서를 작성한다면, 결국 양측의 서명을

    모두 다 당신이 한 셈이다.

  2)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거부당하는 이유는 구원에 시간이나 정성을 전혀 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덜 들여서이다.

  3)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대신 무엇을 선택했든 결국 아무런 차이가 없다.


[10. 어떻게 진짜나로서 진짜 그분앞에 설 것인가?]

- 모든 기도에 앞서 우리는 “‘진짜 나로서 진짜 당신께 말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 주님, 우리의 기도를 그대로 듣지 마시고 어눌한 은유를 주님의 천의무봉으로 통역하소서

 

[11. 다윗처럼 즐거이 기도하려면?]

- 빛들의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의 교훈을 알게 

  된다고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날마다 순종하며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믿음이 자라고 아버지의 

  거룩한 말씀을 더욱 깨닫게 하소서


[12. 기도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똑똑히 주시하는 한 늘 희망이 있지만, 문제가 없는 척한다면 희망도 

  없다.

- 아버지여, 저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제가 너무 무모해서 제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고집하지도 말게 하시고, 너무 소심해서 꼭 필요한 노력을 그만두게도 말게 하소서.


[13.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가운데 기도하고 있는가?]

- 하나님께 다가가되 그분을 종착지와 목적이 아니라 경유지와 수단으로 대한다면

 사실은 그분께 가는 것이 아니다.

 

[14. 고난이 영혼에 유익하다는데 고난을 면하려고 기도해도 되는가?]

- 고통스러운 경험이 주는 유익이란 고난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긍휼이 샘솟아 자비의 행위로 연결된다.

- 고난의 구속 효과는 주로 반항 의지를 누그러뜨리는 성질이 있다. 본래 고행을 실천하면 의지가

  더욱 강해지지만, 고행이 유익하려면 (치열한)의지를 단속할 수 있어야 한다.

- 환난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평소에 합법적 방법으로 힘써 자신의 본능적

  악을 삼가고 본능적 선을 추구했어야 한다.

- 하나님의 경우든 인간의 경우든 절대적 뜻과 상대적 뜻을 구분해야 한다.

  절대적인 뜻을 품고 치아를 뽑는 사람은 없지만, 만성 치통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이를 뽑겠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뜻이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이 겪는 최소한의 고통조차도 결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은 아니지만 다른 대안보다는 차라리 그게 그분의 뜻일 수 있습니다.

 

[15. 구해도 하나님이 거듭 안 된다고 하실 때 어떻게 할 것인가?]

- 불안은 죄가 아니라 고통이다. 모든 고통처럼 불안도 생각하기에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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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영성이다 - 영성 형성에 미치는 습관의 힘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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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스스럼 없이 나는 개신교도라고 하면서 나름 자부하며 

살아온 지가 거의 반세기 가까이 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성령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뜻은 이것이다라는 답변을 나만의 종교 철학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항시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누군가 알려주고 과거에 교육받은 대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만의 색깔 - 종교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정신적 기준점 -을 입혀 답변을 

쉽게 내놓지 못하고 항상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가난한 영혼의 소유자다.

이를 보완하고자 때때로 종교 서적도 읽고, 간증집도 접하면서 나름 진실하게 기도를 하고는 있으나 그리 쉽게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를 못하고 있어 항상 괴롭다.

참고로 십일조에 대한 나만의 방식으로의 답변을 얻기는 하였으나 나머지 분야는 아직 이렇다 할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무튼 작품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답변을 얻기 전에 우선 진노는 더 적게, 행복은 더 많이, 심판은 더 적게, 격려는 더 많이, 죄의 고백은 더 적게, 용서는 더 많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 오늘도 나는 노력과 함께 진실된 성도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솔직히 작품을 2회에 걸쳐 정독하고 정독해 보았으나 - 살면서 여러 상황을 경험하지만 그리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2주간 입원을 틈타 해당 작품을 숙독할 수 있었다 -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내용과 의미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대가리가 잘 안 돌아가서 정말로 짜증난 시간이었다.

 

여기에 작품이 던지는 여러 문구를 정리해 보았다.

 

1장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 예배하는 인간 -

-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랍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사랑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 우리가 누구인기 규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습관의 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인격체의 무게 중심은 지성이 아니라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 마음은 우리 사랑의

  실존적 공간이며 우리로 하여금 어떤 궁극적 목적이나 텔로스를 지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넘치도록 부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구속

  된 욕망바르게 질서 잡힌 욕망이다. 당신이 욕망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

- 제자도의 핵심은 예배이다.

-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산다는 것은 꿈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일종의 무의식 여행을 떠난다는 말이다.

- 우리를 매혹하여 그쪽으로 우리를 잡아끌고 우리로 하여금 그 목적을 향해 노력하며

  살게 만드는 힘을 지닌 것은 번영처럼 보이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도달하는 방법처럼 보이는 삶의 방식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그런 텔로스는 지성을 설득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매혹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 당신이 원하는 바를 향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

-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궁극적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 덕이란 좋은 습관이다. 도덕적 습관을 습득하면 제2의 천성이 된다.

  제2의 천성이 되는 덕을 습득했을 때, 이는 당신이 선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 그리스도인의 형성과 제자도와 관련한 핵심적 통찰은 실천을 통한 습득은 우리의 

  마음이 바르게 재조정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갈망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잘못 조정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 당신의 사랑을 형성하는 문제는 당신의 종교적, 영적 정체성이 걸린 문제다. 무엇을 

  하는가, 어떤 실천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즉,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은 곧 당신이 예배하는 바가 당신이

  다라는 뜻이다.

- 우리는 무언가를 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예배할 수밖에 없다.

- 예배는 오실 왕국을 위한 실천이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길러낸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실천이 필요하다.

 

2장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세속예전을 읽는 법 -

- 당신이 얻는 것은 당신이 바란다고 생각하는 바가 아니라 당신이 마음속 깊이 바라는

  바다.

- 당신이 마음속 가장 깊이 간직한 욕망은 당신의 일상과 습관에서 드러나는 욕망이다.

- 습관이 의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인 것처럼 습관화의 과정도 무의식적이며 

  은밀하다.

- 습득된 무의식적 습관을 자동성이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2천성이라

  했다.

- 우리가 습득한 습관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규정하며, 이는 다시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 ‘성품은 운명이다성품은 당신이 습득한 성향(덕과 악덕)의 그물망이며, 이것은 

  자동성으로 작동하여 당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 어떤 문화적 실천은 당신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훈련시켜, 당신으로 하여금 자동적으

  로 세상에 대한 일정한 지향성을 갖게 만들고 그 지향성이 당신의 무의시적 존재 

  방식 안으로 스며들게 할 것이다.

- 구체적이고 본능적이며 반복적인 실천은 인간 번영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무의식적으로 습득한다.

- 가장 강력한 예전은 몸을 지닌 우리의 속성을 겨냥한다. 감각에 호소하고

  감정을 건드린다. 마음에 이르는 길은 몸을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 '예전'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에 관한 궁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의례를 가르키는 줄임말이다.

- 죄는 악덕을 반영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 곧 습관 

  바꾸기가 필요하다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해야 한다.


3장 성령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을 만나 주신다.

- 포스트모던 시대를 위한 역사적 예배 -

- 우리 마음은 실존적 나침반, 혹은 몸과 직결된 자동 유도장치와 같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마음이 지향하도록 조정된 일종의 자북을 향해 자석처럼 당겨진다.

- 바뀐 습관은 새로운(바르게 질서 잡힌) 굶주림을 만들어 냈다.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욕망을 재정향하고 우리의 식욕을 다시 훈련하라고 촉구하시는 공간이다.

- 제자도는 일종의 이민과 같아서 어둠의 왕국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이주하는 것.

- 하나님이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특별한

  것에서 성령을 찾는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하고 평범한 식사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 영적 훈련은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다.

-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많은 실천의 실천이다.

- 기독교 예배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라는 초대다.

- 우리는 다른 기대 곧 살아 계시며 일하시는 주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새롭게 만드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배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고 우리

  사랑의 습관을 바로 잡으시는 무대다. 예배는 그저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시키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이다.

- 반복은 하나님이 우리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방식이다. 덕의 형성을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반복 없는 실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장 당신은 어떤 이야기 안에 있는가?

- 형식적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 -

- 예배는 직감을 사로잡고, ‘카르디아를 재조정하고 상상력을 장악할 때에만 제자도의

  핵심이 될 수 있다.

- 성경적 세계관으로 방향이 설정되고 성경적 지혜로 인도 받는 백성이 되려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적 투자는, 말씀이란 배우기보다는 깨달아 아는 

  것이라는 확신에 뿌리를 내린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풍성한 유산을 발굴해 내는 것.

- 예배는 그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키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사랑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이를 위해 우리를 성경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고 그 

  이야기를  우리 뼛속에 심어 넣는다.

-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있도록 지으셨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쉴 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 무엇을 덕으로 삼을지는 상정된 목표나 목적, 텔로스와 관계가 있다. 습관이 

  특정한 텔로스를 지향하는 성향, 특정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성향이라면, 어떤 

  습관이 덕인지 악덕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먼저 텔로스를 결정해야 한다.

- 기독교 예배는 반복해서 우리를 그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여 우리가 복음의 드라마를

  거듭 재연하는 동안 우리 성품을 형성한다’.

- 교회의 기도든 개인의 기도든 기도는 모든 행동보다 우선한다.

  기도가 심리 에너지의 원천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걸맞는 예배와 영광 돌림의 행동,

  즉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기심 없이 응답하려고 노력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포를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라는 뜻에서 그렇다.

- 예배는 소설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 소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어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것들을 상상해 달라고 요구한다.

- 죄의 고백이라는 실천은 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하기 위한 핵심 훈련이다.

- 작금과 같은 세속 시대에 기독교 공동체가 가꿔야 할 자질은 신실한 인내이다.

- 성자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은 복음을 운동 감각으로, 뼛속에 지닌 노하우로 흡수하      여 의식적 사고로는 할 수 없는 바를 느낌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5장 마음을 지키라.

- 가정의 예전 -

- 날마다 하는 실천을 매주 드리는 예배의 실천과 결합하여 공동 예배의 형성적 힘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

- ‘세례란 우리가 그렇지 않을 때조차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언약을 지키

  시는 주시라는 표지다. 또한 세례는 아래에서 위로 우리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상징이다.

- 오늘날 가정이 쉽게 깨지고 이혼이 마치 결혼에 늘 따르는 그림자처럼 되어 버린 

  것은, 가정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가정을 우상화했기 때문이다.

- 지혜로운 신앙 형성은 교회의 공동 예배 생활이라는 중심에서 시작된다.

- 결혼 성례의 의미는 자연적결혼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큰 신비속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결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데 있다.

- 인간이 근원적으로 생각하는 사물이라면,

  우리의 방어진지와 교육은 일차적으로 교훈적이며 신학적이어야 한다.

- 우리 가정의 예전은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형성적 예전에 의해 규정되고 그 예전을 

  강화해야 한다.

- 어린이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실천을 통해 복음을 흡수하는 의례적 동물이다.

- 무지개는 하나님이 그분의 언약을 지키시며 그분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 우리 집을 더 광범위한 하나님의 집 안에 자리 잡게 하고, 예배의 예전을 확장시켜 

  그것이 우리 가정의 분위기를 형성하게 할 때, 우리가 하는 세속적인 일조차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 우리는 얄팍한실천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예전이라는 더 넓은 그물망 안에 

  자리 잡을 때 더 두터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6장 자녀를 잘 가르치라.

- 신앙 교육의 예전 -

- 젊은이들을 공교회적 기독교 유산으로 이끄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선물이 될 수

  도 있다.

- 메시지를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따분하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

- 젊은이들을 즐겁게 하고 감정적으로 흥분시키는 목적은 그들의 지성이라는 그릇에

  ‘메시지를 집어넣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 많은 젊은이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대단히 의례적 동물들이다.

- 아이들은 자신보다 더 크고 오래된 무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일종의 

  고대적 안정성과 지속성을 지닌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 우리는 젊은이들의 신앙 형성을 위해서 표현주의적 경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낯선 - 확실히 그렇다 - 고대의 영적 훈련이라는 유산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런 영적 훈련은 낯설기 때문에 습관을 형성하며, 우리의 자기 중심주의

  를 제거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원하는 습득된 욕망에 맞서 저항한다.

- 성화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것이라면 효과적인 청소년 사역에서는 젊은이들이 

  실천을 통해 예수를 입어 보도록도와주어야 한다.

- 섬김은 자의식과 자기애를 조장하는 우리 문화의 실천을 무디게 하고 자기중심주의라

  는 소용돌이에서 우리를 끌어내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 기독교 학습 환경은 지성을 채울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불타오르게 한다.

- 덕은 특정한 이야기가 지배하는 특정한 공동체와 결합한 두터운 실체로 덕은 본보기

  를 통해 흡수된다덕은 일회적 성취가 아니다. 유지 보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기독교 고등교육이 지혜의 추구라면, 어떻게 우리가

  가르침과 배움을 기도 훈련에 복종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7장 당신은 원하는 바를 만든다.

- 소명의 예전 -

- 성경의 창조 교리는 우리의 근원에 관한 교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 상황에 관한

  교리이기도 하다.

-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르심임

  을 깨닫는 것.

- 우리는 세상에서 신실하게 존재하도록부르심을 받았다. 신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창조세계를 차지하는 법이다.

- 기독교 예배라는 실천은 우리의 상상력에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인식하게 하고, 따라서 그 안에 울려 퍼지는 

  그분의 부르심을 듣게 한다.

- 우리가 하는 창조적인일이란, 좋은 삶의 전망에 대한 매혹이 우리 안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으로부터 부풀어 

  오른 것이며, 우리의 상상력을 불타 오르게 하는 것은 번영이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다.

-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며 당신이 원하는 바를 만든다면, 신실한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 즉 지배하는 이야기들의 저장소를 잘 돌보아야 한다. 당신이 예배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고따라서 당신이 만드는 바와 

  당신이 일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 기독교적 상상력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발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교회를 재발명하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재창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습관을 형성하시고 상상력을 재형성하시고 마음을 변화

  시키시냐의 문제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용한 제약과 그것을 혁신을 위한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이란 실천이 필요한 습관이라 강조한다.

  습관이란 우리 성품의 일부가 된 습득된 성향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천과 반복을 

  통해서 말하자면 의례를 통해서 그런 습관을 습득한다.

- 사랑이 궁극적인 덕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사랑으로 옷 입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랑은 실천과 반복을 통해 자라는 사랑이며

  우리가 소명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성품에 스며    들게 하고 그 사랑을 우리의 사고방식뿐 아니라 우리 본성의 일부로 만드는 의례와 

  리듬과 실천에 몰입해야 한다.

 

축 복 기 도

-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을 위해 우리 이웃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 주시고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다시 그분께 향하게 하신다.

- ‘아멘은 우리도 성부를 향해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따라 올라갈 것이며, 이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겠다는 교회의 동의를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이 응답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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