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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
김선주 지음, 김범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9월
평점 :
추천 권유도 7
지역적 특수성과 차별로 인해 일어난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 관한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저자의 통찰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여느 역사 작품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학자적 시각으로 시대 환경적 요소를 대입하며 해당 사건을 분석하고 있어
나와 같은 시대적, 학문적 깊이가 짧거나 문외한에 가까운 이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일시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한편으로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섣불리 옳고, 그르다는 경솔한 의견
표현은 나의 학문적, 역사적 관련 지식에 대한 깊이가 깊지를 않아 여타의 방법으로 알게 된 해당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부분적인 내용이라 전체에서 차지하는
진실의 비중이 낮아 저자의 의견에 쉽게 동의를 할 경우 ‘귀가 얇은 것’ 아닐까 하는 우려로 인해
알면서도 모르는 것으로 하고 일방적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수반된 시간이었기에
작품을 읽는 내내 큰 부담이 되었던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기쁨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읽는 내내 큰 위안이 된 것은
‘개그 콘서트적 여의도 희극인들이 벌이는 연기와 그런 희극인들이 자신들은 국민을 대표한다며
더 많은 국민이 선택한 리더의 뒷다리를 마구 잡아대는 통에 힘들어서 더는 리더 못 해 먹겠다’
고 난리치는 하수상한 세월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난세 극복의 가르침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정해 접해 보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당초 해당
작품을 선정하며 기대했던 내용에서 벗어난 느낌이 커서 그러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방향으로는
큰 수확은 없었던 시간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세계사적 주요 혁명은 농업 사회에서 일어났으며 ‘민란’의 경우는 대체적
으로 경제적 문제 때문에 농민이 일으킨 저항운동으로, ‘변란’은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이 계획한
좀 더 정치적 저항을 지닌 반 왕조적 운동이라는 점을 높고 볼 때,
농업사회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최근 통수권자에 의해 발동된 모종의 질 낮은 조치에 대한 사건의
성격이 정확히 규명되거나 정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국가 변란 사건’이라고 확정해
앞 다퉈 기레기들과 수준 이하의 일부 모리배들 그리고 국민을 대표한다는 수준 이하의 작자들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고 있는데 - 그런 불미스런 조치를 촉발시킨 통수권자의 행위는 백번 만번
이야기해도 잘못된 것으로 어떤 변명도 무색한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확정되지도 않은 행위와
행위자에 대해 수준 이하의 막말, 하대 등의 용어를 마구 남발하면서 그와는 대칭점에 서 있는
전과 4범인 어느 잡범 리더에게는 ‘존칭’을 사용하는 언론과 그 하수인들을 보면서 ‘그람시’가
우려했던 이 사회의 ‘진지전’이 아주 심각히 뿌리 내렸음을 확인하고는 급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
위에서 정의 내린 ‘민란’과 ‘변란’ 등과 같은 사건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할 적절한 표현 단어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내 식견으로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지금도 고민하고 있던 중 이런
재미난 창작 이야기가 떠올라 여기에 옮겨본다.
작품을 읽으며 국정 운영에 있어 중요 요소는 많고도 많지만 특히 본 작품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 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언급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지역차별과 인간적 차별 그리고 당파를 이루어 끼리끼리만 해 먹으려는 기득권들 - 요새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부처의 가족회사 같은 - 의 사고방식이 존재하는 집단은 무슨 사단이 일어나도 골 백번 일어 난다는 것을 본 작품은 강력히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데.
굳이 내가 특정 단어를 써가며 해당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성과 교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고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본 건에 대해 중언부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조선의 지존 “숙종”에 대해 읽고 있는데,
‘송시열’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단하’라는 작자가 빙빙 돌려 이야기하자 ‘숙종’이 추상
같이 일갈합니다.
‘스승은 중요하고 왕은 졸(卒)로 보이냐!’
라고 말입니다. 요즘 세상에 딱 어울리는 문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1장 청북지역의 역사적 발전과 지역 지배층
- 조선 후기에 청천강 이북 지역은 ‘청북’으로, 이남은 ‘청남’으로 불렸으며 ‘홍경래 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지역은 ‘청북’지역이었다. 이와 더불어 ‘관서’는 평안도를, ‘관북’은 함경도 지역을
‘서북’은 평안도와 함경도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 조선 후기의 대중 반란을 이해하려면 중앙과 지방의 권력관계와 민란 지역주민의 다양한 사회
신분을 분석하는 게 핵심이다.
- 조선 후기 문과 급제자가 급증하고 그 결과 더 큰 지배집단이 창출되면서 평안도 지배층 사이의
경쟁은 격렬해졌으며 평안도 출신은 조정의 명망 있는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데서 일상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과거 급제자 수는 임진왜란 전 15명에서 왜란 후 30명으로 1753년 이후는 45명으로 급증)
---> 지역 차별로 인한 북부 지역 주민이 오랫동안 중앙 정부에 품어온 분노가 증폭
- 북부지역 출신이 중앙 조정의 요직에 오를 수 없었던 까닭은 그 지역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기
때문인데 선조 때 이전에는 뛰어난 인물을 배출할 수 없었고, 선조 이후에는 당쟁이 격화되어
그 지방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적 인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홍경래의 난의 원인 중 하나였던 지역차별이 언제 나타났고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찾아내기는 상당히 어렵다. 중요한 사실은 차별만으로는 반란에 찬성하는 상황을 만드는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주변 지역에 살고 있던 소외된 지배층은 모두 정치적 차별의 대상이었으며, 권력과
명망은 수도나 그 부근에 거주하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비교적 소수의 지배층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평안도의 경우 지역 지배층은 조선 전기 중앙 정치에서 위상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자신들의 자원을 교육과 과거제도에 투자해 조선 후기에는 중앙 조정에 진출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경이로운 수적 증가와 중앙에서 높은 명망과 특권을 얻으려는
열망을 보였음에도 당시 확고히 자리 잡은 평안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차별 때문에
그들의 관직 경력은 일찍 끝났고 기대한 명예를 얻지 못했다. 스스로 힘을 기른 지역 지배층은
실력주의를 지향하는 유교의 이상과 중앙 지배층의 배타적 정치 운영 사이의 모순을 경험한 뒤
극도로 좌절하면서 중앙 정부를 강력히 증오하게 되었으며, 이런 경험은 반란에 정당한 근거가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 고려와 조선 전기에 걸쳐 형성된 북부 지역의 지배층은 다른 지방에서 이주해온 명문가 출신들
이 원래 가문의 지파를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은 남부 지역 가문
에도 그랬던 것처럼 북부지배층에게 자신의 지역사회에서 권력과 위신을 강화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가 됐다.
제2장 지역 차별과 홍경래 난
- 조선 전기 동안 북부 출신 가운데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은 매우 적었으며 과거에도 좋은 성적
을 올리지 못했다. 조선 후기 과거에서 북부 출신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관직 취득에는
상당한 정치적 차별이 있었다.
예로서 문관의 경우 유명 가문(청족, 淸族)출신 급제자는 승문원(承文院, 외교를 담당) 북부
출신은 성균관(교육기관), 양반의 서얼은 교서관(校書館, 경서의 출판 등)에 배치하였고
무관의 경우 청족 출신은 선전관청(宣傳官廳)에 배치되어 그곳을 거쳐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
했으나 가문적 배경이 떨어지는 사람은 부장청(部將廳)이나 수문장청(守門將廳)에 배속되었다.
1) 북부 출신이 중앙에서 출세하여 성공하기란 엄청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홍문관(弘文館)은
조선 시대 조정의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및 문한(文翰) 처리와 더불어 국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업무를 맡았던 중앙 관서로 집현전의 후신으로 옥당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으며,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라 하였는데, 홍문관원을 선발하는 ‘도당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평안도 출신 급제자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북부 출신이 당상관(정3품 이상의
고위 관리를 칭하는 말)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보여 주는데, 조선 후기
당상관직에 오르른 주요 경로는 홍문관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2) '백경해'라는 당시 실존 인물의 사례(P 78 ~ 98)를 통해 당시 북부 지역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출세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북부 지역 인물에 대한 지역적
차별은 소세양(1486~1562)이라는 인물이 효시라고 한다.
특히, 1714년(숙종 40면) 평안도 암행어사 여필휘(1679~1721)는 ‘평안도 사람은 이적이나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결론지으면서 30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
했으며 숙종이 이를 여필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 해당 지역 출신에 대한 정치적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널리 퍼져 있었던 인식은
첫째 그곳에는 양반이 없고
둘째 그 지방에는 오랑캐의 땅과 가깝다는 이유였으며
셋째 그곳에는 학문이 없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3) 조선의 국왕들은 지역 차별에 대한 수많은 상소와 발언을 읽고, 들었으며 어떤 지역 출신을
세습적으로 선호하는 관행은 수정되어야 한다며 능력과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등용하고 승진
시키라고 명령하지만 아무도 이런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는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4) 평안도의 지역 지배층은 중앙의 정치과정에서 동등한 참여자로 인정받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앙 양반의 높아진 신분의식과 그들이 채택한 배제 전략일 뿐이었다. 그들이
맞닥뜨린 변함 없는 정치, 사회적 차별 사이의 불일치는 그들의 불만에 연료를 공급했다.
제3장 홍경래 난의 경제적 맥락
1) 과거에 급제하려면 오래 기간 학업에 전념해야 하는데, 상당한 물질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평안도 출신 문과 급제자가 급증했다는 사실은 그 지역이 물질적
으로 비교적 풍요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 ‘환자제도’는 원래 봄에 곡식이 모자라는 동안 사람들을 구휼하려는 목적이었다.
18세기 후반 중앙과 지역의 모든 관서는 자금을 늘리기 위해 이자를 받고 비축곡을 대여했다.
---> 환자 비축곡 분량은 각 군현에 고정돼 있었고 지역 관원은 그 제도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기에 문제가 나타났는데, 농민의 높은 상환 연체율을 감안했을 때 수입과 지불 준비
를 맞추는 유일한 방법은 장부 조작과 농민 작물을 갈취하거나 이자 수입을 얻기 위해
환자가 필요치 않은 농민 혹은 부유한 가호에게 독단적으로 강제 분배하는 것이었다.
---> 홍경래의 난 직전 1822년 황해도 곡산의 농민 반란은 환자제도의 운영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 수령 및 아전과 서리 / 동일 지역 유력자와 농민 납세가 사이의 갈등을 드러냈다.
3) 곡산 부사 박종신은 곡물 비축량을 충원하는 과정에서 지역 유력자들이 조세 행정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안한 관행을 자의적으로 중단시켰고, 그것이 지역민의 불만을 야기해 반란을
불러온 것이다.
---> 여러 잡역과 관용비용을 편리하게 조달하려 설치된 기구였던 ‘민고(民庫)’도 부정한 운영
자들로 인해 해가 갈수록 원금 손실이 커짐에 따라 민원이 높아지면서 민란의 요인으로
작동.
---> 홍경래의 난을 빈곤한 농민이 일으킨 조세 폭동의 성격으로 분석하고 있으나 1811년 말
100년 동안 최악의 가뭄으로 인해 유효 적절한 구휼을 시행하지 않은 무능력한 중앙의
부패한 관원들에 의해 무리하게 환자 상환을 추진해 일어난 사건으로 분석하는 게 맞다.
4) 조선 후기의 대동법과 같은 조세제도의 변화는 상인들의 상업자본 축적과 독립적 장인의 출현
과 권력층 양반들의 사치스런 향락으로 인한 사치품의 수입이 급증하면서 무역이 자유롭게
허용될 수밖에 없게 되면서 해외무역과 국내 상업 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 표준적이고 안정
된 저책의 부재, 불합리한 규제 그리고 밀수자에 대한 엄벌로 평안도 상인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면서 홍경래의 난에 참여자가 늘었을 것으로 판단.
5) 조세와 환자 운영처럼 지방에서 관리해 온 사안에 대해 중앙이 점차 압력과 개입이 늘면서
국가에 대한 반감을 불러왔을 것이며 상인의 재력이 커졌지만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없다는
모순은 평안도 출신 계급자들이 늘었지만 지역 차별 때문에 중앙 관원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반란 세력으로 연결되어 갔을 것으로 분석한다.
제4장 예언과 대중 반란
1) 삶이 자연재해, 가뭄, 전염병으로 타격을 받았을 때 그리고 자신의 사회, 정치적 상황이 위험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약속한 대중 신앙에 더욱 쉽게 영향을 받았다,
---> 새 왕조에서 주연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이룰 수 없던 소외된
지배층에게 대단히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반란 지도자들로서는 그들이 정부의 정치에
불의를 강력히 느끼고 민생의 악화를 참으로 걱정하든 아니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널리 퍼진 ‘정감록’의 예언적 전통에서 언급된 대로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2) ‘풍수설’의 의사 과학적 생각은 전통시대 한국사 전체를 휩쓸었다.
풍수설은 당(617~907)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하던 통일신라(668 ~ 935)에 한반도에 들어
왔는데, 풍수설의 주요 원천인 ‘역경(易經)’은 풍수설과 성리학을 포함한 모든 사상체계의
연결고리였다.
풍수설과 예언은 대중의 지원을 동원하고 반란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도구였다.
---> 풍수설은 자연 안에서 활동하는 힘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성공에 집착한다. 풍수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미 이뤘지만, 자신과 자손이 더 번성하기를
바라기 시작할 때다.
이미 성공했다면 그는 자신의 지속적 성공을 보장할 보든 풍수적 예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은 학문, 부의 축적, 종교에 의지한 행운의 추구를 통해
자신과 후손의 상황을 향상시키는 조치를 추진할 권리를 부여 받았다.
---> ‘풍수’는 길한 묫자리를 잡는 데 널리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계층에서 이를 널리
활용했는데, 당시 북부 주민이 풍수를 후원할 수 있는 일정한 재정적 잉여를 누렸으며
예언적 신앙에 투자해 더 나은 경제적 상황과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열망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정감록의 이념은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은 하늘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므로 하늘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지도자에게서 그 권한을 박탈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자연재해와 초자연적
징조를 통해 지도자에게 불만을 전달한다. 대중 반란은 지도자에 대한 하늘의 분노를 대표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른 새 지도자를 세우는 합당한 방법이었다.
---> 정감록에서 미래 변화를 위한 모든 예언은 풍수적 담론을 빌렸지만 왕조 교체에 관련된
기본 개념은 유교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예언적 신앙을 이용한 것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17세기 후반 ‘정여립의 음모’였다.
4) 영조(1724~76) 때는 다른 시대보다 많은 음모가 발각되는데, 모반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주기적인 자연재해로 백성의 삶이 불안해지고 노론의 권력이 공고해진 뒤 많은 양반 지배층이
정치적으로 소외된 것을 반영한 결과이다.
제5장 반란 세력 지도부와 참여자
제6장 반란 세력과 진압 세력
* 상기 2장은 너무 학술적인 내용으로 내가 추구하는 독서의 방향과 맞지 않아 정리에서 제외
제7장 수세에 몰린 반란 세력
1) 당시 주요 인물들은 서북지역의 반란(홍경래의 난)을 질병과 가뭄으로 고통받는 농민에게
관원이 부정을 저지르고 자의적으로 조세를 부과한 데 있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사간원 정5품
‘임업’은 일부 지방 수령과 향리의 부패와 탐욕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상소했다.
따라서 공정한 인사 운영과 지방 행정에서 강직한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 지방을 안정시키는 데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 반란에 대한 응답으로 국왕은 풍년이 들 때까지 세금을 보류하고, 환자에 쌓인 이자를
탕감하며 반란이 일어난 기간과 그 이후의 군포를 줄여주었다.
2) 오위 부호군 ‘오연상’이라는 인물은 상소를 통해 반란의 원인과 대책을 날카롭게 제시하였는데,
국왕의 특별 명령으로 한 번씩 열렸던 ‘도과(道科)’를 치를 것을 제안했는데 이 시험의 합격자는
다른 예비시험을 거치지 않고 서울에서 열리는 최종 시험에 나갈 수 있었다.
평안도에서 도과는 인조 때인 호란 직후 1643년 처음 열렸고 그 뒤 10년마다 해당 시험 실시
되었으나 도과를 치르지 않은지 오래되어 해당지역 사대부들의 불만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험도 상소를 올린지 3년 뒤에나 실시되었다. 더욱 나쁜 것은 조정의 차별적 승진
제도에 관련된 개혁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 평안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20세기 초까지 지속됐다.
제8장 홍경래 난 연구에 나타난 민족, 계급, 지역
1) 반란을 우연히 목격한 평민 시인 조수삼(1762~1849)
‘용납할 수 없는 반역으로 보았지만, 관원의 부패와 지의적 조세, 그리고 좀 더 날카롭게 지역
차별을 비판했다‘
2)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은 20세기 일제 강점기를 통해 사건과 지역 차별의 문제를 분리해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 부패한 왕조를 무너뜨려 ‘대의’를 펴고 세계에 ‘공의’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반란
(최남선)
- 조선을 독재국가로 규정하면서 그 반란은 관원 등용의 지역 차별 - 정치적 노예생활 -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이돈화)
- 민중 혁명의 선구였으며, 홍경래는 양반사회를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일으켰다
(문일평)
- 민중의 권리를 옹호한 혁명운동(안 확)
- 반란은 반 왕조적 사회운동이었다.(현상윤)
---> 일제 강점기 한국인 학자들은 홍경래의 난에서 토착적, 진보적, 혁명적 전통을 찾았지만
일본인 학자들은 한국 병탄을 함축적으로 정당화하는 쇠퇴와 침체를 찾았다
3) 반란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계급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평안도 주민이 마주한 사회,
정치적 차별이다. 반란 세력은 사회, 정치적 차별을 그 지역의 전체 주민에게 오명을 씌우는
지역적 문제로 보았다.
4) 집단행동이 성공하려면 지역적 분화를 뛰어넘고 협소한 지역적 공간의 경계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통합할 수 있는 타당한 이념적, 사회적 명분이 필요했다.
반란이 지역사회의 단단한 사회적 연결망을 끊을 수 있는 열쇠였던 가장 높은 사회 신분층
- 곧 문과 급제자와 지역 지배층 가운데 성공한 부류 - 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것은 집단이
정부를 지원하기로 선택했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결국 반란 진영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 지역 양반의 기회주의는 반란이 종막에 가까워지면서 증가한 의병 숫자와 관군에 더욱
자주 물질적 기부를 한 것에서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1812년 사건은 사회 기층이 시작한 계급투쟁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누적된 불만을 지역 지배층이 국가에 맞서 폭발시킨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