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와 만나다 -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한 운명의 책 ㅣ 비아 만나다 시리즈
마크 래리모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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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전문가), 비전문가(3)


주님에 다가선지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심자 수준인 나의 신앙심을 제고하기 위해

본 작품을 선정해 읽게 되었다.

성서 욥기는 대체적으로 ‘위로를 주는 책, 자기 수양을 돕는 책, 혼란을 대변하는 책’이라는

세인들의 평가를 가슴에 담고 또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욥에 대한, 욥기가 품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알아보자는 아주 단순 무식한 수준에서 작품에 도전했는데 결론적으로 아주

혼쭐이 난 작품이었다.

종교학 및 종교철학 공부를 3년 이상(?) 하였거나 현직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는 분 아니면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높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나와 같은 무지몽매인 종교적 문외한은 가급적 도전하지 않기를 권유합니다.

 

생뚱맞게 욥기는 누가 지었는가, 욥기는 여러 작품이 짜깁기 된 것이다. 욥은 유대인인가?

등등 성경을 단편적으로 접한 나에게 작품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런 질문은 작품을 읽는

내내 나를 시련의 연속으로 몰고가는 질문이었다.

따라서 나와 같은 종교적 깊이가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품이 던지는 심오한 질문이나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기신 저명하신 분들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여러 사항을 단문 위주로 정리하는 수준에서 해당 작품을 정리해 보았다.

그 내용도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것은 확신이 서지를 않지만 .......

 

참고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욥의 유언 필사본은 10세기 사본이며 오늘날까지도 욥의 전설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설명이 담긴 문헌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종교적 깊이가 낮은 분들은 가급적 본 작품을 외면하시기 바랍니다.

궁금하더라도 말입니다.

 

[서 론]

- ‘욥기’는 분명 성서에 속한 어떤 책보다도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데 악의 문제에 관한

  성서의 답변으로 이해되곤 한다.

-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에서 무고한 이들은 언제나 고통 받는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시지만 동시에 언제나 그들은 도울 방편을 마련해 두신다고 말한다.(P 9)

- 그리스도교 장례 의식을 치를 때 성직자들은 ‘욥’의 연설을 인용하곤 했다. 

  ‘욥’이 인내의 한계를 규정해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P 21)

- 손쉬운 이해를 거부하는 ‘욥기’의 면모는 그 자체로 ‘욥기’를 둘러싼 신비의 일부가

  되었다.(P 24)

- ‘욥기’가 제기하는 물음들, 섭리와 악, 무고한 이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 하느님의 본성,

   피조물 가운데 인간의 지위 등은 모두 손쉽게 종결될 수 없는, 종결되기를 거부하는

  물음들이다.(P 24)

- ‘욥기’의 중심 대목은 널리 통용되는 지혜를 늘어놓는 ‘욥’의 친구들(엘리바즈, 빌닷, 소바르)을 

  하느님이 질책하는 부분이다.(P 25)

- ‘욥기’의 전기는 수 세기 동안 등장한 욥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

   즉 자신이 ‘욥’이라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그와 관련된 이야기의 의미를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한 독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P 32)



[고대 해석자들이 바라본 욥기]

- ‘욥기’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해석인 ‘인내하는 욥’이다.(P 36)

- 그리스도교들은 ‘욥’을 그리스도의 예형(type)으로 보았다. 히에로니무스는 ‘욥기’ 주석에서

  ‘욥이라는 이름은 슬픔과 고통을 뜻한다고 주장. 그는 그리스도의 원형이었다’(P 39)

- 번영은 재앙을 수반한다. 절망이 희망을 수반하듯(P 48)

- ‘욥’의 유언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P 50)

-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네 우리가 주님에게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보여 주실 때까지 인내합시다.

- ‘제임스 쿠걸’이라는 유대인 성서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고대 해석자들’의 작품

  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빌론 유수 이후 지신들의 경전에 새로운 해석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

   1) 성서는 근본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문헌이다. 즉, 성서에 A라고 적혀 있을 때 흔히 실제 

     의미는 B다.

   2) 성서는 당대 독자를 위한 교훈을 담고 있다. 성서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역사책이 아니다. 성서는 유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3) 성서는 모순이 없으며 실수도 없다.

   4) 성서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주셨으며 하느님은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예언자들을 

     거쳐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P 60)

- 절망에 사로잡힌 채 울부짖는 ‘욥’의 말, 그의 분노 어린 말들은 ‘욥’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성서 

  전체의 것,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의 것이다.(P 62)

- 그리스도교 해석자들에게 구약 성서를 해석하는 열쇠는 신약 성서였다.(P 75)

- 모세의 율법을 읽는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으며 이 너울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이 ‘주님(예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진다.(P 75)

- 중세 그리스도교의 토대가 된 ‘욥’기에 관한 저작은 하나다. 바로 기원후 578년에서 595년

  사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저술한 ‘욥기의 교훈들이다.(P 77)

- ‘욥’은 경건한 인물이지만 더 많은 의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상징이기도 하다.(P 78)

- 자신이 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영혼을 해지는 것은 없다.

-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평온함이다.(P 82)

- '고통'은 죄라는 '암'을 퇴치할 때 필요한 '화학요법'이다. 문제는 하느님이 사악한 

  이들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선한 사람들을 치료

  하지 않는 것이다.(P 83)

- 어떤 행동이 그 당시에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가치 있는 예언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종종 있듯 

  어떤 상황이 역사적 차원에서는 미덕이지만 그 의미와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악인 경우가 

  자주 있다.(P 85)


 

[논쟁 속 욥기]

- 에피크로스는 물었다.

  “신은 악을 없애고자 하나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사악하다. 신은 악을 없앨 수 있으며

  악을 없애려 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악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P 92)

- ‘욥기’는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묻기보다는 하느님의 본성을 묻는 책이다.(P 93)

- ‘욥기’는 신성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서곡,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섭리에 관해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문헌이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과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욥기는 섭리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 참여하는

  (그리고 참여하지 않는) 방법을 보여 주는 책이다.(P 95)

- ‘욥기’는 인간이 가장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철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P 96)

- ‘욥’과 친구들의 발언은 그것이 긍정하는 내용보다는 부정하는 내용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P105)

- 악은 엄밀한 의미의 실체가 아니며 본질상 선한 모든 피조물에게 기생충처럼 붙은 결핍

  혹은 왜곡이다.(P110)

- 중요한 것은 섭리(우리는 이를 알 수 없다)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다(P115)

-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칼뱅에게 ‘욥기’가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이 피조물보다 너무나 높이 있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올바름의 규범조차 궁극적이지 않음을 ‘욥기’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컬뱅이 보기에 ‘욥기’를 읽는 실마리, ‘욥기’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논쟁에서 ‘욥’은 

  선한 편을 고수하는 반면, 그의 적대자들은 악한 편을 고수한다는 점이다”(P121)

  "‘욥’과 친구들이 재기하는 물음은 동일하다. 즉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

  하는가? 그에 따르면 ‘욥’은 우리가 고통을 겪게 될 때 ‘욥’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다른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욥’의 친구들처럼 응답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P122)

-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는 겸손과 침묵을 지키며 다른 이가 고통 받을 

  때는 그를 배려하고 위로한다.(P125)

- 섭리문제를 정직하게 마주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자리, 즉(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기는 하지만)하느님에게서는 멀고 인간 동료들에게는 가까운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P130)

 


[공연되는 욥기]

- 수 세기에 걸쳐 ‘욥’ 성인은 나병 환자, 음악가, 공처가, 심지어 매독 환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P135)

- 그리스도교인들은 ‘욥’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을 배웠다.(P139)

- ‘욥’ 이야기는 참되고 확실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이야기인 것 못지않게 거짓 위안과

  감언이설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P150)

- 구원에 대한 믿음은 섭리에 대한 확신과 인내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렵고 유지하기 힘들다.

-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인내를 통해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P160)

- 짧은 생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계속 애통해하고 불평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현명한 이들은 이 세계라는 ‘깊은 구렁텅이’를 순례하는 동안 인내심을 기른다.(P163) 

- 철학자들은 이성 너머 저편에서 오는 도움이나 통찰을 받아들이기 위해 혹은 적어도 고결한 

  습관을 갖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의심을 다른 의심으로 대치하곤 했다.(P168)

 


[신정론과 욥기]

* 신정론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하나님의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는가를

  학문적으로 모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데, 왜 세상에 악이 존재 하는가? 이 세상에 모순이

  이렇게도 많은가?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것을 볼 때, 혹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은

  아니신가? 하는 회의(懷疑)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 신정론이다.

   그리스어로 ‘신’을 뜻하는 ‘테오스(theos)'와 올바름을 뜻하는 ’디케(dike)'를 합쳐

  ‘신정론(theodicy)'라는 말이 나왔다.(p186)

 

-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 

  설령 활동한다 해도 신이 정녕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물었다.(P182)

- 하느님은 왜 악을 용납하는가? 사람들이 악을 당연하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여기지 않게되자 

  악은 독특한 철학적 문제가 되었다.(P185)

- 칸트는 ‘욥기’를 성서, 교회 전통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채 도덕적 자율성을 지니고 신과 

  대면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보았다.(P192)

- 자신의 동기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이해의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진다.(P197)

- 참으로 고귀한 일은 고통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이다.(P197)

- 종교는 도덕 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칸트), 종교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코헨) (P198)

- 고통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처벌이다.

-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은 성서에 나오는 주장이나 성서가 그리는 사건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 너머 핵심에 있는 시적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욥기’는 그 중심이 

  되었다.(P202)

- ‘욥기’에 담긴 신의 선물은 ‘욥기’가 표현하고 또 빚어내는 인간의 감정이다.(P205)

- 자신의 경건함으로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하면서도, 경건함 때문에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인정했다. 바로 그 사이에서 사탄이 나왔다.(P222)

- 모든 고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여정의

  결과다.(P223)

 

 

[추방당한 욥기]

- 하느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경이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욥기 28:28)

  이 구절을 ’욥기‘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P234)

- 역사 비평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준 가장 좋은 도구를 활용해 성서를 이해하려는 선의를 담은 

  노력이라 할 수 있다.(P237)

- ‘욥’이 보여 주는 ‘인내’는 그의 비판과 저항을 포함할 때 더욱 심오해진다.(P250)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침묵만이 궁극적으로 기억과 희망이라는 역설적 임무에 온전히

  부합하는 실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침묵이 전도서의 지혜와 같은 지혜를 보여 주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P259)

- 신앙은 답이 아니라 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이름 ‘엘(EL)'은 물음을 뜻하는 말인 ‘셰엘라(she'elah)'안에 머물고 있다.

  ‘욥’은 자신이 차갑고 냉소적인 세계(참된 친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배웠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하느님은 외로운 인간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한다.(P260)

- 하느님과 투쟁을 할 때조차 ‘욥’은 하느님이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계속 요구할 뿐이다.(P265)

-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임을 알았다. 동시에 그분이 자신들을 

  박해함을 받아들일 때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P266)

- ‘욥’은 커다란 상실 가운데 길을 찾아 헤매는 모든 현대인의 인도자다.

   기도서 이후로 ‘욥’은 개인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P273)

- ‘욥기’는 신이 부재한 것처럼 보일 때, 세계가 윤리적으로 불합리해 보일 때, 특히 정의가 

  실추되고 의미가 부정되어 상실과 고통을 겪을 때 오히려 신의 존재를 가장 예리하게 감지

  할 수 있다는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P273)

- ‘욥기’는 예언적 행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관상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는 책이기도 하다.(P281)

- ‘욥기’는 삶의 한가운데서 상실을 겪은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천민들, 희생양들, 사대의 

  이단자들이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준다.(P283)

 

 

주워들은 이야기

 

- ‘성서’를 뜻하는 영어 단어 ‘바이블(Bible)'은 ’책들‘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비블리아‘에서

  나왔다.

- ‘미드라시’란 히브리 용어로 성경 주석의 설교 방식을 뜻한다

- 성무도일 : 매일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성직자, 수동자들이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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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질문 -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 외 지음 / 다산초당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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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영국의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과 한국의 고승 네 분(성파, 도법, 금강, 정관)과의 평범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원초적 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이야기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개신교 신자인 이같은 작품을 접한 이유는 편협 된 종교관에 매몰되어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노력(?) 때문으로 속된 말로 좀 있어 보이려고 접하게 되었다.

 

난 개신교도이지만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논리인 ‘내 종교만이 최고’다 라는 생각은 갖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나의 종교와 종교적 신념이 중요하면 타인의 종교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기에 기꺼이 이런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거의 역적 수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아닌 것 아니다 -

가끔 언론을 통해 내 종교가 좋은 것이니 타 종교를 폄훼하는 일부 몰상식한 개신교도들의

사고치는 소식을 들으면 참으로 속상하며 진정으로 그들이 믿는 종교의 절대자께서 진정 그런

그들의 저급하고도 몰상식한 모습을 좋아 하실런지가 자못 궁금할 뿐이다. 절대 아닐 것이다.

 

최근 정권이 바뀌면 새로이 출범하는 정권이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경내를 관람하던 어떤 옹졸,

치졸빤스같은 인간이 불상에 절하는 다른 사람을 보고 난리를 친 사건이 일어난 모양인데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개신교도인 나만이라도 내 종교 외의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또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상대 종교에 대해 존경은 아니더라도 폄훼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그런 자세가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순복음 조용기 목사님을 부처님 오신날

조계종인지, 동국대인지를 방문해 종교와 관련된 특강을 과거에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타 종교의 거두께서 상대 종교시설에 가서 특강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상대편 종교인을 초빙한 불교인들에 대해서도 높은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그들의 성숙된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작품 속에서 눈에 들어온 대목은

“- 세상에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기분이 들 때는 바로, 나 자신에게 

   ‘어떤 틀’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 자기의 틀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것은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내가 그 ‘틀’을 깨야 한다.“

라는 대목으로 나이가 들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위의 글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종교를 떠나서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타협을 모르는 

정치인들, 갈라치기를 주업으로 삼고 사는 인간들은 위 문구를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한 대목은

“- 자신이 준 것만 따지는 사람은 불행하고,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대목은 성경의 말씀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고 생각하며 매번 위 문구처럼 살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를 않다. 그런 나는 오늘도 나의 절대자에게 위 문구처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품 제목 ‘오래된 질문’은 답이 없어 물어본지 한 참 지난 오래된 질문이 아니라 세상이,

시간이 흐르며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구성원들이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던져진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변할 수밖에 없기에 외견상 ‘질문’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질문이 아닌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잘 추슬러 보라는 ‘죽비적 가르침’을 던져주려는 작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

 

- ‘생명’이란 DNA나 두뇌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교류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재대로 대처하는 법을 배우면 

  쓸데없는 고통의 연쇄에 매이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깨달음은 일상과 동떨어지고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몰랐던 걸 알았다’, ‘잃었던 것을   

  찾았다‘, ’가려졌던 것이 벗겨졌다‘ 등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의 참모습, 이 세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경험적 지혜가 바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에 맞게 내 삶을 만들어가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 지금 현실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당면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 고통은 그 자체로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그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괴로움의 정도가 달라진다. 쓸데없이 과도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고통이 대부분 우리가

  관념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고통은 외부에서 주어진 상황이나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유래

  한다. 붓다는 이를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찾았다.

- 남들이 우리에게 붙인 이름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중도’라 부른다.

-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라.

- ‘염화 미소’란 말로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다.

- 시비, 분별, 번뇌, 망상이 있기 이전의 마음, 비교하기 이전의 마음, 나라고 하는 개념이 있기 

  이전의 마음, 부처님은 항상 그런 마음으로 행동한다.

- 그대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에 의지하여 내가 존재합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그대는 무한히 높은 자요, 귀한 자요, 고마운 자입니다. 그대 앞에서 나는 무한히 낮은 자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어야 하는 자입니다.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몸짓이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절’이란 주체적으로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삶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 자존심이 센 사람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남과 견주어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 ‘좌선(坐禪)’이란 번뇌와 망상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로 앉는 것을 말하는데

  ‘좌(坐)’란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것을 진짜 앉아 있다고 말한다

  ‘선(禪)’이란 어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고요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 ‘화두’는 반드시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거 계속 반복해서 되뇌면서

  평화로운 본연의 마음 상태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감정에 휘둘리거나 쉽게 끌려가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금강’이라 한다.

- 참선은 삶을 다르게 인식하는 방법

- 진정한 삶의 변화는 저 멀리 특별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창조하는 주인으로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 삶은 내가 마음먹고 행동하는 대로 살아지고 창조될 뿐이다.

- 남과 자꾸 비교할수록 내 행복이 점점 줄어든다. 내가 처한 지금의 환경과 함께하는 사람들,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교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 동양에서는 왼손을 ‘체(體)’라 하고 오른손을 ‘용(用)’이라 한다.

  ‘체용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동양 철학의 아주 오래된 패러다임이다.

  ‘체’는 사물의 본체나 본질을 의미하고, ‘용’은 사물의 작용이나 현상을 의미한다.

- 사찰음식에는 마늘, 파, 달래, 부추, 아위 이렇게 5가지 ‘오신채’가 들어가지 않는다.

- 인생에서 좋은 때라는 것은 따로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가장 좋은 때이자 좋은 삶이다.

 

* 출판사에 표하는 이의제기

- P 46쪽에는 도법스님이 17살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P 24쪽에서 이미 도법스님은

  18살에 출가한 것으로 씌여져 있다.

  독자는 이런데서 출판사에 대한 신뢰, 편집인에 대한 신뢰를 눈여겨 보게 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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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 ㅣ Jesus facebook 시리즈 1
유기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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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천 권유도 초심자 7,

             비신자 8


책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작품을 읽던 해당 작품으로부터 ‘정신’과

‘마음’에 모르게 꽂히는 문구가 1~2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숨기고 싶었던 나의 심중을 헤아려주는 듯, 상처 입은 나를 어루만져 

주듯 나아가서는 내가 그리던 부모님이 내게 들려 주는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문구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해당 작품에서 그런 문구를 마주했다.

평소 읽던 성경에서 혹은 기타 작품에서 자주 보던 문구이기도 했지만 왜 지금 나를 

자극하는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작품을 읽던 심정이 그 문구와도 같은 상황을 갈급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당 문구는

-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면 나도 나를 사랑해야 마땅하다’

- ‘정작 주님이 저를 인도하시려고 할 때 제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P185)

-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선포하고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 하신다. (P236)

아무튼 작품을 읽으며 마음으로 다가왔던 문구를 정리하며 그 분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하며 그 분을 사무하는 나의 마음 속에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믿음은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이다. (P 26)

- 우리의 목표는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봐 문제가 생각나지 않게 되는 것. (P 33)

- 성공은 준비가 먼저 필요하다. 그 준비는 항상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으로 성공은 산의 정상과 같아서 오래 누리지 못한다. 순간에 지나간다.

  따라서 준비되지 못한 자는 성공하고 망한다. (P 35)

- ‘당신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순종이 어려워서라기 보다 ‘마음’의 문제이다. (P 50)

- 성경이 권위자의 명령이라고 해서 모든 명령을 다 그대로 따르라고 하지는 않는다.

  결국, 잘못된 권위에도 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잘못된 권위에 대한 해석은 

  누가 내리나?

-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가 가장 개혁적인 사람이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P 59)

  --->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믿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

        하는 자가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곧, 자아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P 60)

- 우리의 문제는 악한 자에 대해 분노하면서 우리 자신도 똑같이 악하다는 것이다. 

  개혁한다고 하면서 잘못하면 또 다른 악한 자가 악한 자를 제거하는 셈이다.

-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은혜 받은 것도 믿은 것도 아니다. (P 64)

- 두려운 마음이 들수록,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여 살기를 더욱 힘쓰라. (P 67)

  ---> 정말 두려운 것은 주님과 친밀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이다.

-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게 

  하시는 분, 성령님의 역사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다. (P 73)

- 찬송가를 좋아서 부르지만 말고 그 찬송 가사를 주 예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하고

  불러라. (P 85)

- 좋고 싫음의 판단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의 마음만 구해야 한다. (P 91)

- 주님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왜 기도를 ‘오래’, ‘꾸준히’

  하는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가 좀처럼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P101)

- 믿음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이다.

   ---> 두려움이 없는 믿음으로 살려면 분명한 대가 지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P109)

- 양이 이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목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 예수께서 “내게로 오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자고 부르신 것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기 원하심을 믿는

  것이다. (P146)

- 마귀가 우리를 지배할 때는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한다.

  --->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되 24시간 

        하자는 것은 철저히 하자는 것이다. (P173)

-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주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것으로 살아

  가면서 잘되고 못되는 일을 겪는 것은 오직 주님과 더 친밀해지는 계기일 뿐이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데 있다. 기도 응답은 선물일 뿐이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기도 응답만 바라보면, 기도조차 스트레스가 된다.

                                                                                            (P214) 

 - 우리의 자아가 죽었다는 말은 육신의 소욕이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235)

  또한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P245)

-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나타내시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P258)

- 우리가 반복되는 실패에서 구원받는 길은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 예수님을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P267)

-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데도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차원에 머물렀지 “예수님으로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P285)

- 나를 힘들게 한 독일 뤼벡교회의 돌판 문구 ‘주(主)는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신앙적 에피소드

1. 4 * 7 = 27이라고 우기는 놈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

2. 길을 가다 만나 복면강도를 만나는데 그 강도는 자기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 자기를

   괴롭히더란다. 그래서 그 강도를 붙잡아 복면을 벗겼더니 그 강도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책에서 얻은 지식

- 유대인들 머리에 쓴 모자를 '키파(Kippah)'라 하는데, 이는 ‘내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는 상징을 나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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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묻고, 톨스토이가 답하다 - 내 인생에 빛이 되어준 톨스토이의 말
이희인 지음 / 홍익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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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3


작품은 ‘톨스토이’라는 대 문호를 작품 제목에 언급해 대중의 선택을 받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했고, 작품 중간부분까지 읽을 동안 내게 그다지

큰 감흥이나 어떤 느낌을 전해주지 못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작품으로 다가오게 하여 

저자와 출판사의 ‘책팔이’ 마케팅 전략에 내가 요번에도 속았다고 느끼며 작품을 고르는

안목에 스스로 자책할 즈음 맞이한 저자와 출판사의 ‘훼이크적 전략’에 분노보다는 

보다는 그렇지 않은 감정, 즉 우호적인 감정이 더 밀려들어 와 나 스스로도 약간 놀랐다.


저자는 톨스토이의 명작인 <안나 카레리나>, <전쟁과 평화>,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이라는 작품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죄와 벌> 등에 나온 인물과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인생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많은 분들은 작품에서 언급된 여러 작품을 전부 다 읽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작품을 

접하게 되면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여러 소주제에 대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기에 별도의 작품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저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몇 가지 꼭지들을 정리해 보았다.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다 서로 비슷한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어느 경우나 그 불행의 

  상태가 다른 법이다.

- 하나님은 십자가를 내려 주시지만 그걸 짊어지고 갈 힘도 함께 주신다.

-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은 주제를 뭐라 한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삶에 특별한 주제가 있을 수 없듯이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한 위대한 작품들에

  이렇다 할 주제가 없는 게 마땅하다. 가장 훌륭한 작품은 주제가 여러 가지로 읽히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P 34)

- 클리셰(cliche) ① 진부한 ② 케케묵은(hackneyed) ③ 진부한 상투어

  즉,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를 이르는 말

- 미래의 사랑은 없다. 사랑이란 언제나 지금 현재의 행위다. 사랑을 지금 보여 주지 

  않으면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P 45, ‘인생이란 무엇인가’)

- 모든 종류의 복수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나 소설이 심어 준 일종의 환상이다.

  현실의 생활에서 일반인들의 복수가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복수를 허용할 만큼

  법이 녹록하지 않으며, 복수의 대상인 상대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중략) 

  억울한 일을 당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내가 그들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중략) 모든 일의 최고의 복수는 그 불의한

  자들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P 61)

- 인생의 시간이 많이 남았다 생각하는 이라도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게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 크게 공감하는 대목이다.


(반성 1) 내가 아닌 타인의 잣대로 살았다.

  난 내가 조금씩 조금씩 산을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산을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지. 그래, 이제 다 끝났어 죽는 일만 

  남은 거야!!!. (P115)

  ---> 타인이 만든 룰과 규칙, 자본이 만든 유행과 트렌드에 조종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부추겨진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나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나를 바라보거나 기대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P119)

(반성 2) 경쟁이 내 인생을 망쳤다.

  경쟁 대신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비록 당장 인정받지 못하거나 평생 인정받지 

  못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는 성정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인생의 승자다.

  ---> 경쟁심으로 어떤 아름다운 것도 만들 수 없고, 오만한 마음으로는 어떤 고귀한

         것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P124)

(반성 3) 집만 넓혔지 행복은 넓히지 못했다.

  한번 비대해진 욕망은 줄이거나 조절하기가 어려워지는 게 사람의 성정이다. 

  우리를 길들이는 것은 ‘편리함’의 유혹이다. 이 말은 반대로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잃어버린 의미와 태도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얘기가 된다. (P128)

- 오래 지속되는 사랑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P145)

- 진실이 선한 것은 아니며, 선하다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P146)

  ---> 철학자들에 따르면 ‘진’과 ‘선’과 ‘미’를 분리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순전히 칸트

        철학의 공헌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진리는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아름다움은 진리라는 식의 생각들이 사람들 머릿속에 

        굳게 자리 잡았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같지 않으며 그 각각의 경계를 칸트가

        분명히 했다.

        진리는 ‘순수이성비판’으로, 선에 대해서는 ‘실천이성비판’, 아름다움과 추함은 

        ‘판단력비판’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는데, ‘과학’이나 ‘윤리학’에 이어 ‘미학’

        이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된 것은 모두 칸트에 와서 가능해진 일이다. 

                                                                                                  (P 148)

- 분노는 반드시 그것을 불러일으킨 상대의 행위 이상으로 유해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종종 분노에 사로 잡혀 그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분노 속에

  일종의 남자다움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멈추지 않고 달려갈 것을 다그치는 ‘속도’와, 적은 노력으로 최대한 많이 얻을 

        것을 요구하는 ‘효율’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속도와 효율을 무한대로 강요

        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부여안고 살 것을 강요한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되고, 조금 덜 이익을 보아도 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P87)

-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선 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P191)

-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를 두려워하라.

  --->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 부를 늘리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부패한 

         정치인이나 부도덕한 사업가들과 같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P197)

- 무엇보다 먼저 좋은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평생 그 책을 읽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P202)

- 책은 여행을 부르고, 여행을 다시 책을 부른다. 세 개의 길을 통해 우리는 예지에 도달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색의 길로, 이것은 가장 고상한 길이다. 

  두 번째는 모방의 길이며, 이것은 가장 쉬운 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경험의 길인데 이것이 가장 힘든 길이다. (P203, 공자)

-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경험들은 나를 키우는 스승이 된다. (괴테)

-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만한

  사람들이었다.(P208)

- 스스로 높이는 자는 신에 의해 낮춰지지만 스스로를 낮추는 자는 신이 그를 높여 

  주리라.(탈무드)

- 지금 당장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남겨진 시간을 뜻밖의 

  선물로 생각하고 살아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가장 눈에 뛰는 현상은 필요 없는 지식을 산처럼 채워 넣고 자신을 학자나 교양인, 

  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의의도 모르며 오히려 그 모르는 것을

  자랑하는, 깊은 미망의 구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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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2 - 나를 떠난 글이 당신 안에서 거듭나기를 ㅣ 이어령의 말 2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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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선거철이다 보니 아무리 사소한 사항을 언급하신 내용이라도 해당 글을 접하게 되면 

특별한 이유나 문구가 함의한 관점에 특별한 의미가 없어도 일단 선거와 관련된 인물

혹은 특정 집단의 부정적인 모습과 자꾸 연관시키게 되는 이상한 방향으로 해당 내용

과 문구가 내게 ‘훅’하고 다가오니 심히 착잡하다.

지금은 또 ‘투표용지 부족으로 인한 참정권 제한’이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으로 ‘재선거’

운운하는 집회가 열혈 시민들에 의해 여기저기서 열리는 모양인데 과거 특정 집단이 ‘광우병’과 ‘후꾸시마 원전’을 갖고 상대방에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어깃장을 놓으며 

온갖 단물을 쪽쪽 빨았던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 되는 가운데 특정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이상하게 꼬아서 또다시 표 몰이하는 방식을 통해 변하지 않은 일부 

질 낮은 인간들이 즐겨 쓰는 단물 빨기 작전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인간은 안 바뀐다’

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크게 느끼고 있는 순간이다. 참으로 징그럽다.

하여간 이 꼴 저 꼴 보기 싫은 가운데 책을 펼치자 작품 속에서 마주한 ‘치매(P201)'를 읽으며 요즘은 존재 가치가 거의 바닥 수준인 과거 ’만나면 좋은 친구‘라는 슬로건으로 재미 좀 본 회사 출신의 특정인이 과거에 했던 ‘치매 노인’ 발언이 떠올랐는데, 과거 

그의 발언은 아마도 자신은 치매에 걸리지 않을 듯해서 행한 것으로 보이나 그들의 

후배들이 최근 벌이고 있는 여러 수준 낮은 작태를 보면 그와 그들의 후배들 역시

‘치매’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거 때만 되면 노인을 폄하하는 젊은 정치인들의 수가 늘고 있습니다. 노인성 치매와 달리 청년성 치매는 자기도 곧 아버지처럼 늙게 된다는 뻔한 사실을 잊어버릴 때 발생하는 병이지요’

위와 같은 문구가 나를 자극하다 보니 또 이런 문구도 눈에 들어옵디다.

‘별을 만들어낸 건 하늘이지만 별자리를 만들어낸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P125/별자리)

언뜻 읽으면 그냥 무색무취의 문구이면서 단순한 내용으로 치부해도 이상할 게 없는 

문구이지만 내게는 해당 문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리더는 하늘이 내나, 리더의 자취는 그 리더가 지닌 인격이고 인품에 따라 이루어져 

 간다.’

라는 말로 변환되어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입만 열면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국민을 대표’ 한다고 철면피한 면상 치켜들고 난리치며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특정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질 낮은 인간 - 이 인간 말고도 더 있다 - 이 떠올라서인데 이런 질 낮은 인간의 출현을 예측해 질 낮은 인간들을 질타하는 글을 선견지명 있게 언급해 주신 교수님의 혜안에 머리 숙일 뿐이다.

위 문구와 그렇게 긴밀한 연관성을 갖지는 않지만 그래도 억지로 해석해 연관시켜 보면 최근 천만 돌파 영화로 각광받고 있는 ‘왕사남’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한명회’라는 인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는 훗날 ‘부관참시’의 형벌과 함께 그의 자손들(1남 4녀)까지도 그리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국민을 대표한다고 하면서, 위기의 정국을 타개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토사구팽’ 당할 것이 뻔히 보이는 데도 나는 아닐 것이라고 충견처럼 짖어대는 꼴이란 애처롭기 그지없고 여기저기서 짓고 까불고 있는 정치 모리배들의 앞날과 연관되어 위 문구는 내게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


한마디를 덧붙이면 최근 우리의 ‘입법권’이 ‘사법권’을 우습게 여기고 난리도 아닌 사항이 자주 연출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사법권을 가진 그들 스스로가 ‘화’를 자초한 결과로 나타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초 법에 정해진 절차대로 법을 집행했다면 국민들을 대상으로 크게 외친 내용대로 

법을 집행했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사안을 갖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기회를 

놓치니 별의 별 놈들이 거기에 편승해 다수의 힘을 믿고 내로남불을 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고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가는 과거 6.25전쟁 직전 우리 대대급 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넘어간 ‘강태무’와

‘표무원’에 대해서도 ‘전쟁 방지를 위해 국가 평화통일에 앞장 선 선각자’로 탈바꿈시켜 포상하자고 덤벼들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역사 속 과거를 교훈삼아 미래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발췌해 자신들 잇속만을 챙기려는 집단들과 기득권층에 짜증이 날 뿐이며 아직도 죽어서도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해 구천을 헤매고 있을 전임 통수권자의 사례가 자신들에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는 그들을 보면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봉숭아 학당의 ‘맹구’가 생각날 뿐이며 진시황 탄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거상 ‘여불위’

같은 인간들만 난무하는 철면피한 저질 인간들의 향연장이 되어 버린 우리의 여의도가 애처로울 뿐이다.


아무튼 할 이야기는 많고도 많지만 교수님의 작품을 통해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다.

위에 언급한 ‘별자리’라는 문구 아래에 ‘애국’이라는 내용의 글이 있다.

‘히틀러는 독일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 그는 너무나도 독일을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맹목적인 사랑이 그의 조국을 망치게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애국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가 아니고 애국하는 방법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선거철이니만큼 모두가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아주 명문구도 있었다.

‘전쟁은 상대방을 섬멸시킬 때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정치나 기업은 상대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서 완전한 승리를 얻는다.'(P188 / 승리)

너무도 명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작품 후반부의 내용은 죽음을 앞둔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 같은 느낌의 내용이 연속되고 있어 너무도 쓸쓸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어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18. 생명 : 모태와 무덤 사이’의 전체 내용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의 연속이었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삶과 죽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있었다. 


308쪽에서 ‘인간’이라는 소제목으로 언급되고 있는 내용

‘영어로 어머니의 자궁은 움womb, 무덤은 툼tomb이다. 자궁의 w를 t로 바꾸면 

 무덤이 된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모태와 죽음이라고 하는 무덤의 사이에서 잠시 

 사는 것이다.’


또 311쪽의 ‘생애’에서는 ‘인간의 한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탄생과 사망이다. 생의 시초와, 그리고 그 생의 마지막보다 대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탄생을 기억할 수 없고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말할 수 없다.’

 

329쪽의 ‘준비’에서는 ‘열매들은 꽃의 진정한 죽음들이다. 아무리 향기로운 과일도 

끝내는 썩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동그란 죽음 속에는, 모든 그 과일 속에는 내일의 

생명인 씨앗이 박혀 있지 않는가, 그렇다. 부패의 죽음 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무슨 말과 느낌으로 선생의 고언을 정리하며 나의 생각을 나열하겠는가...모든 근심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그토록 사랑하셨던 따님과 편히 쉬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 사람을 위해 돈을 써보면 안다. 그 돈이 아깝지 않다는

  건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P 21 / 돈)

-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을 할 때에는 부자가 함께 웃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물을 할 때는 부자가 함께 운다. (P 26 / 아버지)

- 세미오시스 semiosis

‘노웨어nowhere = 어디에도 없다’, ‘나우 히어 now here = 지금 여기에’ 이렇게 글자 

하나만 고치면 바뀌는 것.(중략) 글자로는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님’이 되는 것 이걸 ‘세미오시스’라고 합니다.

창조 중에서 돈 안 들고 제일 쉬운 방법이 언어 조작입니다. 이걸 독재자들이 다 썼어요.

언어 조작에 의해서 이념을 조작하는 거예요. 

가령 ‘저 사람들이 세뇌 됐어’ 하면 ‘아, 무서워’하지만

‘제가 의식화 됐어’ 그러면 박수치는 거예요....(중략) (P 39 / 세미오시스)

- 편리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순간 생명은 그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 독특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P111 / 진화)

-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할 때 인간은 여태까지 열 길 물속을

  재는 기술만 개발했지, 한 길 사람 속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기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화란 한 길 사람 속을 아는 기술입니다. 사랑하고 믿고 눈물 흘리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기술로 한 치도 해결하지 못하는 데 문화는 그것을

  해석한단 말입니다.(중략) 이게 진짜 문화에요. (P116 / 문화)

  ---> 문명이 ‘액셀러레이터’라면 문화는 바로 그 ‘브레이크’에 해당합니다.

                                                                                 (P123/브레이크)

- 앞으로 오게 될 문화자본주의를 맞기 위해서는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과, 삶의 목적은 노동의 고통이 아니라 여가의 즐거움과 창조적인 기쁨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P120 / 여가)

- 단추는 위에서 아래로 채워가는 것이지만 지퍼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잠가야 한다.

  개혁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야만 성공을 거둘 수가 있다. 

  지퍼 역시 첫 단추를 끼우듯이 올리기 전에 이를 잘 맞춰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서 걸려 잠겼던 것이 풀어지고 지퍼는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게 된다.

                                                                                     (P121 / 개혁)

- 문화라는 말은 언뜻 뭔가 수준 높아 보이고 좋은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이 자연 속에서 그냥 살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낸 궁여지책일 뿐입니다. 짐승들은

  문화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저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만들고 문명이라는 것도 만듭니다. (P127 / 사회)

- 사회가 바뀌려면 누군가가 나쁜 짓이라도 해야 한다. 가만히 있는데 사회가 바뀌지는

  않는다. 자물쇠는 도둑에 의해 발전했다. 도둑은 나쁘지만 자물쇠를 만드는 사람은 

  그 도둑 때문에 보다 나은 자물쇠를 만들어서 먹고살고, 그로 인해 더 완전한 기술들

  이 발전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그 자체는 법이지만, 그로 인해 약점이 발견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보완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 많다. 그건 것을 필요악이라고

  한다. (P165/ 필요악)

- 헴록hemlock은 소크라테스가 처형될 때 마신 독약으로 한국 말로는 독미나리.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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