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와 만나다 -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한 운명의 책 ㅣ 비아 만나다 시리즈
마크 래리모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7(전문가), 비전문가(3)


주님에 다가선지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심자 수준인 나의 신앙심을 제고하기 위해

본 작품을 선정해 읽게 되었다.

성서 욥기는 대체적으로 ‘위로를 주는 책, 자기 수양을 돕는 책, 혼란을 대변하는 책’이라는

세인들의 평가를 가슴에 담고 또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욥에 대한, 욥기가 품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알아보자는 아주 단순 무식한 수준에서 작품에 도전했는데 결론적으로 아주

혼쭐이 난 작품이었다.

종교학 및 종교철학 공부를 3년 이상(?) 하였거나 현직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는 분 아니면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높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나와 같은 무지몽매인 종교적 문외한은 가급적 도전하지 않기를 권유합니다.

 

생뚱맞게 욥기는 누가 지었는가, 욥기는 여러 작품이 짜깁기 된 것이다. 욥은 유대인인가?

등등 성경을 단편적으로 접한 나에게 작품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런 질문은 작품을 읽는

내내 나를 시련의 연속으로 몰고가는 질문이었다.

따라서 나와 같은 종교적 깊이가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품이 던지는 심오한 질문이나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기신 저명하신 분들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여러 사항을 단문 위주로 정리하는 수준에서 해당 작품을 정리해 보았다.

그 내용도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것은 확신이 서지를 않지만 .......

 

참고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욥의 유언 필사본은 10세기 사본이며 오늘날까지도 욥의 전설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설명이 담긴 문헌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종교적 깊이가 낮은 분들은 가급적 본 작품을 외면하시기 바랍니다.

궁금하더라도 말입니다.

 

[서 론]

- ‘욥기’는 분명 성서에 속한 어떤 책보다도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데 악의 문제에 관한

  성서의 답변으로 이해되곤 한다.

-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에서 무고한 이들은 언제나 고통 받는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시지만 동시에 언제나 그들은 도울 방편을 마련해 두신다고 말한다.(P 9)

- 그리스도교 장례 의식을 치를 때 성직자들은 ‘욥’의 연설을 인용하곤 했다. 

  ‘욥’이 인내의 한계를 규정해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P 21)

- 손쉬운 이해를 거부하는 ‘욥기’의 면모는 그 자체로 ‘욥기’를 둘러싼 신비의 일부가

  되었다.(P 24)

- ‘욥기’가 제기하는 물음들, 섭리와 악, 무고한 이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 하느님의 본성,

   피조물 가운데 인간의 지위 등은 모두 손쉽게 종결될 수 없는, 종결되기를 거부하는

  물음들이다.(P 24)

- ‘욥기’의 중심 대목은 널리 통용되는 지혜를 늘어놓는 ‘욥’의 친구들(엘리바즈, 빌닷, 소바르)을 

  하느님이 질책하는 부분이다.(P 25)

- ‘욥기’의 전기는 수 세기 동안 등장한 욥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

   즉 자신이 ‘욥’이라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그와 관련된 이야기의 의미를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한 독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P 32)



[고대 해석자들이 바라본 욥기]

- ‘욥기’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해석인 ‘인내하는 욥’이다.(P 36)

- 그리스도교들은 ‘욥’을 그리스도의 예형(type)으로 보았다. 히에로니무스는 ‘욥기’ 주석에서

  ‘욥이라는 이름은 슬픔과 고통을 뜻한다고 주장. 그는 그리스도의 원형이었다’(P 39)

- 번영은 재앙을 수반한다. 절망이 희망을 수반하듯(P 48)

- ‘욥’의 유언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P 50)

-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네 우리가 주님에게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보여 주실 때까지 인내합시다.

- ‘제임스 쿠걸’이라는 유대인 성서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고대 해석자들’의 작품

  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빌론 유수 이후 지신들의 경전에 새로운 해석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

   1) 성서는 근본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문헌이다. 즉, 성서에 A라고 적혀 있을 때 흔히 실제 

     의미는 B다.

   2) 성서는 당대 독자를 위한 교훈을 담고 있다. 성서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역사책이 아니다. 성서는 유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3) 성서는 모순이 없으며 실수도 없다.

   4) 성서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주셨으며 하느님은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예언자들을 

     거쳐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P 60)

- 절망에 사로잡힌 채 울부짖는 ‘욥’의 말, 그의 분노 어린 말들은 ‘욥’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성서 

  전체의 것,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의 것이다.(P 62)

- 그리스도교 해석자들에게 구약 성서를 해석하는 열쇠는 신약 성서였다.(P 75)

- 모세의 율법을 읽는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으며 이 너울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이 ‘주님(예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진다.(P 75)

- 중세 그리스도교의 토대가 된 ‘욥’기에 관한 저작은 하나다. 바로 기원후 578년에서 595년

  사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저술한 ‘욥기의 교훈들이다.(P 77)

- ‘욥’은 경건한 인물이지만 더 많은 의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상징이기도 하다.(P 78)

- 자신이 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영혼을 해지는 것은 없다.

-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평온함이다.(P 82)

- '고통'은 죄라는 '암'을 퇴치할 때 필요한 '화학요법'이다. 문제는 하느님이 사악한 

  이들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선한 사람들을 치료

  하지 않는 것이다.(P 83)

- 어떤 행동이 그 당시에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가치 있는 예언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종종 있듯 

  어떤 상황이 역사적 차원에서는 미덕이지만 그 의미와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악인 경우가 

  자주 있다.(P 85)


 

[논쟁 속 욥기]

- 에피크로스는 물었다.

  “신은 악을 없애고자 하나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사악하다. 신은 악을 없앨 수 있으며

  악을 없애려 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악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P 92)

- ‘욥기’는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묻기보다는 하느님의 본성을 묻는 책이다.(P 93)

- ‘욥기’는 신성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서곡,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섭리에 관해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문헌이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과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욥기는 섭리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 참여하는

  (그리고 참여하지 않는) 방법을 보여 주는 책이다.(P 95)

- ‘욥기’는 인간이 가장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철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P 96)

- ‘욥’과 친구들의 발언은 그것이 긍정하는 내용보다는 부정하는 내용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P105)

- 악은 엄밀한 의미의 실체가 아니며 본질상 선한 모든 피조물에게 기생충처럼 붙은 결핍

  혹은 왜곡이다.(P110)

- 중요한 것은 섭리(우리는 이를 알 수 없다)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다(P115)

-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칼뱅에게 ‘욥기’가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이 피조물보다 너무나 높이 있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올바름의 규범조차 궁극적이지 않음을 ‘욥기’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컬뱅이 보기에 ‘욥기’를 읽는 실마리, ‘욥기’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논쟁에서 ‘욥’은 

  선한 편을 고수하는 반면, 그의 적대자들은 악한 편을 고수한다는 점이다”(P121)

  "‘욥’과 친구들이 재기하는 물음은 동일하다. 즉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

  하는가? 그에 따르면 ‘욥’은 우리가 고통을 겪게 될 때 ‘욥’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다른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욥’의 친구들처럼 응답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P122)

-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는 겸손과 침묵을 지키며 다른 이가 고통 받을 

  때는 그를 배려하고 위로한다.(P125)

- 섭리문제를 정직하게 마주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자리, 즉(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기는 하지만)하느님에게서는 멀고 인간 동료들에게는 가까운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P130)

 


[공연되는 욥기]

- 수 세기에 걸쳐 ‘욥’ 성인은 나병 환자, 음악가, 공처가, 심지어 매독 환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P135)

- 그리스도교인들은 ‘욥’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을 배웠다.(P139)

- ‘욥’ 이야기는 참되고 확실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이야기인 것 못지않게 거짓 위안과

  감언이설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P150)

- 구원에 대한 믿음은 섭리에 대한 확신과 인내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렵고 유지하기 힘들다.

-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인내를 통해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P160)

- 짧은 생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계속 애통해하고 불평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현명한 이들은 이 세계라는 ‘깊은 구렁텅이’를 순례하는 동안 인내심을 기른다.(P163) 

- 철학자들은 이성 너머 저편에서 오는 도움이나 통찰을 받아들이기 위해 혹은 적어도 고결한 

  습관을 갖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의심을 다른 의심으로 대치하곤 했다.(P168)

 


[신정론과 욥기]

* 신정론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하나님의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는가를

  학문적으로 모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데, 왜 세상에 악이 존재 하는가? 이 세상에 모순이

  이렇게도 많은가?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것을 볼 때, 혹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은

  아니신가? 하는 회의(懷疑)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 신정론이다.

   그리스어로 ‘신’을 뜻하는 ‘테오스(theos)'와 올바름을 뜻하는 ’디케(dike)'를 합쳐

  ‘신정론(theodicy)'라는 말이 나왔다.(p186)

 

-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 

  설령 활동한다 해도 신이 정녕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물었다.(P182)

- 하느님은 왜 악을 용납하는가? 사람들이 악을 당연하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여기지 않게되자 

  악은 독특한 철학적 문제가 되었다.(P185)

- 칸트는 ‘욥기’를 성서, 교회 전통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채 도덕적 자율성을 지니고 신과 

  대면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보았다.(P192)

- 자신의 동기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이해의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진다.(P197)

- 참으로 고귀한 일은 고통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이다.(P197)

- 종교는 도덕 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칸트), 종교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코헨) (P198)

- 고통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처벌이다.

-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은 성서에 나오는 주장이나 성서가 그리는 사건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 너머 핵심에 있는 시적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욥기’는 그 중심이 

  되었다.(P202)

- ‘욥기’에 담긴 신의 선물은 ‘욥기’가 표현하고 또 빚어내는 인간의 감정이다.(P205)

- 자신의 경건함으로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하면서도, 경건함 때문에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인정했다. 바로 그 사이에서 사탄이 나왔다.(P222)

- 모든 고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여정의

  결과다.(P223)

 

 

[추방당한 욥기]

- 하느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경이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욥기 28:28)

  이 구절을 ’욥기‘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P234)

- 역사 비평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준 가장 좋은 도구를 활용해 성서를 이해하려는 선의를 담은 

  노력이라 할 수 있다.(P237)

- ‘욥’이 보여 주는 ‘인내’는 그의 비판과 저항을 포함할 때 더욱 심오해진다.(P250)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침묵만이 궁극적으로 기억과 희망이라는 역설적 임무에 온전히

  부합하는 실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침묵이 전도서의 지혜와 같은 지혜를 보여 주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P259)

- 신앙은 답이 아니라 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이름 ‘엘(EL)'은 물음을 뜻하는 말인 ‘셰엘라(she'elah)'안에 머물고 있다.

  ‘욥’은 자신이 차갑고 냉소적인 세계(참된 친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배웠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하느님은 외로운 인간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한다.(P260)

- 하느님과 투쟁을 할 때조차 ‘욥’은 하느님이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계속 요구할 뿐이다.(P265)

-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임을 알았다. 동시에 그분이 자신들을 

  박해함을 받아들일 때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P266)

- ‘욥’은 커다란 상실 가운데 길을 찾아 헤매는 모든 현대인의 인도자다.

   기도서 이후로 ‘욥’은 개인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P273)

- ‘욥기’는 신이 부재한 것처럼 보일 때, 세계가 윤리적으로 불합리해 보일 때, 특히 정의가 

  실추되고 의미가 부정되어 상실과 고통을 겪을 때 오히려 신의 존재를 가장 예리하게 감지

  할 수 있다는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P273)

- ‘욥기’는 예언적 행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관상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는 책이기도 하다.(P281)

- ‘욥기’는 삶의 한가운데서 상실을 겪은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천민들, 희생양들, 사대의 

  이단자들이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준다.(P283)

 

 

주워들은 이야기

 

- ‘성서’를 뜻하는 영어 단어 ‘바이블(Bible)'은 ’책들‘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비블리아‘에서

  나왔다.

- ‘미드라시’란 히브리 용어로 성경 주석의 설교 방식을 뜻한다

- 성무도일 : 매일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성직자, 수동자들이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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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질문 -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 외 지음 / 다산초당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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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영국의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과 한국의 고승 네 분(성파, 도법, 금강, 정관)과의 평범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원초적 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이야기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개신교 신자인 이같은 작품을 접한 이유는 편협 된 종교관에 매몰되어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노력(?) 때문으로 속된 말로 좀 있어 보이려고 접하게 되었다.

 

난 개신교도이지만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논리인 ‘내 종교만이 최고’다 라는 생각은 갖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나의 종교와 종교적 신념이 중요하면 타인의 종교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기에 기꺼이 이런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거의 역적 수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아닌 것 아니다 -

가끔 언론을 통해 내 종교가 좋은 것이니 타 종교를 폄훼하는 일부 몰상식한 개신교도들의

사고치는 소식을 들으면 참으로 속상하며 진정으로 그들이 믿는 종교의 절대자께서 진정 그런

그들의 저급하고도 몰상식한 모습을 좋아 하실런지가 자못 궁금할 뿐이다. 절대 아닐 것이다.

 

최근 정권이 바뀌면 새로이 출범하는 정권이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경내를 관람하던 어떤 옹졸,

치졸빤스같은 인간이 불상에 절하는 다른 사람을 보고 난리를 친 사건이 일어난 모양인데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개신교도인 나만이라도 내 종교 외의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또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상대 종교에 대해 존경은 아니더라도 폄훼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그런 자세가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순복음 조용기 목사님을 부처님 오신날

조계종인지, 동국대인지를 방문해 종교와 관련된 특강을 과거에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타 종교의 거두께서 상대 종교시설에 가서 특강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상대편 종교인을 초빙한 불교인들에 대해서도 높은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그들의 성숙된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작품 속에서 눈에 들어온 대목은

“- 세상에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기분이 들 때는 바로, 나 자신에게 

   ‘어떤 틀’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 자기의 틀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것은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내가 그 ‘틀’을 깨야 한다.“

라는 대목으로 나이가 들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위의 글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종교를 떠나서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타협을 모르는 

정치인들, 갈라치기를 주업으로 삼고 사는 인간들은 위 문구를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한 대목은

“- 자신이 준 것만 따지는 사람은 불행하고,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대목은 성경의 말씀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고 생각하며 매번 위 문구처럼 살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를 않다. 그런 나는 오늘도 나의 절대자에게 위 문구처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품 제목 ‘오래된 질문’은 답이 없어 물어본지 한 참 지난 오래된 질문이 아니라 세상이,

시간이 흐르며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구성원들이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던져진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변할 수밖에 없기에 외견상 ‘질문’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질문이 아닌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잘 추슬러 보라는 ‘죽비적 가르침’을 던져주려는 작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

 

- ‘생명’이란 DNA나 두뇌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교류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재대로 대처하는 법을 배우면 

  쓸데없는 고통의 연쇄에 매이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깨달음은 일상과 동떨어지고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몰랐던 걸 알았다’, ‘잃었던 것을   

  찾았다‘, ’가려졌던 것이 벗겨졌다‘ 등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의 참모습, 이 세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경험적 지혜가 바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에 맞게 내 삶을 만들어가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 지금 현실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당면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 고통은 그 자체로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그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괴로움의 정도가 달라진다. 쓸데없이 과도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고통이 대부분 우리가

  관념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고통은 외부에서 주어진 상황이나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유래

  한다. 붓다는 이를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찾았다.

- 남들이 우리에게 붙인 이름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중도’라 부른다.

-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라.

- ‘염화 미소’란 말로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다.

- 시비, 분별, 번뇌, 망상이 있기 이전의 마음, 비교하기 이전의 마음, 나라고 하는 개념이 있기 

  이전의 마음, 부처님은 항상 그런 마음으로 행동한다.

- 그대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에 의지하여 내가 존재합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그대는 무한히 높은 자요, 귀한 자요, 고마운 자입니다. 그대 앞에서 나는 무한히 낮은 자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어야 하는 자입니다.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몸짓이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절’이란 주체적으로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삶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 자존심이 센 사람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남과 견주어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 ‘좌선(坐禪)’이란 번뇌와 망상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로 앉는 것을 말하는데

  ‘좌(坐)’란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것을 진짜 앉아 있다고 말한다

  ‘선(禪)’이란 어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고요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 ‘화두’는 반드시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거 계속 반복해서 되뇌면서

  평화로운 본연의 마음 상태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감정에 휘둘리거나 쉽게 끌려가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금강’이라 한다.

- 참선은 삶을 다르게 인식하는 방법

- 진정한 삶의 변화는 저 멀리 특별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창조하는 주인으로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 삶은 내가 마음먹고 행동하는 대로 살아지고 창조될 뿐이다.

- 남과 자꾸 비교할수록 내 행복이 점점 줄어든다. 내가 처한 지금의 환경과 함께하는 사람들,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교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 동양에서는 왼손을 ‘체(體)’라 하고 오른손을 ‘용(用)’이라 한다.

  ‘체용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동양 철학의 아주 오래된 패러다임이다.

  ‘체’는 사물의 본체나 본질을 의미하고, ‘용’은 사물의 작용이나 현상을 의미한다.

- 사찰음식에는 마늘, 파, 달래, 부추, 아위 이렇게 5가지 ‘오신채’가 들어가지 않는다.

- 인생에서 좋은 때라는 것은 따로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가장 좋은 때이자 좋은 삶이다.

 

* 출판사에 표하는 이의제기

- P 46쪽에는 도법스님이 17살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P 24쪽에서 이미 도법스님은

  18살에 출가한 것으로 씌여져 있다.

  독자는 이런데서 출판사에 대한 신뢰, 편집인에 대한 신뢰를 눈여겨 보게 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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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지음, 서은국 외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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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정말 시간 남는 사람 5  

                                                                                              한가한 사람 6

                                                                                              바쁜 사람 3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이란 없으며, 오직 우리의 생각이 그것을 믿는 것이리라’

 

작품을 다 읽고 어떤 내용으로 정리할까를 고민하던 중 우연히 마주한 어느 신문의 컬럼에서 이런 자료가 눈에 들어와 올려 본다.

“스위스에서 어떤 노인이 자신의 여든 살 생애를 세부적으로 나눠 계산해 보았다고 

 합니다. 결과는 미로우면서도 씁쓸했습니다. 그중 일부를 보면 

 잠자는 데 26년, 일하는 데 21년, 식사 시간 6년, 혼자 공상하며 낭비한 시간 5년, 담배

 피우는 데 1년, 세수하는 데 228일, 아이들과 노는 데 26일, 넥타이 매는 데 18일, 

 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린 시간 5년. 그중 행복했던 시간은 46시간이었습니다.

 행복을 위한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빈약하기만 합니다.“

신문 기사를 근거로 나를 비롯해 본 작품을 읽는 모든 이들은 결국 자기 인생의

‘46시간’을 알차게 보내고자 또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읽은 것 밖에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하고도 무척 짜증나는순간이었다. 

그런 짜증을 극대화시킨 것은 작품 제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었던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저자는 후기 글에 이렇게 쓰고 있는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나 승진, 해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경험하는 즐거움, 즉 행복인 것이다. 따라서 탁월한 선택이란 돈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즉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인생의 말년에 작품 제목처럼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고 싶었던 나’의 꿈과 희망을 해당 작품은 산산이 박살내고 있었다.

아무튼 작품을 읽으며 행복에 대한 나의 평소 지론을 확고히 하는 시간이었는데 내게

부여된 인생의 시간이 얼마나 부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폼 나고, 멋지고, 신나고, 즐겁고, 재미나고, 건강한 삶을 위해 열심히 살 것이다!!!’

작품 정리....제목에 부합되는 내용은 아닐지라도 머리에 담아두면 좋을 듯해 정리해 보았다.

 

- 오직 인간만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다. 다른 동물들이 과거에도 하지 못했고,

  현재 그리고 이후에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생각한다. 이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야말로 인간을 독특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P 29)

  ---> 인간의 뇌가 이룩해낸 최대의 업적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과 사상들

        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P 30)

  ---> 뇌는 일종의 ‘예견하는 기계’로 이 기계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지구상에 뇌가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약 5억 년 전이다. 그리고 초기 영장류의 뇌로 진화하기

   까기 약 4억 3천만 년의 시간이 걸렸고, 7천만 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맨 처음 원인(原人)의 

   뇌로 진화. 그런 다음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약 2백만 년이 넘는 기간에 인간의 것과 

   비슷한 뇌가 전례 없는 급속한 성장을 겪으면서 그 부피가 두 배로 커진 것이다.

   이때 1.24파운드였던 ‘호모 하빌리스’의 뇌가 3파운드인 ‘호모 사피엔스’의 뇌로 변하게 

   되었다.

- 인간의 뇌의 한 부분인 ‘전두엽’은 건강한 성인이 자기 자신을 여러 시간에 걸쳐 확장

  된 존재로 여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P 42)

   ---> 전두엽은 일종의 타임머신 같다. 우리는 이를 통해 현재로부터 빠져나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 우리의 뇌는 고집스럽게 우리를 미래로 끌고 가려고 애쓰는 것인가?

  그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P 46)

- 우리의 뇌가 고집스레 미래를 상상하여 애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뇌는 우리가 경험

  할 것들을 통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P 51)

  ---> 사람들은 통제력을 행사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 행복은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우리가 편의상 이름붙인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P 64) 

- 사람은 행복하길 원하고 행복 외에 바라는 모든 것은 대개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서 의미를 지닐 뿐이다. (P 68)

  ---> 사람의 의지는 행복 이외의 목적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 무언가를 선호한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더 큰 기쁨을 얻으려는 기대감으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거나 원하는 것“이다.

-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인간 행동에 대한 이론을 행복이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립해

  왔다.

- 행복은 고결한 삶의 결과물이 아니라 고결한 삶의 보상이며, 이 보상이 반드시 이 생

  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자들, P 71)

- 철학자들이 행복이라는 단어의 도덕적 의미와 감정적 의미를 뒤섞어놓았다면, 

  심리학자들은 행복에 담긴 감정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를 뒤섞어놓았다. (P 73)

- 언어는 우리가 경험했던 것의 중요한 특징을 추출하고 기억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우리가 나중에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 준다.

                                                                                                     (P 78)

- 행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남에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P 93)

- 칸트의 새로운 이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하는 경험은 우리 눈이

  세상의 이미지를 그대로 뇌로 전달할 때 일어나는 생리적인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지각현상은 눈이 보는 것들이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느끼고 알고 원하고 믿던

  것들과 합쳐지는 심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결국, 현실 지각은 감각 정보와 현존하던 지식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합작품인

  것이다. (P129)

- 우리는 처음에 기억과 지각 경험을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이듯, 상상도 정확한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한다.

-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은 종종 우리 마음에 있는 맹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 미래의 사건 그 자체에 대해 틀린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 사람들은 미래를 상상할 때 자신의 상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P145)

- 보통사람은 두 현상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아내려 할 때, 대개 발생했던

  일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지만 발생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언가를 심사숙고하는 행위는 ‘보는 것’에 국한되고, 보이지 않는 것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P147)

  ---> 우리가 선택할 때는 대안들의 '장점'에 주목하지만, 거부 결정을 내릴 때는 주로

        대안들의 '단점'을 고려한다. (P149)

- 아주 먼 '과거나 먼 미래의 사건'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건이 발생했던 '이유'나 

  발생하게 될 이유를 '추상적'으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으나, '가까운 과거나 가까운 

  미래사건'을 생각할 때는,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혹은 '앞으로 어떻게 발생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P156)

-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가 어떤 현상에 대해 가능하다고 진술한다면 그 말은 십중팔구

  옳다. 하지만 그가 어떤 현상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범하는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미래가 현재와 굉장히 비슷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클라크의 제1법칙, P167)

- 인간의 뇌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지 그리고 어떤 것을 무시해버릴지에 대해 엄격한

  우선순위를 갖추고 있다. (P180)

- 우울증의 징후 가운데 하나는 미래를 예측할 때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82)

- 상상은 현재의 경계를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상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동시에 지각을 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P184)

-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면서 경험하는 정서는 사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

- 시간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므로 상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어떤 추상적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추상적인 것과 비슷한 ‘구체적인 사물’을

  떠올려 그것으로 추상적인 것을 대신한다.

  그것은 공간으로, 시간을 공간적인 것으로 상상한다고 한다. (P187)

- '습관화‘를 이기는 한 방법은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것이며, 또다른 방법은 반복되는

  경험 사이사이의 시간 간격을 늘리는 것이다. (P191)

- 우리가 미래의 느낌을 예측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느낌을 그 시작점

  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더 미래가 현재와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P199)

- 사람의 뇌는 자극의 절대 강도에 민감하지 않다. 오히려 뇌는 ‘차이’와 ‘변화’에 놀라울

  정도로 민감하다.

- 사람들이 절대 강도보다 상대 강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성은 무게, 밝기, 

  부피 등과 같은 물리적 속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치, 재화, 부와 같은 주관적인 

  속성에서도 나타난다. (P201)

- 나란히 놓고 비교할 때 발생하는 가장 위험한 사실 중 하나는, 비교 대상이 되는 여러

  대안들은 서로 구별하도록 해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주의를 끈다는 

  점이다. (P208)

- 역사가들은 역사상의 인물들을 현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성을 가리켜 

  현재주의라 표현한다. (P213)

-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각은 미래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예측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현재 경험하는 현실이 매우 강력하고 생생해 그에 기초한 미래는 현재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주의는 우리가 미래 시점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과,

  현재 시점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깨닫기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P214)

-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엄연히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이다. 즉, 우리는 명백한 현실과

  낙관적인 환상의 적절한 조합을 경험하고 있다. (P231)

- 우리가 원하는 결과에 부합하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판단할 때 울리는 

  ‘불공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게 해주는 정보에 대해

  서는 관대하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훨씬 

  엄격한 증거를 요구한다. (P245)

- 우리의 현실 왜곡은 우리의 경험이 본질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사실을 접하면 그것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잘 기억하며, 

  그 사실의 진위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도 관대하게 적용한다. (P248)

-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그것이 정직하게 얻어진 결론이라고 믿어질 때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을 조작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그 결과를 즐길 때는 의식적으로 한다. (P251)

-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선택들은, 그 선택으로 미래에 경험하게 될 후회의 크기를 

  예상하는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후회'란, 우리에게 발생한 나쁜 결과가 우리가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다면 피할 수 있었다고 느낄 때 경험하는 매우 불쾌한 

  감정이다. 따라서 현재의 행동은 미래의 후회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결정된다.

                                                                                                   (P256)

  --->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무언가를 했던 것보다 하지 않았던 것을 훨씬 

         더 많이 후회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심리적 면역체계는 행동하지 않은 것보다 행동한 것에 대해 

         훨씬 더 쉽게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유가 제공해주는 유익은 쉽게 상상하지만 자유 때문에 오히려 훼손될 수 

  있는 즐거움은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 기억은 경험의 중요한 요점만을 골라 보관하는 편집자로, 우리가 기록을 다시 읽고 

  싶어 할 때마다 그 요점들을 사용해 매번 기억을 재구성한다. (P282)

- 흔하지 않은 이례적인 사건들을 잘 기억하는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주범 중 하나이다. 우리의 뇌는 사실과 이론을 결합하여 과거 사건에

  대한 추측을 만들어내고, 동일한 원리로 사실과 이론을 결합해 과거에 경험했던 

  감정을 추측한다.

- 우리가 ‘내일’ 어떻게 느낄지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오늘’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보면 된다. (P326)

 

책으로부터

-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는 독사 이빨보다 날카롭다. (세익스피어, 리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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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말실수 - 조선의 역사를 바꾼, 개정판
이경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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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말이 당신의 입안에서 돌고 있을 때, 그 말은 당신의 노예이지만 일단 입 밖으로 튀어

 나오면 당신의 주인이 된다‘ (탈무드)

 

위 문구는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정치권은 물론이고 크던, 작던 특정 집단을 이끌고 있는 리더들이라면 이 문구가 던지는 의미와 뜻을 정말 가슴 깊게 되새기며 자신의 행동거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지침으로 새겨 볼 금언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작금의 세상은 전과자들이 판을 치고 똥 묻은 놈이 묻은 이들을 타박하는 

세상이고 그런 리더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보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나는 언젠가 지금의 여당이 야당시절 종횡무진 난리를 치면서 정권을 향해 막말과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을 때 그들도 언젠가 입장이 바뀌어 ‘동일하게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 적이 있었는데,

작금의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말의 잔치를 보고 있으면 내가 과거에 주장했던 방식으로 그들이 던졌던 무책임한 발언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모습들이 재연되는 모습과 

분위기를 보면서 내가 예측한 내용대로 상황이 전개되어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치 수준이 나 같은 평범한 범인도 예견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낮아졌음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누구 편을 들고 누구를 질타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이라면 아무리 정권욕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동네 시정잡배들처럼 막말을 쉽게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것도 책임지지도 못할 말에 대해 ‘카더라’ 수준으로, 면책특권 그늘 뒤에 숨어서 난리를 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는 항시 이야기했다.

입이 하나고 귀가 두 개인 이유가 뭔지를 생각하라고.....점잖지 못한 수준 이하의 인간들로 인해 그들이 생각 이 혹은 정권욕에 급급해 툭하고 내뱉은 저질 발언들로 인해 

앞으로 십 수 년간 이 땅은 바람 잘날 없이 시끄러울 것이 예상된다 할 것이다.

그런 단적인 예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법을 수호하는 대법원장에게 막말을 해 대고,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장군들이 통수권자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내란 

세력’운운하는 막말을 쉽게 날리는 인간들은 정신이 나가도 한 참 나간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그들이 입으로 쌓은 업보는 입으로 되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의 역사를 마주하다보면 큰 재난을 거치며(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역사적 증거가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왜곡되어 그런지는 몰라도 예기치 않은 역사적 굴곡점에서 그런 소실되거나 변형된 증거로 인하여 이상하게 석되고, 판단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간혹 

눈에 들어오고는 했었는데 그동안 역사적 지식이 짧았던 내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몇몇 가지 사실은 내가 너무 무식했기 때문인데

그런 의문 중에서 몇몇 가지를 본 작품을 통해 다소 해소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대표적 사례가 학창 시절 배운 내용 중 ‘태종의 외척 정리사건’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권을 물려 줄 때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름으로 외척을 강하게 정리

하면서 세종의 삼촌들인 ‘민씨 일가’를 거의 도륙에 가까운 정리를 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처가 식구들을 ‘박살’냈다는 이야기다.

학창 시절 나는 태종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하고 외척을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껏 했겠지 그렇게까지 험악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태종의 와이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의 형제들을 정리해 자신의 후임자 권력을 강화해 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가식구들을 박살냈다고 하는 이야기는 처가 식구들이 태종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미운털이 박히는 행동을 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잠깐 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권까지 빼앗다 시피해 왕이 된 그가 처갓집까지 박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즉, 배은망덕의 극치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작품을 통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태종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확인하고는 그간 내가 가졌던 의문의 상당부분을 해소했다.

 

또 하나의 의문점(?)아닌 의문점으로 다가온 것은 ‘남이 장군’에 관한 사항이다.

학창 시절, 내가 살던 지역에서 북한산 넘어 사시던 친척 집을 한 달이면 한 두 번 정도 주말에 놀러가게 되면 반드시 ‘세검정’이라는 곳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 부근을 지나게 되면 ‘남이 장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록된 입간판을 지나곤 하였는데 당시 

나는 남이 장군이 어떤 인물이며 누구의 후손인지 또 무엇을 한 사람인지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친척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 데면데면 입간판을 쳐다보기만 

했지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마주한 역사 속에서 마주한 남이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아사리 정치 축소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 안타까움 그 자체였고 아쉬움을 크게 남는

시간이었다.


추가적으로는 ‘사도세자’와 관련된 죽음의 배경에 관한 사실과 우리 정치권의 아귀다툼의 원조격인 이조전랑임명권에 관한 동서 분당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한 ‘심의겸’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내용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아무튼 심의겸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조선 시대의 ‘의겸’이나 허무맹랑하고도 

무책임하게 터트려 온 나라를 벌집 쑤셔놓은 듯 난리를 치게 만든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지금의 ‘의겸’이나 하여간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는 데 일가견 있는 인간들이 아닐 수 없고 지금도 사과 한마디 없이 고개 빳빳이 들고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뻔뻔함의 극치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하여간 뭐가 잘못돼도 한 참 잘못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회기 중 주식 투자하던 놈도 그렇고 돈 봉투 받고 뿌렸다 문제 되었다 기사회생 한 놈, 툭하면 같이

일했던 비서관들로부터 난도질 당하는 집단과 성 비위 문제가 터지면 이를 문제 삼는 집단에 대해 ‘내란 세력, 내란 동조 세력’이라고 외치며 물타기 하는 집단을 보면 아무튼 답답한데 그런 놈들이 좋다고 응원하는 인간들을 보면 도대체 그들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지 또 그들의 육체위에 달린 머리를 장식품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며 그런 집단에 대해 싸워야 할 집단은 오늘도 주판알 튕기며 자신의 몫만 

챙기려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땅의 정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밖에는 없다.

한마디로 한심한 백치 인간들의 향연장이 아닐 수 없다.

 

위에 언급된 대표적 역사적 진실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전문적인 역사책을 통해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행위이기는 하나 그에 앞서 본 작품을 구매해 읽는 것도 좋을듯하여 

강추하는 바이다.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쉽게 알 수 없었던 숨겨진 기타 이야기

1) 정도전의 활약상을 보면서 든 생각은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라는 문구가 떠오른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작금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설익은 진보들의 계엄 잔존세력 소탕 타령을 보면

    위의 문구가 절로 떠오르고 있다.

2) 줄을 잘못서 한직으로 내 몰리며 절치부심하던 중 태종의 처남 민무질에 빌붙어 

   기회를 엿보던 ‘이무’라는 작자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경언’이라는 작자의 행태를 보면 작금 이 땅에서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는 어느

   ‘새 한 마리’와 ‘드라이크리닝 집 딸’이 생각나는 듯했으며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던 

   날아라 슈퍼 보드 속 주인공 부캐를 지닌 어느 여인도 떠올랐다.

3) 생육신의 신하 신숙주 아들 ‘신정’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자식은 부모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 그리고 부모들이 아무리 자식을 올바른 길로 가르치려 해도

   자식은 자신이 타고난 성향대로 간다는 사실을 통감했는데 이 내용을 읽으며 

   영조시대 우의정이면서 희대의 도박꾼이었던 원인손이 생각났고 그의 아들 ‘원재명’

   이도 생각났는데 왜 그 사기꾼 부자의 이름이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으나 작금의 

   혼란한 우리 정치판에 그들이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 크게 들고 있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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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 ㅣ Jesus facebook 시리즈 1
유기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초심자 7,

             비신자 8


책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작품을 읽던 해당 작품으로부터 ‘정신’과

‘마음’에 모르게 꽂히는 문구가 1~2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숨기고 싶었던 나의 심중을 헤아려주는 듯, 상처 입은 나를 어루만져 

주듯 나아가서는 내가 그리던 부모님이 내게 들려 주는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문구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해당 작품에서 그런 문구를 마주했다.

평소 읽던 성경에서 혹은 기타 작품에서 자주 보던 문구이기도 했지만 왜 지금 나를 

자극하는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작품을 읽던 심정이 그 문구와도 같은 상황을 갈급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당 문구는

-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면 나도 나를 사랑해야 마땅하다’

- ‘정작 주님이 저를 인도하시려고 할 때 제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P185)

-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선포하고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 하신다. (P236)

아무튼 작품을 읽으며 마음으로 다가왔던 문구를 정리하며 그 분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하며 그 분을 사무하는 나의 마음 속에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믿음은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이다. (P 26)

- 우리의 목표는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봐 문제가 생각나지 않게 되는 것. (P 33)

- 성공은 준비가 먼저 필요하다. 그 준비는 항상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으로 성공은 산의 정상과 같아서 오래 누리지 못한다. 순간에 지나간다.

  따라서 준비되지 못한 자는 성공하고 망한다. (P 35)

- ‘당신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순종이 어려워서라기 보다 ‘마음’의 문제이다. (P 50)

- 성경이 권위자의 명령이라고 해서 모든 명령을 다 그대로 따르라고 하지는 않는다.

  결국, 잘못된 권위에도 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잘못된 권위에 대한 해석은 

  누가 내리나?

-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가 가장 개혁적인 사람이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P 59)

  --->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믿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

        하는 자가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곧, 자아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P 60)

- 우리의 문제는 악한 자에 대해 분노하면서 우리 자신도 똑같이 악하다는 것이다. 

  개혁한다고 하면서 잘못하면 또 다른 악한 자가 악한 자를 제거하는 셈이다.

-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은혜 받은 것도 믿은 것도 아니다. (P 64)

- 두려운 마음이 들수록,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여 살기를 더욱 힘쓰라. (P 67)

  ---> 정말 두려운 것은 주님과 친밀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이다.

-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게 

  하시는 분, 성령님의 역사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다. (P 73)

- 찬송가를 좋아서 부르지만 말고 그 찬송 가사를 주 예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하고

  불러라. (P 85)

- 좋고 싫음의 판단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의 마음만 구해야 한다. (P 91)

- 주님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왜 기도를 ‘오래’, ‘꾸준히’

  하는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가 좀처럼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P101)

- 믿음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이다.

   ---> 두려움이 없는 믿음으로 살려면 분명한 대가 지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P109)

- 양이 이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목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 예수께서 “내게로 오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자고 부르신 것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기 원하심을 믿는

  것이다. (P146)

- 마귀가 우리를 지배할 때는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한다.

  --->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되 24시간 

        하자는 것은 철저히 하자는 것이다. (P173)

-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주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것으로 살아

  가면서 잘되고 못되는 일을 겪는 것은 오직 주님과 더 친밀해지는 계기일 뿐이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데 있다. 기도 응답은 선물일 뿐이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기도 응답만 바라보면, 기도조차 스트레스가 된다.

                                                                                            (P214) 

 - 우리의 자아가 죽었다는 말은 육신의 소욕이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235)

  또한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P245)

-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나타내시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P258)

- 우리가 반복되는 실패에서 구원받는 길은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 예수님을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P267)

-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데도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차원에 머물렀지 “예수님으로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P285)

- 나를 힘들게 한 독일 뤼벡교회의 돌판 문구 ‘주(主)는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신앙적 에피소드

1. 4 * 7 = 27이라고 우기는 놈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

2. 길을 가다 만나 복면강도를 만나는데 그 강도는 자기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 자기를

   괴롭히더란다. 그래서 그 강도를 붙잡아 복면을 벗겼더니 그 강도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책에서 얻은 지식

- 유대인들 머리에 쓴 모자를 '키파(Kippah)'라 하는데, 이는 ‘내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는 상징을 나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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