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 유대 기업은 현대 중국의 탄생에 어떻게 기여했나
조너선 카우프만 지음, 최파일 옮김 / 생각의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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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중국은 미국과 패권 전쟁 중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분야 중 하나가 유대 금융 세력의 중국 금융 시장과 외환

시장 공격이다그럼에도 중국은 금융 시장 개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이다.

 

중국은 금융 시장 개방을 위해 2020년 적격 외국인 기관 투자자에게 파생 상품 거래를 허용했다. 뒤이어 원자재, 곡물, 지수옵션 등 41개 파생상품을 추가로 개방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은 외국인 기관 투자자에게 주요 주식 지수 관련 파생 상품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이유는 유대 금융 세력이 1990년 초 파생 상품으로 일본 주식

시장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 기관 투자자들은 닛케이 지수에 터무니없는 버블이 끼었다고 보았다.

그들은 일본에서는 닛케이 지수 상승에 베팅하는 파생 상품을 주로 판 반면,

뉴욕과 런던에서는 하락에 베팅하는 파생 상품을 많이 팔아 일거에 일본 주식시장을

폭락시켰다물론 자산 시장의 버블이 폭락의 주원인이지만 폭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유대 금융 세력이었다.

이후 닛케이 지수는 20년 간 하염 없이 추락했다. 1989년 말 38915에서 200937054까지 주저앉았다.

미국의 대외정책, 중국과의 패권전쟁을 주도하는 국무장관과 국가정보국장, 재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모두 유대인이다. 중국이 미국 유대인의 동향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국 상하이에 몰려온 유대인들

 

중국인과 유대인 간에는 애증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많이 기여했다.

반면에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당시 유대 기업을 이끈 대표적인 가문이 사순(Sassoon)가와 커두리(Kadoorie)가였다.

---> 해당 작품은 두 가문이 대륙에서 중국 공산당이 완성되는 단계에서 중국을 대상

       으로 펼친 밝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활약상 그리고 그 양 가문이 어떻게 중국

       으로부터 용도 폐기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는

       즉, 중국 애증의 역사를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 ‘커두리가와 서순가는 중국 공산당에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하자,

   커두리가는 중국 남단의 영국 식민지 홍콩으로, 서순가는 런던과 바하마 제도

   심지어 텍사스주 댈러스까지 도망치지만 그들은 상하이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서순가는 세계가 불황에 빠져들고 있던 1930년대 중국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이바지했으며 중국인 한 세대를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 육성하며 오늘날 중국의 

  놀라운 성공을 위한 길을 닦았다.

  커두리가는 홍콩을 중심으로 지역을 변모시켜 21세기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든

  주역이다하지만 1949년 공산당이 승리했을 때 양 가문 모두 거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 중국에 커두리가와 서순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상하이의 과거는 중국의 미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물론 두 가문은 제국과 식민주의의 수혜자였다. 서순가가 부를 축적한 토대였던

  아편 무역은 수 백 만의 삶을 망가트렸다

  서순가와 커두리가가 얻은 막대한 재산을 저임금과 불공정 경쟁 위에 쌓아올린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의 대두와 승리를 부채질했다. 양 가문은 상하이를 착취

  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지인을 활용해 경제 호황에 불을 붙였다. 중국이 경화된 봉건

  사회를 탈피하고 현대적인 산업 사회로 진입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들은 그 

  도시에서 과감한 사업의 꿈을 추구할 곳을 찾아냈다.

  상하이를 그리고 중국을 탈바꿈시킨 것은 중국인들이었고 양 가문은 퓨즈에 불을 

  붙이는 일조를 했다.


 이후 1895년부터 10년간 러시아 유대인들이 대 박해(포그롬)와 공산혁명을 피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30년대 말 상하이 유대인 수는 4천 명을 넘어섰고 

유대 회당이 7곳이나 되었다.

* 중국과 유대인 사이에는 애증의 역사가 존재한다.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 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 사이의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상하이의 유대인 수가 4천 명명을 넘어섰다.

 

중국에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1842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까지 

107년간이 외세에 시달린 치욕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일본도 대륙 침략에 가세했다.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했고 

1905년 러일전쟁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유대인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거의 패전 상황에서 군비 마련이 시급할 때, 뉴욕의 유대인 금융가 야곱 시프가 거액의 전쟁채권 판매를 선뜻 주도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일왕이 야곱 시프를 초청해 최고 훈장을 수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1930년대에 유대 국가를 만주에 건설하자는 국제적 제의를 했다.

일본은 유대 자본을 활용해 만주를 개발하고 이들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사실 그즈음 만주에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만주 이주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900년대 초 러시아는 뤼순항을 점령하고, 만주 개발을 위해 러시아인들의 만주 

이주를 독려했다

그러자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던 러시아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와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 만주로 이주해 왔다. 이후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피해 온 유대인들이 

합세했다그 뒤 철도 건설 붐과 은행 개설로 유대인 숫자는 더 불어났다.

그 무렵 하얼빈이 대표적인 유대인 도시였다. 상업 지역의 80%가 유대인 소유였다고 한다하얼빈은 20세기 초 동북아의 대표적인 국제도시였다. 19국의 영사관이 

하얼빈에 들어와 있을 정도로 인종 용광로였다

당시 하얼빈의 외국인 인구는 도시 인구의 절반이 넘는 19만 명이었다이 중 2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 가문이 하얼빈 출신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 더 많은 유대인이 몰려온 건 히틀러 등장 이후이다

193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극심한 사회 혼란을 불러왔다. 이 틈을 타 1933년 

나치 정권이 탄생했다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열등한 

인종을 청소해야 한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 차별이 가해졌다.

1938년에는 반유대 폭력이 시작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을 가두는 게토가 다시 만들어지고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유대인의 탈출을 도운 동양 영사들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유대인들은 탄압이 거세지자 탈출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갈 곳 잃은 유대인들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자 난민 문제가 발생했다.

19387월 프랑스 에비앙에 32국 대표들이 모여 유대인 난민 문제 처리를 협의했다. 유대인들의 딱한 사정에 동정을 표하긴 했지만, 2차 대전 직전 각국의 민감한 국제관계와 국익 앞에 어느 나라도 선뜻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회의는 소득 없이 끝났다히틀러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유대인 탄압이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며 고무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유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오히려 동양 외교관들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주재 중화민국(현재 대만) 영사관의 허펑산 영사는 도움을 청한 

유대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가장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상하이로 2~3개월 만에 거의 4000명을 도피

시켰고 1940년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관 스기하라 지우네영사도 이웃 폴란드에서 피신해 온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해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렸다.

이렇게 해서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피란 온 2만여 명 등 25000명의 유대인들이 상하이 일대에 거주했다. 어느 나라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 난민들을 중국은 받아들인 것이다.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그제야 이들을 받아들여 중국 내 유대인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으로 떠났다. 지금 상하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2000명 남짓이라 한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1969년 일본 영사에게 훈장을 수여해 고마움을 표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상하이시에 감사를 표하고 2000년에 야드바샴(이스라엘을 도운 의인의 전당)’에 허펑산을 동양인 최초로 등록시켰다. 대만 정부도 2015년 이미 고인이 된 허펑산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출처 : daum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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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읽는 역사
한순구 지음 / 삼성글로벌리서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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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3



감히 나와 같은 독자에게 이 작품을 읽고 누군가가 작품 어때요?’라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고 평하려 한다.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분석해 저자의 전공 분야 관점으로 이를 해석해 그 역사적 

순간에 저자의 방법론을 적용해 보았다면 어땠을까를 유추하는 작품으로

저자가 사례를 들기 위해 선정한 역사적 사건과 해당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 및 그에 

대한 해법 등 모든 것이 각양 각층의 독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저자께서 노력하고는 있었다고는 느끼고 있으나 저자의 분야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무지에 가까운 독자들이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해석이 부분적으로 보였고, 그 접근

방법도 평이했다는 생각이다특히 나와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그러했다는 말이다.


크게 아쉬웠던 점은 저자의 약력을 통해 본 이력 중 일본에서 연구 활동 기간이 포함

되어 있어 그런지는 몰라도 구성된 총13개 장 중에서 4개의 장(33%)이 

일본 역사에서 사례를 뽑아내고 있는데일반인들이 쉽게 알고 있는 대중적인 

-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 역사적 사건이 아닌 특정 국가의 특정 사건을 예로 들면서 분석하고 있는데, 일본 전문가 혹은 일본에 지대한 관심이 없는 독자들이 해당 역사에

대한 깊이가 없는 상태에서 저자의 분석에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점은 아쉬움이라면 큰 아쉬움이라 할 것이다.


각 장별 아쉽거나 나름 이해가 어려웠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2장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로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만 있는 상태라면 쉽게 이해되었고 저자의 주장에 일견 동의를 하지만

3장은 저자가 어떤 점을 강조하려는지(코어와 새플리 밸류) 또 저자께서 강조하시는 

학문에 관한 이론적 배경에 관한 기초 지식이 없으면 저자의 상세한 설명이 지금보다 더 세심하게 배려되지 않는한 이해가 쉽게 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고 판단되었지만 

한편으론 해당 장에서는 그동안 여러 역사적 작품을 통해 빈약하게 알고 있어 약간 

답답한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한 부분은 칭찬할만한 내용이었다고 판단한다.

4장에서 주장하신 이론(‘홀드 업 문제는 중소기업이 인질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인질로 잡힐까 두려워 대기업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이론)에 대한 사항은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몇 차례 읽었지만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으며


5(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저자께서 주장하는 이론(팀에서의 도덕적 해이)과 묘사 내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6 ~ 9장까지는 내가 위에서 거북하게 느꼈다는 혼란한 일본국 시대의 이야기를 배경을 예로 들고 있는데,

6장의 레퓨테이션 게임7장의 담함과 배신의 게임이론 그리고 8장의 밴드왜건 

효과’, 9장의 오사카성 전투내용은 일본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을 경우 저자의 

일방적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다소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10(컨티전시), 11(대리인 문제와 도덕적 해이), 12(데드라인 문제) 및 

13(또라이 전략)에서 예화로 든 역사적 사실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내용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분석하고 이론적인 내용으로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도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운 아쉬운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257쪽에서 저자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경제학의 가장 큰 화두는 구성원들에게 주인의식을 불어넣는 일이다.”

라는 내용은 경제학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이 사회, 우리나라 경제 활동을 비롯한 

전 분야에 걸쳐 가장 시급한 문제임에도 이를 경제학에만 국한시킨 강조는 큰 아쉬움

으로 남는다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방법을 제시한 작품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역사적 순간에 잘못된 순간 및 판단을 저자의 전공이론으로 이를 해석해 새로운 시각으로 참신하게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 의도했다면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이나 완성 후, 관련되는 여러 사람 특히 역사학자나 해당 역사적 사건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관련자들과 한 번쯤 토의나 토론을 통해 무지한 독자의 눈높이 까지 헤아렸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 작품이었다는 게 무식한 나의 

판단이다.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구 중 그나마 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마을이나 국가 

  그리고 친족 심지어는 가족마저 자기 자신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P 27)

- 홈그라운드를 완벽히 장악하지 전에 외부 정복에 나서는 것은 게임이론의 견지에서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다.(P 31)

-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은혜를 베풀면 안 된다.(P 33)

- 천하를 얻는 순간까지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썼지만 일단 천하를 얻어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니 능력보다는 충성심 강한 사람이 중요해 진다.(P 47)

-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개인보다 조직에 더 긴요하다.(P 60)

- 게임이론은 현재 상황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것이 유리한지 아니면 세컨드 무버가

  되는 것이 유리한지를 반드시 따져보고 결정하라(P233)

- 강하지만 상대를 맞힐 수 없는 오른손보다는 약하지만 상대를 맞힐 가능성이 높은 

  왼손을 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오른손잡이 권투 선수들은 왼손을 자주 뻗는다.

                                                                                                (P249)

- 최고 책임자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미리 

  생각해 봐야 한다.(P252)

- 경제학의 가장 큰 화두는 구성원들에게 주인의식을 불어넣는 일이다.(P257)

- 대리인 문제의 해법은 의견교환과 믿음의 형성이다.(P269)

- 미래에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소수의 인간이 인공지능 기계를 이용하여 생산 작업을

  하고 전투에 임하는 시스템을 더 빨리 받아들이는 국가가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P273)

-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기만의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목표가 보통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과 존경을 받는다.(P277)

- 협상에서 시간제한, 즉 데드라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고

  실은 우리 머릿속만 있는 주관적인 것이다. 결국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P297)

 

 

작품에서 얻은 상식

- 로마인들은 카르타고 사람들을 포에니쿠스(Poenicus)라 불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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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룰렛 - 중국공산당의 부, 권력, 부패, 보복에 관한 내부자의 생생한 증언
데즈먼드 슘 지음, 홍석윤 옮김 / 알파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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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중국은 금세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외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상대로 펼치는 

국가 전반의 행태에 대해 게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갈 것으로 생각한다.

, 아무리 주변국에서 중국에 대해 비난을 퍼부어도 작게는 주변국으로부터, 넓게는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의 질타와 비난을 받는다 해도 빛바랜 그들의 정책인 도광양회

(韜光養晦: 실력을 감추고 절대 드러내지 말라) 정신을 이유로 절대 자신의 노선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자신의 행동이 표준이고 정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사상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낭비이다 -


본 작품을 읽는 본인이 내린 결론은 중국에 진출하는 기업 및 개인들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여러 사건사고 내용을 반면교사로 삼아 중국내에서의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중국에서 펼치려는 사업 활동에 있어 활동의 지침(‘이카루스의 날개로 나는

명명하고 싶다)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내가 모 대학 중국인 여 교수가 미래에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인구가 많은 

시장이 있는 중국을 바라보라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나는 시장도 시장 나름이고 시장에 있는 소비자들의 수준도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단연코 그녀의 주장에 대해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작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들은 나는 작품의 주인공처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둥, ‘내 친구 중국인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는 등의 근자감을 갖고 주장하면서 섣불리 중국 사업에 

뛰어 들 수 있다고 보는데,

그건 개인의 자유이나 나도 중국 쪽에서 일해 본 경험과 작품에 나타난 여러 증상을 

갖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비상식이 판치는 중국 사업은 쉽게 도전해서도, 쉽게 봐서도

안 되니 다시 한 번 신중히 접근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며 혹자는 나의 이런 글을

읽고 - 동의하지도 않겠지만 - 중국과의 거래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분명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중국인으로서중국인 경제

학자로 중국의 장밋빛 미래를 예측하는 중국 나팔수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 - 나도 구매해 읽었지만 -라는 작품이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와 있는 몇몇 사례를 통해 누구나 다 중국에 

가면 성공할 듯이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해당 작품을 읽으며 중국 현지에서 맨발로 뛴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야릇한 미소만 지을 뿐 소설 속 내용이 맞다, 틀리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왜 오늘날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앞서 그들은 뭐라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그런 민족이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대표적으로 내가 겪은 중국, 중국인 그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저개발국가와 후발 국가를 대상으로 일대일로를 행하며 돈을 무상으로 빌려주고 있는 것을 내가 주장하는 내용의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짜가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돈을 빌려 주고 대여금을 갚지 못하는 해당 국가에 

대해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 유럽에서 고리대금업자로 이름을 날린 유태인들 

뺨친다 할 것이다 -

위에서 언급한 배려라는 단어를 놓고 이야기를 해 보면,

 

한국인도, 독일인도, 일본인도 그렇고 중국인도 좋은 사람이 있고, 질이 원천적으로 

나쁜 사람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곳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혼재되어 

있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나 중국은 좀 특이하다 못해 이상한 민족들이 모여서 만든

국가같다.

공자를 비롯한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여러 불세출의 인물들을 탄생시킨 그런 국가 중국이 왜 오늘날 요즘말로 이야기하면 동네 양아치들도 하지 않는 그런 작태를 

세계를 대상으로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한국인들도 오늘날 중국  못지 않은 성향의 국가요 국민

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육에 힘입어 현재는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져 사회 곳곳이 선진화되어 가고 있지만 중국의 경우는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격하게 변한 중국인들

심성과 품성이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이상하게 변질된 채 잘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다.

 

대표적인 저들의 심성을 알 수 있는 단어가 배려’(配慮,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에는 해당 단어가 없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유사한 단어는 있는데 정확한 의미 전달 수준에서의 해당 단어는 없다고 

보면 정확하다.

배려가 없는 사회이고 국가이다 보니 모든 게 자기 중심적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 후기에도 중국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을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데

당은 위기가 왔을 때만 장악력을 느슨하게 해 사람들과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허용

 하는 척한다당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다가 항상 제자리로 돌아온다. (중략) 중국의 

 경제가 성장 가도에 접어들면서 당은 다시 지배력을 강화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문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작품을 읽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거래를 위해 다른 사례는 필요없다. 구구한 개인적 억측과 편견이라 이야기

하기 쉽지만 최근 발표된 중국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어떠한 부패가 이루어졌는가를 

보면 알 것이다.

그래도 중국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해당 작품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중국인들의 

특성을 공부하라고 강하게 권하고 싶다.

 

하지만 남만 탓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여의도에도 중국인들 못지 않게 행동하는 배려 부족한 족속들이 부지기수로 

활동하고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 자기네 편 말만 옳다고 외치는 인간들이 득실대니 중국을 탓하기 이전에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인간들만 별도로 모아 놓고 룰렛 게임을 진행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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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맨 칭기스칸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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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해당 작품을 지난 2005년 처음 접하고 당시 내 이메일 아이디(nomad)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작품으로 당시 내가 만든 아이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할 수 없이 아이디 뒤에 'e'를 붙이며 아이디를 변경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당시 나는 작품을 읽고 앞으로의 시대는 유목민의 시대가 올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만들었음에도 아이디가 주는 의미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들볶는 주변인들 때문에 바꾼 것이 지금도 맘에 걸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당시의 분위기를 상기하며 작품을 읽은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유목민 시대는 앞으로 대세 - 지금도 약간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미풍 수준으로 조만간 태풍 

수준으로 우리 사회에 밀려 들 것으로 나는 예측하고 있다 - 가 될 것이고 그 내용과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며 작금 우리 사회 및 국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폐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를 들어 ‘MZ세대의 현상도 다 유목민 시대의 연장선상이라 여겨지며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떤 방면에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지는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연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 분명한 것은 나는 대책이 있고 앞으로 찬찬히 주변에 적용해 나갈 것이다 -

 

한 가지 퀴즈!

대세 연예인 유 모씨, 대중들에게 바보 이미지가 강한 김 모씨, 계그계의 대부이자 버럭 대마왕 

이 모 개그맨과 팔짱과 레이저 눈빛으로 한 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변호사 우 모씨, 엄마 찬스의 주역임에도 아니라고 우기시는 소년원생들의 대모를 자청하셨던 추 모님, 단군 이래 최대의 업적을 남기셨다고 지금도 틈만 나면 주장하시는데 가끔 주변인들을 모른다고 외치시는 이 모 정치인님들 각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나폴레옹(115), 히틀러(219), 알렉산더(515)보다 더 넓은 영토(777)를 정복했던 인물이며 새 천 년을 여는 시점에 워싱턴 포스트가 뽑은 1001년에서 2천 년까지의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정된 칭기스칸에 관한 이야기다.

(중반 이후는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서와 비슷해 정리에서 제외)

유목민, 그러면 몽골의 칭기스칸 시대의 유목민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당시의 그들이 그렇게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핵심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요인은 아마도 그들이 주고받았던 한 문장

소닝 새항 요 밴?(무슨 새로운 소식 없냐?)'

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유추가 가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해당 문장에는 도전정신’, ‘탐구정신그리고 개척정신등 현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 기업 및 기업인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반드시 갖추어야 할 그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몽골족의 첫 모습은 8세기 중엽 흑룡강의 중상류인 에르군네강유역이라 하며 9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면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토번제국과 중원의 당 제국역시 쇠퇴의 조짐을 보이며 그동안 눌려 지내던 군소 세력이 발흥하면서 나타났다.

12세기 초인 1206년 칭기스칸은 예케 몽골 울루스를 건설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일부 발췌 정리해 보면

 

- 몽골 유목민들은 1203년을 대단히 중요하고 뜻 깊은 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1) 씨족제를 해체하고 천호제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을 구축해 사회적 대개혁을 감행했고

  2) 1204년 몽골제국 출범의 기반을 닦았으며

  3) 1206푸른 군대의 정비와 함께 칭키스칸이라는 칭호를 얻기 때문이다


- 몽고군은 포로를 잡아 보유하고 있는 기술재주를 통해 기술자 집단을 원했다.

  과거제도를 통해 세워진 중원의 유교 문명은 몽골군에게 냉혹히 거부되었다. 암기 능력만을

  테스트하는 중원의 과거제도는 몽골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 효용의 가치가 적어진 중원의 지식인들은 야한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데

          ‘금병배라는 소설도 당시에 나온 것이다.

 

- 1115년 건국된 금나라는 몽골고원에 대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 왔다.

  그 결과 금나라의 무차별적 도륙 정책은 몽골고원의 비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특히 금나라의 세종(1161~1189)이 펼친 감정(減丁)정책’ ‘몽골고원의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없앤다는 정책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도 같은 정책이었다. 칭기스칸은 1162년에 태어났다.

   ---> 1211년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대한 보복을 결의한다.


- 1218년 대규모 통상 사절단을 콰레즘(페르시아 길목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오코나를 통해 

  술탄 무하마드에게 보내지만 그의 친척인 이날치크 카이르칸이 사절단을 처치하자 

   ‘코릴타를 개최하고 콰레즘을 멸살시킬 것을 결의

   ---> 11만의 콰레즘 군이 주둔하는 사마르칸트 요새는 누구도 1년 내에 함락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몽골군은 3일 만에 함락하고 기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도륙

 

- 술탄 무하마드가 제거된 것을 확인하고 기독교 문명이 쉼쉬는 키에푸 루시(러시아)’로 방향을

  돌린 몽골군을 1223킵차크족키예프와 연합해 몽고군을 공격하지만 전멸 당하는데 그

  전투는 이후 유럽의 기독교 문명에 몰아닥친 파란의 전주곡이 된다.

 

- 몽골군(푸른 군대)은 금나라를 꾀뚫어보고 있었지만 금나라는 푸른 군대의 존재 유무를 몰랐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금나라 군대는 푸른 군대가 침범했을 때만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반면 

  푸른 군대는 자신이 싸우고 싶을 때 싸웠다.

  푸른 군대는 인간이 갈 수 있는 대지 전체를 무대로 삼은 반면 금나라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한

  곳에서 눈에 보이는 작은 영역만을 무대로 했다. 푸른 군대는 전력을 아껴가며 싸운 반면 

  금나라 군대는 선택 당한 부문만으로 총력을 다해 맞서야 했다.


- 자신의 실수를 상사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병사가 있을 정도로 군율이 강했으며

  그들은 무기가 있으면 절대로 도망가지 않았고, 전쟁을 할 때도 지휘관이 신호를 내릴 때까지

  후퇴하지 않았다이런 여러 요소가 겹치면서 킵차크 칸국몽골인이 4만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럽인 25백 만 명을 통제할 수 있었다.

 

- 농경 정착 사회는 수직 마인드 사회로 그런 사회에 사는 정착민들의 삶을 가장 확실하게 지켜

  주고 막아 주는 것은 바로 자리. 안정된 자리만 확보할 수 있으면 삶은 끝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창의력이 필요 없고 기억력이 중요시되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사는 사회였다.

  반면에 유목민들의 수평 이동 마인드는 농경 정착 세계를 넘나들며 사는 사회로 위가 아니라

  옆을 봐야 하는 수평 마인드의 사회로 살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회로 다른 사람이

  소중해 진다.

  또 수직 마인드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자리는 착취와 군림의 수단이 아닌 역할과 기능을 발휘

  하는 곳이 되며 이동효율정보의 개념 속에서 시스템이 태어나게 된다.


- 몽골군이 강했던 이유는 전리품의 공평한 배분, 부하들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특히 노예나 

  포로에게도 무한한 가능성과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고, 전투 자원(편제, 무기, 말 등)의 효율적인

  호완성과 군수 보급과 병참 시스템이 뛰어났고 평소에 대규모 사냥을 통해 연습하면서 숙달된

  군사들의 기동성이 가미되면서 그 효과는 배가 되었다.

  참고로 칭기스칸 군대가 콰레즘을 공격할 때 주로 부유한 성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함락 후 그 성에서 식량을 보급 받으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 12세기 후발 신흥국이었던 몽골 제국이 선진 정착 문명국가를 격파한 근간은 바로 군사 기술

  , 전쟁 기술이었는데, 칭기스칸은 신기술의 수입과 발전을 위해 기술자 집단을 극도로 

  우대했다.

  기술 패권주의의 정수는 금나라 투항 시 그들로부터 압수한 세계최초로 개발된 원시적 다연장

  로켓포인 비화조회회포(回回包)’는 몽골군의 큰 전력으로 자리 매김한다.

  또한 대상들을 활용한 정보전 및 심리전도 몽골군의 가장 큰 무기로 활약하게 된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정보 인프라 군사 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역참제의 개발도 몽골군이

  강해지게 한 큰 요인으로 이는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몽골을 지탱하는 데 큰 역할은 한 사준마(四駿馬)의형제인 보오르초, 잘 라이즈족의 모칼리,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칠라운, 주르킨 출신의 보로콜이었으며

  사맹견(四猛犬)제베, 코빌라이, 젤메, 수베에테이였다.

 

- 몽골의 징병과 징세는 그 지역 사정에 밝은 인물들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납세를 거절

  하면 각지의 전략 지점에 배치된 몽골군이 처리했다.

 

- 칭기스칸은 몽골고원 통일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기여한 너커르집단을 새 시대의 주도 

  세력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너커르란 동무, 친구, 동지라는 뜻으로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집단을 의미하며 너커르는 칭기스칸 권력의 핵심이자 신질서의 상징

  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천호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군사 조직의 개편을 넘어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군사, 사회의 종합 통치시스템이자 총력 동원 체제의 등장을 의미했다.

 

- 유목 방식은 2가지가 있는데

  1) 쿠리엔식 : 부족 전체가 집단적으로 이동항는 형태의 유목 방식

  2) 아일식 우목 : 두세 가구가 한 무리를 이루어 광활한 초지를 소유하며 유목하는 방식

 

- 칭기스칸의 말을 한데 모아 놓은 대자사크격언 빌리크는 칭기스칸이 단행한 여러 개혁 

  조치와 개혁방향, 구상, 원리들이 들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칭기스칸의 정복 전쟁은 자연 재해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만든 것은

  중국이었지만 지폐의 대량 발행을 통해 본격적인 화폐경제를 이룬 것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때 일이었다.

   ---> 몽골인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을 단일 화폐 경제권으로 통합했다. 그 덕택에 동양과 

        유럽 간에 대규모 무역이 가능해졌다. 곳곳에 무역항이 발달하고 외국인이 모여들었다.

 

- 무굴제국이라 할 때 무굴이란 힌두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 몽골의 언어는 소리는 있지만 글자는 없다. 대부분 소리만을 빌려 번역하고 통역한다

  이것을 통사(通事)라고 한다.

 

[작품에 나타나는 몽골어]

- 바아토르 : 용사 

일종의 국회’ : 코릴타(상원격), 케식텐(하원격)

- 사원 : 부하라 

고탈 : 군화

- 너커르 :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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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군주 평전 시리즈 4
송재혁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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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여러 업적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여기에 세세히 열거해 나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본 작품을 집필한 저자의 의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인 것 같아 그 부분은 생략하고 작품에서 확인한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거나 - 나의 시각과 관점에서 - 잊고 있었던 내용에 방점을 두어 편안한 마음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작품을 읽으며 든 생각은 우리의 역사 교육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교육이 단답식 암기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일방적으로 선생님들이 떠 먹여주는 주입식 교육 과정의 폐해로 일어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크게 든 시간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세종대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 외에 세세하게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이 그 단적이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분의 본명이 이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있을까? 또 그분의 재위 기간 중 발명한 

여러 과학기구가 나온 배경이 통치 기간 내내 가뭄과 흉년의 연속이었기에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왜 그분의 통치기간 중 의예(儀禮)’를 중시하는 많은 책자가 발간되었는가?를 비롯해 노비의 애환을 보살피는 여러 

제도를 개정한 것과 본 작품에서는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작품을 통해 확인한 내용 중 결혼과 관련된 풍습을 우리 현실에 맞게 변경시키기 위해 솔선해 자신의 

딸부터 적용해 보았다는 내용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손이 모자를 정도의 개혁을 추진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교육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세종께서 이룬 

업적이 많음에도 후세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불확실한 내용이 많아 개탄스런 마음이 앞서서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그분의 업적 중 일반적인 사항 말고 기타 사항으로 들 수 있는 

몇 가지 업적을 드려다 보면서 그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점은

첫째, 중국에 맞서려는 의식이 강했던 인물이었으며

둘째, 부국강병에 대한 열의가 그 어느 왕보다 높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셋째, 조선의 어느 왕보다 공론정치를 개척한 인물이었고

넷째, 애민 사상이 그 어느 왕보다 높았던 국왕이었으며

다섯, 효와 형제애가 무척 깊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 선왕 태종이 당초 후계자로 생각지 않았던 관계로 1418(태종 18)당초 세자로 

  책봉이 예상되었던 장남 이제를 내치기 전까지 이도(세종)에게는 차원이 다른 

  교육을 시켰다.

  단적인 예로 세종에게는 후계자 교육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술과 관련된 교육에 집중

  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교육은 세종 말년에 정치사적 외에 그가 이룬 업적의 

  큰 밑바탕을 이루는데 자산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이다.

 

- 맏아들 이제를 내치기 전 태종은 수많은 고민을 했는데, 자신이 권력정치를 통해 

  구축한 비정상의 정치를 학문과 이념의 정치로 정상화할 수 있는 후계자를 원하면서

  무엇보다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훌륭한 국왕의 조건들 중 우선적인 것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정치의 핵심을 알고 있으며, 관계 지향적인 인간형이며 앞으로 

  후계자가가 될 수 있는 즉 적장자(두 아들)가 있는 아버지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꼽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이도에게 권력을 이양하려는 표면상의 이유는 당초 거듭된 자연재해와 

  자신의 지병이었다. 또 태종 자신은 정통성이 떨어지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

  했지만 세종에게는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조선의 정식 궁전(법궁)

  인 경복궁에서 즉위할 것을 지시하는데 이는 그동안의 정치를 정상화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즉위한 세종은 두 가지 교서를 내리는데 하나는 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유학 이념을 구현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 ‘세종실록을 보면 유독 의례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이도의 시대에 이르러 국가 

  의례가 상당수 정비되었다는 뜻으로 그의 시대는 건국과 정변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권위로 바꿔가던 시대로 한마디로 후대 국왕들의 표준을 확립한 국왕이었다.

  왕이 된 세종은 첫 번째 경영 교재로 대학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중국 남송

  시대의 대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책으로 유학의 기본교재인 대학의 이론적 바탕위에

  역사 사례들을 결합한 제왕학의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 이도는 경연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인 집현전설치를 지시하는데, 집현전은

  고려의 한림원을 계승한 것으로 이것은 당나라 현종 때에 왕립 학술기관으로

  ‘한림원이 설치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태종은 태조의 아들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력도 있었던 관계로 학자로서 자신의 

  학술적 지식에 의존해 별도의 자문기구를 두지 않았던 반면, 이도는 재위 초기에 

  학술 자문기구인 집현전을 설치했다.


- 권좌에 오른 세종이지만 지속되는 자연재해(9년의 홍수와 7년의 가뭄)가 치세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는데 이를 개선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32년의 재위 기간 중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은 해가 불과 6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420(세종 2) 하늘을 살피는 관측, 즉 천문과 관련된 정책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측과 대비를 통해 재해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 이도는 4명의 황제를 섬겼는데, 1424년 몽골 원정 중에 영락제가 사망하였고

  이후 3명의 황제가 뒤를 이었다. 이도는 지성사대를 통해 생존과 안정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는 명 황제들에게 신뢰를 쌓아 갔고, 재위 후반기에는 그것을 북방 영토 개척에 

  활용한다. 특히 태조와 태종을 계승한 이도는 명나라와의 공존을 시도하는데

  선왕들이 힘들게 얻은 평화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사대에 지극정성을 다하게 된다.

  이도의 행장을 보면 정성을 가지고 사대하였고, 신의를 가지고 교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도가 재위 시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를 알 것이다.

  반면에 왜에 대해서는 통신사라는 이름의 사절을 1428년에 처음 보내는데 왜에 대한

  교린정책은 양면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우선 중앙의 막부와는 우호 유지, 지방의 여러

  왜인들에 대해서는 기미정책을 시행하였다. , 조공을 잘하고 통제를 따를 경우만

  조선과 통상을 허락하였으며 창구는 대마도로 일원화했다.

  또한 조선은 독자적인 국가로서 국가이익을 위해 전쟁이란 수단을 활용하기 시작

  하는데 그 출발은 1419년 태종이 약 17천명으로 단행한 대마도 정벌이며 이를 

  이어받은 이도는 야인 정벌과 북방 영토 개척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 태종의 상제가 끝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상복을 벗자 이도가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을 상왕을 따라다니며 매년 해 왔던 사냥을 겸비해 훈련하는 강무였다.

  이도는 매년 봄, 가을 강무를 시행했는데, 군사적인 의미 외에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

  으로 활용하였으며 무의 정치를 내세우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재위 15년째인 

  1433년의 야인 정벌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야인 정벌의 본질은 명나라의 현상유지 

  정책과 이도의 공세적인 북방정책 사이의 마찰이었다.


- 당대의 대학자 변계량이 지은 화산별곡은 이도가 직위 직후부터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정치를 펼쳤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가 실패한 정책은 전폐 정책

  , ‘동전의 보급이었다.

 

- 이도의 시대에 들어 그동안 태종의 권력정치에 가려 있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

  했는데, 대표적 사건이 바로 벼슬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관행이었는데

  이도는 뇌물사건을 국가 흥망이 걸린 중대 사안으로 간주하며 이를 철저하게 관리

  하며 문제화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국가 흥망의 문제를 넘어선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이도는 부패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처벌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해 극히 자제된

  처벌을 하게 되는데 이도는 부패가 한 인물을 처단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진정한 해결은 인정교화의 정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도권을 장악한 이도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학문적 성취로 잡으려 한다. 신유학의

  서적을 읽으며 신유학의 정치론을 체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다

  이도는 자신이 솔선수범해야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도는 재위 초반부터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어떠한 신하들보다 깊은 학문적 성취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학문적 성취야말로 유교국가 조선에서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

 

- 이도는 재위 기간에 총 1,898회의 경연을 개최하는데, 이도 경연의 특징은 실용적

  이라는 것이 특징으로 학습 성과는 재위 후반기 각종 개혁의 모태가 되었다.


- 즉위 10년차(1428) 즈음 사회적 범죄(문제)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나타나면서

  이도는 통치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고민하게 되는데 관료들의 부패(1426)

  백성들의 풍속 , 민풍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며 사회질서 안정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공자는 백성을 먼저 부유하게 하고, 다음에는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맹자 역시

         먼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후 교육해야 함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왕도정치이다.

         ,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왕도정치의 시작이고, 교육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왕도 정치의 완성임을 깨닫는다.

   ---> 백성들이 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 과학기술 분야의 수많은 업적도 결국은 농업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농사직설과도 같은 증산법을 만들어도 백성이 글을 몰라 농사 권면이 

          지지부진 

   --->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작업의 연장으로

          교민은 훈민으로 연결되었다.


- 잦은 개혁으로 인한 관료들과 백성들의 원성을 줄이고 개혁에 동참시키기 위해 또 

  법 자체가 지닌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여론 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 1436년 이도는 의정부 서사제로 통치제도를 전환했다. 서사(署事)란 일을 처리한다는

  말로,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제도인 반면, 서사제도는

  의정부의 대신들이 주요 안건들을 미리 검토, 의논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통치제도

  이다.

  즉, 6조는 안건을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의논해 아뢴 뒤에 

  임금의 분부를 받아서 도로 6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는 제도이다.

  주된 이유는 정치적 책임의 분산으로 이도는 독단적으로 강행한 정책의 실패를

  체감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정치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의 정치적 수혜자는 황희였는데 그는 헌장(憲章)’에 밝았기 때문인데 헌장이란 

  선왕인 태조와 태종이 이룩한 정치적 유산을 의미한다

 

- 1438년 신개는 무인정변을 조선의 건국을 이어 다시 왕업을 안정시킨 행위로 평가

  하면서 기존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데 무인정변이란 정안군 이방원이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법 그리고 태조를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의 

  신하를 제거한 쿠테타를 말하는데 이 작업은 1447년 정인지와 권제,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편찬으로까지 연결되며 신개의 이런 주장은 추후 태조실록에도 

  반영된다.

   ---> ‘무인정변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귀향가 있던 이숙번을 초치하여 

          과거사에 대해 재조사를 추진하게 한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국사 교과서를 다시 읽는다 셈치고 이런 책은 한 권씩 사거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크게 생각한 시간이긴 했지만 나의 이런 요약도 만족스럽지 못 해 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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