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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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를 두고 불거진 근래의 역사 교과서 논쟁을 지켜보며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의 주장에 귀기울이려 나름 애를 썼다. 지피라야 지기이고, 나와 다른 견해에도 이해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 성숙한 자세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과 주장과 논리에 귀기울이면 일수록 내 가슴 속에 슬픈 짐승이 자라난다. 집필의 일원화가 마치 내용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식의 궤변과 빈대를 잡겠다는데 집이야 태워먹으면 어떠냐는 식의 주장을 듣노라면 화가 난다기보다 슬프다.

거의 2년 전쯤에 읽었던 한홍구 선생의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된 계기다. 책은 1972년 10월 17일 선포된 유신시대의 그림자를,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 이면의 역사를, 공포와 죽음과 그 복판에서도 존재했던 저항의 나날들을 되살려낸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지금의 20~30대에게 유신시대란 그 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긴급조치 세대에게 `개 타고 말 장사하던 북만주 벌판의 독립군` 얘기만큼 머나먼 시절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금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쿤데라가 쓴 대로 권력과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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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나의 여친
블레이크 넬슨 지음, 홍한별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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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혹했다. 작가가 주목 받는 청소년 소설 작가라는 것도 몰랐다. 마르크스 주의에 물든 학생이 여친을 만나 현실에 눈을 뜨는 류의 내용인가? 하고 넘겨짚었다. 아니었고,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지금 든 것이다.

17세 고딩인 제임스 호프는 뇌가 좀 과격하고 반문명적이고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 복장은 일부러 재활용센터 같은 곳에서 고른 옷으로 차려 입고 다니는데 `소비주의자`들이 싫어서, 그들과 똑같아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눈부시게 멋있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고 아주 밥맛은 또 아니다. 친구 없을 타입인 것 같지만 몇 어울리는 친구는 있다. 권위적이고 교양없는 아빠를 많이, 아니 그래 존나 싫어하고 사실 싫은 게 좀 많다. 놀랍지만 이런 호프에게 미인이고 긍정적인데다가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은 여친이 있었는데 그 전 여친이 보기에 호프는 비관주의자다. 작문 숙제로 자동차를 모조리 없애야 한다든가, 사람들이 아무 생각들이 없다거나 하는 혹독한 비판글을 써내는 이 학생에게 담임은 감정적으로 타인을 비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전 여친이랑 쿨하게 헤어진줄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 마음 정리가 안 되서 미치겠다.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이 친구 밉지 않다.

누구에게나 17세의 시절이 있었다. `중2병`이나 `씹선비`로 매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비슷하게 크는 게 나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과거엔 골빈X이나 무뇌아 라는 욕설이 존재했는데). 마르크스는 제임스 호프가 영향을 받은 인물이고 나의 여친 세이디도 그 못지 않다. 이 두 영토에서 방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엔 졸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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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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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해하기가 어려운 두 남자의 어울림이 나를 빛마저 피해가는 듯한 흑림 가운데 던져놓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입맛을 다신다. 쓴 맛이 난다. 약은 입에 쓰다는데, 독이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장클로드 로망. 세계보건기구(WHO)의 우수 연구원. 성실함과 노력의 천재. 자상한 남편이자 헌신적인 아빠이며 부모의 자랑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가족과 부모를 살해한 악마, 파렴치한 사기꾼, 거짓으로 도배된 끔찍한 삶의 노예에 불과한 남자. 이 남자가 소설의 주인공이며 이해가기가 어려운 첫 번 째 남자다.
엠마뉘엘 카레르. 명망과 재능을 갖춘 소설가. 토머스 드 퀸시의 후예. 삶의 어두운 구멍에 대한 페티시스트. 아니, 오히려 그 점에서 탁월한 천재. 바로 이 소설의 저자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남자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두 번 째 남자다.

이 끔찍한 사건은 실화다. 1993년 1월, 장클로드 로망은 자인의 아내와 어린 두 자녀, 그리고 부모를 살해한 살인범으로 구속된다. 언론을 통해 사건을 접하고 약 반 년 뒤, 작가는 장클로드 로망에 대한 강렬한 끌림에 의해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선생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나는 선생의 사건에 큰 흥미가 있다고. 호사가로서의 흥미와는 전혀 다르다고. 그것은 그러니까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힘에 의해 마지막 지점까지 내몰린 사람˝에 관한 흥미, ˝끔찍한 힘˝에 대한 흥미라고. 우리는 작가가 무엇을 이해하고 싶어하는지 안다. 그것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 파우스트 박사의 심정과 닮았다. 그러니까 악의 실체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 우리는 이해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므로.

간단하게 적었지만 장클로드 로망의 삶은 거짓투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머리에 난 뿔과 꼬리를 숨기고 사는 인간으로 취급해버리기도 어렵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는 실제로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그를 아는 거의 모두가 이 남자를 좋아했다. 성실하고, 조심스럽지만 신중하고 유능한, 거의 모든 면에서 모범적으로 보였던(그리고 사실 그렇기도 했다) 이 남자를 말이다. 물론 작가의 지나친 신중함에 우리가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직업도 없이 거짓신용으로 부모를 비롯한 친인척의 예금을 거리낌없이 낭비하며 사는 그에게서 이미 명백한 악마적 징후를 파악하고 충분히 비난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진실의 방향으로 되돌려 놓는 고통에서 늘 외면하기를 택한 인간의 비도덕적 태도를 엄격하게 추궁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모든 것이 늦었다. 호통은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감춘다.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힘˝, 그 ˝끔찍한 힘˝의 목도와 이해가 이 두 남자의 협업의 이유임을.

그러나 작가는 끝내 실패한다. 장클로드 로망이라는 이 끔찍한 남자가 거짓이라는 무인 수레에 몸을 싣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중이라면 누구도 멈춰 세울 수가 없다. 그것이 다름 아닌 끔찍한 힘의 정체이고 본질이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있는지, 끔찍한 죄 앞에 독대한 단독자로서의 환희에 젖어 뉘우치는 연기에 빠져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거짓에 사로잡힌 자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 그에게 참을 내미는 손길이 거짓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 이 실패는 예견된 실패였을 것이다. 작가도 독자도 누구 하나 진짜 장클로드 로망을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이야기 앞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 작가의 지난하고 길었던(이 책을 쓰는 데 7년이 걸렸다) 실패 앞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을 들여 숙고할 만한 장소에 설 수 있게 된다. 우리 안에도 자리하고 있을 꼬마 악마로서의 장클로드 로망. 심연의 진짜 정체일지도 모를 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이들의 참혹한 슬픔. 살인자의 영롱한 어두움보다 피해자의 참혹한 슬픔 앞에 서고픈 마음. 악마의 면상에 대고 한 대 갈겨줬으면 싶은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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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 읽기 세창사상가산책 9
한상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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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에 대한 입문서로 읽었다. 저자가 베르그송 전공자는 아니지만 개념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고 분량도 적어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과학적 방법으로써 이해되는 생의 한계를 명확히하고, 지속의 개념과 직관으로서만 올바른 생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줄기를 중심으로 베르그송의 사상사를 균형감 있게 개략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뒤따르는 밋밋함은 어쩔 수 없다. 생철학자이자 반실증주의자로서 당대의 베르그송은 논란의 중심이면서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철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아쉽다. 저자는 개종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베르그송(그는 유대인이다)의 삶과 사유에 방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베르그송의 생애와 사유의 진행 과정을 개략하고 있는 본문에 앞서 죽음 직전의 개종 장면을 소설적 필체로 적어 내려가는 몇 장은 책의 성격상 조금 어안이 벙벙하다. 아마도 사르트르를 위시한 뒤이은 후대 철학자들이 베르그송의 사유로부터 단절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얇은 책에서는 베르그송 철학의 개요에 집중하고 있을 뿐, 그 한계와 비판적 수용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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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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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가볍게 한 편 씩 읽겠다는 정도로 읽으면 좋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하루키가 꾸준히 소설을 써주기를 바라고(무슨 일이 있지 않는 한 앞으로 십 년 정도는 부탁하고 싶다), 나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그 소설들을 서두르지 않고 읽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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