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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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해하기가 어려운 두 남자의 어울림이 나를 빛마저 피해가는 듯한 흑림 가운데 던져놓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입맛을 다신다. 쓴 맛이 난다. 약은 입에 쓰다는데, 독이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장클로드 로망. 세계보건기구(WHO)의 우수 연구원. 성실함과 노력의 천재. 자상한 남편이자 헌신적인 아빠이며 부모의 자랑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가족과 부모를 살해한 악마, 파렴치한 사기꾼, 거짓으로 도배된 끔찍한 삶의 노예에 불과한 남자. 이 남자가 소설의 주인공이며 이해가기가 어려운 첫 번 째 남자다.
엠마뉘엘 카레르. 명망과 재능을 갖춘 소설가. 토머스 드 퀸시의 후예. 삶의 어두운 구멍에 대한 페티시스트. 아니, 오히려 그 점에서 탁월한 천재. 바로 이 소설의 저자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남자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두 번 째 남자다.

이 끔찍한 사건은 실화다. 1993년 1월, 장클로드 로망은 자인의 아내와 어린 두 자녀, 그리고 부모를 살해한 살인범으로 구속된다. 언론을 통해 사건을 접하고 약 반 년 뒤, 작가는 장클로드 로망에 대한 강렬한 끌림에 의해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선생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나는 선생의 사건에 큰 흥미가 있다고. 호사가로서의 흥미와는 전혀 다르다고. 그것은 그러니까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힘에 의해 마지막 지점까지 내몰린 사람˝에 관한 흥미, ˝끔찍한 힘˝에 대한 흥미라고. 우리는 작가가 무엇을 이해하고 싶어하는지 안다. 그것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 파우스트 박사의 심정과 닮았다. 그러니까 악의 실체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 우리는 이해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므로.

간단하게 적었지만 장클로드 로망의 삶은 거짓투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머리에 난 뿔과 꼬리를 숨기고 사는 인간으로 취급해버리기도 어렵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는 실제로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그를 아는 거의 모두가 이 남자를 좋아했다. 성실하고, 조심스럽지만 신중하고 유능한, 거의 모든 면에서 모범적으로 보였던(그리고 사실 그렇기도 했다) 이 남자를 말이다. 물론 작가의 지나친 신중함에 우리가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직업도 없이 거짓신용으로 부모를 비롯한 친인척의 예금을 거리낌없이 낭비하며 사는 그에게서 이미 명백한 악마적 징후를 파악하고 충분히 비난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진실의 방향으로 되돌려 놓는 고통에서 늘 외면하기를 택한 인간의 비도덕적 태도를 엄격하게 추궁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모든 것이 늦었다. 호통은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감춘다.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힘˝, 그 ˝끔찍한 힘˝의 목도와 이해가 이 두 남자의 협업의 이유임을.

그러나 작가는 끝내 실패한다. 장클로드 로망이라는 이 끔찍한 남자가 거짓이라는 무인 수레에 몸을 싣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중이라면 누구도 멈춰 세울 수가 없다. 그것이 다름 아닌 끔찍한 힘의 정체이고 본질이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있는지, 끔찍한 죄 앞에 독대한 단독자로서의 환희에 젖어 뉘우치는 연기에 빠져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거짓에 사로잡힌 자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 그에게 참을 내미는 손길이 거짓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 이 실패는 예견된 실패였을 것이다. 작가도 독자도 누구 하나 진짜 장클로드 로망을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이야기 앞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 작가의 지난하고 길었던(이 책을 쓰는 데 7년이 걸렸다) 실패 앞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을 들여 숙고할 만한 장소에 설 수 있게 된다. 우리 안에도 자리하고 있을 꼬마 악마로서의 장클로드 로망. 심연의 진짜 정체일지도 모를 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이들의 참혹한 슬픔. 살인자의 영롱한 어두움보다 피해자의 참혹한 슬픔 앞에 서고픈 마음. 악마의 면상에 대고 한 대 갈겨줬으면 싶은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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